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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6일 목요일 새벽 비. 또 벌에게 쏘이다.
오늘도 오전에 화단을 정리하다가 벌에게 귀 전과 손 등 두 군데나 쏘였다. 역시 응급처치를 해서 별 탈은 없었으나 쏘인 곳의 부기는 잘 가라앉지 않는다. 오후에 다시 살펴보니 벌들이 땅을 파고 집을 지어놓고 들락거리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당장 살충제를 뿌리고, 그 집을 뒤집어 버리려고 하다가 좀 보류하였다. 그것도 다 생명이고 봄에 꽃이 필 때는 좋은 역활도 한다니…
이번에 한국서 나올 때 손 전화기를 로밍을 하고 오지 않았더니, 전화 소리는 울리지 않으나, 걸려온 전화의 번호는 수신 기록에 나타나고, 또 문자 메시지나 카톡은 된다고 한다. 그래서 가끔 충전은 하고, 무슨 전화가 걸려오고, 글이 들어 왔는지 확인은 하여 본다. 그런데 여기서도 070 전화로는 한국에서 사용하는 국내전화 번호만 누르면 그대로 쉽게 통화가 된다고 해서, 그 전화로 두어 군데 전화를 하여 보았다. 매우 잘 들리었다.
8월 17일 금요일 맑음. 당송대 지식인[士]들의 글[文] 대한 생각은 어떠하였는가?-‘이 문화[斯文]’를 생각한다.
1.이 글을 적게 된 연유
몇일 전에 이곳 대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온 두 가지 책[피터 볼의 This Culture of Ours와 로날드 에간의 소동파 전기The Life of Su Shi]을 한 데 모아서 같이 평한 영어로 쓴 글 한 편이 검색 창에 나타나 보이기에 출력을 하여 읽어 보기 시작하였다. 벤자민 엘만이라는 사람이 1995년에 《하버드대학 동양학보》에 실었던 것인데, A4용지로 17페이지나 되는 한 편의 논문에 비견될 아주 상세한 서평Review이다.
앞의 책의 저자는 하버드대학의 동양어학부의 중국문화사 교수인데, 지금 그 대학의 연구담당 부총장직을 겸하고 있는 미국 동양학계의 한 거두로, 그 사람 밑에서 그 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도 이미 한국 학계에서 중요한 자리에 몇 명이나 포진하고 있으며, 그 사람의 영문 저술도 여기서 말하는 이 책 이외에도 또 한 권[역사 속의 신유학Neo-Confucianism in History]이 더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고, 그 책 한국어판에 대한 매우 상세하면서도 날카로운 서평을 이미 내가 이 일기에서도 앞서 한번 소개한 바가 있다.
또 This Culture of Ours라는 말은 《논어》에 나오는 “사문斯文”이라는 단어를 영어로 옮겨 책이름으로 삼은 것인데, 부제로 “당송 시대의 지적 변화Intellectual Transitions in T'ang and Sung China”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는데, 한국어로는 “중국 지식인들과 정체성”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바 있다. 역시 이 일기에서 그 책 한국어 판에 대한 자못 소상한 안내문을 몇일 전에 소개한 일도 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이런 책들에 대하여 자못 관심을 갖는 이유는, 나도 이전에 당나라의 후기의 고문 작가 한유韓愈에 대하여 공부를 한 일이 있었고[대만 대학 석사 논문: 《한유의 문체연구》, 서울대 박사논문《한유의 고시 용운 》], 지금은 주자나 이 퇴계선생 같은 유학자들의 글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또 한국의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에 당송 문장가들의 글이 우리 선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도 매우 알고 싶은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지금 서울에서 이런 문제를 가지고 토론하는 모임이 하나 생겨져 있다.
이 영문 서평은 이미 나온 지가 20여년이나 지난 것이기는 하지만, 무엇이 적혀 있는지도 한번 훑어보았다. 다음에는 이러한 책들과 그러한 책을 평한 글들을 읽어 보고서, 내 나름대로 느낀 당송 시대 유학의 변천과 문학, 문화의 흐름을 우리나라 말로 좀 쉽게 풀어 가면서 한번 정리하여 소개하여 보려고 한다.
2. 한유, 당송 팔대가, 신법당과 구법당
안록산과 같은 외국 사람이 중국(당나라)에 들어와서 중국의 제국 질서를 마구 어지럽히고, 불교 같은 외국종교가 중국에 들어와서 중국의 사상계에 깊이 침투하자, 중국의 정치는 혼란스럽고 지식인들은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을 지 잘 몰라서 유학보다는 오히려 불교나 도교 같은 것에 더 기우러지는 경향이 뚜렷하여 지기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하여 어떤 뚜FUT한 목표의식을 상실하기까지도 하였다. 그러한 움직임에 대한 반작용으로 한유 같은 사람이 나와서 중국적인 문화전통을 중시하고 옛날 사람들이 쓴 글[古文]을 다시 찾아서 읽고, 그러한 문투로 글을 적어야한다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을 역사에서 “고문운동古文運動”이라고 하며, 역사에서 말하는 “당송팔대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고문으로 글을 짓는데 성공하여 이름을 날린 사람들이다.
그들 중 한유와 유종원은 당나라 때 사람들이고, 송나라에 들어와서 구양수, 소씨 삼부자(소순, 소식, 소철), 왕안석, 증공 같은 사람들이 있는데, 북송시대 모두 정치와 문화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 계기는 구양수가 과거시험을 주관할 때 금문今文(대구와 수식 같은 형식을 강조하는 미문체)이 아닌 고문체로 답안을 쓴 사람들을 많이 합격 시켰는데, 소씨 형제와 증공 같은 사람들이 그 때 발탁된 사람들이다.
이 중에 특히 소식(소동파)는 한유가 문학을 혁신하여 중국의 선비[士] 문화를 새롭게 만들려고 하였던 여러 가지 노력을 가장 잘 실천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또 그 팔대가 중의 한사람으로 치는 매우 훌륭한 문인이며, 또 소동파 못하지 않게 여러 방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왕안석은 중국 고전에서 역사적인 사례에서 사람들의 행동의 잘, 잘못을 나누어 비평하고 있다는《좌전》같은 책의 가치는 경시하고, 주나라의 제도를 정리하여둔 《주례》을 중시하면서, 새로운 법[新法]을 만들어서, 당시의 정치 경제 등 국가를 운영하는 틀을 급격하게 전면적으로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집권을 하자, 자기가 개발한 새로운 학설로 과거에 답안을 적도록까지 하면서, 그런 법을 실제로 집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큰 소란과 파동을 일으켰다.
여기에 대하여 “통치에 바탕이 될 만한 역사적인 거울[資治通鑑]”이라는 300권에 가까운 방대한 역사책을 지은 사마광司馬光 같은 원로 정치가는 그러한 급진적인 개혁을 반대하였다. 그는 역사에 비추어 나라가 흥하고 쇠하는 이치를 참고하여 부분적으로, 점진적으로 고칠 것이 있으면 고쳐 나가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하였는데, 소식(동파)도 부분적으로는 사마광과 불일치하는 점이 있었지만, 역시 왕안석의 그러한 급진적이고 일률적인 개혁은 반대하는 점에서는 일치하였다. 역사에서 왕안석 일파를 “신법당”, 사마광과 소씨 일파같은 사람들을 “구법당”이라고 부르는데, 이 신법·구법 당파의 대치에는 그들의 학문관 경세관의 차이도 작용하기는 하지만 대체로 신법당은 송나라 때 지금의 강서, 절강, 복건 등 남부지역의 경제적인 발전을 중시하는 남쪽 지역 출신이 중심을 이루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새로운 변혁을 중시하였지만, 구법당에 속한 사람들은 대체로 낙양, 서안 등을 중심으로 하는 북쪽 지역에 근거를 두었던 사람들이 위주가 되면서 개혁보다는 오히려 관례를 더 중시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왕안석은 남쪽인 강서 지방 출신이이나, 사마광은 북쪽인 산서 지역 사람이었다고 하며, 다음에 거론할 신법에 반대한 정호, 정이 형제들도 북쪽인 낙양 지역 출신들이다. 소동파는 좀 독특하게 서쪽 지역인 사천[촉] 땅 사람이다.
3. 정자와 주자, 도학, 이학, 성리학과 문학
왕안석의 신법을 반대한 사람들 중에는 문인, 예술가 기질을 가진 소동파와는 다른 철학자 정씨 형제(정호, 정이)들도 있었다. 소동파는 한유를 중국 역사에서 드물게 보는 문화 운동가로 높이 본 것에 비하여, 정이(이천)은 직접 멀리 공자나 맹자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참된 길[道]를 그들이 지은 경전 속에서 다시 묻고 찾아야 된다고 주장하였고, 그 계통은 이은 주자(주희)가 뒤에 나와서 그러한 “길을 연구하는 학문[道學]”을 크게 선양하여, 남송 말년부터 시작하여, 원·명·청 등 후세 여러 나라로 내려오면서, 정씨·주씨의 학문이 큰 세력을 얻어 발전하게 된다. 그렇게 되자 그 때부터는 과거 시험 답안지에서 주자가 쓴《사서》의 풀이에 의거하여 답안을 적어야 할 정도로 주자가 끼친 영향은 막대하여 졌다.
정·주학을 위에서 말한 것 같이 사람이 살아가는데 바른 길을 찾는 학문 이라는 뜻으로 “도학”이라고도 하지만, 그런 길을 찾아가기 위하여서는 모든 사물이 지니고 있는 이치[理]를 잘 알아내어야 한다고 해서, 이 정주학을 이치를 알아내는 학문[理學]이라고도 하며, 또 그러한 이치는 모든 사람의 심성 속에도 모두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본래 타고난 심성을 잘 터득하고, 수양하여 나가면서 천지 만물의 이치에도 통하게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의 학문을 또 “이치의 학문[理學]”, “마음의 학문[心學]”, 또는 “인간의 심성과 상통하는 만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학문[性理學]”이라고도 한다. “모든 세상 만물의 이치는 모두 한 가지이지만, 그것이 변화하여 나타나는 양상은 천태와 만상으로 다르다[理一分殊]”라고 한다.
이렇게 말하는 정씨 주씨들의 성리학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점차 중국[나아가서 우리나라나 동아시아] 학문의 중심축이 되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문文”을 중시하는 중화 전통문화[斯文] 안에서 인간의 본성의 깨달음을 중시하는 성리학이 매우 중요하기는 하지만, 사람의 마음과 생활을 풍부하고 다양하게 만들고, 세련되고 아름답게 다듬어 가게 하는 데는, 역시 문예적인 수련도 매우 중요한 몫을 차치한 것이 사실이다.-공자도 《논어》에서 “문과 질이 빈빈하여야 선비라고 할 수 있다[文質彬彬, 可以爲士也]” 이러한 점에서 보면 중국의 당송 문화사에서 질을 중시한 정자나 주자도 중요하지만, 문을 중시한 소동파도, 그를 연관된 당송팔대가들도 역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4. 남부지역의 경제 발전과 지역 문인 모습의 변화
문화사학자인 피터 볼 교수는 이 “斯文This Culture of Ours"이란 책에서, 특히 송나라 때의 남쪽 지역의 경제 발전 상황과, 선비 숫자의 증가, 출판문화의 발전, 공부 내용의 변화 같은 것을 매우 정밀하게 추적하면서, 그 시대가 그 이전의 시대와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세심하게 관찰하고 있다. 한나라 당나라 때까지는 사람들의 출세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을 손꼽으라면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출생 가문이라고 말할 수 있었는데, 그러한 것이 좋으면 벼슬도 하기가 쉽고, 출세도 빨랐으며, 그러한 사람들끼리 세력을 형성하여 나라를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송나라에 들어 와서는 남부 지방에 경제력이 크게 향상되면서, 글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급격하게 많아져 갔다고 한다. 거기다가 또 송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정부의 시책으로 당나라 후기부터 시작하여 “오대십국五代十國”이라는 시대가 끝날 때까지 몇백 년 동안을 지방에서 무력을 가지고 지역 지역을 분활하여 세력을 구축하고 날뛰던 군벌들 때문에 온 세상이 뒤집혀져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던 전례를 극복하고자 하여, 될 수 있으면 무력을 가지는 무신들을 누르고 그 대신 문신들의 숫자를 늘리기 위하여 과거 시험에서부터 문과 합격자 숫자를 크게 늘리었다고 한다. 이래저래 송나라에 들어와서는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 그 시험을 합격한 사람들의 숫자도 엄청나게 늘어나면서부터는, 이제부터는 설령 과거에 붙어도 중앙정부에 들어가서 벼슬할 길도 점점 좁아지게 되었다. 그렇게 되고 보니 가문의 배경이 별로 없이 등장한 수많은 여러 지방의 새로운 선비 그룹들은 점차적으로 그들의 학문적인 능력, 문학적인 교양을 중앙관계가 아니라, 지방 사회를 위하여 헌신하는 쪽으로 바꾸어, 지방 사회의 지도자로서 향약 같은 것을 통하여 향촌의 질서를 바로 잡고, 출신 지방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거나, 발전되 출판업을 통하여 저서를 간행하거나, 각 지방에 서원을 세워서 자기네 유파의 학문을 전승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5. 국가 위기에도 기죽지 않는 선비의 자존심:
-“자기 성심을 잘 다듬는 것이 모든 일의 근본이 된다.”
더구나 도학이니 이학이니 하는 성리학에서는 비록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에 대한 소망은 유지하지만 그런 것을 하는 실천하여 나가는 데는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심성心性의 수양이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이제는 선비가 꼭 조정에 나가서 큰 벼슬을 하여 출세를 하는 것만이 유일한 출세의 길로 보지도 않게 되었다고 본다.
“송나라”라는 나라는 이전에 한나라나, 당나라 같은 대 제국에 비하여 보면, 그 국가의 판도도 많이 쭉으러 들고, 황제의 위신도 더욱 별로 빛을 내지 못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북쪽에 있는 요나라, 금나라 같은 이민족의 나라에게 오히려 돈을 가져다가 바치면서 겨우 정치적인 소강상태를 유지하다가, 황제[휘종]까지 잡혀가는 수모를 당하고 수도를 황하 유역의 개봉에서 남쪽인 절강의 항주로 옮기면서 또 명맥을 유지하여 나갔다. 이런 면으로 보자면, 이 나라는 형편이 없이 비참하고 부끄러운 나라 같이만 보이지만, 중국은 워낙 땅 덩어리가 넓은 나라이고 보니, 비록 일부 지방을 딴 이방인들에게 내어 주고, 상당한 기간 동안 이방인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지낸다고 한들, 그것은 중국의 긴 역사에서 보면 그렇게 좀 이상한 기간도 없지만 않았구나 하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6. 우리 한국 사람들도 그런 자존심을 함께 하기를
나는 앞으로 다시 송나라 같은 형세가 중국에 다시 나타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기도 하며,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중국황제만이 독존하는 것이 아니라, 이민족의 황제[지도자]와 중국의 황제[지도자]가 공존하는 형태로 평화 공존은 하는 것도 어떨까 하고 생각하여 보기도 한다.
하여튼 송나라는 국제 정치상의 권위는 보류된 시대였지만, 위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는 실제로 그렇게 어렵거나 위축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다양한 빛을 생산한 자랑스러운 나라였다고 말할 수 있다.-마르코 폴로가 몽고족인 원나라에 지배당한 남송이 수도였던 항주에 가보고서 하늘 아래 이러한 이렇게 좋은 곳이 있었는가 감탄하였다는 이야기를 여기서 잠시 상기하여 볼만 하다.
이러한 매우 특수한 시대에 만들어지고, 다듬어 진 중국의 문질이 빈빈한 “이 문화[사문]”는 비록 중원에 주인이 바뀌어 가도 그대로 존속, 계승되면서 오늘 날도 다시 음미되고 반추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한국은 한 때 역시 이 “문화[사문]”를 받아들여, 오히려 중국 본토를 제쳐두고, 우리가 이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고 자부하는 시대가 있었다. 어찌 되었건 그것은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었겠는가? 또 그런 문화를 우리도 지금 중국 사람들과 함께 더욱 빛나게 발전시키어 “아름다운 것을 서로 아름답게 나누어 가지는 것[美美與共]”이 어떻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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