2025년 1월 19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설교 – 황의찬 목사
《 예배의 자격 》
시 15:1~5
〈 어떤 자격으로 예배합니까? 〉
절친 목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지난 17년간 시리즈 설교를 해 왔는데, 이번에는 어떤 책을 설교할까?”
“시편을 한 번 해보는 게 어때?”
“시편은 150편이나 되잖아?”
“그래도 한번 도전해봐!”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시편 설교를 시작할까요?” 여쭙고 시작했습니다.
매주 한 편을 본문으로 설교를 시작했는데, 벌써 시편 15장입니다.
딱 십분지 일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2024년 8월 둘째 주에 시작했는데, 10월에 작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시와 견주어 설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최고의 평판을 얻었다고 시편과 동일선상에 놓을 수는 없습니다.
시편은 하나님이 주신 감동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세상의 문학은 세상에서 얻은 감동에서 기록했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작품은 세상에서 으뜸입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저의 시편 설교에 영향을 줍니다.
시편은 시가서로 분류됩니다.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 이렇게 다섯 권을 구약에서 ‘시가서’라 합니다.
시가서(詩歌書), 시와 노래입니다.
시가서를 설교하려면 문학을 아주 쬐금이라도 알면, 더욱 좋겠지요?
온고을교회와 함께 시편을 설교할 수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은 시편 15편입니다. 시편 15편의 주제는 “예배의 자격”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가,
예배자는 어떤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가?
예배하기 전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답해 줍니다.
☞ 움찔하지요? 지금 나는 어떤 자격으로 예배하고 있는지! 실은 저도 그렇습니다!
〈 ‘하며’ ‘아니하며’ 〉
성경은 시편을 시처럼 편집하지 않습니다. 시편 15장을 시처럼 행을 바꿔보겠습니다.
1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2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3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4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5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1절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주의 장막, 주의 성산, 주님의 품 안입니다.
“주님 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예배하는 자는 누구인가?”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 오늘 지금 우리는 주님의 품에 안겨 있습니다.
주님 품에 안겨 예배하는 우리, 참 행복한 우리입니다. 할렐루야~
시편 15장을 쓴 시인 ‘다윗’ 예배의 자격을 어떻게 열거하고 있는지 찬찬히 보겠습니다.
15장에는 “하며”가 다섯 번, “아니하며”가 여섯 번 나옵니다.
다섯 가지를 하는 자, 여섯 가지를 아니하는 자가 ‘예배의 자격’을 갖춘 성도입니다.
“하라!” 다섯 번, “하지마라!” 여섯 번입니다.
시인은 모두 합해 열한 번을 어떻게 시적으로 배열하고 있는 보고자합니다.
정말 시적인 탁월성을 드러냅니다.
☞ 함께 은혜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2절, 나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
2절에는 “하며” 세 가지가 나옵니다.
(2절)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 정직하게 행하라! 공의를 실천하라! 진실을 말하라!
2절에 나온 ① 정직 ② 공의 ③ 진실, 이 셋은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의 문제입니다.
남들이야 어떻게 살든지, 일단 나는 어떻게 해야지?
정직, 공의, 진실! 이 셋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에게 예배 자격이 주어집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정직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고속도로입니다”
아마 이 분도 시편 15편을 읽으셨나 봅니다.
‘정직’이 ‘예배의 자격’ 맨 첫머리에 나왔습니다. 할렐루야~
〈 3절, 이웃에게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
3절에는 “아니하며” 세가지가 나옵니다.
(3절)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④ 허물하지 말라! ⑤ 악을 행하지 말라 ⑥ 비방하지 말라!
3절에 나오는 “하지 말라” 이것은 이웃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시인은 지금,
2절에서는 ‘나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를 선포했습니다.
3절에서는 ‘이웃에게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를 선포합니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주섬주섬 쓴 글이 아닙니다.
시인이 얼마나 고심했는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나 스스로는 ① 정직 ② 공의 ③ 진실, 이 셋을 지키고,
남에게는 ④ 허물 ⑤ 악행 ⑥ 비방, 이 셋을 하지 말자!
남의 허물을 들춰내지 말아라! 이웃에게 악행 금지! 비방도 금지!
열한 가지 중 여섯 가지가 나왔습니다.
〈 4절, 하나님과의 관계에 비추어 〉
4절에는 다시 ‘하며’가 둘, ‘아니하며’가 하나 등장합니다.
(4절)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
4절의 선포는 어떤 성격을 가진 것인지 여러분이 한번 맞춰보십시오!
우리가 지금 함께 시를 감상하고 있는 중이잖아요!
2절의 ‘하며’ 셋은 예배하는 나,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3절의 ‘아니하며’ 셋은 예배하는 나, 나는 이웃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
4절의 ‘하며’ 둘과, ‘아니하며’ 하나는 2절과 3절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4절에서 첫 번째, “망령된 자를 멸시하라!”입니다. 이 뜻이 무엇입니까?
망령된 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없다하는 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자입니다.
이들을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 “멸시하라!”
멸시하라 했다고 쫓아가서 다지고 주먹다짐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마음 속으로 ‘멸시하라’는 뜻입니다. 그렇지요! 그들을 존중할 수 없습니다.
빛과 어둠이 섞일 수 없습니다. 잘 분별해야 될 줄 믿습니다.
두 번째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컫는 자는 멸시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존대하라’
4절, 세 번째는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개하지 말라!’
약속한 것, 맹세한 것, 특히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이 있다면 변개하지 말라는 선포입니다.
간혹 약속, 맹세, 서원해놓고, 자신에게 불리할 것 같으면 안 지키는 이들을 봅니다.
나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도 반드시 질문해 봐야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서원해놓고도 안 지키는 일이 비일비재하니까, 예수님이 선포합니다.
마 5: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그럼에도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이 있다면 자신에게 불리하더라도 지키라는 선포입니다.
2절의 ‘하며’ 셋은 예배하는 나,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3절의 ‘아니하며’ 셋은 이웃과의 관계는 어떻게 맺을 것인가?
4절의 ‘하며’ 둘, ‘아니하며’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비추어 어떻게 할 것인가?’
〈 5절, 돈 문제는? 〉
5절에는 ‘아니하며’가 둘 나옵니다.
(5절)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2절, 나는 어떻게 할까, 3절, 이웃과는 어떻게 할까, 3절, 하나님과 어떻게 할까?
이어서 5절의 ‘아니하며’ 둘은 어떤 것과 연관이 있습니까?
이제는 답을 아시겠지요? ‘돈’입니다. 돈!
고리채를 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위가 높은 자들, 뇌물을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① 정직하라 ② 공의로워라 ③ 진실하라,
④ 허물하지 말라 ⑤ 악행하지 말라 ⑥ 비방하지 말라,
⑦ 망령된 자 멸시하고 ⑧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존대하라 ⑨ 서원은 변개치 말라,
⑩ 고리채 하지 말라 ⑪ 뇌물 받고 무죄한 자 해하지 말라!
열한 가지 덕목을 짧으면서, 굵고, 강하게, 임팩트 있게 선포합니다.
저와 여러분이라면 이렇게 시를 쓸 수 있겠습니까? 언감생심이지요!
〈 나는 예배 자격을 갖추었는가? 〉
그런데 말입니다. 이쯤에서 우리가 이것을 모두 지켜야만 예배 자격을 취득하는가?
이 질문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열 한 가지 모두를 다 지키기는 솔직히, 정직하게 말해서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런 때 절망이 몰려옵니다. 에효~ 한숨이 푹 나옵니다.
“그렇다면 나는 예배 자격이 없는 자인가?”
11가지 덕목을 완전히 갖추었다는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자칫 시편 15편은 아무도 예배할 수 없는 장애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야,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할 수가 있어? 아서라 그만!’
이러고 다 떠날 수가 있습니다.
시인이 이것을 모르고 이 시를 적었을까요?
시인이 이렇게 적은 깊은 뜻이 있습니다.
시편 15장은 예배실 출입문을 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예배실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문이다!
왜 그렇습니까?
15장은 예배에 참예코자 교회를 향하는 이들에게 ‘예배의 자격’을 알려주는 열쇠입니다.
‘그냥, 대충대충 성경책 겨드랑이에 끼고 가면 안 되지!’ 이것을 일깨워줍니다.
15장이 있으므로써, 우리의 예배가 더욱 진지해지고, 진솔해지고, 진정성을 띄게 해줍니다.
교회를 향하는 발걸움, 오늘 드리는 이 예배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떻게 교회를 향하는 우리에게 예배 자격을 주셨는지를 일깨웁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예배 자격을 주십니까?
우리가 11가지를 다 지켰는지 검토하시고 우리에게 예배 자격을 주셨습니까?
핚교에서 돌아오는 손주들, 고것들을 품에 안으면서,
“너희가 할아버지 명령 다 지켰으니 안아주마!” 이렇게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말썽꾸러기, 말도 잘 안듣는 개구쟁이입니다. 그럼에도 안아줍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교회로 모이고, 예배실 문을 들어올 때, “우리 강아지들!”
하시면서 꼬옥 품에 안아주십니다. 무슨 뜻이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열한 가지 다 못 지켰지만, ‘용서하시고’ 안아주십니다.
우리가 용서받고 예배한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열한 가지나 체크하셔야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덮썩 안아주시면서 하나님의 장막, 하나님의 성산에 들여주십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예배할 때마다 시편 15장을 떠올립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상기합니다. 그리고 회개합니다.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구나!
하나님은 그럼에도 나를 용서해 주시고, 예배의 자격을 주시는구나!
그리고 오늘 이렇게 예배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