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력서
류창희
“오우~, 멋진데…” 국제적인 보잉사의 사모님께서 네임카드를 목에 걸고 싶다고 한다. 예전에는 근무 책상 앞에 이름표를 붙였다. 이제 관료주의 제복은 점점 힘이 약하고 책임감이 무거워졌다. 최근에는 아예, 개목걸이처럼 ‘꼼짝 마라’ 옥죈다. 위아래로 이름표를 훑어보면 ‘너의 목줄은 내가 쥐고 있다.’는 엄포가 되어버린 세상이다.
나에게 일과 가난은 동의어였다. 요즘은 일하는 자체가 능력이다.
나는 얼굴과 엉덩이가 매우 방정하게 생겼다. 착실하게 앉아 책 읽는 모양새다. 오로지 외모가 나라 국〔國〕자처럼 네모 번듯하여 길거리에서 캐스팅되었다. 꼭 국가의 기록이 담긴 서책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내가 꿈꾸던 일이다. 간서치看書痴, ‘책만 보는 바보’ 이덕무처럼 ‘라이브러리언librian’ 도서관 사서다. 지역의 작은 도서관에서 맡은 소임을 다했다. 임기를 마치고 위임할 무렵, 문화공간으로 관을 발전시킬 인재가 필요했다.
일을 같이 해온 집행부 선생에게 넌지시 부탁했다. 기관장의 자격이 필요하니 이력서를 제출하라고. “이력서요?”라며 깜짝 놀란다. 결혼하고 아이 둘 낳은 것 밖에 한 일이 없는데, 뭘 써야 되느냐고 되묻는다. 처음에는 그가 장난하는 줄 알았다. 정말, 한 번도 써 본적이 없다고 한다. “아니, 어떻게 이력서 한 번을 안 써보고 살았어요?” “정말?” 정말? 정말이냐고 몇 번이나 물었다. 취임식 때 그의 이력을 보니, 우리나라 영부인이 나온 명문 여자대학출신이다. 대단하지 않은가? 우리나라 재원才媛들이 이력서 한 장을 써보지 않고 가정에서 아이들만 키웠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선진국으로 도약함은 당연한 일 아닌가. “아~ 대한민국. 아, 아~ 나의 조국♬”이다.
‘그대는, 이력서를 써 본적이 있는가?’
요 몇 년 사이, 초 중 고등학교가 얼기설기 겹쳐지는 친구들을 만난다. 30년 넘은 공백에 달동네출신 여섯 명이다. 저녁에 와인 한잔씩 따라놓고 “얘들아, 내 말 좀 들어 봐” 이력서 한 번 써보지 않고 평생을 산 사람이 있더라. “말이 되니?”라고 물었다. 사람은 다 자기 범주 안에서 생각하는가보다. 그만큼 나에게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정말, 팔자 좋은 양반들이지.” 이력서 한 장에 팔자타령까지 한다.
유년에서 청소년기를 함께했던 나의 친구들은 지금도 다 현역이다. 지난 날, 대기업재벌총수의 비서와 경리를 지냈던 경력도 결혼이라는 이름에 묻혔다. 그 시절, 아이나 노인을 모시거나 볼보는 일이 훗날 직장이 되리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우리들은 ‘학벌이라는 단어는 모르고, 오로지 주산이나 부기 타자급수만이 최고인줄 알았었다. 산전수전 공중전을 겪으며 버텨온 세월의 보상으로 현재 유아원, 노인병동, 복지관 등 생활전선에서 일하고 있다. 일 년에 한두 번 만남도 휴가 날짜를 조절하느라 애를 먹는다. “세상, 참 웃기지 않니?” 사람들이 회갑 넘어 ’출근‘하는 것이 부럽단다. 서로 묻고 대답하며, “그래, 맞아” 자식에게도 남편에게도 “당당하긴 해.”라며 서로 위안으로 안주를 삼는다. 그야말로 일이 존중받는 사회가 되었다.
‘그대는, 이력서를 써 본적이 있는가?’
나는 지금도 해마다 이력서를 쓴다. 고정적으로는 1년에 대여섯 장을 두 번씩 써서 기관에 제출한다. 비정규직 시간 강사는 학기가 바뀔 때 마다 재계약 자료로 이력서를 낸다. 평생에 내가 가장 부지런히 하는 작업이다. 처음 이력서는 고3 여름방학에 자필로 썼다. 고작 고등학교 졸업예정자에게 학력이나 경력에 무엇을 썼을까? 가혹했던 시절이다. 1956년 출생, 본적 경기도 포천, 1964년 정교분실 국민학교 입학, 1968년 서울미아국민학교 전학, 1969년 미아국민학교 졸업이다. 시시콜콜 펜촉에 잉크를 콕콕 찍어 한 글자 한 글자 서각을 파듯 썼다. 그 때와 다름없이 지금도 성실하게 손가락을 꼭꼭 눌러 자판을 찍는다.
오늘도 나는 다섯 군데 이력서를 제출했다. 새로운 정부가 공공기간 채용비리를 바로 잡으려고 나섰다. 이력서의 규정이 삼엄해졌다. 학력, 경력, 해당분야 자격증과 해당분야 연구실적 자료를 연도뿐만 아니라 월, 일까지 기재하여 사실증명서를 모두 첨부하란다. 일일이 원본을 가져가 원본대조 필에 사인도 했다. 나잇살이나 먹고서 담당자들 앞에서 돋보기를 끼고도 어릿어릿 겸연쩍다. 2차 면접의 질문에서는 더듬거리기까지 했다. ‘이 참에 일을 놓아버려’ 순간, 순간 땅이 내려앉듯 숨어들고 싶다. 그러나 절차에 따라 법을 잘 지키면 밥을 준다는데, 이왕이면 따뜻한 밥을 먹고 싶다.
집에 돌아와 나는 지금 이중 이력서를 작성하는 중이다. 소장용이다. 소장용은 한 줄 한 줄 적을 때마다 차오르는 감흥이 모락모락 하다. 문학이력이다. 무엇이 다른가. 기관제출용은 출생년도부터 한 계단 한 계단 밟은 발자국의 순서, 그야말로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생존의 발자국이다. 문학 소장용은 거꾸로 행적이다. 첫머리는 언제나 올해 오늘이다. 맨 밑에 칸은 2001년 ‘에세이문학’ 겨울 완료추천이다.
평생에 40대가 가장 행복지수가 떨어지는 시기라고 들었다. 꿈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다가 자신의 꿈을 포기하는 나이란다. 포기란, 불행이다.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행운아인가. 나의 꿈은 바로 불혹의 나이에 시작됐다. 40세까지 다 버려도 아까울 것이 없었다. 중간 중간 어느 해는 아무 실적이 없다. ‘나, 이렇게 멈춰있어도 되는 거야’ 어쩌면 나는 삶의 궤적을 남기기 위해 오늘도 문학의 허울로 글을 쓰는지 모른다.
어느 날, 문득 글 쓴 이력마저 다 버려야 할 것이다. 그때 또 어찌 할까. 노르망디 상륙작전 짜듯 D-day를 잡아야 한다. 오늘부터, 아니면 3년 후, 더 길게 십년 후는 어떨까. 또 미련이 동지섣달 움파 자라듯 올라온다. 어제 내린 하얀 눈은 오늘 내 앞길을 질척하게 할 뿐, 뒤돌아보지 말자. 탕湯왕이 이르기를 ‘진실로 어느 날에 새로워졌거든,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나날이 새롭게 하라!’〔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오로지 새롭게, 새롭게 하라고 했다.
글이여, 나의 문학이력을 날마다 새롭게 진화시키기를!
[류창희]
≪에세이문학≫ 수필 등단(2001).
제27회 현대수필문학상 수상.
LG메트로 작은쌈지도서관 관장. 수필집 매실의 초례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