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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주작가님께서 주신글]
1545년 3월 8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4월 28일,
그러니까 어제는 이순신 장군 탄신일입니다.
난세엔 영웅이 난다고 했던가.
요즘 시국에 이순신 장군이 그립습니다.
우리는 이순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저 광화문 광장을 지키는 동상이나 역사책에 등장하는 해전 장군 정도로 알고 있지는 않았는지.
온갖 권모술수와 음해 모략을 견뎌가며 나라를 구한 민족의 영웅이었다. 백의종군하다가도 다시 전쟁에 나가 결국 전사하기까지 아군의 승리를 염려했던 장군이었다.
살림이 시원찮았던 이순신은 외가인 충청남도 아산 현충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임진왜란의 징후를 감지한 세 살 터울 서애 유성룡 대감의 강력한 추천으로 출사해 47세에는 부산포 앞바다에 수만의 왜선을 맞아 싸웠다.
그러나 7년 간 조선의 강토는 처참한 전쟁으로 초토화됐다.
유명한 ‘삼척서천 산하동색, 일휘소탕 혈염산하’의 명언
‘필사즉생 필생즉사’
석 자의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떨고, 한번 휘두르니 적의 피가 강산에 물들도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 앞바다에서 53년의 생을 일기로 임진왜란도 막을 내렸다.
지금 같은 난세야 말로 진정한 영웅이 필요한 때다.
만고 충신의 탄생을 예언하다.
비몽사몽간에 신선이 나타나 이 아이는 충신이 될 것이니 이름을 순신이라고 하라! 그래서 순신이라고 지었다.
순신은 서울 남산자락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한국의 집 한옥 자리는 건천(乾川)이었다. 순신은 주로 여기서 놀았다.
병정놀이에서 꼬마 대장이 된 순신은 책에서 읽은 작전을 병정놀이에 적용하였다.
공격하는 적은 위 병사들이 맡고 수비는 아래 병사들이 한다.
수비하는 병사들은 반으로 나눠 따로 진을 치도록 하라!
반은 나무 뒤에 진을 치고, 나머지 반은 개울가에 진을 친다. 그러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뒤에는 개울이 있어 적군이 쳐들어 올 수 없다. 이것이 '배수의 진'이다.
순신은 나이 28세, 무과에서 활쏘기 칼쓰기 창쓰기 시험을 치루고 마지막 승마 시험을 볼 때 달리던 말이 발을 헛디뎌 그만 순신을 내동댕이쳤다.
사람들은 순신이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고통을 참고 절뚝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다리를 칭칭 감고 다시 달렸다. 순신의 일화 한 대목이다.
만해 한용운
이순신(李舜臣) 사공 삼고
을지문덕(乙支文德) 마부 삼아
파사검(破邪劍) 높이 들고
남선북마(南船北馬) 하여 볼까?
아마도 님(나라) 찾는 길은
그뿐인가 하노라.
러일전쟁의 영웅,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러시아 극동함대와 싸워 이겨서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승전 축하연에서는 제독에게 칭송이 쏟아졌다.
“각하의 업적은 영국의 넬슨제독이나 조선의 이순신장군에 비견할 만합니다.”
나를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지 말라. 그 분은 전쟁에 관한 한 신의 경지에 오른 분이다, 열악한 상황에서 국가의 지원도 없이 매번 승리를 하였다.
그분과 비교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모독이다. 내가 그분 휘하에 있었으면 하사관도 못되었을 것이다.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다.
가장 미운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다.
가장 존경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도 이순신이다.
가장 차를 함께 마시고 싶은 사람도
바로 이순신이다.
와키자카 장군의 어록에서
왜군 총수 와키자카는 그의 전투일지에서 ‘나는 이순신이라는 장군이 조선에 있는지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 번 이긴 그저 그런 장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마주친 이순신은 여느 조선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두려움에 떨며 음식을 전혀 입에 델 수가 없었다. 한산도 패배의 충격으로 6일을 굶었다,
그는 2천의 왜군으로 5만의 조선군을 격파한 명장이었지만 이순신 장군만은 이렇듯 두려워했다.
전쟁의 신이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시작전을 명령하는 자리에서,
앞으로는 조선 수군과는 싸우지 말라. 그리고 육지에서만 싸워라. 는 지침을 하달했다고 한다.
명량대첩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은 칠천량에서 왜적에게 대패하고 원균마저 전사하였다.
패전 소식에 놀란 조정은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했다.
명량 해협에서 포위를 당하고도, 단 13척을 가지고 적선 133척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며 조선수군은 남해의 해상권을 장악한 것이다.
그가 조정에 올린 장계는 간단명료한 여덟 글자였다.
상유십이(尙有十二)
순신불사(瞬臣不死)
이순신 장군 어록에서
집안이 나쁘다고 탓 하지마라
나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랐다.
머리가 나쁘다 탓 하지마라
나는 첫 시험에서 낙방하고
서른둘에 겨우 과거에 급제하였다.
좋은 직위가 아니라고 불평 하지마라.
나는 14년 동안 변방 오지에서
말단 장교로 복무 하였다.
윗사람 지시라고 탓하지 마라.
나는 직속상관과의 불화로
몇 차례나 파면을 당할 뻔 했다.
허약한 몸을 탓 하지 마라
나는 평생 동안 위장병과
전염병으로 고통 받았다.
기회가 없다고 불평하지 마라.
나는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마흔 일곱에 통제사가 되었다.
조정의 지원이 없다고 낙담 하지마라
나는 논밭을 일궈 군자금을 만들었다.
오합지졸을 강한 군대로 만들었다.
위에서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만 하지 마라
나는 임금의 오해와 의심을 사서
공적이 사라지고 옥살이를 해야 했다.
배가 없다고 절망하지 말라
열두 척의 낡은 배로 133척을 막았고.
스물세 번 싸워 스물세 번 이겼다.
장군의 죽음
이순신 장군은 최후의 전투인 노량 해전에서 갑옷을 입지 않고 진두지휘하다가 적탄을 맞았다.
난중일기에서도 “나는 죽고 싶다”고 토로하며, 장군은 자신의 최후를 부끄럼 없이 장식하기 위해 장렬하게 자살한 것이라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
장군은 평소에도 자신의 진퇴에 대해 분명하게 말했다.
‘예로부터 대장이 자기가 세운 전공에 대해 인정을 받으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갖는다면 대개는 생명을 보전하기 어려운 법이다.
나는 적이 물러나는 그 날에 죽음으로써 유감 되는 일을 없애도록 하겠다.’
이순신 장군 체포 작전
선조는 이순신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의심하여, 금부도사에게 선전관의 신표와 밀지를 주어 신분을 위장케 하고 잡아오도록 하였다.
금부도사는 선전관의 자격으로 한산도에 머물면서 장군의 동태를 엿본 다음 잡아오는데, 선조의 다음 4가지 죄목이다.
조정을 속였으니 임금을 무시한 죄를 범했다.
(欺罔朝廷 無君之罪).
적을 쫓고 치지 않아 나라를 저버린 죄를 범했다.
(縱賊不討 負國之罪)
남의 공로를 빼앗았고 또 남을 모함했다.
(奪人之功 陷人於罪 無非縱恣 無忌憚之罪).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으니. 고문을 가하라.
(今將窮刑得情)
선조는 이순신의 죄를 자백 받고 사형에 처하라고 지시했다.
장군과 완도의 인연
완도는 도처에 고인돌이 많이 있다. 선사시대부터 이미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다. 신라 장보고 제독의 청해진이 있었던 곳이다. 고려 때 삼별초가 제주도로 가기 전에 주둔했던 곳이었다.
또한 이곳은 이순신 장군이 계급장을 떼고 백의종군했던 쓰라린 기억이 있는 곳이다. 그 후 복권하여 껍데기뿐인 수군을 재건하고 전열을 가다듬어 왜군들에게 연전연승한 곳이다.
이곳에는 83일간이나 이순신 장군의 시신을 임시로 가묘 한 유적이 남아있다.
이순신 장군의 만장(輓章)에 쓰인 글 - 이조판서(吏曹判書)
雅度澄壺月 (아도징호월)
淸詩脫轡銜 (청시탈비함)
命窮違素志 (명궁위소지)
官薄困靑衫 (관박곤청삼
旅舍驚辭世 (여사경사세)
秋風未掛帆 (추풍미괘범)
靈輀明日發 (령이명일발)
老淚灑天南 (노루쇄천남)
고상한 성품이 얼음장 술병 같아, 가을 달처럼 맑았습니다.
시(詩)의 깨끗함은 고삐도 재갈도 벗어버렸지요.
명이 다하자 처음 품은 뜻으로 우회해버리셨습니다.
말단 관직의 복장을 갖추는 것에 늘 연연해하지 않았지요.
현생에 남긴, 세상을 떠나며 적은 글은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가을바람이라 돛은 아직 걸지 않았습니다.
상여 실은 수레 내일이면 출발을 한답니다.
늙은이의 눈물이 남쪽 땅을 온통 적시겠지요.
일화 한 대목 살짝 들려줄까요?
이순신 장군은 전했다고 합니다. 난중일기에서
대구 명태 숭어가 조선을 구했다.
옛날에는 남해안의 거제 다대포 마산포 진해 장승포 등 포구에서 대구가 많이 잡혔다. 이순신장군의 작전은 하나같이 성공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포구에 있었다.
대구가 다니던 회유통로에서 목을 지키고 있으면, 틀림없이 왜선들이 이곳으로 들어왔다.
포구는 내만이라 병목 같이 폭이 좁은 입구를 지나야 만이 포구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곳에서 목을 지켜, 적은 병력으로도 손쉽게 왜군을 격파 할 수 있었다.
숭어는 울돌목을 지나야 산란지인 거제로 갈 수 있다.
울돌목은 육지와 섬 사이에 있는 여울목이다. 남해 해류는 서해로, 서해 해류는 남해로 가야하는데, 오로지 이 길 뿐이다.
물결이 거세서 바다도 조약돌 소리를 낸다고 해서 명량(鳴梁)이다.
이순신 장군은 빠른 물살과 간만의 차를 이용하여 적을 격파를 했다. 이곳이 숭어가 다니는 길목이다.
명량대첩의 전승지인 전남 해남의 울돌목에서 뜰채를 이용한 숭어 잡이가 한창이다. 숭어 잡이는 울돌목의 거센 물살 때문에 한가운데를 피해 가장자리로 거슬러 올라오는 숭어 떼를 바위에서 지키고 있다 뜰채를 이용해 건져 올리는 이색적인 방식이다.
산란 전에 잡히는 울돌목 보리숭어는 거친 물살을 거스르고 올라가는 탓에 쫄깃한 맛이 일품이다. 기름이 많아 찰지고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회와 튀김, 찜, 회덮밥 등으로 먹을 수 있다.
갓 잡은 숭어회는 우수영 관광지 내 조선시대 저잣거리에서 맛 볼 수 있다.
바다 생선이 애국을 하였다.
임진왜란으로 농사지을 겨를이 없어 알곡이 부족했다.
먹을 것의 확보가 문제였다. 그
래서 식량을 대신하여 말린 대구포가 수군의 전투식량(씨레이션)역할을 톡톡히 했다.
가끔 육포(肉脯)도 있었으나 그 양이 적어 주로 생선말린 어포(魚脯)를 사용하였다.
그중에도 대구포는 배고픈 병사들에게 좋은 식량이 되었다.
대구 알이나 아가미젓, 명란젓이나 창란젓, 숭어알을 말린 어란은 귀물이라 상감마마에게 진상하였다.
바다 생선이 애국을 한 것이다.
까꿍 아침산책 20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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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울돌목 진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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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은 글쓴이에게
큰 보람과 용기가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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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상한 성품이 얼음장 술병 같아, 가을 달처럼 맑았습니다.
시(詩)의 깨끗함은 고삐도 재갈도 벗어버렸지요.
명이 다하자 처음 품은 뜻으로 우회해버리셨습니다.
말단 관직의 복장을 갖추는 것에 늘 연연해하지 않았지요.
현생에 남긴, 세상을 떠나며 적은 글은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가을바람이라 돛은 아직 걸지 않았습니다.
상여 실은 수레 내일이면 출발을 한답니다.
늙은이의 눈물이 남쪽 땅을 온통 적시겠지요.
일화 한 대목 살짝 들려줄까요?
이순신 장군은 전했다고 합니다. 난중일기에서
대구 명태 숭어가 조선을 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