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우리 아버지 (3)
순야 이선자
오 씨 들의 모의가 사실로 드러난 것은 한밤중에 대산아재가 남의눈을 피하여
몰래 다녀간 후의 다음 날이었다.
갑자기 하루 아침에 우리 집 정미소의 기계가 돌아가지 않고,
무섭도록 고요한 정적만이 계속되고 있었다.
일주일 째 되던 날,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에 벼가마니를 쿵 하고
내려놓는 소리에 우리집 식구들은 놀라서 잠이 깨였다.
정미소의 문이 잠겨있으므로 안채의 정문으로 들어온 상능(上能)에 사는
임씨라는 분이 그간의 오 씨들의 소행을 듣고, 일부러 찾아온 거였다.
자기는 오씨가 아니니 오 씨들의 소작을 지을 필요도 협박도 받을 이유가
없노라고, 2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벼가마니를 지고 왔다.
모두들 침묵만 지키고 아무도 참관하지 않겠다는 다른 동네 사람들에 비해서
성정이 곧은 분이었다.
오랜만에 정미소의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온 마을에 퍼져 나갔다.
평소에는 시끄럽게만 여겼던 기계의 소음이 그날따라 음악처럼 들린 것은
그 방아소리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 칠남매가 아무 걱정 없이 살아왔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방아소리가 동네로 퍼져나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 동네에 사는 이옥수의
아버지 이기달씨, 이경점의 오빠인 이승길씨네도 벼가마니를 지고 왔다.
친척은 아니지만, 자기들도 타성인지라 우리집과 일맥상통하는
그 무엇이 있었을 까? 이승길씨는 목수인지라, 자주 우리 아버지가 불러다
일감을 맡기기도 했고, 이옥수와 이종락의 아버지인 이기달씨는 우리 아버지와
서로 “이상!“ “이상!“하고 부르며 지내는 지인 관계였다.
우리 집 오른쪽 옆집에 사는 순임(옥자)이 어머니인 심지할매가 자기 아들 보고,
“생아! (봉상이 아재)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그리하지 말거라.
너는 이서방이 어떤 사람인 줄 니도 알재?
니는 그 집 아들(우리 오빠)과 같이 자라온 친구지간이 아니냐?
그리고 ‘이실’이(우리 엄마를 지칭)는 내가 딸처럼 여기며 의지하는 사람 아니더냐?
니도 그 사람들 모의에 참석하면, 하늘에서 벼락이 내릴까 겁이 난다. “
라고 누누이 타이르기도 했다고, 우리 집에 와서 미안한 마음을 담아 말씀하셨다.
우리 동네는 작은 마을이지만 장년, 청년들로 구성된 농악대가 인근의 동네는
물론이고, 멀리는 전라도 까지 소문이 나서 원정을 다녀오는 일도 종종 있었다.
열대여섯 명 남짓 되는 농악대의 신명 나는 놀음이 설을 쇠면서 축제의 분위기로
익어가면 너도 나도 농악 소리에 들떠서 어깨춤을 추기도 했다.
둥~둥~둥~ 북소리에 맞춰 놋쇠로 만든 커다란 징은 광~ 하고 여운을 남기면,
앞산이 과앙하고 메아리를 보내고, 꽹과리는 깨갱깽 깽, 장구는 덩 쿵덕 쿵,
또 손에 벅구(소고)를 잡고 상모를 돌리는 청소년들은 온갖 재주를 선 보이는
날이기도 했다.
새해를 맞아 집안의 액운을 없앤다고 해서 농악대가 동네의 왼쪽 끝에서 부터
시작해서 한 집 한 집 돌며, 복을 빌어주는, 마치 꼭 치러야 하는 예식 같은 전통이
우리 마을에 있었다.
그래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설레는 맘으로 농악대의 방문을 기다리는
날이기도 했다.
“쥔, 쥔(주인, 주인) 문 여소! 문 안 열면 갈라요.“
하고 단장이 대문 앞에서 선창을 하면,
단원들이 북과 장구와 꽹과리가 깨갱깽, 쿵닥쿵 덩덩, 광 광~ 화답을 한다.
해마다 그들이 우리 집에 오면 맨 먼저 마당에 있는 우물에선 샘물이 마르지 않도록,
정미소 앞에선 기계가 잘 돌아가도록, 부엌 앞에선 양식이 풍성하도록,
농악을 울리며 잡귀를 쫓아내는 의식절차를 치르곤 했다.
주인은 또 고맙다고 막걸리를 대접하는 집도 있었는데, 살림이 넉넉한 집에서만
그렇게 했다.
그런데 1970 년, 그 해의 정월 대보름날,
그들은 우리 집을 방문하지 않고, 우리집을 지나서 왼쪽 옆집인 갭이(갑이) 아재
집으로 가 버리는 것이 아닌 가?
나와 내 동생 들은 그들 농악대가 우리 집 대문을 지나 옆집으로 가리라곤
꿈에서도 상상 못 했던 일이었다.
옆집에서는 꽹과리 소리가 고막을 시끄럽게 할 때,
내 동생들은 실망과 분함으로 엉엉 울었다.
아무리 달래도 끝이 날 것 같지 않는 동생들의 울음소리는
내 귓전을 한동안 맴돌았다.
나도 속으로 울면서 오늘의 이 굴욕감을 결코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음 호에 계속)
지난 3월 초의 산행했던 영상들입니다.
바위에 누가 이런 그림을 ? 용감했던 기사에게 선물을 바치는 장면 같은데...
아래, 순야의 뜨락에도 봄이 오고 있습니다.
매일 비 오고, 춥고 바람 불어 정원의 일을 못 했는데, 이렇게 동백도 피고 수선화도 피어나고 있습니다.
아래는 제일 먼저 피어나는 꽃, 늦 가을 부터 시작해서 겨울 추위에도 피어나는 꽃, 이제는 지고 있어요.
수선화를 보면 봄이 일찍 온 듯 싶지만 아직은 바깥 날씨가 추워서 겨울 외투 입고 다닙니다.
히아신스도 이제 피려고 하네요. 지난해에 피었던 금잔화의 꽃대도 아직 거둬들이 못한 어수선한 상태,
마른 꽃대들을 걷어내고 찍었더라면 하는 후회도 있네요.
이 동백꽃은 정원이 아니고, 정원으로 가는 길목인 마당에 서 있는데, 오늘 비를 맞아 움추리고 있는 듯 해요.
울 가에 명자꽃도 개나리도 오래 전에 피었다가 지금은 지고 있어요.
크로커스꽃이 제일 먼저 피었는데 시기를 놓쳐 이제 한 군데만 남았네요.
첫댓글 감정을 억누르면서 읽었습니다.
그렇게 구구절절이 기억하고 필림에서 뽑아내듯 사연들 그래도 용케도아픔을 견디어왔으니 대단한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장녀로서 책임감 가히 짐작합니다.
59여년 전에 일어난 일을 생생하게 잘 묘사하였네요.
허세를 부리던 사람들도 지금은 다 고인이 되었겠지요.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아야 한다."는 글귀가 생각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