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3181]풍월정(風月亭)이정(李婷)시 尋花古寺(심화고사)
尋花古寺(심화고사)
꽃피는 옛 절을 찾다
-풍월정(風月亭)이정(李婷)
春深古寺燕飛飛(춘심고사연비비)
深院重門客到稀(심원중문객도희)
我昨尋花花落盡(아작심화화락진)
尋花還爲惜花歸(심화환위석화귀)
봄 깊은 옛 절에 나비는 날아들고
깊숙한 사원 겹 문에는 찾는 이 드물어라
어제 꽃 찾아 보아도 꽃은 다 지고
꽃 찾아 갔으나 꽃을 아끼며 돌아 왔도다
원문=속동문선 제9권 / 칠언절구(七言絶句)
續東文選卷之九 / 七言絶句
尋花古寺[月山君婷] 婷=예쁠 정
심화 고사- 이정(李婷)
春深古寺燕飛飛。
深院重門客到稀。
我昨尋花花落盡。
尋花還爲惜花歸。
[주-D001] 月山君 : 저본에는 없다.
저본의 원목차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옛 절에 봄이 깊어 제비는 날고 날고 / 春深古寺燕飛飛
깊은 원의 겹 문에는 오는 손이 드물다 / 深院重門客到稀
나는 어제 꽃을 찾았으나 꽃이 다 떨어졌기에 / 我昨尋花花落盡
꽃을 찾다 도리어 꽃을 아끼며 돌아온다 / 尋花還爲惜花歸
ⓒ 한국고전번역원 | 김달진 (역) | 1969
월산대군 이정(1454년~1488년)은 자는 자미(子美),
호는 풍월정(風月亭)으로, 덕종(德宗)의 맏아들이며, 성종의 형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잃은 월산대군은 할아버지인 세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궁궐에서 자랐다.
7세 때인 1460년(세조 6) 월산군에 봉해졌고,
1468년(예종 즉위년) 동생인 잘산군(乽山君: 성종)과 함께
현록대부(顯祿大夫)에 임명되었다. 1471년(성종 2) 월산대군으로 봉해졌고,
같은해 3월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봉되어 전지(田地)ㆍ노비 등을 하사받았다.
이후 그는 서호(西湖)의 경치 좋은 양화도(楊花渡) 북쪽 언덕에 위치한
희우정(喜雨亭)을 개축하고, 망원정(望遠亭)이라 하여 서적을 쌓아두고
시문을 읊으면서 풍류생활을 지속하였다.
1473년 조정에서 덕종을 추존하고 종묘에 부묘(祔廟)하기 이전에는
월산대군이 별묘를 세우고 봉사(奉祀)하여 덕종의 맏아들로서 역할을 다 하였다.
그 뒤 어머니인 덕종 비 인수왕후(仁粹王后)의 신병을 극진히 간호하다가
병들어 35세로 죽었으며,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다.
그는 일찍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종학(宗學)에 들어가 배웠고,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두루 섭렵하였다. 성품은 침착, 결백하고,
술을 즐기며 산수를 좋아하였으며, 부드럽고 율격이 높은 문장을 많이 지었다고 하는데,
그의 시문 여러 편이《속동문선 續東文選)》에 실릴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저서로는 《풍월정집》이 있고 시호는 성종이 특별히 '효문(孝文)'으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