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나 고전이 오랜 시간 전에 작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많이 찾는 이유는 그 속에 많은 이야기와 가치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화나 고전을 읽을 때, 우리는 단순히 ‘어떤 인물이 이렇게 했었다’를 기억하기 위해 읽지 않는다. 우리는 그 속에 담긴 본래 의도를 파악하고 우리 삶에 적용하기 위해 읽는다. 성서도 마찬가지다. 창세기를 읽을 때, 단순히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다고만 기억하면 이는 우리 삶에 아무런 영향도 배움도 없다. 그저 옛날 이야기처럼 알고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아주 세심하게 한 절 한 절 살피며 고대인들이 어떠한 마음으로 이 이야기를 남겼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우리가 고대인들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우리 삶에 변화를 온전히 만들어낼 수 있다.
3장부터는 죄의 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교회에서는 주로 원죄라고 불리는 본문이다. 그러나 이 본문도 단순히 아담과 하와 때문에 죄가 들어왔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는 무책임한 해석이며 나의 삶에 아무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 그보다 죄가 아담과 하와에게 어떻게 들어왔고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 유심히 살펴 보아야 한다.
뱀이 질문한다.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냐?’(3:1). 질문이 틀렸다. 하나님은 분명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대로 먹으라고(2:16) 말씀하시며,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만 먹지말라고(2:17) 하셨다. 그러나 뱀은 교묘하게 사실을 왜곡하여 질문한다. 이에 인간은 먹어도 되지도 되지만, 동산 중앙에 있는 열매를 먹으면 우리가 죽을까 하노라라는 불명확한 답변을 내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2:17).
인간이 뱀으로부터 유혹받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말씀처럼 인간은 동산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었다. 그들은 부족하지 않은 삶을 살았을 거다. 그러나 단 한 가지 결핍에 걸려 넘어진다. 허락하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누리기 보다, 허락되지 않은 것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인간에게 나타난 첫 번째 죄이다. 선불교에는 이런 말이 있다. ‘괴로워서 구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구하니까 괴로운 거다’. 우리의 원함이 무엇인지 바라봐야 한다. 우리의 선악과는 무엇인지 바라봐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담과 같이 될 것이다. 아담은 한 가지 잘못을 저지르는 데, 바로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때 그것을 말리지 않은 것이다. 약간의 상상이 필요한 일이지만, 하와가 선악과를 두고 꽤 오랜 시간 고민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옆에 같이 있던 남편은 아무 말도 없다. 그저 선악과를 따먹게 내버려 두고 자신도 같이 먹는다. 옆에 있는 곁생명이 시험당할 때, 전혀 돌보지 않은 것이다.
결국 하나님이 반드시 죽는다는 일을 인간이 저지른다. 여기서 질문이 생기는데, 아담과 하와는 죽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신 것인가? 아니면 공갈협박하신 것인가? 아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죽음의 개념은 다르다. 성경의 죽음은 단순히 생물학적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한 죽음의 결과가 무엇인지 잘 바라보아야 한다.
그 결과가 무엇인지 3장 7절부터 나오는데, 서로 가리기 시작한다. 이전에는 서로가 내 뼈 중에 뼈요, 내 살 중에 살이라고 고백하며 관계 맺었지만, 이제는 서로가 남탓을 한다. 철저히 타자가 되어 버렸다. 그러니 가리는 것이다. 이전에는 부끄러운 일이 있어도 서로 헐벗은 상태로 교제하며 자신의 약함을 바로 세워나갔더라면, 이제는 서로 가리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도 단절되고, 인간과의 관계도 단절되었다. 이것이 원죄 이야기이다.
인간이 서로를 죽이고 불신하신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선악과를 먹은 것일까? 부동산, 학벌, 자본?
그렇다면 내가 정말로 욕망하는 것은 무엇인가? 질문을 달리해 요즘 내가 가장 관심가는 주제는 무엇인가? 나한테 없어서 꼭 가지고 싶은 선악과는 무엇인가?
한편, 16절부터 꽤 논란이 많은 본문이 나온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 선언인데, 꽤나 비상식적인 말씀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이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적 해석이 필요하다. 따라서 앞의 내용과 이어져 관계가 깨진 세상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 고대인들이 스케치한 말씀이라고 봐야 한다.
여자는 임신이 고통스럽다고 한다. 이는 단순히 출산의 고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임신, 출산, 육아가 고통스러운 사회라는 것이다.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에 육아 과정을 스스로 핵가족 안에서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자가 남자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관계의 깨짐으로 그러한 사회가 도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남자가 평생 수고한다는 것은, 노동자들이 아무리 노동해도 살아가기 벅찬 사회라는 것이다. 오늘날도 단순 노동자로 살아간다면, 집 조차 구할 수 없지 않은가?
따라서, 16절 이후의 내용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인간과의 관계가 깨진 세상 속에서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 단상을 보여주는 본문이다.
오늘날 사회도 고대인들이 스케치한 말씀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우리도 깨진 관계를 회복해야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회복할 수 있나?
4장부터는 유명한 가인과 아벨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시는데, 성서에는 그 이유가 나와있지 않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 따라서 의문이다. 하나님이 어떠한 이유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는지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인의 반응을 통해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를 파악할 수 있다.
가인은 자신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질 않자, 몹시 화가 났다(4:5). 그러자 하나님은 ‘어찌하여 네가 화를 내느냐? 얼굴빛이 달라지는 까닭이 무엇이냐?’(4:6)고 묻는다. 아마도 가인은 어떤 유혹과 시험을 받고 있던 것 같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죄가 가인을 지배하려 하고 있기 때문에 가인보고 죄를 다스려야 한다(4:7)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인은 불편함을 드러내며 곧바로 자신의 동생을 죽인다.
분명 가인에게 어떠한 시험이 있었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음으로 가인의 어두운 마음을 드러내셨다. 만약 가인이 자신의 마음이 드러났을 때,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였다면 아벨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고 죽인다.
우리도 그러할 때가 있다. 뭔가 상태가 이상하고 어두워지고 아무말도 듣고 싶지 않을 때다. 누군가 나에게 불편한 말을 하면 듣기 싫다. 그 사람과 만나기 꺼려진다. 그러나 그 때가 은혜의 때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음으로 그의 상태를 알려주신 것처럼, 나의 상태를 알려주는 사건은 감사한 시간이다. 내가 바로 서고 시험으로부터 이겨낼 시간이다.
우리는 나와 가까운 생명의 상태를 잘 일러주는가? 아니면 원만한 관계를 위해 불편한 말보다는 서로 편안한 말만 주고 받는가? 나는 나를 위한 불편한 말을 잘 듣는가?
마지막으로 가인의 자손과 셋의 자손이다. 가인은 자신의 공동체에서 쫓겨나며 불안해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가인을 지켜줄 표를 주신다(4:15). 그러나 가인은 그 표를 믿지 않았다. 그래서 성을 쌓는다(4:17). 좀 전에 하나님께서 가인을 지켜주시겠다고 하셨지만,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곧바로 성을 쌓는다. 결국 그 성 안에서 가인의 자손은 번창한다. 가인의 자손은 문명적으로 크게 번성하는데, 그의 자손 야발은 목축업의 조상(4:20)이 되고, 유발은 예술의 조상(4:21)이 된다. 두발가인이라는 후손은 온갖 쇠기구(무기)의 조상이 된다. 이처럼 가인의 후손은 몇 대 가지 않아 곧바로 번창한다. 문명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이다. 그러나 라멕이라는 가인의 자손은 자신에게 상처입힌 남자를 죽였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닌다(4:23).
반면, 셋의 자손은 뭐가 없다. 지루한 자손들만 길게 열거할 뿐, 별다른 내용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 창세기 저자의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창세기 저자는 의도적으로 두 후손을 병렬적으로 나열함으로써 두 계보를 노골적으로 비교하는 것이다. 가인의 후손은 곧바로 문명사적 업적을 남기며 번창하지만, 서로를 죽이는 사회가 되었다. 반면, 아담(셋)의 자손,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단순 소박하게 살며 특별히 문명사적으로 이룬 것이 없다.
앞서 가인은 성을 쌓았다고 했다. 성은 무엇일까? 실제 벽돌을 견고하게 세워 높은 성벽을 쌓았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하나님 외의 자신이 의지하는 무언가라고 보는 것이 맞다. 왜냐면 하나님의 표를 잊은 채 곧바로 성을 쌓았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성은 여러 가지 스펙, 돈, 명예, 서로만 의지하는 이성관계 등이 될 것이다.
오늘날 교회도 가인적 후손의 삶을 열망하지 않는가? 나는 실제로 어떤 성에 의지하여 살고 있는가? 내가 당장 없으면 안되는 것이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