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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하느님은 이렇게 일하시는구나
언제부터인가 내 소개를 이렇게 하게 된다.
“유방암, 폐 전이 4기, 5년차 암환자입니다. 오늘도 살려주시는 하느님 감사드립니다.
요즘은 세 명 중에 한 명꼴로 암 진단을 받는다고 하고 치료약도 좋아졌다고 하니, 병원 의사의 지시에 따라 항암·수술·방사선 치료를 하면 암은 사라지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병원 치료가 마무리될 무렵 유방암이 폐로 전이되었다. 처음 진단받을 때보다 훨씬 더 큰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고 길을 잃은 듯 헤매기 시작했다. 다시는 1년 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구나. 죽음이 코앞에 와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4기 암환자의 항암제는 치료를 위한 것이 아닌 생명 유지를 위한 조치라고 매번 강조한다. 희망조차 품지 못하게 하는 잔인함이라니…. 젠장. 그때부터 4년 9개월째 끝을 알 수 없는 항암 주사가 68번째 이어졌다.
나의 기도는 오직 성모님께 “제가 떠난 후에 빈자리가 크지 않기를…. 성모님, 아이들 잘 키워주시고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도록 지켜 주세요”라고 아주 단순하게 청하기만 했다. 그리고 남편이 새 장가 가면 다른 여자가 들어와서 혹시 구질구질한 내 살림살이를 보고 흉볼까 봐 살림을 몽땅 갖다버리고 통장ㆍ사진ㆍ일기장ㆍ인간관계 등 내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암환자가 된 것이 마치 인생 실패자로 낙인 찍힌 기분이 들어 가족을 제외하고는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성당이나 지인들에게조차 알리지 않았다. 또 아예 경기도에서 충청도로 이사를 했다. 도망쳤다. 바람처럼 사라지고 싶었다.
외짝 교우…. 이 단어는 15년 넘게 나를 움츠리게 한 족쇄 같은 말이었다. 나는 그 세월 동안 혼자 아이들 둘을 첫영성체 받게 했고, 주일이면 셋이서만 성당에 가고 남편은 혼자만의 시간을 갖곤 했다. 남편은 언제나 내 고해성사의 주연이었으며 가장 미운 이웃이자 가장 사랑해야 할 원수였다. 한 울타리 안에 있어도 서로 의지하기보다는 그저 각자의 역할을 해나가는 가정일 뿐이었다. 그래서 암 진단받은 후에 조당 상태로 죽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 관면혼배라도 받아야 하는데 비신자인 남편의 협조를 받는 게 결코 쉽지 않았다. 그 쉽지 않은 여정, 그러나 기적 같은 이야기를 이 글에서 펼쳐보고자 한다. 주인공은 내가 아닌 비신자인 남편이다.
남편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강하고 돈을 벌어서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다. 불안지수가 높고 믿을 사람은 자신밖에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니 신의 존재를 쉽게 믿기 어려웠으리라. 처음 내가 암 진단받을 때 엉엉 울던 남편도 어느 덧 지쳐가는 게 느껴지고 친정 언니들에게도, 내 아이들에게도 아픈 내가 짐처럼 느껴질까 봐 고통도 외로움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투병하는 동안 통증 때문에 방바닥을 기어 다니고 변기를 잡고 밤을 새워야 하는 그 고통도 오롯이 나 혼자 극복하고 감당하는 것이 가족들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 손을 내밀지 못한 것일까? 내밀지 않은 것일까?
나는 항암 주사를 맞고 온 일주일은 꼼짝 못하고 끙끙 앓다가 겨우 운전할 만한 기운만 생기면 성지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신앙심이 깊어서도 아니고 순교자들의 정신을 본받고자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나에게는 하느님이 두렵고 벌주시는 구약의 하느님이었다. 무서운 내 아버지 같은…. 성지를 가면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기에 이 상태로 죽으면 천국에 가지 못할 거 같으니 전대사라도 챙겨둬야 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코로나로 인해 성지가 한산해서 사람들 피해 다니기에도 참 좋았다. 코앞에 다가와 있는 죽음을 어떻게 대면해야 하는지 찾고 싶고 묻고 싶었다. 집 근처부터 4시간은 족히 걸리는 먼 곳까지 닥치는 대로 다녔다. 하느님께서 나를 길에서 죽게 하시지는 않겠지. 성지까지만 가자. 집에까지만 가자. 내 나름 두려움의 시간을 견디는 방법이었나 보다. 나는 순교자들의 무덤 앞에서 주저앉아 울다 오는 게 전부였다. 그럴 때면 19살에 암으로 돌아가신 엄마 생각만 가득 찼다. 학교 다니면서 엄마 대소변도 받아내며 병간호하고, 엄마의 고통과 마지막 순간까지 다 지켜봤는데 이제는 내 자식들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라는 겁니까? 차라리 지금 여기서 죽여달라고 협박도 하고 애원도 했다.
그렇게 혼자서 성지를 찾아다닌 지 6개월쯤 되었을 때 남편이 나의 행적에 대해서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어느 성지에 다녀왔는지, 가면 뭘 하는지 물어보았다. 성지를 다녀온 뒤 내 모습이 달라 보였던 것일까? 그러더니 내가 아주 힘들고 우울해 있으면 주일이나 공휴일에는 자신이 성지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제안했다. 성지에 대해서도 미리 알아보고 근처에 암환자인 내가 먹을 수 있는 조용한 식당도 찾아보면서. 혼자 다니던 성지순례길에 남편과 아들이 동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들과 내가 성전에서 미사 봉헌할 때, 남편은 혼자 주차장에서 기다렸다. 어느 날은 미사 중에 문득 뒤돌아보니 성당 맨 뒷자리에 남편이 앉아있기도 했다. 십자가의 길이나 묵주 기도의 길을 산책하듯 걸을 때는 남편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에게 묻는다.
“예수님 옆에 저 사람 누구야?”
그러면 나는 무심한 듯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대답한다.
“성모님은 알지? 수건 든 여자는 베로니카, 저 옆에 십자가를 함께 든 남자는 시몬, 또 사도 요한….”
나는 어떤 친절한 설명도 없이 그냥 그렇게 여러 성지를 함께 다녔다. 그 전에 성지에 혼자 다닐 때는 간절한 기도의 시간을 가졌는데, 남편이 옆에서 자꾸 이것저것 묻기 시작하니 순례를 온 건지 소풍을 온 건지 귀찮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옆에서 교리 시간에 배웠다면서 대신 대답해주는 아들이 고마웠다.
그렇게 함께 성지를 다니던 어느 날, 본당 주보에 예비자 교리반 모집 공고가 떴다. 나는 남편이 자연스럽게 볼 수 있도록 주보를 식탁에 며칠간 올려두고 남편의 동태를 살폈다. 말없이 기다리기만 했던 보름의 시간이 지나고 남편이 했던 말을 잊을 수 없다. 무심하듯 쑥스러운지 덤덤한 말투로,
“신청이 언제까지야? 퇴근하고 갈 수는 있겠네.”
놀라움과 기쁨에 벅찼지만, 걱정도 있었다. 행여나 남편이 교리에 안 간다고 할까 봐 부부싸움 피하려고 눈치도 보고 비위도 맞췄다. 또 본당 수녀님께서 세례 잘 받으려면 기도가 많이 필요하다는 말씀에 내 기도만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건 하느님이 해주셔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본당에서 만나는 자매님들·형제님들, 특히 정 많은 어르신들께 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이번 예비자 교리반에 남자가 딱 한 명인데 우리 남편이에요. 세례 잘 받을 수 있도록 기도 좀 해주세요. 성당에서 보시거든 아는 척 좀 해주세요.”
그리고 하느님께 간청했다.
“하느님, 제가 남편 세례식에 참석할 수 있게 해주세요. 살아서, 그리고 제 발로 걸어서 들어가게만 해주세요.”
남편은 단 한 번도 결석 없이 교리에 참석했고 세례를 받았다. 교리 신부님께서 나에게 축하를 건네시며 남편을 어찌나 칭찬하시던지. 왜 세례받으려고 하는지 물었을 때 요한 사도의 대답이 기억에 남는다고 전해주셨다.
“아들 미카엘이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학생 미사와 교리에 참석하고 무엇보다도 아프고 힘들어하는 아내가 신앙심으로 잘 극복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에게는 “내가 세례를 받으면 당신이 제일 좋아할 것 같았어”라는 말로 나를 울렸다.
이후 나는 계속되는 항암 주사로 인해 몸이 힘들어져서 암환자들의 치유센터인 청주 ‘성모 꽃마을’에서 지내고 싶다고 했다. 사실 전 같았으면 남편에게 이런 부탁을 꺼낼 수조차 없었다. 60번이 넘는 항암치료를 받는 동안 병원에 같이 가준 건 10번도 채 되지 않았다. 거래처와 약속이 잡히면 그게 더 우선이었다. 병원 같이 가는 것보다 돈 많이 벌어다 주는 게 본인의 몫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남편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제 전적으로 아이 학교 보내고 식사 챙기는 등 집안 살림은 모두 그의 차지가 되었다. 전기밥솥·세탁기 사용법을 배우고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성모 꽃마을’에서 지내면서 저녁에 남편에게 안부 전화를 하면 아들 저녁 챙겨놓고, 마음이 심란하다면서 혼자 평일 미사 드리러 성당에 간다고 한다. ‘내가 성지를 다니며 하느님께 매달렸듯이 남편 역시 혼자 지내며 힘든 시간을 하느님께 의탁하며 극복하고 있구나.’ 우리 가족은 비록 몸이 떨어져 있지만, 하느님을 통해 한 마음 한 몸으로 연결되어 함께 가고 있다는 일체감을 느꼈다. 내가 밑반찬 해놓으러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 돌아오면 식탁에 앉아서 남편과 하느님 얘기를 서너 시간씩 나눈다. 남편이 하느님 얘기를 하고 싶어 얼마나 나를 반갑게 맞이하는지 모른다. 우리 부부는 그동안 정답게 대화를 나누는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제일 긴 대화는 싸울 때 했으면 했지….
남편은 점잖고 내성적인 성격인데 하느님 얘기를 할 때면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며 쫑알쫑알 대고, 때로는 감격에 겨워 울먹이며 눈물도 흘린다. 마치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모습을 보인다. 하느님께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지닌 자가 하늘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게 바로 이런 의미일까? 20년 이상 함께 살았건만 이렇게 해맑고 순수한 남편의 새로운 모습이 놀랍기만 하다. 자신만을 믿고 살던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어린양이 되어가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그 전과는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을 느꼈다고나 할까? 나도 이렇게 기쁜데 하느님 보시기엔 어떨까?
또 남편은 ‘예수, 마리아, 사제, 교황, 수도자, 순교자''라는 제목이 붙은 다큐멘터리와 영화는 모조리 다 찾아서 보고 자동차에서는 가톨릭평화방송을 항상 틀어놓고 가톨릭 성가는 외우듯이 듣고 다닌다. 한 번은 가족이 함께 차를 타고 나가는데 운전 중에 끼어드는 차량 때문에 놀란 적이 있었다. 다른 때 같으면 욱하고 성질 내던 남편이 차분한 말투로, “내가 예수님 때문에 참는다.” 아들과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전에는 나하고 대화할 때 죽음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것조차 꺼렸던 남편이 투병하는 나를 지켜보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묵상하는 것 같았다. ‘이 땅에서의 죽음 이후’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갖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믿게 되고. 그래서인지 연령봉사회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세례받기 전부터 연령회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면서 연령회장님께 직접 대부님이 되어주십사하고 청했다. 연령회장님도 연령봉사회에 형제들이 없어서 하느님께 형제들이 봉사회에 들어오게 해달라고 청하는 기도를 오랫동안 하면서 기다리셨다고 반겨주셨다.
본당에서 선종 안내 문자가 오면 이틀은 아예 출근을 안 한다. 새벽 일찍 장례식장으로 가고 밤늦게까지 연도하고 장지까지 간다. 평소에 장의 차량만 보아도 “오늘 더럽게 재수 없네”라고 육두문자를 날리던 사람이 장례식장에서 운구를 한다. 예전에 내가 죽으면 장례 미사를 해달라고 부탁할 땐 들은 척도 안 하더니 이제 내 장례미사는 걱정 없을 정도다.
요즘에는 상장례 연도를 잘하고 싶다며 수시로 연도를 틀어놓고 연습한다. 평상시 듣기에 그게 그렇게 좋은 곡조는 아님에도, 급기야는 저녁 식사를 하는데 연도 틀어놓고 한 소절씩 따라 부른다. 참다못해 아들이 말한다. “아빠, 살아 있는 사람들이 밥을 먹고 있고 밖은 어두워져서 으스스한데 이 연도 노래는 아니지 않아?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잖아.”
어느 날 아침에는 ‘성인 호칭기도’ 성가를 크게 틀어 놓았다. 남편은 성인 호칭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 성가를 부를 때마다 성인들이 우리에게 오셔서 보호해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신다고 한다. 그때 아들이 눈을 비비며 방에서 나오면서 하는 말에 우리 가족이 그야말로 빵 터졌다. “아니, 씻지도 않고 속옷 차림인데 아침부터 누가 집에 오는 거 좀 싫은데…. 아빠….” 그리고는 오후에는 노래 크게 틀어도 된다고 선심 쓰듯 덧붙여서 한 번 더 배꼽을 잡았다. 가족들이 자연스레 하느님 얘기를 나누고 웃는 이런 모습이 성가정이 아닌가? 나도 몰래 자아도취에 빠지기도 한다.
하루는 남편과 함께 평일 미사를 봉헌하러 가면서 내가 남편에게 말했다. “나 죽으면 100일 위령미사 꼭 봉헌해 줘. 그 순간 돈 아끼지 말아줘.” 신랑이 한 술 더 뜬다. “나는 30일이면 돼.” “응? 좀 더 쓰지? 그 정도로 되겠어?”라고 물으니 “내가 기도하고 정성껏 위로해 준 영혼들이 천국으로 모두 가셔서 그 영혼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해 줄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러면서 ‘산들이 밀려나고 언덕이 무너져도 나의 사랑은 결코 너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이사야서 말씀을 나한테 해주며 힘내자고 한다. 이 성구를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니 모든 말씀은 하루종일 귀에 달고 사는 성가를 통해서 배우고 있고 자신에게는 그것이 기도라는 말도 덧붙인다. 남편의 입을 통해 하느님께서 나에게 이 말씀을 전해주시는구나 싶기도 하고 남편이 나에게 하는 뜨거운 사랑 고백 같아 마음이 벅차오른다. ‘아, 하느님은 이렇게 일하시는군요!’
남편은 작년 부활절에 세례를 받고 요한 사도로 새롭게 태어났다. 주변 분들께서는 나에게 남편이 세례받도록 기도를 얼마나 했느냐고 물어보신다. 내 기도가 많았을 거라며 나를 치켜세워 주시기도 한다. 결코 아니다. 생각도 못 했던 일이다.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이 말씀을 남편 요한 사도를 보면서 깊이 깨닫게 된다.
나는 종종 남편에게 “당신은 신앙의 신비야”라고 부르곤 한다. 세례성사의 은총이 크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렇듯 엄청나게 무시무시할 줄이야. 성령님께 나를 좀 살려달라고 그렇게 매달리고 울부짖었는데 성령님께서 나에게로 오셔야지, 어찌 엉뚱하게 경로를 신랑 쪽으로 향하신 걸까? 엉뚱한 성령님 덕에 웃음이 난다.
성지를 다니며 길을 찾고자 헤매던 내가 성모 엄마에게 간청했던 그 기도! ‘내가 세상에서 사라져도 남편과 아이들이 잘 살아가게 해주세요’라고 청했는데, 성모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신 것 같다. 남편을 준비시키시고 굳건하게 신앙으로 무장시켜 주시고 아이들을 잘 돌봐줄 것 같으니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임을 깨닫게 된다.
암환자 치유센터인 성모 꽃마을에서 박창환 가밀로 신부님께 배운 것 중 가장 중요한 사실이 우리가 병드는 원인 중 영혼이 7할, 육체가 3할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내 영혼의 치유가 우선이라는 뜻이다. 하느님은 나한테 무섭고 벌주시는, 엄하기만 했던 내 아버지 같은 하느님이었는데 성모 꽃마을에서 지내면서 하느님의 치유의 은총을 받으며 자비의 하느님을 만났다. 그리고 신랑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보여주시니 내 영혼의 치유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지금도 남편은 여전히 연령회 봉사를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제 남편을 통해서 많은 분이 나를 위해 기도해주고 계신다. 본당 레지오 마리애에서, 그리고 형제자매님들이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며 응원해 주신다. 내가 그 기도의 밥으로 내 영혼을 채우며 지금 살고 있음을 안다.
그리고 아픈 아내 때문에 직접 살림하는 남편을 위해 성당 교우들이 김치나 밑반찬을 챙겨주신다. 나는 그 양식으로 그 밥으로 또 내 육신을 살리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암에 걸려 인생 실패자라며 숨고 도망쳤던 나를 남편을 통해 끌어 올려주셔서 하느님의 길로 함께 가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지난 11월, 죽을 때까지 항암 주사를 맞아야 생명을 유지한다고 했던 주치의로부터 이제 내 몸에 암세포가 발견되지 않으니 더 이상의 항암 주사가 필요하지 않는다는 진단을 받았다. 4년 9개월 동안 68번의 항암치료는 이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성가정을 세워주시고, 4기 암환자의 영혼과 육신을 치유하신 사랑의 하느님! 하느님 아버지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어머니 마리아를 통하여 올려드립니다. 아멘.
이정희 헬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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