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우 배추 갈무리하고 벼까지 베더니 한희민 감사한테서 점심 먹자는 전화가 왔다.
오후가 되어 홍천으로 짬뽕을 먹기로 하고 스님이 모는 차를 타고 홍천 국도 길로 들어섰다.
휴대전화로 담은 사진들을 그냥 올린다.
북방면을 지나다가 범골 화동마을 입구의 샛노란 국화밭에 반하였다. 온통 국화향이 진동하였다.
생긴 것은 논 같은데 일부러 감국(甘菊, 山菊?)을 흐드러지게 심어놓았다.
여긴 화동마을 입구로 솟대도 있고 장승공원이라 했다.
윗쪽에 연못인 화동지가 있다.
한켠으로 부들과 왕골이 자라고 있었지만 물속엔 배스가 있다고 한감사님이 가리켜 보여주었다.
며칠 뒤 8일부터 화동마을축제가 있다고 포스터가 보였다. 미꾸라지잡기나 국화따기도 한단다.
스님은 국화포기라도 얻을 수 있을까 알아보지만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마침 한 아주머니도
와서 꽃을 둘러보며 아쉬움을 달랜다. 내면에서 차를 만든다며 거기 은행나무숲에서 왔다고 하였다.
이게 감국이냐 뭐냐고 물으니 동국이란다. 국화는 다 식용이 가능한데 겨울까지 가서 동국이라고
한단다. 일단 1,2초 끓는 물에 담갔다가 말려 차로 마시면 된다고 하였다.
북방에서 바로 시장통으로 들어가는 터널길도 처음 가보았다.
시장을 가로질러 먼저 보물 제80호인 희망리당간지주를 보러 갔다.
홍천강 둑길 안쪽에 붙어 있고, 길가 귀퉁이엔 조사 알림판이 서 있었다. 그렇잖아도 다리와 길을 낸다며 이전 여부가 거론된다는 소리를 들었었다. 기간이 올봄이었으나 발굴한 흔적은 별로 없었다.
이 당간지주는 보물 제76호인 춘천 근화동당간지주와 여러 모로 흡사하다.
우선 크기도 3.5m로 춘천 것보다 2cm 작을 뿐이다.
설명문에 고려 전기 것이라고 하였는데 춘천 것은 그냥 고려시대라고만 하였다.
당간을 세우는 안쪽으로 위에 간구가 더 확실하지만, 중간이나 아래로 춘천 것과는 달리 간공이 없고
밑에 간대도 보이지 않는다.
또 자리한 위치도 비슷하다. 강이 휘돌아내려가는 강안 안쪽에 바로 자리한 것이다. 춘천에는 7층
석탑이 있어 절터를 추정케 하지만 홍천에는 절터가 어딘지 모른다. 아마 읍 뒤의 산기슭 아래쯤이
아니었을까.
참고로 춘천 근화동당간지주 사진도 올린다.
마침 인근에 사신다는 할머니 한 분이 말을 걸어오셨다. 노년에 살기 좋은 집인데 나가란다고 걱정이
크셨다. 문화재는 보존돼야 하고 사유재산도 보상해줘야 하는 부딪침의 현장이었다. 충분히 보상
해주기가 불가능하다면 어째야 할까, 긴 시간을 두고 계획을 추진하면서 경제적 갈등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수밖에 더 있겠는가 싶다.
중앙시장 통으로 들어갔다.
신협이 있는 블록의 아래쪽 골목가에 매일식당이라는 중국집이다.
수수한 집이어서 짬뽕을 먹으러 왔다고 주문하며 아주머니의 표정을 살피니까, 더러들 먹으러
온다는 말뿐으로 별다른 내색은 없이 그저 소박한 미소로 답을 해준다.
매콤하면서도 들큰한 맛이다.
양배추 때문이었는데, 쌀쌀한 날씨에 부담없이 서민들의 입맛을 달래기에 족한 음식이었다.
돌아오는 길은 11사단 앞으로 난 길이었다.
한감사님이 군생활을 여기 기계화사단에서 했다며 옛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능평리를 지날 땐 당시에 보았던 엄청 커다란 묘소를 보고 가자고 하였다.
이름에도 능(陵)자가 있으니 심상치 않아 보이기도 했다. 바로 길가에 붙어 있었고 공원으로 조성돼
있었다('능뜰 근린공원').
우선 그 묘역의 방대함에 놀랐다.
길가쪽엔 정자와 운동기구 시설, 안내판이 있었고, 좀 들어가서는 근래에 세운 홍천의 3.1운동
(4월1일) 5의사추모 기념비가 서 있었다.
아래 사진 중간에 문인석이 있는 묘는 정경부인묘라는 비석이 있고 그 뒤로 멀리 보이는 것이
이묘역의 주인묘다.
묘역의 나무도 아름드리 참나무 소나무들이었고, 마침 태풍에 쓰러진 나무를 파내는 작업을 한켠
에서 하고 있었다.
우선 봉분의 크기가 엄청났고 석물도 잘 다듬지는 않은 석물들이나
비갈, 석등, 문인석 등이 두루 잘 갖춰져 있다. 안내판을 보지 않고 들어와서 우선 신도비인 듯 보이는 커다란 비석에 다가섰으나 비문이 거의 마모되어 보이질 않는다.
지붕돌 모양이 조선전기임을 말하고 있었다.
묘비도 탁본으로 먹이 남아 검게 보이나 거의 글자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좌측에는 철원에서 실전된 묘를 우선 묘단으로 복원해놓았다는 비석이 있어서 이들이 연안김씨의
묘들임을 알 수 있었다.
약간 묘쪽으로 기울어진 신도비 모습.
목과 두상이 몸통 속으로 파고 들어가 있는듯 보이는 문인석.
묘비모습. 글자리를 파내고 글을 새겼다는 점이 특이하다.
봉분 아래는 방형으로 여러 돌을 이어가며 둘렀다.
돌아나오다가 그제서야 안내판이 있음을 보고서 여기가 연산군 김효성의 묘임을 알았다.
김효성은 세종 때부터 무관직에 나서서 문종과 단종 대를 거치며 세조 편에 서서 한명회처럼
1등공신이 된 사람이었다. 그의 호가 '양효'였다. 임금이었던 연산군과는 한자가 다르다.
하긴 춘천 인근의 청풍부원군 묘가 조선중기를 지난 시기로 그래도 후기보단 일러서 크기나 석물이
단아한 모습이라면, 이 묘는 사대부 위인 군(君)이란 신분을 가진 사람의 묘이면서도 규모로 보면
능원(陵園)에 가까워 보일 정도다.
지방에 떨쳤을 위세가 대단하였던 모양이었다. 나중에 영월 단종의 능은 정조 대에 이르러 장릉으로
추존이 되었음에도, 그를 몰아냈던 공신들의 묘는 이처럼 조선시대 내내 위세를 보존해왔다는 점에
놀라움이 있었다.
공원에 근래 세운 새 정자 이름도 그의 호를 따라 양효정(襄孝亭)이다.
지나는 길에 이처럼 문득 들러서 문화재나 유적을 보는 것도 새로운 즐거움이자 한유(閒游)의
하나가 아닐까.
다만 무심히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만 있다면 말이다!
첫댓글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홍천에서 북방으로 지나다 보면 길가에 위차해 있는 묘역이 있는걸 알고 있었는데 이런 규모였군요.. 들어갈볼 생각을 안해서 이제야 사진으로 보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