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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입문] (11) 번역, 해석의 다른 이름
작가 한강의 노벨상 소식으로 대한민국이 들썩이고 있습니다. 문학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이에게도 작가의 이름이 익숙하게 된 것은 부커 상 인터내셔널 부분(=맨부커 상)을 수상하면서부터가 아닐까 합니다. 수상작이었던 The Vegeterian은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의 영어 번역본이었습니다. 때문에 작품의 원저자인 한강과 더불어 그 번역자인 데보라 스미스가 맨 부커 상을 공동 수상했습니다. 2010년대 이후로 문화계 전방에서 K-Culture(한국문화)의 열풍이 일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이나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지속되고 있는데, 한강의 노벨상 수상은 이런 흐름의 일환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그 흐름에 박차를 가했던 상징적인 사건이 영화 「기생충」의 흥행이었습니다. 오스카(아카데미) 상 수상 전 이미 골든 글로브 감독상을 받았던 봉준호 감독은 수상 소감에서 “1인치 되는 자막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여러분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라는 일침을 남겨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때마침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OTT 플랫폼 서비스의 확대(특히,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성공),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의 유행에 따른 격리생활 등은 실제로 언어의 장벽 너머로 한국의 문화가 널리 알려지게 된 바탕이 되었습니다.성경의 역사 속에도 이러한 언어의 장벽과 번역의 문제는 중요한 문제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분명 성경의 자의적(字意的) 의미는 성경이 최초로 기록된 언어와 그 바탕이 되는 역사, 문화, 사회적 배경 속에서 밝혀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 말씀의 원초적 출발점이 하느님이시라는 점에서 성경 번역은 해석의 역사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더하게 됩니다. 곧, 하느님은 어느 특정 시대와 특정한 지역에 묶여버린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으로 드러나는 변하지 않는 진리는 모든 시대, 모든 이를 향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초의 성경이 우리를 ‘향해’ 쓰였던 기록이 아니지만 그 글에 담긴 것은 여전히 우리를 ‘위한’ 말씀입니다. 우리를 위한 말씀이기 위해 필요한 작업, 구체적인 시대와 장소에서 살아가는 독자와 청중들이 그 의미를 자기 시대의 언어로 이해하도록 필요한 작업이 번역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인간 저자를 통해서 당신의 말씀을 하실 뿐 아니라, 다양한 번역자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령께서는 최초의 성경이 기록될 때에만 감도 하신 것이 아니라 번역자의 노력에도 같은 성령의 활동이 동반된다는 것입니다. 번역은 곧 해석입니다.
성경 안에서도 그 통번역의 실례를 만나게 됩니다. 대표적인 본문이 느헤미야 8장의 성대한 초막절 축제 기사입니다: “그들(=레위인들)은 그 책, 곧 하느님의 율법을 번역하고 설명하면서 읽어 주었다. 그래서 백성은 읽어 준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느헤 8,8)
또, 집회서의 번역자는 ‘잠도 제대로 못자며 온갖 지식을 다 기울여 번역했지만, 어떤 표현들은 도저히 원문의 의미를 그대로 옮기지 못하는 한계’를 고백하기도 합니다(집회서 머리말 참조).
성경의 원저자, 다양한 언어의 번역자들 만이 성령의 영감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퍼즐은 그 말씀과 글을 듣고, 읽는 청중들과 독자들의 몫입니다. 특히, 공동체의 전례 속에서 거행되는 말씀의 선포와 해설은 ‘성령의 성전’(에페 2,20-22)인 교회가 하느님과 소통하는 중요한 체험입니다. 교회는 성체 성사와 더불어 하느님 말씀을 먹고 자랍니다(마태 4,4; 루카 4,4 참조).
성령은 성서의 저자들이 거룩한 책들(성서)을 저술할 때 성서 저자들에게만 단 한 번 역사하신 것이 아니다. 성령은 성서를 읽는 모든 이들에게 언제나 역사하신다. 오지 성령의 현존만이 단순한 문자를 영으로 변화시키는 보증이 되시며 오직 그분만이 성서 본문에 영원한 젊음을 부여하신다. 하느님의 성령께서 읽는 이를 부추기실 때에만 성서는 결실을 풍부히 맺는 말씀이 된다.
[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하느님 사랑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시나이산 아래 집결하였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들과 계약을 맺으십니다. 당신은 그들의 하느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당신의 백성이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계약 유지에 필요한 율법도 주셨습니다. 다만 과거 아브라함과의 계약 때는 이런 율법을 주시지 않았는데, 이스라엘에겐 왜 율법을 주시고 그 준수를 명령하셨을까요?
이는, 아브라함의 경우 일종의 선행상처럼 하느님 앞에서 증명한 충심에 대한 상급으로 계약이 내려진 것(창세 15,6; 느헤 9,8)인 데 비해, 이스라엘은 무상으로 이집트 종살이에서 구원받아 하느님과 계약을 체결한 까닭에 이후 자신들의 충심을 증명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주신 여러 율법을 준수하는 방법으로 말입니다. 이때 주어진 율법 가운데 으뜸은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신명 6,5)이고, 그 다음은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레위 19,18)입니다.
이렇게 구약, 특히 신명기에서는 사랑을 율법으로 규정하지만, 사실 사랑은 내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지요. 예를 들어, 층간소음으로 피해를 주는 윗집 가족을 이제부터 사랑하기로 굳게 다짐한다고 해서 그게 쉽게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사랑을 즉각적인 감정 이상의 ‘함양해 갈 수 있는 것’으로 본 듯합니다. 레위 19,17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이는 미워하지 않으려 노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사랑 역시 노력으로 키워 나가야 한다는 뜻일 터입니다. 그런데 이웃은 눈에 보이므로 어려울 때 서로 도우며 사랑을 키울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여전히 의문이 남습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증명하려고 오경의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 애썼고,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 안식일에 불을 피우지 말라는 규정을 지키려고 요리도 하지 않고 전기 스위치도 쓰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 영적 의미를 우선시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유다인들의 행동이 단지 몸에 밴 관습처럼 비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율법이 제정된 고대에는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요?
이 점을 이해하는 데는 이집트의 아마르나(Amarna) 유적지가 도움을 줍니다. 아마르나에서는 옛 이집트와 가나안 사이를 오간 서신이 다수 출토되었는데요, 이에 따르면 가나안의 봉신 국가들은 ‘주군 파라오를 사랑할 것’을 요구받습니다. 기원전 7세기 아시리아 임금 에사르 하똔과 관련된 기록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거기서 에사르 하똔은 봉신 국가들에게 황태자인 아슈르바니팔을 ‘사랑하라’고 명합니다. 말하자면, 고대 근동에서 사랑은 ‘충성’을 뜻하는 일종의 관용어였던 셈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사랑의 의미도 분명해집니다. 이는 하느님에 대해 애틋한 감정을 품으라는 게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다해 한결같은 충심을 유지하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계약의 율법을 더 구체적으로 준수할 수 있습니다.
[성경, 다시 보기] 일관성과 융통성
성경을 번역하다 보면 늘 부딪치는 문제가 있습니다. 한 번 나온 단어가 다른 곳에서 다시 나오면, 그 단어를 같은 말로 번역하는 것이 원칙이고 상식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우리는 일관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요한 21장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발현하신 내용 가운데 일부입니다. 일곱 제자들이 밤샘하며 그물질을 하였지만, 헛수고를 했는데,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그들이 많은 고기를 잡았다는 대목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있고 빵도 있었다”라는 9절의 장면에서 숯불이라고 번역한 희랍어는 “안트라키아(ανθρακια)”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2번 나오는데, 또 한번은 18장 18절 “날이 추워 종들과 성전 경비병들이 숯불을 피워 놓고 서서 불을 쬐고 있었는데, 베드로도 그들과 함께 서서 불을 쬐었다.”입니다. 이렇게 이 단어 “안트라키아”가 나올 때마다 같은 단어로 번역하는 것은 일관성이 있어 좋아 보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그 당시의 상황, 즉 호숫가인데, 가정이나 음식점에서 사용하는 숯을 어디서 쉽게 구할 수 있었을까? 또는 역사적인 사정을 고려해 볼 때, 숯이라는 것이 그 당시 그곳에도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해 볼 때, 숯불보다는 모닥불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으로 융통성에 대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 여기서 “편하다”라고 표현된 이 희랍어 단어는 “크레스토스(χρηστος)”인데 신약성경에 7번 나옵니다. 그런데 전후 문맥이나 상황에 따라 제각기 번역되고 있습니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루카 5,39),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루카 6,35), “그분의 호의가 그대를 회개로 이끌려 한다는 것을 모릅니까?”(로마 2,4), “나쁜 교제는 좋은 관습을 망칩니다”(1코린 15,33),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 4,32), “주님께서 얼마나 인자하신지 여러분은 이미 맛보았습니다.”(1베드 2,3) 이와 같이 “크레스토스”라는 단어가 형용사로는 “편하다”, “좋다”, “좋은”, “인자하시다”, 그리고 “너그럽다”로 번역되었고, 명사로 사용되었을 때는 “호의”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문장의 주어가 무엇이냐에 따라 이렇게 다양하게 번역이 되긴 하지만, 그 뜻은 서로 비슷하거나 같은 맥락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단어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번역이 되지만 그 뜻은 서로 통하고 있으니, 이를 융통성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또 한 가지 사족을 달자면 같은 뜻을 지닌 단어일지라도 한자 말보다는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그렇게도 시도를 해 보지만 그것도 말처럼 그렇게 쉽지는 않다는 것을 이 기회에 피력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늘 염두에 두는 것은 제가 번역한 우리말 성경을 희랍어로 되번역하면 얼마나 원문에 가까워질까 하는 것입니다.
또한 독자들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저의 글에 대한 반응으로, 독자들이 궁금한 점이 있으면 개인카톡으로 연락해 주시면 참고하겠습니다.
[묵시사회를 살아가는 신앙인] 십사만 사천(묵시 7,1-17)
땅이 무너지고 빛이 스러지고 모든 인간 계급이 아우성친 후, 묵시 7장은 너무나 조용한 기운을 서술한다. 땅의 네 바람을 붙잡은 네 천사, 해 돋는 쪽에서 올라와 그 어떤 것도 해치지 말라는 다른 한 천사, 그들 덕에 뭔가 움직이지 않는, 뭔가 숨을 고르고 침착해야만 할 것 같은, 그리하여 태풍 전야 같은 고요함에 긴장하게 된다.
네 천사, 네 모퉁이, 네 바람…, 숫자 ‘4’의 반복은 당시의 세계관, 그러니까 세상이 네모나게 생겼고(이사 11,12; 에제 7,2 참조) 네모난 세상의 네 바람은 네 천사로부터 시작한다는 유다 전통에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해 돋는 쪽, 곧 메시아의 방향을 가리키는 동쪽(에제 43,2; 마태 2,1-2 참조)에서 올라오는 천사는 ‘하느님의 인장’을 언급한다. ‘인장’은 소속감과 정체성을 가리키는 형상으로 하느님에게 소속되어 하느님을 통해 제 정체성을 다듬어 가는, ‘하느님의 종들’의 등장을 알린다.(에제 9,4-6 참조)
세상에 등장할 하느님의 종들을 윤리-도덕적 차원에서, 혹은 신비스런 사상이나 황홀한 환시의 차원에서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는 침묵 속에 묶어 두자. 하느님의 종들을 설정하고 규정하는 어떤 잣대든, 신앙의 이름으로 세상을 규정하고 나아갈 전망을 제시하는 그 어떤 외침이든 꼼짝없이 침묵해야 한다.(묵시 7,2-3) 십사만 사천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십사만 사천은 무엇보다 땅의 자손들, 그러니까 유다 백성을 가리키는 열두 부족에서 나온다. 신약의 시대에 이르러 열두 부족이 갖는 유다 민족의 혈연적, 지리적 배타성은 점차 옅어져 갔고 요한 묵시록이 소개하는 열두 부족 역시 전통적 족보(창세 49; 신명 27,12-13)와는 거리가 있다.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전통적 하느님 백성이 다시 정리되고 편집된 것이다. 이를테면 이렇다. 단 지파가 없고 요셉의 두 아들 중 하나인 므나쎄 지파가 들어와 있다. 열두 부족의 첫 자리엔 르우벤 보다 메시아를 가리키는 ‘유다 지파’가 차지한다. 더욱이 열두 지파의 순서가 야곱의 여종이 낳은 아들들부터 시작된다. 본부인의 아들보다 첩의 아들을 우선시하는 족보를 우리 전통인들 받아들이겠는가.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대담한 것인가, 무모한 것인가. 기존의 사상과 전통을 꺾어 놓고야 마는 요한 묵시록의 저자 앞에서 우리는 습관에 젖은 과거를 잠시 내려놓게 된다.
열두 부족을 다시 보는 것은 십사만 사천의 가치를 제대로 셈하는 것이기도 하다. ‘12’라는 숫자는 하느님 백성을, ‘1,000’이라는 숫자는 충만함과 완전함을 가리킨다. 하여, 각 부족으로부터 나오는 ‘12,000’이란 숫자는 하느님 백성의 충만함, 완전함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에 다시 ‘12’를 곱하는 것은 묵시문학적 특성으로 강조와 다짐의 의미를 배가시킨다. 결국 십사만 사천은 하느님 백성이 가득하고 완전하여 그 어떤 이도 하느님 백성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 말하자면 하느님 인장의 보호 아래 머무는 이들은 셈할 수 없어 무한대라는 것이다. 묵시 7,9은 이러한 십사만 사천의 숫적 의미를 적확하게 서술한다. “그 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하느님 백성의 자리엔 차별이 없기를, 제도와 관습에 얽매여 소외와 배타의 삶이 하느님 백성의 무리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지 않기를 바라는 요한 묵시록 저자의 원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자본과 권력의 차이로 계급의 차별이 횡행하는 오늘날, 제 능력과 경험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한 채 첫째 자리를 갈구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끌려가는 딱한 인생들이 많다. 십사만 사천의 자리는 이 세상 모든 이를 향한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 메타포다. 셈을 하고 평가를 하여 서로를 갈라놓는 분열의 세상에 포탄처럼 부딪쳐 터져 버린 요한 묵시록 저자의 간절한 사랑이다. 내가 받(고자 하)는 하느님의 인장은 다른 이가 받을 하느님의 인장을 가리키는 상징체다. 하느님 백성의 손은 다른 이, 나아가 모든 이의 손을 찾아 나서는 매개체다. 하느님의 인장을 받는 이들은 ‘남들보다 잘 사는 이들’이 아니라 ‘모든 이와 함께 잘 사는 이들’이다. 그리하여 이마에 박힌 하느님의 인장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오는 이들의 ‘몸 전체’를 감싸는 희고 긴 겉옷으로 다시 소개된다.(묵시 7,9)
천상의 영광과 기쁨을 가리키는 흰 겉옷을 입은 ‘셈할 수 없는 큰 무리’는 구원의 승리와 기쁨의 상징인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이렇게 외친다. “구원은 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양의 것입니다.”(묵시 7,10) 이 외침은 시편 118편을 옮겨 놓은 것이라 여기며 구원의 주체는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이 자주 강조된다. 그러나 이 외침은 구원을 누가 주었는지를 다시 캐묻는 얘기가 아니다. 구원의 주체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 당연해서 진부한 것이다. 이 외침은 구원을 받은 이들이 하느님과 어린양께 드리는 화답의 찬가다. 구원을 받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구원은 마침이 아니라 비로소 하느님과 어린양을 향한 발걸음의 시작이다. 그 발걸음을 따라가 보자면 구원 받은 이들의 정체성으로 이야기는 이어진다.
13절에 이르러 원로는,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저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는다. 요한은 답하지 못했고 질문을 던진 원로가 결국엔 답을 한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묵시 7,14) 먼저 우리말 번역에서 다시 고칠 부분이 있다.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 아니라, ‘겪고 있는’ 사람들로 고쳐야 한다. ‘겪어 낸’이라고 번역된 동사 ‘에르코마이(‘오다’라는 뜻.)가 현재 분사형으로 사용되었으므로 큰 환난은 지난 과거가 아니라 현재 지속적인 상황을 가리킨다. 역사비평적 관점으로 성경을 읽는 대부분의 주석학자들은 큰 환난을 역사적 사건의 유무로 따져 묻기도 한다. 이를테면 요한 묵시록이 쓰일 당시, 그러니까 90년대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힌 큰 박해가 있었는지 묻곤 한다.(물론, 제국적인 큰 박해가 있었던 시절이 아니다.) 그러나 독자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큰 환난의 역사적 시간이 아니라 텍스트 안에 서술된 큰 환난의 가치다. 큰 환난은 여전히 지속적이다. 아니 지속적이어야 한다. 어린양의 피로 제 겉옷을 빨아 희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통과 희생에 대립한 행복과 기쁨의 길은 요한 묵시록에 적혀 있지 않다. 오로지 피 흘리는 어린양 예수를 향한 집요한 서술과 초대가 요한 묵시록이 닦아 놓은 길이다. 큰 환난이라는 표현은 고통과 희생의 사전적 의미를 갈아 치운다. 어린양을 향한 끊임없는 열정과 사랑의 의미를 담아 큰 환난은 아프지만, 너무 힘들지만 그럼에도 영광과 기쁨의 메타포가 된다.
큰 환난을 겪고 있는 이들은 어린양이 겪은 죽음의 길을 함께 걸으며 ‘하느님의 어좌 앞’에 서 있다.(15절) 그들이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그들이 살아가는 삶 자체이며 그 삶은 하느님의 보호 아래 머무는 것이기도 하다. ‘천막’과 ‘목자’의 형상은 구약 전통 안에서 하느님의 보호로 이해된다.(탈출 26,1; 29-42-45; 시편 27,5; 76,3; 이사 4,5-6; 시편 23; 이사 40,11; 에제 34 참조) 배고픔도, 목마름도, 그 어떤 열기도, 그리하여 그 어떤 눈물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다는 요한 묵시록의 서술은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로 각인된다.(16-17절)
그러나, 하느님의 보호는 죄다 ‘미래형 동사’로 소개된다. 여전히 큰 환난을 겪고 있는 이들은 현재형의 배고픔과 목마름과 눈물을 제 삶 속에서 겨우 짊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느님을 향한 희망과 위로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 2000년 전 요한 묵시록이 여기서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는 아직 아프고 힘들고 그래서 희망과 위로를 갈망한 요한 묵시록의 원의를 여전히 간직한다. 하느님과의 인연은 이렇게 우리의 일상과 현실의 ‘목마름’ 안에서도 여전히 단단하고 뜨거워서 하느님을 만나는 영광과 기쁨은 그 ‘목마름’ 안에서도 구현된다. 고통과 환난과 박해를 가리키는 어린양의 피와 천상의 영광과 기쁨을 대변하는 우리의 하얀 겉옷의 간극은 이렇게 우리 인생의 희로애락 안에 허물어지고 메워진다. 어린양의 피에 우리의 겉옷을 빨면서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은 인생사 아픔과 슬픔과 불행의 극복이 아니라 그것들과의 애틋한 사투이며 어린양 예수는 백마 탄 기사(묵시 19,11-16 참조)로 그 사투에 성실히 임한다. 그것이면 우린 되었다.
누군가 “사는 건 쐐기풀로 열두 벌의 수의를 짜는 일”이라 했다.(나희 덕, 「고통에게 1」) 열두 벌의 수의를 짜는 것이 예수를 닮는 것이고, 수의를 입는 것이 희고 긴 겉옷을 제 영광과 기쁨을 사는 것이다. 그것이면 되었다. 그것으로 족하다. 그게 신앙이다.
[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94) 유다 서간
믿음 · 희망 · 사랑에 의지해 살아가라
유다 서간(이하 유다서)은 베드로의 둘째 서간에 많은 영향을 준 정경입니다. 그래서 유다서의 중심 내용은 베드로의 둘째 서간과 마찬가지로 ‘거짓 교사들을 조심하라’는 경고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그릇된 교리를 퍼뜨리고 문란한 생활을 조장해 교회에 분란과 분열을 일으키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정통 교회에 적대적인 자들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천사들을 모독했습니다. 그래서 유다서는 이들을 ‘불경한 자들’이라고 단죄하고, ‘육욕에 빠진 자’, ‘꿈꾸는 자’, ‘본성만 따르는 짐승 같은 자’, ‘자신만 돌보는 이기주의자’, ‘불평불만꾼’, ‘아첨꾼’이라고 비난합니다.
이들 거짓 교사들은 아마도 당시 교회 안에서 골칫거리였던 ‘영지주의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했다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부정하게 된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뛰어난 지식과 완전한 자유를 천부적으로 타고났다고 자부해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유일하고 참된 영적 지혜를 스스로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육체를 업신여겨 그리스도의 강생도 부정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유다서는 이들을 성령이 아니라 자기 본능에 따라 방탕한 생활을 하는 ‘현세적 인간’(19절)으로 규정했습니다.
유다서의 저자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야고보의 동생인 유다”라고 밝힙니다.(1절)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이는 두 명이 있습니다. 바로 타대오(마르 3,18; 마태 10,3)라고도 불리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루카 6,16; 사도 1,13)와 주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입니다. 하지만 유다서의 저자는 이들이 아니라 예수님과 야고보, 요세(요셉), 시몬과 형제인 유다입니다.(마르 6,3; 마태 13,55 참조) 오늘날 근동도 마찬가지이지만 성경에서 ‘형제’는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동기뿐 아니라 가까운 친척도 가리킵니다.(창세 13,8; 14,16; 29,15; 레위 10,4; 1역대 23,22)
오늘날 성경학자들은 주님의 동생 유다가 유다서를 직접 쓰진 않았으리라 추정합니다. 왜냐하면 서간의 여러 내용이 사도 시대 이후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유다서 17절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기억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학자들은 교회 지도자 중 한 명이 유다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빌려 이 서간을 썼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80~90년께 유다서가 쓰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유다서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카르타고 교회에서 일찍부터 성경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시리아 교회에서는 4세기까지 성경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를 선보인 예로니모 성인은 유다서가 교회에 알려지지 않은 문헌들을 이용했기에 사람들이 경전으로 받아들이기를 주저하게 됐다고 전합니다. 헬라어 성경은 ‘Ιουδα’(유다),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Iudae’,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펴낸 우리말 「성경」은 ‘유다 서간’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유다서는 모두 25절로 구성돼 있습니다. 처음에는 ‘우리의 공동 구원’에 관해 쓰려했으나 교회에 잠입해 참신앙을 거스르는 내용을 가르치는 불경한 자들에 관한 소식을 듣고 거짓 교사들을 경고하고 이들과 맞서기 위한 내용으로 고쳐 씁니다.(3-4절)
영지주의는 오늘날에도 교회의 큰 적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에서 하느님 은총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오로지 자유 의지에 따라 구원될 수 있다며 극단적인 금욕을 실천했던 펠라지우스주의와 함께 영지주의를 ‘성덕의 교묘한 적’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교황은 영지주의는 하느님과 하느님 은총의 신비든, 하느님의 초월성을 인간이 조정할 수 있다고 여겨 결국 그리스도 없는 하느님, 교회 없는 그리스도, 하느님 백성 없는 교회에 이르게 한다고 경계했습니다.
유다서는 거짓 교사를 세 가지 형태로 식별합니다.(1-4절) 첫째, 이들은 불경합니다. 하느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전혀 없으며 주님께서 드러내 주신 진리와 참된 생활양식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둘째, 이들은 방탕합니다. 불륜을 저지르고 변태적인 육욕에 빠진 자들입니다. 셋째,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부인합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의 기본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입니다.
유다서는 거짓 교사들이 심판을 받고 세 가지 벌을 받을 것이라 합니다.(5-8절) 첫째, 이들은 이집트를 탈출한 후 하느님의 수많은 표징과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은 자들처럼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둘째, 이들은 자기 영역을 이탈해 사람의 딸을 아내로 삼은 천사들처럼 감옥에 갇힐 것입니다. 셋째, 이들은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처럼 유황불에 멸망할 것입니다.
유다서는 ‘미카엘 대천사’를 진정 본받으라고 합니다. 미카엘 대천사는 자신이 판결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긴 겸손한 하느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유다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다음 세 가지를 당부합니다.(20-25절) 첫째, 지극히 거룩한 믿음을 바탕으로 성장해 나아가라. 둘째,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 셋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고 자비를 베풀어라. 이 세 가지 당부는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기본 덕인 ‘믿음·희망·사랑’과 일치합니다. 하느님 본성에 참여하는 이 향주삼덕은 모든 윤리의 기초이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신 자녀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자격을 얻을 수 있도록 주신 은총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