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일송차도(今日送此盜) : 오늘 이 도둑놈을 보내노라.
사동이 고삐를 잡은 말을 타고
최 참판이 한양을 떠나 남태령고개에 오르자
소나무 그늘에 돗자리를 깔아놓고 기다리던 과천현감이
벌떡 일어나 말에서 내리는 최 참판을 부축했다.
고갯마루 돗자리에 앉자 시원한 바람이 부는데도
과천현감은 꿇어앉아 약주를 따르고 손수 부채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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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령고개에서 땀을 식힌 최 참판은
현감의 안내로 과천 관아에 들어섰다.
최 참판이 들어서면 잔치가 벌어질 판인데
최 참판이 수원에 있는 숙부장례식에 가는 길이라 잔치는 접어뒀다.
대신 우황·산삼·사향 등 온갖 진기한 보약으로
탕약을 달여 보신하라며 최 참판에게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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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현감은 이방을 시켜 돈을 거둬들였다.
이방이 숙부장례에 조의금 명목으로 돈을 거둬
일부는 제 주머니에 넣고 삼백냥을 조의금 봉지에 넣었다.
칠백냥을 빼돌리든 구백냥을 빼돌리든
그건 과천현감이 상관할 일이 아니다.
“참판 나리 언제 돌아오시는지요?”
“7일장을 치르니 과천은 이달 스무닷새에 지날 것 같구려.”
“아이고 이 벌건 대낮에 이방 나리께서 어쩐 일로 주막을 찾으십니까요?”
개다리소반에 차려온 술상에서 우선 막걸리 한잔을 죽 들이켠 이방이 귓속말했다.
“주모, 글피에 최 참판 나리께서 상경하는 길에
우리 관아에서 하룻밤 지내실 건데, 현감께서 숫처녀를 구해오라 하네그려.”
주모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갑자기 숫처녀를 어디서 구해요” 했다.
한잔을 들이켠 이방이
“흠흠, 그러니 주모를 찾은 게 아닌가” 하더니
“자네 질녀인가 있잖여, 삼월이라 했던가”라고 눈치를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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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모와 이방이 머리를 맞대고 한참 궁리하더니 삼월이를 불렀다.
주모를 이모라 부르는 열일곱살 삼월이는 주모의 친정 쪽 먼 친척 질녀로
허드렛일도 하고 주모 몰래 틈틈이 잔돈도 벌어 챙기는 산전수전 다 겪은 여식이다.
이방이 돈주머니를 삼월이에게 건네자 그녀가 깜짝 놀랐다.
이방이 좀 챙기고 주모도 얼마 뗐지만 남은 돈이 적지 않았다.
주모가 슬며시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가자
이방이 삼월이 손목을 잡고 뒤뜰 구석진 방으로 들어가
요를 펴고 예행연습을 시작했다.
“요에 핏자국을 찍으면 너는 팔자를 고쳐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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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후에 최 참판이 수원에서 장례를 치르고
상경하는 길에 과천 관아에 들렀다.
“나리, 먼 길을 오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낮잠 한숨 주무시죠.
서헌에 금침을 깔아뒀습니다. 처녀애가 안마를 해드릴 겁니다.”
최 참판이 서헌으로 가 벌렁 드러눕자
숫처녀가 수줍은 듯 고개를 돌리고 꿇어앉아 최 참판의 다리를 주물렀다.
저녁 연회까지 갈 것도 없이 최 참판은
발버둥질하는 숫처녀를 품에 안았다.
폭풍이 지나가자 숫처녀는 방구석에 쪼그려 앉아 울고 있는데
최 참판은 요 위에 찍힌 붉은 피를 보고 감격에 겨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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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는 취소되고 닭피를 보고 감격한 최 참판은 이튿날,
삼월이를 가마에 태워 한양으로 데려가 셋째 첩으로 삼았다.
서너달 후, 최 참판은 한의원을 들락날락했다.
매독에 걸린 것이다.
삼월이는 금붙이를 훔쳐 야반도주했다.
병에 걸린 사람은 그뿐이 아니다.
과천 관아의 살살이 이방도 아랫도리를 싸안고 끙끙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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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현감은 평양감사하고도 바꾸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과천은 드넓은 평야가 있어 산물이 풍성해서 재물을 긁어모을 수 있고
한양의 길목이라 조정을 좌지우지하는 고관대작을 모실 기회가 많아
매관매직이 비일비재한 곳이다.
최 참판이 힘을 써 과천현감이 강원 부사로 승진 발령을 받았다.
과천 유림들이 과천현감의 송덕비를 남태령에 세웠다.
한양으로 가는 현감이 현 경계인 남태령에 올라 만감이 교차하는 듯
말에서 내려 3년간 세월을 보낸 과천을 내려다보는데
나무 그늘에 한 무리의 사람이 몰려나왔다.
면면이 낯익은 과천 유림이다.
“아니, 어르신께서 이 더운 날 여기까지 송영을 나오셨소이까?”
현감이 인사를 하자
유림 대표가
“현감 나리의 송덕비를 손수 제막하시고 가시라”고 했다.
현감이 어리둥절해 송덕비를 덮어씌운 광목천을 벗기자
빙 둘러선 유림과 고개를 넘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다가 송덕비를 보곤 조용해졌다.
‘금일송차도(今日送此盜·오늘 이 도둑놈을 보내노라).’
현감이 송덕비를 보더니 껄껄 웃고는
“갑시다. 여러분과 하룻밤 회포를 풀고 내일 떠나겠습니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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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질펀하게 술판을 벌이고 이튿날 다시 남태령에 모였다.
다시 광목천을 벗기자 본래 있던 글 옆에 대구로 무언가 적혀 있었다.
‘명일래타적(明日來他賊·내일 또 다른 도적이 올 건데).’
현감이 껄껄 웃으며 고갯마루에서 한양으로 내려가고
유림들은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