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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피신과 사울의 예언
삼상 19:18-24
18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전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
19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여 이르되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하매
20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가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전령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21 어떤 사람이 그것을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다른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했으므로 사울이 세 번째 다시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22 이에 사울도 라마로 가서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도착하여 물어 이르되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어떤 사람이 이르되 라마 나욧에 있나이다
23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며 예언을 하였으며
24 그가 또 그의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웠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삼상 19:18-24 / [사무엘에게 피신한 다윗] 아내 미갈의 슬기로 살아난 다윗은 라마로 사무엘을 찾아가서 그동안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였던 모든 일을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사무엘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고 즉시 다윗을 데리고 나욧으로 가서 살았다. 나욧은 예언자들이 사는 성역인데, 그곳으로 피신하는 사람은 안전하였기 때문이다. 19) 다윗이 라마에 있는 예언자의 집에 들어가 숨었다는 소식이 사울에게 전하여지자, 20) 사울은 거기서라도 다윗을 잡으려고 부하들을 보냈다. 그들이 와서 보니 마침 예언자 무리가 모두 황홀경에 빠져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기뻐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무엘은 맑은 정신으로 그들 앞에 서서 지도하고 있었다. 사울의 부하들도 이런 광경을 보고 있다가 어느새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여 사무엘의 제자들과 똑같이 황홀경에 빠져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기뻐하였다. 21) 이 소식이 사울에게 전해지자 그는 다시 부하들을 보냈다. 그러나 세번째로 보낸 부하들도 예언자의 황홀한 기쁨에 젖어 먼저 사람들과 똑같은 현상에 빠졌다. 22) 이번에는 사울이 직접 라마로 향하였다. 그는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이르러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라마 예언자의 집으로 기는 길을 사울에게 가르쳐 주었다. 23) 사울이 라마 예언자의 집으로 가는데 도중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에게도 임하시자, 그도 예언자의 황홀경에 빠져서 라마 예언자의 집에 이르기까지 계속 그런 상태로 걸어갔다. 24) 그가 마침내 사무엘 앞에 이르러서는 옷까지 모두 벗어 버린 채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추면서 사무엘의 주변을 맴돌다가 마침내 힘이 다 빠져서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사울은 그날 해가 저물어 밤이 새도록 그냥 땅바닥에 알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래서 `사울도 예언자와 한패가 되었느냐?'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사울은 사자들을 세 번이나 보냈지만 그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예언하였으므로 다윗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직접 라마 나욧으로 내려가서 다윗을 잡고자 하나 사울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예언을 하게 됩니다.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19-21) 사울은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다는 보고를 받고 또 그곳으로 병사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병사들이 사무엘 선지자와 다윗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성령 하나님이 그들에게 임하게 되고, 그러자 그들은 다윗을 죽이지 못하고 또 실패를 하게 됩니다. 그것도 한 두 번이 아니고 세 번이나 그랬습니다. 여기 그들이 예언을 했다는 말씀은 그들은 어떻게 할 수 없는 놀라운 경지에 빠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사울이 직접 가게 됩니다. 그런데 사울도 성령 하나님에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라마 나욧에는 성령의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온 모든 사람들이 다 성령에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불이 활활 탈 때는 전혀 영적이지 않은 사람도 변화됩니다. 전령들 모두가 변화되었습니다. 심지어 악령에 사로잡힌 사울이 이곳에서 성령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사울도 라마로 가서(22-24) 사울은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시자, 열이 나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벌거벗은 임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하루 종일 사무엘 앞에서 마치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언을 했습니다. 사실 사울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받은 것입니다. 사울이 이 은혜를 잘 지켰더라면 비참하게 죽지 않았을 것이며, 하나님의 지속적인 은혜 안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 은혜를 감당하지 못하고 버렸기에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본문에서만 보아도 다윗은 두 번 이나 실수를 합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 앞에서 수금을 탄 것이 하나의 실수이며, 또한 아예 멀리 도망을 가야지 자기 집으로 도망 간 것도 실수입니다. 이런 다윗의 실수에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고, 그를 죽음의 자리에서 지키시고 보호하셨습니다.
적 용 : 사람은 많은 지식과 경험을 통해서 그리고 배움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전적이 변화를 원한다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는 비로써 변화될 수 있습니다.
미워해야 할 이유도 없이 괜히 악한 마음을 가지고 괴롭게 하는 자가 있으면 그것과 맞서지 말고 도망쳐야 합니다. 어디로 도망을 가야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 안으로 도망을 쳐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지키심과 보호하심과 이기심을 볼 것입니다. 또한 이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아가고 만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 설 교 >
하나님의 신이 머무시는 곳
삼상 19:18-24
1. 재미있는 유머 하나를 소개합니다. 여자 ‘송편’과 남자 ‘김밥’은 애인 사이였습니다. 어느 날 길을 가던 ‘송편’과 ‘김밥’ 곁으로 여자 ‘인절미’가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김밥’은 ‘인절미’를 티 나게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습니다. “유...후, 이쁜데...” 이에 질투를 느낀 ‘송편’이 말했습니다. “쟤 다 화장발이야.” 예일대학의 심리학 교수 살로비(P.Salovey) 박사는 미국 범죄의 20%가 질투 때문에 생긴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질투는 무서운 범죄행위의 암적인 요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질투의 특성 중 하나가 자기와 관계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거의 질투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옷가게를 하는 사람이 어떤 농부가 농사를 잘해 거금을 벌었다고 해서 질투하지 않으며, 회사원이 같은 동네의 식료품점이 잘된다고 해서 질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분야에서 경쟁관계에 있을 때에는 질투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질투의 불길이 아주 가까운 인간관계 속에서 작용하기 시작하면 더욱 그 불꽃이 사나워진다고 합니다. 부부관계, 애인관계, 친구관계에서 이 질투의 불꽃이 일어나면 반드시 그 불길에 화상을 입는 사람이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질투의 임상학’을 저술한 화이트(G.White) 박사는 이혼한 부부의 30%가 질투 때문에 갈라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질투의 십중팔구는 열등감에서 출발한다고 합니다. 자신의 결함을 질투로 바꾸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 되고, 분발의 동기로 바꾸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기원전 1020년경, 이스라엘 사울 왕이 왕세자 요나단과 모든 신하들에게 “다윗을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이같은 공개적 다윗 살인명령은 사울 왕의 시기, 질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소년 다윗이 양을 지킬 때 사용하던 물매 하나로 블레셋 장군 골리앗의 이마를 명중시켜 죽임으로 나라를 위기에서 건졌습니다. 이에 사울 왕이 다윗을 왕궁에 머물게 하며 여러 전쟁에 내보냈습니다. 그 때마다 다윗은 지혜롭고 뛰어난 전략으로 모든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습니다. 그로 인해 다윗은 온 백성들과 사울의 신하들의 칭송을 받게 되었습니다.
삼상 18:12-16 /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13) 그러므로 사울이 그를 자기 곁에서 떠나게 하고 그를 천부장으로 삼으매 그가 백성 앞에 출입하며 14) 다윗이 그의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15) 사울은 다윗이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 16)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으니 그가 자기들 앞에 출입하기 때문이었더라
한번은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사울 왕과 함께 입성할 때였습니다. 여인들이 모든 성에서 몰려나와 온갖 악기를 연주하며 춤을 추며 노래를 불러 이들을 환영했습니다. 이 때 환영의 노래 내용이 “(삼상18:7)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였습니다. 이 내용은 당시 다윗의 인기도(人氣度), 또는 민심을 반영하는 것으로 사울 왕보다 다윗이 훨씬 뛰어나다는 뜻입니다. 사울보다 다윗의 명성이 궁궐 안팎에서 점차 높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그만 시기와 질투로 불타오른 사울은 몹시 불쾌하여 분통을 터뜨리며 말합니다. “(삼상18:8)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이러다가 결국 왕권이 다윗에게 넘어갈 것 아니냐는 뜻입니다. 게다가 얼마 전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삼상15:23)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는 충격적인 왕권 박탈을 통보받은 터였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왕권의 위기를 느끼고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다윗을 제거하고자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그러나 다윗을 죽이려는 시도가 번번이 실패합니다. 이렇게 사울은 다윗 제거를 위한 자신의 모든 음모가 성공하지 못하자 아들 요나단과 모든 신하들에게 공개적으로 “다윗을 죽이라”고 명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곧 바로 이 사실을 다윗에게 전하며 급히 은밀한 곳으로 피신시킵니다. 감히 왕의 명령을 거역하며, 왕세자의 위치를 저버리고 다윗을 피할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요나단의 이러한 선택, 다시 말해 아버지 사울의 명령을 버리고 다윗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좋아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삼상 19:1 / 사울이 그의 아들 요나단과 그의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좋아하므로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좋아했다.” 는 이 말의 뜻은, 요나단의 마음이 이미 다윗에게 기울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이유는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서로 통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믿음이 서로 같아서 마음과 마음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이 하나 되어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로의 우정을 변치 않기로 굳게 언약을 했습니다.
삼상 18:1-4 /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2) 그 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고 3)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4)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이렇게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 우정, 믿음으로 맺어진 우정이야말로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단은 “다윗을 죽이라”는 사울의 명령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하나님을 믿는 자의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사울의 명령을 버리고 다윗을 선택한 것입니다. 사실 다윗에 대해서 시기심을 갖고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어야 될 사람은, 사울 왕이 아니라 요나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요나단은 아버지를 이어서 왕의 자리에 올라야 될 왕세자인데, 그 왕의 자리를 놓고 가장 위협적인 인물은 다윗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요나단이 다윗을 눈동자처럼 지켜주고 보호해준 것은, 믿음으로 그들이 하나 된 우정,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변치 않는 우정 때문이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안전하게 피신시킬 뿐만 아니라 적극 나서 아버지 사울 왕을 이렇게 설득합니다. “나라와 왕을 위해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충신인데, 그리고 사울에게 범죄한 일이 전혀 없이 오히려 사울에게 수없이 선한 일을 행했는데, 이러한 다윗을 죽이는 일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죄악일뿐더러 하나님 앞에 크나큰 죄악이라”(삼상19:4-5) 그러나 사울 왕은 아들 요나단이 계속해서 다윗 편에서 다윗을 옹호하자(삼상20:11-29) 분노가 치밀어 이렇게 말합니다. “(삼상20:30-31) 패역부도의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 하리라 그런즉 이제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니라.” 그리고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 하리라” 사울은 이 말로 자신의 본심을 털어놓은 것입니다. ‘요나단 네가 아비의 뜻을 따르지 않고 다윗을 선택하므로, 왕권이 다윗에게 넘어가 결국 너는 심각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장 가서 다윗을 끌어와 죽이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울 왕의 살해 위협을 느낀 다윗은 결국 도피하게 됩니다.
2. 다윗이 도피한 곳은 “라마 나욧”이었습니다.
이곳은 사무엘 선지자의 고향으로 선지자 학교가 있는 곳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신학교같은 곳이었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의 활동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다윗은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사울 왕을 피해 다니다가, 지치고 고달픈 몸을 이끌고 사무엘을 교장으로 한 ‘라마 나욧’의 선지학교를 찾아간 것입니다. 사무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장차 왕위에 오를 것을 예언하신 분이어서, 그 분에게 앞으로의 처신에 대하여 자문을 받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사무엘을 찾아 ‘라마 나욧’으로 간 것은 아주 잘 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무엘은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참 선지자였고, 그는 어려서부터 누구에게나 하나님 말씀을 가감없이 선포하는 진정한 선지자였기 때문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 왕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셨다는 사실을 거침없이 선포한 용기있는 참 선지자였습니다.
삼상 15:22-26 /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24)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25)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하여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니 2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참으로 사무엘은 어떠한 위협과 희생이 따른다 해도 하나님의 편에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무엘이 있는 ‘라마 나욧’으로 도피한 것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 왕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다윗의 말을 다 들은 후에, 사울 왕이 죽이려고 하는 자를 용납하면 자기까지 위험한 줄 알면서도 다윗을 받아들였습니다.
삼상 16:2 / 사무엘이 이르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퇴위시키고 장차 이스라엘 왕으로 다윗을 세우실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피신한 ‘라마 나욧’은 사무엘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들까지도 모두가 다 하나님의 영,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그야말로 ‘라마 나욧’은 하나님의 신이 머물러 계신 곳이며, 하나님의 신이 역사하시는 곳이었습니다. 현대 사회도 사울 왕에게 무죄한 다윗이 쫓겨 다닌 것처럼 악인들에게 의인들이 쫓겨 사는 사람들, 불의한 사람들로 인해 의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억울함을 당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마땅히 갈 곳이 없어 방황하는 사람들은 마음 놓고 짐을 풀고 발붙여 살 수 있는 안식처요 피난처를 찾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다윗은 사울 왕의 추격을 받아 하루 한 순간도 마음 놓고 지낼 수 없는 처지에서 하나님의 영, 성령이 충만한 ‘라마 나욧’을 찾아간 것입니다. 다윗은 훗날 자신의 지난날들을 돌아보며 때마다 일마다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신 것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 27:5 /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다윗은 사울 왕의 궁중에서는 불안한 나날을 보냈지만 하나님의 신이 충만한 ‘라마 나욧’에서는 평안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궁중이라고 평안하고 초막이라고 불안한 것이 아닙니다. 찬송가 438장처럼,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을 앞두시고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16:18 /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그리고 약속하신대로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여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행 2:1-4 /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리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 세상 끝날까지 성령으로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마 28:18-20 /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신, 성령이 머물러 계셔야 하는 곳입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인생들에게 쉴만한 안식처와 피난처가 되어야 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불의한 자들에게 쫓기고 고통당하며 외롭고 의로운 모든 자들이 피할 처소가 되어야 하며 참 안식을 얻을 수 있는 피난처와 안식처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교회 성도들은 마땅히 그 누구라도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신앙 인격을 갖추고 사랑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이 시대의 ‘라마 나욧’이 되어야만 합니다. 쫓기는 의인이 쉴 수 없는 교회는 참 ‘라마 나욧’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평강교회와 성도 여러분에게 항상 성령이 충만하여, 이 시대의 ‘라마 나욧’으로 쓰임받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 여러분이 세상에서 쫓기어 들어온 자들의 아픔을 녹여주고 상처를 싸매주고 치유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신, 성령이 항상 머물러 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다음으로, ‘라마 나욧’은 하나님의 신이 충만한 곳으로 쫓기는 의인의 피난처만 된 것이 아니라, 악인을 변화시켜 의인들이 되게 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다윗이 ‘라마 나욧’으로 피신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사울 왕은 다윗을 잡아 오라고 부하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서 선지자들 무리가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고 있는 것을 보는 순간 그 부하들에게도 하나님의 신, 성령이 내려 그들도 예언을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보고 받은 사울이 다른 부하들을 보냈지만, 그들 역시 마찬가지로 그곳에 가는 순간 성령에 힘입어 예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이 다시 세 번째로 부하들을 보냈지만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사울이 직접 ‘라마 나욧’으로 갔습니다. 사울은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라마 나욧’으로 가는데, 도중에 사울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내려서, 그는 ‘라마의 나욧’에 이를 때까지 계속하여 춤추고 소리치며, 열광적인 상태에서 예언을 하며 걸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옷까지 벗어 버리고 춤추고 소리치면서, 예언을 하고 나서, 그 날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후로 “사울도 선지자 중 하나인가?”라는 유행어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머무시던 ‘라마 나욧’은 모든 악인들이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버리고 의인들과 자리를 같이 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머물러 계신 성령 충만한 ‘라마 나욧’에서 사울 왕의 악의 도모가 허사가 되어버렸습니다. 악인들이 의인들과 하나가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이러한 변화는 일시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신, 성령이 임하여 잠시 선지자처럼 예언을 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그 인격과 성품이 변화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 미국 샌프란시스코 동쪽에는 ‘알카트라즈’(Alcatraz island)라고 하는 작은 섬이 있습니다. 이 섬은 1907년부터는 전쟁 포로들의 감옥으로, 1934년에서 29년 동안은 알카포네 등 마피아와 흉악범들을 감금했던 탈출이 절대 불가능한 악명 높은 연방 교도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감옥은 해변가에서 1.5마일(2.4Km)정도 떨어져 있는데 조류가 매우 빠르고 수온이 낮아 공식적으로 단 한 명도 탈출에 성공한 사례는 없다고 합니다. 단지 4명의 기결수가 사라졌는데... 오늘날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끔 죄수들이 육지가 가까워 쉽게 탈출할 수 있다고 판단해 바다에 뛰어들기도 하지만 섬을 굽이도는 급류 때문에 단 한명도 탈출에 성공하지 못해서 그 교도소 문에는 이런 팻말이 있다고 합니다. “당신이 이 섬에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도망가는 길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변화되는 길뿐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어렵고 힘든 것은 ‘변화’되는 것입니다. 인간됨의 성숙함이나 영적인 성숙은 변화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저의 30년 넘는 목회 생활을 통해, 저 자신과 더불어 성도들에게서 그 인격과 성품이 변화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너무나 잘 보게 됩니다. 신의 성품,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참으로 평생 힘쓰며 이루어야 할 과제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갈 5:22-24 /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변화’에 대해 깨우치는 “나의 기도”란 제목의 짧은 글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 나는 혁명가였고, 하나님께 드리는 나의 기도는 이것이 모두였다. “주여! 내게 세상을 개혁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중년에 이르러 한 사람의 영혼도 고쳐놓지 못한 채 내 반생이 흘렀음을 깨닫자 내 기도는 이렇게 달라졌다. “주여! 나와 접촉하는 모든 사람을 변화시킬 은총을 주소서. 그저 가족과 친지들만 개종시켜도 만족하겠나이다.” 이제 노인이 되어 죽을 날이 가까워 오늘 내일하고 보니, 이제야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알게 되었다. 이제 나의 유일한 기도는 이것이다. “주여! 나 자신을 고칠 은총을 주소서!”> 정작 중요한 것은 사회변혁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변화도 아니고, 내 자신의 변화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변화로부터 인격적, 영적인 성숙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와 성숙으로 세상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부름받았지만 그가 부름받은 한 순간에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겁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졌지만 두려움 때문에 거짓말을 자주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나안 땅에 이르게 되었지만 그 땅에 기근이 심해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에서 자기 아내 사라를 자신의 누이 동생이라고 속였습니다. 애굽의 권력자들이 자기를 죽이고 아리따운 아내를 빼앗아 갈까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창 12:10-20). 이러한 거짓말은 20여년 후에도 반복됩니다. 그가 90세가 되었을 때,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두려워 자기 아내를 누이 동생이라고 똑같은 거짓말을 했습니다(창 20:1-17). 여전히 변화되지 못한 아브라함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성숙되어가지 못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 역시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 전, 애굽의 왕자로 있을 때 혈기가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모세는 성장해서 자신이 히브리 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애굽 사람이 자기 동족을 학대하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해 애굽 사람을 쳐죽여버렸습니다. 이로 인해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 양을 치는 목동으로 40년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한 순간의 혈기를 다스리지 못해 애굽 제국의 왕자가 보잘 것 없는 목동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훗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는 지도자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 갈 때, 백성들에 이어 자기 가족들까지 가세하여 모세를 비방하고 불평하며 모세의 지도력에 시비걸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민 12:3 /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하나님께서 이 정도로 모세가 온유하다고 칭찬하셨지만 20여년이 지난 B.C. 1430년경, 광야 40년을 마쳐갈 즈음에 가나안 땅 진입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 다시 마실 물이 없자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원망 불평을 퍼부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반석에 명하여 물을 내어 마실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반석에 명하여 ‘물을 내라’ 하지 아니하고 홧김에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내리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행위가 못마땅하지만 반석에서 물을 내어 모든 백성과 짐승들이 마실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 일로 치명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민 20:12 /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너희가 나를 믿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나를 거룩한 자로 높이지 않았으므로 너희는 그들을 인도하여 내가 준 땅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한 순간의 분노가 꿈에도 그리던 약속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와같이 모세의 치명적인 약점은 혈기 문제였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성군(聖君)으로 불리며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손꼽히는 인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 대해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실 만큼 다윗을 높이셨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성적(性的)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여자에 약했습니다. 사울 왕의 시기로 지명수배를 받아 도망자의 신세로 쫓겨다니는 와중에서도 ‘아내들’을 많이 두었습니다. 나중에 권력을 장악하고 나라가 태평성세를 누리게 되었을 때, 왕궁 옥상을 거닐다 건너편으로 한 여인이 목욕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다윗 왕은 목욕하는 여인의 외모에 반해 그 여인이 충신 우리아의 아내인 것을 알고도 불러 간음죄를 범합니다. 이 여인 역시 자기 아내로 삼고자, 충신 우리아를 함정에 빠뜨려 죽이도록 하는 청부살인까지 자행합니다. 이 일로 다윗 왕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가장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왕궁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삼하 12:7-12 /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 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이처럼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 믿음의 선진들도 저마다 단점과 약점들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시간과 세월이 흐른다고 자동적으로 사람이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 그리고 다윗 모두 2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거짓말하고, 혈기부리고, 여자에 약한 모습이 남아 있었습니다.
■ 고양이가 미남 청년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고양이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자신을 여자로 만들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고양이의 딱한 사정을 가엾이 여긴 여신은 고양이를 아름다운 처녀로 만들어 주었고, 청년은 첫눈에 그녀에게 마음이 사로 잡혔습니다. 이들은 결혼을 하였습니다. 첫날밤에 <아프로디테>신은 그 신방에 쥐 한 마리를 넣었습니다. 그러자 처녀가 된 고양이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를 까맣게 잊은 채 침대에서 뛰어내려 쥐를 잡아 입에 피를 묻히며 잡아먹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신은 처녀를 본래 고양이 모습으로 되돌려 버렸다는 신화가 있습니다. 이처럼 본질이 변하지 않으면 변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치명적 약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뿌리가 깊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본성은 너무도 뿌리 깊어서 인간은 사실상 스스로 변화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성경 에베소서 4:22-24에서,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했습니다. 인간의 옛 본성을 버리고 마음과 정신, 영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형상대로 재 창조된 새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오직 성령의 은혜를 받아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인간은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죄의 본성이 얼마나 뿌리깊이 박혀 곤고한 삶을 살았었던가를 이렇게 토로했었습니다.
롬 7:19-24 /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이러했던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이 변화된 것을 감사하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롬 7:25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고전 15:10 /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스스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는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는 은혜가 항상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사울은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 가운데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의 요구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인정하는 의식으로 사무엘 선지자로 하여금 사울의 머리에 기름을 붓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당신을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기 때문이오. 당신은 여호와의 성령에 완전히 사로잡혀 당신도 그들과 함께 예언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될 것이오.” 사무엘이 이렇게 말한 후 사울과 작별할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성령으로 사울을 강하게 사로잡자 사울이 다른 예언자들과 함께 예언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이 백성들의 지지로 왕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성령에 사로잡혀 새 사람이 될 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진정한 왕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후 10년이 지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아니한 사울 왕을 두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삼상 15:11, 23 /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이렇게 사울은 그가 왕위에 오르게 될 때, 성령이 임하여 예언을 하기도 했지만, 그 성령에 이끌려 삶으로 그 인격과 성품이 변화되지 못하여 결국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되고 하나님의 영, 성령이 떠나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로부터 10년 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새 왕이 될 인물로 정하시고 그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 날 이후로 다윗은 하나님의 성령에 크게 감동되어 항상 하나님께서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반면 사울 왕에게는 성령이 떠나고 대신 악령이 그를 사로잡게 되었습니다.
삼상 16:13-14 /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악령에 사로잡혀 사는 사울 왕은 성령과 함께 하는 다윗을 죽여 없애버리고자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지만 결코 성공하지 못하게 됩니다. 오히려 다윗이 그러한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님께 그 처분을 맡기도 털끝 하나 손대지 아니합니다. 성령이 함께 하며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사는 사람을 악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결코 이길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짓이 진리를 결코 이길 수 없는 것처럼, 거짓된 악령에 이끌려 사람이 진리의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을 결코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삼하3:1) 사울의 집안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다윗의 추종자들 사이에 전쟁이 오랫동안 계속되자 다윗은 점점 강해지고 사울의 집안은 점점 약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울 왕은 블레셋과의 길보아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자살하므로 자신과 더불어 그의 가문이 몰락당하는 비참한 말로(末路)를 당합니다.
롬 8:5-9 /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사울 왕은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지 아니하고 육신의 생각대로 살다가 결국 성령이 떠나고 악령의 지배 아래 살다가 생명과 평안을 모두 잃어버린 불행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아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지 아니하고 육신의 생각을 좇아 탈취물을 감추어 두었지만 결국 발각되어 가족 모두가 돌에 맞아 죽는 참사(慘死)를 당했습니다. 삼손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삼손에게 “하나님의 영”이 크게 감동되자 손에 아무것도 없어도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음 같이 찢었습니다.
삿 14:6 /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손에 아무것도 없어도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음 같이 찢었으나
그러나 삼손이 이방 여인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않게 되었을 때, 소위 그 막강한 ‘삼손의 힘’이 한 순간에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블레셋 군대에 결박되어 두 눈이 뽑히고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는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삿 16:19-21 / 들릴라가 삼손으로 자기 무릎을 베고 자게 하고 사람을 불러 그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고 괴롭게 하여 본즉 그 힘이 없어졌더라 들릴라가 가로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블레셋 사람이 그를 잡아 그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로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아 살라”는 말씀은, 삼손이 들릴라의 끈질긴 유혹을 이기지 못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 성령으로 살지 아니하면 유혹하고 미혹하는 마귀의 궤계를 인간 스스로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살라는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성령에 감동되어 사는 사람이 반드시 승리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사울 왕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삼상 15:26 /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새 왕이 될 사람으로 다윗을 벌써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무엘 선지자로 하여금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 말씀대로 다윗에게 기름을 붓자 “(삼상16:13)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성령)에게 크게 감동되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악령이 그를 번뇌케 하기 시작했습니다(삼상 16:14). 이후로 사울 왕은 기회만 주어지면 다윗을 살해하고자 온갖 수단 방법을 다했습니다. 악령의 지배아래 사는 왕이 성령에 감동되어 사는 다윗을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사울 왕은 전국에 다윗 살해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수배망을 피해 유리하던 다윗에게 목숨을 걸고 그를 도울 큰 군대를 붙여주셨습니다(대상 12:22). 다윗이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해 시글락에 숨어있을 때였습니다. 당시 사울 왕의 심복들 중 ‘모두 활을 잘 쏘고 물맷돌도 잘 던지며 왼손과 오른손을 다 같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군인들 30명’이 있었는데 이들 모두가 다 사울과 같은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울 왕의 군대에는 1,0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방패와 창을 능숙하게 쓰는 자들로서 얼굴은 사자처럼 날카롭게 생겼고 빠르기는 산의 사슴과도 같았던 갓 지파 맹장들이 즐비했습니다.’ 이들이 그 동안 사울 왕에게 충성을 다하다가 다윗과 함께 할 의사를 가지고 다윗을 찾아갑니다. 요새에 있던 다윗은 그들을 맞으러 나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진정으로 나를 도우러 왔다면 나는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나를 속여서 내 대적에게 넘겨주려는 속셈으로 여기까지 왔다면 비록 내가 여러분을 해하지 않을지라도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사실을 아시고 여러분에게 벌을 주실 것입니다.’ 이때 ‘성령께서 30명 용장의 대장인 아마새를 감동시키시자’ 그가 다윗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다윗 장군님, 우리는 당신의 부하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의 편입니다. 당신과 당신을 돕는 사람들에게 승리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을 도우시시기 때문입니다.’ 그제서야 다윗은 그 사람들을 영접하고 그들을 자기 군대의 지휘관으로 삼았습니다. 이 후에도 다윗을 지지하겠다는 사람들이 매일 찾아왔으며 마침내 그들은 막강한 군대가 되었는데 ‘하나님의 군대’와 같았다고 했습니다(대상12:1-22).
대상 12:22 / 그 때에 사람이 날마다 다윗에게로 돌아와서 돕고자 하매 큰 군대를 이루어 하나님의 군대와 같았더라
30명 용장의 대장인 아마새가 다윗에게 ‘당신과 당신을 돕는 사람들에게 승리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을 도우시시기 때문입니다.’ 라고 한 말은, 성령에 감동되어 나온 것입니다. 아마새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사울 왕과 같은 지파 출신 장군들임에도 불구하고, 동족을 버리고 다윗을 돕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여기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을 도우십니다.’는 말에서 ‘돕는다.’는 바로 성령의 감동을 말합니다. 성령은 ‘보혜사’ 곧 도우시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감동’의 어원 히브리어 ‘라브솨’는 문자적으로 ‘옷 입히다’는 의미로서, 성령께서 인간의 전 인격을 관할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마새와 그 무리들에게 성령의 옷을 입히자, 그 동안 악령에 사로잡힌 사울 왕의 인격과 삶을 바로 분별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에 감동되는 인격과 삶을 보여준 다윗 편에 가담하여 마침내 다윗의 승리를 이룩하게 한 것입니다. 이후 성령의 감동의 물결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전 군대와 전 백성들에게까지 성령이 감동했습니다.
대상 12:38 / 전투태세를 갖춘 이 모든 군인들이 헤브론으로 와서 하나같이 다윗을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려고 했으며 다른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도 같은 심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성령에 감동된 자, 다윗이 승리하여 왕이 될 것을 미리 알고 원근각처의 각 지파 사람들이 최대의 잔치를 준비하고 배풀어 나라 전체가 희락으로 충만했습니다.
대상 12:39-40 / 헤브론에 온 모든 군인들은 다윗과 함께 3일 동안을 먹고 마시며 즐겼다. 이것은 그들이 올 것을 대비하여 그 형제들이 음식을 미리 준비해 두었기 때문이었으며, 또 근처에 있는 자로부터 잇사갈과 스불론과 납달리까지도 식물을 나귀와 약대와 노새와 소에 무수히 실어왔으니 곧 과자와 무화과병과 건포도와 포도주와 기름이요 소와 양도 많이 가져왔으니 이스라엘 가운데 희락이 있음이었더라.
다윗과 같이 성령에 감동되는 인격과 삶을 통해 ‘하나님의 군대’가 함께 하여 승리와 희락의 축복이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신, 성령이 항상 함께 하시어 인격과 성품이 변화되시고, 범사에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