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는 피곤하다
공장문을 나선다. 칠월의 한낮은 땅의 지열로 지글지글 끓어 오르는 뙤약볕이다. 재판이 있는 날이다. 한여름의 낮은 길어서 늦은 오후에도 햇살이 뜨겁다 못해 따갑다. 이제는 제법 만성이 될 법도 하건만 법정출입은 늘 가슴이 죄어 오면서 오그라든다. 염병할 떨림으로 진정시키지 못한 가슴을 안고 발걸음은 학익동으로 향한다. 인천지방법원 사백십 구호 법정은 늘 사람들로 가득하다. 가소 법정(소액 재판, 이천만원이하)은 가단(삼천만원 이상) 법정보다 언제나 득실거래하다. 다닥다닥 붙은 판자촌이 인구밀도가 높은 것처럼 가소법정에는 늘 많은 사람들로 인해 붐빈다.
소심한 나는 늘 한 시간 빨리 움직인다. 혹시라도 늦어 지각이라도 혀서 재판이 후딱 지나가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조바심에 말이다. 달리 한번에 가는 노선이 없기에 택시를 이용한다. 평소에는 어림없는 짓이다. 요행 낯선곳이라도 갈라치면 그곳 지리도 희박하고 낯선곳이라 당연히 택시를 타면 간단하게 해결이 될법도 하건만, 기어코 대중교통 버스를 이용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늘 조바심에 일찍 공장문을 닫고 택시를 타고 미리 서둔다. 일찌기 어느 관상가가 이르기를 '당신은 평생 경찰서 근처에도 얼씬거릴 일이 없습니다'란 소릴 듣고 살았는데, 사실은 얼마전 그 금기를 깨버렸다. 보무도 당당하게파출소말고 지구대 문을 열고 그것도 경찰에게 말을 걸었다. '소변이 매우 마려우니 화장실을 부탁합니다.' 친절한 경찰씨는 자세한 안내로 바지에 미리 물 흘릴일을 미연에 방지시켜 주셨다.
평생을 동심으로 살아온 나였다. 과거 잠시 모래판을 평정한 적이 있었다. 그 유명한 이만기도 한방에 날려 버렸다. 나로 인해 은퇴를 했다. 나의 승승장구도 결국은 모래판이 아닌 여의도 너른판에서 결정이 났다. 경규형의 도움으로 나는 쉽게 여의도성을 정복했다. 유재석이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하지만 나는 재석이에게 없는 파워가 넘쳤다. 그 파워도 잠시 공장에서 일하는 날이 많아졌다. 파김치가 되었다. 일해주고 대금을 못 받는일이 잦아졌다. 소송은 피곤하다. 벌써 오늘로써 법원출입이 이순이구식(二旬而九食)이다. 낯설지 않음을 보니 꽤나 오랜시간이 흘렀다.
네 시 삼십분이 법정출두시간이다. 지열이 지글거리는 노면으로 인해 오후의 열기는 후끈후끈 달아올라있다. 작열하는 바깥공기는 호흡을 거칠게 만든다. 그늘에라도 피하기 위해 미리 건물안에 들어선다. 차라리 재판구경이라도 하는게 덜 더울거 같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다행스럽게 빈자리가 눈에 들어온다. 재판이란 게 칼로 토막 쳐서 회를 치는 막 회집이 아닌 탓에 언제나처럼 정해진 시간보다 재판은 밀리기 마련이다. 한여름의 날씨에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그곳엔 애시당초 에어컨은 있을 리 만무고, 선풍기는 더더욱 없다. 관공서는 예의상 항상 은행보다는 덥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는 것도 한 방편이다. 나는 조용히 앉아 법정 드라마를 시청한다.
-원고는 도대체 뭘 주장할려고 피고를 고소하셨나요.
-판사님. 제가 법을 잘 몰라서요.
-모르는 것도 자랑입니까.
-....
-원고는 적어도, 당신의 주장을 위해서 피고를 이 법정에 불러 들였으면 최소한 법적용에 대해 알고 임 하는 게 원칙 아닙니까,
-뭐, 제가 가방끈이 워낙에 짧아서 달리 배운 것도 없고 더더구나 법이라곤 아는 게 통 없어서 법무사님께 의뢰를 하긴 했습니다만.
-아, 이게 뭡니까, 최고의 지성인인 판사인 내가 봐도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네요. 다시 작성해서 오세요 .
-판사님, 제가 작성한 게 아니고 아, 그, 저, 뭐, 법무사님이 해 준건데,
-그러면 좀 더 유능한 법무사를 고용해서 제대로 해 오세요.
피식 웃음이 나온다. 나도 첨엔 그랬다. 무능한 법무사의 친필에 의존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본인이 직접 작성했다. 왜, 나는 국문학도에다 글쟁이니까. 재판은 어차피 서면대결이다. 글로써 미리 제출하면 그 내용을 숙지하여 쫌 머리 좋은 판사가 머리를 요리조리 굴려 판결을 내리는거다. 날이 갈수록 나의 문체가 빛났다. 왜냐구, 나는 작가를 꿈꾸는 미래 작가가 아니던가 말이다. . 핍진성을 발휘하라. 사실보다 더 개연성있게 말이다.
-할아버지, 무료변호사도 있으니까, 원하신다면 소개 시켜 드릴수도 있으니까
국선 변호사를 선임 하십시오.
-판사님, 변호사가 저보다 제일을 더 잘 알 수 가 있을까요.
-할아버지 말을 내가 못 알아들으니 좀 유능한 분이 변호하면 유리하실 겁니다.
-아, 글시 그 놈이 내 일을 어떻게 알아요.
할아버지의 똥고집은 더운 날씨만큼이나 푹푹 찌게 만든다. 똥꼬 찌개 맛있다. 하긴 맞는 말이다. 지일은 지가 젤루 잘 알지. 판사도 이해 못하는 말을 그 놈이 어캐 알어.
-피고는 왜 답변서를 제출하지 않으셨나요,
-판사님, 그걸 꼭 해야 하나요.
-내가 보기엔, 답변서를 제출 하시는 것이 피고에게 유리할겁니다.
-안 해도 될 것 같은데요.
-그럼 니 맘대로 하세요.
가르쳐 줘도 못 먹는 놈, 결국은 지고 말았다. 환장 하겠다.
-원고는 돈 십 만원을 받고자, 벌써 이 재판정에 몇 번이나 출두 하셨나요,
-오늘이 세 번째입니다.
-내가 보기엔 송달료, 인지대가 십 만원은 더 들었을 거 같은데요, 이제 그만 하시죠 ,
-저는 명예가 중요합니다.
-십 만원을 받아서 무슨 명예를 얻습니까.
그 원고는 자칭 기술자였는데, 고용한 사장이 하루 일을 시켜 보고 너무 일을 못해서 짤랐다고 한다. 그 기술자는 하루 일한 일당 십 만원을 받아야겠다고 저 지랄이다. 암만 봐도 땡깡 기술자 같다.
-저 뒤엔 열심히 일하고 못 받은 돈 받을 라고 줄을 서 있는데, 당신이 그렇게 시간을 잡아먹어야 합니까.
-네.
-다음에 다시 오세요, 음, 이십오 일, 오후 세 시 이십 분.
나의 원고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은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시간은 일곱 시를 넘기고 있다.
-저 번 달에도 네 시간이나 나를 잡아두고 나오지 않더니, 쌍불, 오늘 안 나오면 쌍불, 두 번으로 나의 승리가 확정적이다. 하긴 지 놈이 무슨 염치로 나와. 더러운 놈. 나에게 피해를 끼친 게 얼만데,
여덟시가 넘어서 나의 차례가 끝났다. 원고가 안 나오면 다음으로 연기다. 나는 피곤한 피고다. 재판은 퇴근도 없다. 그날 일은 그날 끝내야 퇴근이다. 힘없이 나오는데 하늘이 흐리다. 승리의 환호성이 귓전을 때린다.
-나는 이겼다. 네 놈이 두 번이나 출두를 하지 않았으니. 이젠 확실한 나의 승소다.
승리를 장담했는데, 했는데, 그 놈이 그 다음날, 기일 연장서를 제출했다. 나는 허탈했다. 젠장 할, 말미잘 같으니라고. 나는 또 한 달을 기다려야 한다. 피 말리는 송사는 나를 지치게 한다. 다시 한 달이 되었다. 인천법원으로 향한다. 원고 측의 2회 쌍불이라 오늘만 나타나지 않으면 나의 승리다.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쯤이면 나의 승리는 확정적이다. 판사는 재차 원고를 부른다. 대답이 없다. 다음으로 넘어가려는 순간,
-잠깐만요.
주현미의 트로트가 울려온다. 기어코 그 놈은 오고야 말았다. 기는 놈 위에 뛰는 놈이다. 두 번을 혼자서 서너 시간을 기다리고,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쳤는데. 역시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다.
-원고는 어째 두 번이나 걸러 시고 오늘에사 나오셨네요.
-아, 네. 제가 원체 바빠서리.
아닐 것이다. 저놈이 고용한 변호사가 분명히 한 말씀 해 준 게 분명하다. 원고는 원하는 날 나오면 되고, 그러면 혼자 기다리는 피고는 피곤할 것이다. 어차피 자기가 주장한 금액으로 승소 할 수 없음에 피고를 엿 먹이려는 수작이다. 다행이도- 판사는 내가 주장한 대로 받아 들여졌다. 그 놈이 주장한 사백 오십 팔 만원을 내가 주장한 백 십만원으로 조정이 되었다. 그것으로 위로를 삼을 수밖에. 밖을 나오니 한낮의 폭염이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없는데도 여전히 지글지글 온통 대지를 익히고 있다. 그래, 지글지글 대지위에 삼겹살이나 구워 쐬주나 한잔 처먹어야겠다.
첫댓글 법정을 리얼리티하게 표현했네요. 그렇지요. 법을 떠나 모른다는 것은 자랑이 아니지요.ㅎ
안다는 것은 그만큼 그 분야에 대해서 남들보다 노하우를 지녔다는 뜻이고요.
허나 아는 걸로만 유리한 위치를 점령하는 건 아니고, 특히 법정에선 인맥(학연,지연,혈연 등)이
판가름나는 경우가 허다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