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닮은 인간 생명의 풍요로움
레위 19,1-2.17-18; 1코린 3,16-23; 마태 5,38-48 / 연중 제7주일; 2023.2.19.
생명과 죽음 중에 생명을 택하라고 하시던 지난 주일에 이어서 오늘은 하느님을 닮아야 한다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는 죽음 대신에 생명을 선택하되 풍요로운 삶을 누려야 한다는 뜻이겠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처럼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타이르며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사랑을 기준으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시며 손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사랑으로 완전해야 할 삶이야말로 하느님의 영이 현존해 계시는 성전(聖殿)이라는 통찰을 전해주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미사에서 들려오는 하느님 말씀의 흐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초점과 흐름에 따라서 살자면 이를 방해하는 세력과 만나게 되는데 이때 가장 큰 숙제가 원수 사랑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산상설교 안에는 자신을 경멸하던 유다인을 이웃처럼 돌보아주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방불케 하는 이웃 사랑의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오른뺨을 치거나 재판에 걸어 속옷을 빼앗거나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는 등 그 당시에 실제로 행해졌던 구체적인 폭력행위들이 열거되고 있는데, 이렇듯 폭력이 일상화된 현실 속에서 내려진 예수님의 처방은 폭력이 저질러지면 그보다 더 큰 하느님의 사랑으로 대처하라는 근본적인 대책이었습니다. 즉, 악인에게 맞서느라고 기운을 빼지 말고 오히려 그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랑으로 의연하게 대하라고 가르치신 겁니다. 그래서 로마 백인대장이 중병을 앓고 있던 그의 종을 살려달라고 간청했을 때 두말없이 살려주셨으며(마태 8,5-13), 역시 헤로데 왕실의 관리가 죽어가는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고 청했을 때에도 조건 없이 그 아들도 살려주심으로써(요한 4,43-54) 몸소 원수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보여주신 진리의 위계질서에 따라서 행동가치의 서열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에 따라서 목숨을 바쳐 순교하거나 일생을 바쳐 헌신하는 사랑의 순교자들은 성인으로 공경받아야 할 분들입니다. 하지만 현존하는 악이 압도적인 힘으로 다수의 힘 없는 이들을 억압하고 착취하여 또 다른 악에로 내모는 현실에서는 정당방위의 행위로 자기희생을 각오하고 더 큰 희생을 예방하고자 헌신하는 정의의 순교자들도 성인에 버금가는 의인으로 존경받아야 합니다. 더 현실적으로는, 평소에 일상적인 생활과 활동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사회의 공동선을 실현하기 위하여 사회적 약자와 연대하는 선한 이들도 본받아야 합니다. 이들이 짊어지는 사랑과 정의와 연대를 위한 십자가 희생으로 하느님을 닮은 생명이 존중되고 더 나아가서는 생명의 풍요로움까지도 되살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지난 연중 제5주간과 6주간동안 평일 미사의 독서였던 창세기 1장에서 11장을 통해서 우리는 모든 민족들에게 해당되는 인류의 원역사(元歷史)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기서 단연 돋보인 인물은 의롭고 흠 없이 살았다고 하느님께서 평가하신 노아였는데, 그는 그야말로 하느님을 닮도록 창조된 존재답게 아담에 이은 인류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멈춘 아라랏산으로부터 서쪽으로 이주해 갔던 노아의 후손 중 4대손 니므롯은 힘센 장사여서 사람들을 규합해서는 자신의 왕국을 세웠고, 제단으로 쌓던 벽돌탑을 제사 용도 대신에 왕국의 랜드마크로 세우고자 하는 욕심에서 훨씬 더 높이 세우려다가 하느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말이 섞이고 달라져서 더 이상 탑공사를 함께 하기가 어려워지자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니므롯은 노아의 아들인 함의 3대손이었지만, 노아의 또 다른 아들인 셈의 4대손 에베르는 아들 둘을 낳았는데 각각 펠렉과 욕탄이라고 이름 짓고서는 노아 선조의 유훈에 충실하게 키워서 각각 아시아의 서쪽과 동쪽으로 보냈습니다(창세 10,24-25). 그 후 큰 아들 펠렉의 6대손인 아브람이 니므롯 무리에서 벗어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칼데아 우르에서 빠져나와 아시아의 서쪽 끝인 가나안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습니다(창세 12,1-9). 그리고 작은 아들 욕탄은 그의 아들들과 함께 “메사에서 동부 산악 지방인 스파르 쪽까지”(창세 10,30), 그러니까 아시아의 동쪽 끝으로 가서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이리하여 에베르의 시대에 세상이 동서로 나뉘어졌습니다(창세 10,25).
창세기는 원역사에 이어서 12장부터는 아브라함을 민족의 시조로 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록 문자로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도 아시아의 동쪽에서 민족 단위의 생활과 의식에 5천년 동안 뿌리내린 문화로 이어져온 욕탄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성경의 문자도 수많은 신앙인들의 통찰과 성령의 계시로 기록되는 것이지만, 문화 역시 어느 한 두 사람이 하루 아침에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문화 현상 역시 문자 기록에 못지않게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알아보는 데에 중요합니다. 남은 숙제는 그 해석이지요. 대홍수로 말미암아 그 이전에 살던 모든 생명체는 죽었으므로 욕탄과 그 아들 그리고 그 후손들이 아시아의 동쪽 끝까지 가서 살면서 이룩한 문명은 동아시아 최초의 문명이 되었으리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최근 고고학과 유전학, 인류문화학과 언어학 등의 발달로 새로운 유적이 발굴되고 학제간(學際間) 종합연구가 진행되면서 이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기존의 역사 상식을 뒤집어야 할 새로운 해석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에 대해 지명을 따서 ‘홍산(紅山)문화’나 ‘요하(遼河)문명’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는 나라 이름을 따서 ‘고조선문명’이라고 불리는 동아시아 상고시대(上古時代)의 문명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특징적인 유적 겸 유물이 있습니다. 바로, 고인돌입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4만여 기(基)의 고인돌이 아시아의 동쪽 끝인 만주, 산동 그리고 특히 한반도에 몰려 있습니다. 바벨탑처럼 벽돌에 역청을 발라 쌓은 수메르식 탑제단과 달리, 고인돌은 수백 명이 함께 힘을 써야 할 정도로 엄청난 크기의 바위를 자연 상태에서 재단하여 또 필요로 하는 자리까지 이동시켜서 쌓은 돌제단입니다. 이 거대한 크기의 제단에서 알 수 있듯이, 니므롯과 달리 욕탄과 그 후손들은 노아 선조의 유훈을 받들어 하느님께 제사를 바치는 일에 최고의 정성을 들였고, 이것이 한민족의 제천의식(祭天儀式)으로 계승되었는데, 고인돌은 이에 대한 움직일 수 없는 표지 유적으로서 유네스코에 의해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고인돌에서 바친 제사로 그들이 하늘로부터 받은 계시 진리는 “널리 인간세상을 이롭게 하라”는 이타적(利他的)인 홍익인간(弘益人間) 이념이었습니다. 흔히 니므롯 같은 자들이 권력을 쥐면 자기 혼자 ‘천자(天子)’로 자처하고서 나머지 사람들을 이등 인간으로 부리려 들었지만, 욕탄과 그 후손들은 모두가 천손, 즉 하느님의 자손이라는 뜻에서 평등하게 여겼으며 흰 색이 상징하는 밝음을 숭상하였기로 모두가 제관의 옷인 흰 옷을 즐겨 입어서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 불리었습니다. 그리고 이 밝음이 상징하는 가치에 따라서 이룩한 선진문명을 이웃 민족들에게 전해 주었으며 주변 나라를 침략하거나 그 백성을 노예로 삼아 억누르는 일은 결코 없었습니다. 진리와 평화라는 문명의 빛을 전해준 것입니다.
우리 말과 글에는 이러한 선진적 천손의식이 깊이 배어 있습니다. 우리 말은 전 세계의 유수한 언어들 중에서 유난히 존대어법이 발달한 언어입니다. 수메르어에서 파생되었다고 추정되는 그리스어와 라틴어 그리고 다른 서양 언어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입니다. 하느님을 하늘처럼 우러러보던 전통과 관습에서 우러나온 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말’에 대한 존대어도 ‘말씀’이라고 부르는 유일한 민족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다른 동식물들도 돌보라고 말씀하신 뜻에 따라서 우리 말에는 인간사와 사물들, 동식물의 습성과 모양을 표현하는 의태어와 의성어, 형용사와 부사가 독보적으로 풍부합니다.
이러한 우리 말을 문자로 기록하고자 세종대왕이 창제한 우리 글도 우수하고 합리적이며 뛰어난 문자입니다. 모음은 홍익인간 이념의 근간이 된 천지인(天地人)의 삼재사상(三才思想)을 반영했으며, 자음은 발음기관을 본떠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문자는 세계적으로 한글이 유일합니다. 한때 한글을 천시하던 유림들이 사라지고 아예 한글을 말살하려 들었던 일제총독까지 떠나간 뒤에는 온 국민이 한글을 배워 익힐 수 있었고 높은 교육열까지 더해서 오늘날 선진국 대열에 들 수 있는 국력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우리 말과 글이 바탕이 된 민족 문화를 살아있게 하는 것은 민중의 정서인데, 이를 대변하는 세 가지 요소는 한(恨)과 정情)과 흥(興)입니다.
지배 엘리트들이 저질러온 사회적 불의 탓에 억울하게 희생된 의인들이 생겨나서 민중의 한이 생겨났으므로 한을 노래한 민요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다가 국난을 당하게 되면 평소에 품었던 한의 에너지가 폭발하여 힘을 모아 풀어내다가 정이 생겨났고,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대동세상(大同世上)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흥도 우러나왔습니다. 흥을 돋구어주는 춤과 노래는 우리 민족 역사의 초기부터, 그러니까 아주 오랜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온 전통입니다. 이 한과 정과 흥이 모두 어우러져 있는 노래가 아리랑입니다. 이것이 반만년 동안 생명의 풍요로움을 표현한 말과 글로 이어온 끝에 마침내 원수 사랑은 물론 이웃 사랑을 한과 정과 흥으로 녹여내면서 온 세계인의 공감을 자아내고 있는 우리 민족 문화의 홍익인간적인 사연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도 구약시대에는 물론 예루살렘이 함락된 유대 독립전쟁 이후 2천 년 동안이나 전 세계로 흩어져 살면서 많은 고난을 겪었고 선민의식으로 율법을 지키며 살아왔습니다만, 그들이 또 다른 선민이라고 부러워하면서 열심히 연구하는 대상이 바로 우리 한민족과 그 문화입니다. 그들에게 모세의 율법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진리와 평화를 존중해 온 문화가 있습니다. 생명의 풍요로움을 실현하는 데에는 경직된 법률보다 부드러운 문화가 훨씬 더 유리할 것입니다만, 그 오랜 고난의 세월을 견디면서도 하느님께 충실하려는 그들의 견고한 신앙에 대해서는 우리도 배울 것이 많습니다. 교우 여러분! 그래서 하느님께서 특별히 부르셨고 또 돌보아주셨던 이 두 민족이 사랑과 정의와 연대의 십자가를 함께 짊어지고 생명의 풍요로움으로 세상을 복음화시키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