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피해서 포교를 못하겠어요”은처의혹과 ‘한국불교의 자기정체성 제고’
요즘 불교계의 뜨거운 이슈는 종교평화선언에 관한 것이다. 소위 21세기 아쇼카선언이라고 불리우는 불교인의 종교평화선언이다.
그런데 최근 불교관련 인터넷신문에 ‘종교평화선언 종정 추대식에서 공표키로’라는 기사가 뜨면서 아쇼카선언은 또 다시 뜨거운 논란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 이전에 아쇼카선언을 추진하고 있는 화쟁위의 도법스님과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 총무원장 스님에 대한 도덕성에 대한 문제를 김영국거사가 주권방송에서 폭로 (“MB 당선 위해 뛴 자승 총무원장은 참회하고 스스로 거취를 정리해야 한다”, 총무원장 사서팀장 청와대 특채 되자마자‘오해 풀렸다’며 對정부여당 접촉금지 解禁) 한 바 있다.
“창피해서 포교를 못하겠어요”
이와 같은 일련의 폭로성 기사로 인하여 불자들은 현 조계종 총무원을 구성하고 있는 종단 지도부의 행태에 대하여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어느 불자는 관련기사 댓글에서 다음과 같이 글을 달았다.
창피해서 포교를 못하겠어요
은처승에다 XXX범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니는 총무원장이 너무 창피했지만,
(조계신도탈퇴자, “아쇼카선언 시기·내용 전면 재검토하라”의 댓글에서)
조계사
‘조계신도탈퇴자’라는 필명을 가진 어느 불자가 ‘ 창피해서 포교를 못하겠어요’라는 제목으로 작성한 글이다.
최근 발표된 총무원장 스님에 대한 각종의혹, 특히 은처의혹과 관련하여 강한 불신감을 표명하며, 대놓고 처자식을 가지는 타 종단 보다 못하다고 하였다.
왜 은처의혹이 끊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와 같이 은처의혹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사설사암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승려의 자질문제에 대한 것이다. 먼저 사설사암에 대한 것이다.
종교전문기자로서 신문에 각종컬럼을 남긴 김나미기자가 최근 발행한 자신의 책 ‘신앙지옥 불신천국’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은처는 말 그대로 처를 숨겨놓는 것이다. 은처문제는 쉬쉬하면서도 간간히 제기되지만 항간에 높은 승려 가운데 마누라를 숨겨놓지 않았다면 바보 멍청이라는 말도 들린다.
(김나미기자, 신앙지옥 불신천국 56p)
몰래 숨겨놓은 처 즉, 은처을 가진 것은 고위직 승려일수록 그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불자들로부터 지탄받는 은처가 생겨난 원인은 무엇일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를 들라면 다음과 같은 이유도 될 것이다.
너도 나도, 어른도 아이도 사설사암이요, 토굴이요, 아파트다. 개인주의가 팽배해 대중생활은 이뤄지지 않고 승가공동체의식은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월암스님, 승가 도덕적 해이 만연…파합승가·물신풍조 팽배, 법보신문 2011-03-25)
월암스님의 글에 따르면 출가수행자들이 ‘사설사암’이나 ‘토굴’갖기 경쟁이 붙었다고 질타하고 있다. 큰방에서 생활하며 인내하고 화합하며 살아가는 산중공의제 (山中公議制) 의 가풍이 실종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토굴은 ‘개인수행처’를 말한다. 하지만 토굴은 반드시 흙으로 만든 집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현대식 토굴은 개인주택도 될 수 있고 아파트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수행을 한다는 명목으로 아파트를 구입하여 토굴로 삼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어갈까.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아 있으면 눕고 싶은 것이 사람들의 심리이다. 편리하고 쾌적한 아파트 토굴이라도 하나 장만 하면 그 때부터 다른 생각이 들 것임에 틀림 없다. 공동체적인 대중생활을 기피하고 홀로 살아 간다는 것은 수행에서 어긋나는 첩경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산전수전 다 겪고 들어온 사람과 뭣 모르고 들어온 사람
은처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승려의 자질문제를 들 수 있다. 뚜렷한 출가목적이 없이 승려가 된 것을 말한다. 이는 어려서 출가한 경우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김나미기자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산전수전 다 겪고 들어온 사람과 뭣 모르고 들어온 사람과의 차이 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잘 알기에 세상을 완전히 등진 타입이 있는 반면, 어린 나이에 성직이란 직업을 택한 사람은 유난히 세상 것들에 호기심과 애착이 많아 보였습니다.
(김나미 기자, 취재후, 그 뒷이야기(3) 세상에 나가지 못한 글입니다)
출가자 중에는 두 가지 타입이 있다고 한다. ‘자발적 출가자’와 ‘비자발적 출가자’이다.
전자의 경우 출가의 이유가 분명하고 스스로 판단하여 출가한 경우로서 나이가 든 경우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어떤 이유에 의하여 절에 맡겨진 케이스라 볼 수 있다.
6.25동란으로 인한 전쟁고아 또는 가정사정으로 인하여 절에 맡겨진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 경우 절이 고아원 역할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 “집도 절도 없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처럼 옛날에는 절이 고아원이나 양로원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처럼 절에 맡겨진 아이가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고 절에 눌러 앉았을 경우, 절밥을 어려서부터 많이 먹은 경우에 대하여 김나미기자의 글에 따르면, 유독 ‘세상 것들’에 대한 관심이 많다고 한다.
세상것들에 대하여 관심이 많다는 것은 이성에 대한 관심도 포함될 것이다. 더구나 공동체생활을 하지 않고 즉 주택이나 아파트 토굴 생활을 하였을 경우 딴 생각이 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승과 속은 하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현 조계종 총무원장스님의 은처의혹을 접하면서 불자들은 스님들 세계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불자네티즌은 “창피하다”고까지 하였는데, 이런 승과 속에 대하여 김나미기자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내가 들여다 본 성스런 세계, 승과 속, 성과 속은 종이 한장의 차이도 없었습니다. 다시 강조하자면 성과 속, 승과 속은 하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김나미 기자, 취재후, 그 뒷이야기(3) 세상에 나가지 못한 글입니다)
김기자가 직접취재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불교에서의 승과 속은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 말은 승이나 속이나 똑 같다는 말로 해석된다.
‘한국불교의 자기정체성 제고’관한 글
이처럼 승과 속이 다르지 않다는 것에 대한 댓글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지난 2009년 법보신문에 실린 기사에 대한 댓글이었다. 이미 블로그에 발표(주지불교의 현실을 매섭게 비판한 댓글, 한국불교의 자기정체성 제고, 2009-10-05)한 바 있다.
이 댓글을 보면 한국불교에서 승과 속이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한국불교의 자기정체성 제고’에 대한 글이다. 그 전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사실상 승가의 재가화
<<한국불교의 자기정체성 제고>>를 위한 첫 단추이자 그 변화의 중심적 과제는 과연 무엇일까?? 먼저 그 답을 내리고 시작하자..
오늘날 그것은 <승과 속을 제대로 분별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승과 속>이란 무엇인가??
승(승가)의 핵심은 곧 <출가비구의 역사적/현재적 전통>을 의미한다.. 또한 속(재가)의 핵심은 당근 <재가신도가 주축이 된 민주화된 오늘날의 재가불교운동>이 된다..
그러면 도대체 왜 이 자명한 명제를 새삼 거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가?? 왜?? 그 이유는 불을 보듯 명약하다.. 곧 소위 <<반승반속>>(사실상의 승가의 재가화/세속화!)이란 작금의 현실이 모든 것을 뒤죽박죽, 혼란의 도가니 속으로 쳐박고 있기 때문이다..
반승반속의 현실
그 <반승반속의 현실>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단적으로 소위 각 종단의 총무원장/종회의원 <금권선거> 등에서 여실히 보여지는 바, 오늘날 한국불교의 저 면면한 <치부>(부끄러움/참괴심)를 부단히 양산하고 있는 <<주지불교/재산관리인의 불교>>를 말한다..
지난시절 소위 해방공간의 정화운동에서 내걸린 <비구/대처 운운>의 깃발은 종내 <명색의 변경>에 불과했다.. <금강경>은 누누이 말하지 않던가?? 명색 따위로는 결코 법의 실상을 볼 수 없노라고..
비구승가가 전혀 비구승가 답지 않고, 실제 승속이 서로 뒤엉켜버려 <출가비구라는 수행자의 성인지향의 그 성스러운 삶>은 오늘날 오직 <세속화된 범부의 경제적 치부의 삶>으로만 나날이 전락해가고 있다..
처자식을 거느리고 산다면
그런즉 대처승(재가승가?)이라는 <모순어법>조차 <공공연한> 시절이 되었다.. 남방은 다만 <환계/재출가>의 자유(7번 운운/실제 자유)로 대체할 따름이다..
곧 이 대처승(이는 결코 카마쿠라 시대부터 내려온 일본불교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미 중국/한국/티벳 등에서도 그 유구한 <역사적> 사실은 존재한다..)이란 결국 광의의 동아시아불교전통의 전근대적 <국가주의 불교전통>이 배태한 <재가불교의 변형형식>이 아니던가??
처자식(그것이 소위 <은처 또는 사실상의 동거>라면 합법적 결혼제도보다도 더욱 더 큰 위선적인 <훼승가>의 문제다..)을 거느리고 산다면, <아무리 삭발을 하고 승복을 걸쳐 입는다>고 해도, 그것은 곧 본질적으로 다만 <재가인의 삶>과 동일하다..
그러고서 그 어느 승가가 감히 <<재가인의 귀의>>를 받을 수 있겠는가?? 너나 나나 다 똑같은 재가자일 뿐인데!!
그러니 홍 모처럼(불교신문!) 인간(범부!)은 다 평등하니, 소위 중의 특권(고작 어간출입?)을 폐지하자고 개거품을 무는 게 아닌가?? 그러나 불성은 평등해도, 그 업은 <차별상>을 띤다!! 모르는가??
출가주의 전통을 폐기해도 좋을까?
물론 재가인으로서 보살의 삶(중생구제), 성문의 삶(교학/학문), 연각의 삶(선정수행 등) 등을 살 수 없다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불교사는 이미 이 모든 것이 출/재가의 형식을 뛰어넘은 <대승의 원융 회귀적 정신>(특히 법화/화엄 등) 속에 이미 하나(불이)로 포섭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소위 <<출가주의 전통>>은 오늘날 과감히 폐기처분되어도 좋을 무엇인가?? 결코 아니다..
왜?? <진정한> 출가주의야말로 <탐진치로 대표되는 인간의 감각적 욕망에 종속된 노예의 삶>을 벗어난, 곧 <번뇌의 상속이라는 윤회의 삶>을 단멸한, 바로 <성인(성불)을 지향하는 수행자의 삶의 오롯한 표상(그래서 출가는 곧 <출세간>인 것이다)이자 정법(성인의 삶)의 구현>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은
다만 오랜 불교사에 있어서 <출세간을 성취한> 소위 거사/부인들(우바새/우바이)은 모두 단지 모습만이 재가자이되, 이미 출가자와 같은 성스러운 삶을 구현하고 있기에 그들은 <귀의>를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런즉 실질적인 <출세간의 성스러움>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출가>라는 제도형식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미 <재가화>된 소위 <대처종단>을 굳이 제외한다면, 소위 <명목상의 비구종단들>(대표; 조계종 등)은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만 한다..
그러고서 소위 종무(법의 실천)니 수행(법의 체득)이니 교육(법의 전수)이니 포교(법의 전달)니 호계(법의 수호)니 등을 비로소 운위할 수 있다.. 아니던가??
재산관리인으로서의 주지들
아무튼 <비구승가가 비구답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승가 본연의 양상과 정법을 파괴하고 있는 바의, 그 <재산관리인으로서의 주지들(혹은 재단이사장 등)의 불교= 즉 사유화된 사찰경제>라는 오늘날의 친일(사찰령) 이래의 <해묵은 과제의 미청산>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소위 비구종단들에서조차 소위 비구들이 오직 <경제적으로 치부하기> 위한 <본사/수말사 주지 자리> 하나 꿰차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작금의 <한국불교(물론 어디 이게 불교만이랴??
소위 <개독교>라는 비난을 받는 소위 <대처 목사 기독교>도 역시 마찬가지다)의 천민자본주의적 실상>(정작 불교 또한 소위 뻘짓만 일삼는 <뻘교>가 되지 말란 법이 어디 있겠는가??)은 이미 <목불인견>이다..
타락한 일부 권승들의 금권정치
그렇다면 도대체 이 친일불교의 잔재인 <미청산 과제의 해결방법>은 무엇인가?? 소위 <묵은 도둑을 새 도둑으로> 갈아치우는 과거 <정화운동/종단개혁> 운운의 <행동주의의 오류>라는 이권분규의 구태(차마 입에 올리기도 부끄러운 타락한 일부 권승들에 의한 금권정치..)를 반복해야 하는가??
소위 총무원장을 선거로 갈아치우고, 세속화된 종법(특히 선거제도의 도입 등)으로 소위 잘나가는 수말사 주지들이 여야 파당정치(소위 종책모임?)를 벌이는 종회의원급 주지들만 뽑아 놓으면, 그 일(곧 여법승가의 구현/주지불교의 청산=<사유화>된 사찰경제의 청산)이 해결될 일이던가??
소위 각종 종교 <쇼>들 하시는 분들!! 당신들 모두 <돈많은> 주지님들 아니신가?? 아무리 <도>(정법!)보다 <돈>(돈벌어 도대체 무엇에 쓰시는가?)이 더 높은 세상이래도 넘 하지 않은가?? 돈도 안 벌리고 지위도 힘들기만 하다면 다들 지발로 세간으로 도로 나가실 분들이다..
아무리 순결주의를 외쳐도
아니면, <이도 저도 다 꼴보기 싫다, 그런즉 다 때려부수자>며 <구정물(세속화)도 버리고, 아기(정법)도 버리고> 죄다 버리고서, <순결주의적 독선>으로 소위 근본도 모르는 <근본불교 재가종단>이라는 달랑 <깃발 하나> 더 세우고, 남의 것이 더 커보인다고 남방사대주의적 발상의 <남방팔리승가>를 덜렁 <장기이식>하면 해결될 일이던가??
그거 절대 안된다.. 이미 동아시아 전통의 <불교사>는 그런 거 안된다고 다 보여줬다.. <달마 등 그 수많은 서역승들>이 소위 <삼의일발>로 중국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가??
그 많던 대승의 서역승도 다 남방스님들과 똑같은 모습(삼의일발)으로 중국에 들어가고, 티벳으로 들어갔다.. 결국 니들이 다만 몰라서 그렇지.. 니들도 결국 소위 <<주지불교 흉내내다간 종내 변질되고 만다>>라고 장담한다..
문제는 그 껍데기(흉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1700년 지난한 한국불교의 유산상속자의 이름은 정해졌다.. 다만 누구도 그 유산들을 제대로 <향유>하지 못할 따름이다.. 나쁜 유산을 버리고 <좋은 유산>을 가려내지도 못한다.. 암튼 누가 그 좋은 유산을 제대로 상속받아 정법(성인불교의 구현)을 구현할 것인가??
소위 팔리불교주의자여..
<족보도 없는> 재가 근본불교(고작 범부불교) 따위 차치하고, 한번 물어보자.. 소위 팔리불교주의자여.. 니들이 소위 남방에서처럼 이 한국사회에서 발우 하나로 <맨발로 탁발>하고, 한겨울에도 편단우견하고 달랑 <삼의가사>만으로 살아갈 자신이 있는가??
그거 아니라면 말짱 쇼(연극!)다!! 티벳불교는 어디 인도불교의 그 전통(삼의일발의 그 탁발전통)을 인도로부터 상속받지 못해서 그거 안하는 줄 아는가??
모든 한국사회의 재가대중들이 그리 어리석지 않다.. 일부 <반사적> 지지자들 믿고 소수종단 밥그릇(비주류 종단?)은 챙길지 몰라도 니들은 이미 그런거 제대로 흉내내지도 못하고 있지 않은가??
이미 미얀마의 수행센터들도 상당수가 단지 <형식적인> 탁발 의례화된 모습을 보이질 않던가?? 이미 한국에서처럼, 공양간에서 조리해서 공양해 올리지 않던가?? 도대체 왜 그런가??
미얀마의 숲속 꾸띠와 지리산/태백산 등의 토굴 등은 머가 그리 다른가?? 우 조티카의 꾸띠와 신변잡기식 에세이는 법정스님의 오두막과 신변잡기식 에세이와 도대체 머가 그리 다른가??
니들에게 필요한 것은 <형식적인 쇼>가 아니라 결국 소위 <아라한의 실제 인격>을 보여주는 일이다..
선근의 배양이야말로
남방 붓다고사의 위빠사나(청정도론)든, 중국 대혜의 간화선(서장)이든, 결국 수행은 일차적으로 <각자의 선근>에 달려있다.. 아무리 정진해도 일단 그 선근이 약하면 금방 그 <한계>에 봉착한다..
물론 위빠사나 수행은 중요하다.. 대승위빠사나(유식관) 수행전통이 단절된 현재, 팔리위빠사나수행법(특히 사띠행법)을 통해 그 <실마리>(그러나 거기까지다!)를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남방위빠사나인 미얀마의 행법들도 잘 아다시피 레디 세야도 이래, 현재적/공식적 실수행의 전통은 고작 일세기를 겨우 넘는다.. 그것은 소위 경허 이래 우리네 선문도 마찬가지다..
한 가지 더, 또한 이 두 분은 다 높은 수준의 교학적 이해(해오!)를 전제한 수행자들이다.. 왜?? <정견/정사유>(문혜/사혜)되지 않은 대상은 <정념/정정>(수혜)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곧 8정도가 모두 <반야바라밀>(위빠사나 지혜수행!)일 따름이다!
근데 묻자!! 누구나 쫌만 수행하면 대충 다 아라한이 되던가?? <자칭> 아라한들(대부분 주지 행세하는 이들!! 니들이나 조계중 중님들이나 머가 다르냐??) 말고 말이다..
안된다.. 그거 수행은 선천적/후천적 자기 선근(근기)의 한계를 넘어서려면 <한평생> 목숨 걸어도 될까말까다.. 오죽하면 선문에서는 <대사각활>이라고 하던가?? 물론 최상근은 좀 더 빠르게 간다만..
그런즉 <선근(선심소의 증장)의 배양>이야말로 모든 수행의 기초(8정도의 <정어/정업/정명/정정진>//유식관의 자량/가행위 등)이다..
곧 출/재가에 상관없이 일단 소위 <5계의 실수행>은 출/재가 공통이자, 그 5계는 출가자의 율(4바라이도 결국 5계에 근거를 둔다)의 바탕이다..
누구든 금생(현재)에 자신이 노력하고 성취한 만큼, 내생(인과!!)을 기약하는 법이다.. 따라서 잘 안된다고 물론 퇴행(도로 이전 수준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문화재는 국가관리로!! 보시금의 관리는 재가자들의 손에!!
암튼 돌아가서 그럼 저 <주지불교>를 어떻게 <<해체>>해야 하는가?? 소위 범부불교의 희안한 <순결주의적 독선>도 안되고, 명색만을 바꾸는 <행동주의적 오류>도 안된다면, 도대체 어찌 해야하는가??
일단은 명목상이라도 <비구승가의 자정노력>이 필요하다.. 단 아무래도 금권을 쥔 주지들 <스스로> 자정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럼에도 주지 중 누군가는 먼저 시도라도 한번 해보라!!
암튼 부단히 <계몽>하는 수밖에 없다만.. 그래도 비구승가경제의 <주지 사유화>를 막을 방법들을 찾아야 한다..
어떻게?? 승가의 재산을 그 문화재는 국가관리로!! 그 보시금의 관리는 <시주한 재가자들의 손>에!! 곧 이미 <카톨릭(천주교)의 롤모델>도 있으므로..
카톨릭의 롤모델과 개독모델
물론 천주교도 문제(비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승가 구성원의 자질>의 문제이다..
오히려 지금 우리승가는 소위 <개독의 모델>(개교회주의/개인사찰화! 예; 모모선원 등 재가화/세속화!)로 나가는 게 더 큰 문제다..
천주교의 경우처럼 추기경조차 모든 일반 신부들과 같은 <일정금액의 월보시>를 <평등지급>받는 그 구조(도대체 선방수좌들의 해제비타령이 왠 말이며, 학인들의 대학등록금 걱정이 왠 말인가??)로 나가야하고, 또 판공비, 소임비, 학비 및 기타 공금 등은 <예산/회계/감사> 등을 거쳐 공개적으로 <차등지급>받는 형식을 갖춘다면, 심지어 모 사찰 일부 주지들처럼 퇴폐영업장(?)운영, 빌딩소유, 개인사찰화 등 일체 <재산증식을 위한> 영리적 경제활동을 엄금하되, <비영리적 개인재산>인 생활유지용 소비물자(자동차, 기호품, 책 등) 들은 일정기준(재가자의 <비난>을 피할 수준-율장의 보증!)으로 허용한다면, 나아가 의무화된 보험, 의료, 교육 등의 서비스를 <공공기관>(보험사/병원/각종 승가교육기관)에 의해 직접 관장하고 운영한다면, 이는 이미 <천주교의 예>를 보더라도 충분히 가능하다..
<<칼자루>>는 재가자가 쥐고 있다..
역시 제 스스로 머리를 안 깍는다면, <주지불교 해체>를 위한 <재가자의 적극적 비난과 승가에 대한 경제적 압박>이 필요하다..
<사찰재산의 공개>에서부터 <사찰운영의 각종 비사유화>에 이르기까지 그 <<핵심>>을 요구하라!! 그렇다고 엉뚱하게 일부 주지들과 결탁하여 정치적인 이권에 눈 먼 일부 사악한 재가자들의 교활한 선동에는 결코 속지 말라!!
절대로 <<선거>> 따위로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 오히려 승가의 세속화/재가화만 가속시킬 뿐이다..
물론 이미 <사유화된 기득권을 향유하는 소수 금권력을 쥔 일부 주지들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칼자루>>는 재가자가 쥐고 있다..
모든 경제적 보시는 <재가자들의 주머니>에서 나오므로.. 운영규모가 큰 절의 주지일수록 <경제적 압박>은 더 견디기 힘들다..
모조록 간단하다.. <불량품>은 구매하지 말라!! 그게 소위 <시장 원리> 아니던가?? 소위 종교장사 안되어 파산하면, 다시 재가자로 다들 돌아갈 일이다..
비구승가가 엄격해지면 결국 절집에 남아 있을 주지들 별로 없다!!
재가자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오늘 재가자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정법에 입각한 <양질의 법문과 실수행의 지도>이지 않던가?? 따라서 법문/수행 등의 지도는 <재가자의 요청>에 따라 비구들이 직접 재가단체/수행단체 등을 찾아가서 하면 되는 일이다..
그리하여 만약 비구승가가 <지적/윤리적/수행적 권위>를 확보하게만 된다면, 그 어떤 재가불교단체도 소위 승가를 향한 <세속화된 전횡>을 부릴 순 없다..
왜?? 일부 주지들이 언급하는 <재가자보다 소위 스님들이 삼보정재(공유물!)를 더 아낀다는 저 엉뚱한 수사학>은 바로 저 <바른 권위의 부재에 기인한 변명>일 따름이다..
예컨대 그 어떤 <재가자들이 직접 운영하는 수행/포교단체들>(소위 대처승 운영의 개인사찰도 결국 재자자일 따름이다)도 그 <권위를 갖춘 비구승가>의 <복발>(불인정!) 앞에서는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재가자가 운영하고, 출가자가 감사하고
만일 예컨대 조계종 등 비구종단에 등록된 재가자 직영의 포교단체의 경우, 그 <인사권 및 감사권>(공공화된 분담금 납부 등)을 비구승가가 행사한다면, 그 <부정과 비리>는 충분히 일정범위 내에서 통제할 수 있다..
물론 사람 사는 일이 어디 그리 단순하랴만.. 결국 그 포교단체 또한 재가자들의 자발적/경제적 보시(협동조합적 운영방식을 권유한다!)에 의존하므로!!
설혹 그 언론/방송/포교단체 등의 재가 대표자 혹은 재단이사장 등이 <윤리적 사치/횡령/물의> 등을 빚는다면, 과감하게 비구승가가 그 <인사권>(호계갈마 등)을 행사하고 그 <감사자료>(전문기관 의뢰!) 등을 통해 그 경제적 보시 등을 신도들에게 거부할 것을 호소한다면, 그 어떤 재가운영자들이 견딜 수 있으랴??
공유화된 산중 <<수도원>> 시스템으로 돌아가야
정법에 입각한 여법한 승가를 구현해야
그렇다.. 결국 한국불교의 문제는 그 <외적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비구승가가 <바른 권위(정법에 입각한 승가/여법승가)를 확보되지 못한 것>에 주요 원인이 있는 것이다.. 나머지는 다 그 <부차적> 산물이다..
출가비구의 숫자는 결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숫자가 적을수록 더 권위의 확보는 용이한 것이다..
암튼 말이 길어지는데, 이만 줄이자.. 단지 예서는 그 <실마리>만 던진 셈이다.. 답은 이미 문제 속에 있다..
종내 출가 비구승가는 일단 <원칙적으로> 소위 공유화된 산중(숲속?) <<수도원>> 시스템으로 반드시 돌아가야만 한다!!
참으로 구차하다.. 모쪼록 삼가 합장!!
( 한 알의 불씨~~)
한국불교의 자기정체성 제고.docx 한국불교의 자기정체성 제고.pdf
장문의 댓글은 ‘한 알의 불씨~~’라는 필명을 가진 사람이 작성한 것이다. 글에서 편의상 문단을 나누고 소제목을 붙였다.
불량품은 구매하지 않듯이
댓글을 쓴 이는 주지불교의 현실에 대하여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오로지 재산을 형성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듯한 주지불교, 재산관리인으로서의 불교에 대하여 “사실상 한국불교의 승가가 재가화 되었다”고 하였는데, 거기에다 숨겨 놓은 처자식이 있다면 ‘너나 나나 똑 같은 재가자’라는 것이다. 이런 주지불교의 현실에서 그 어떤 고결한 불교가 이 땅에 들어와도 얼마가지 못하여 현재의 시스템에 동화되어 버리고 말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천주교 모델’을 따르자고 주장한다. 현재 한국불교는 ‘개독모델’을 따르고 있는데, 이를 폐기 하고 천주교의 롤 모델을 따르자는 것이다. 그래서 투명하고 공개적인 시스템을 만들자고 한다.
이는 재산관리는 재가자에게 하고, 승가는 감사를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출가자는 한 곳에 모여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하며 출가자들은 직접 재가단체나 수행단체를 찾아 다니며 정법의 법문과 수행을 지도해야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문화재관리도 국가에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하였을 경우 절집에 남아 있을 주지는 별로 없을 것이라 한다. 이제까지 반승반속의 삶을 살아갔던 주지들이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걸어 내려 갈 것이라 한다.
그렇게 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재가자 역할이 중요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모든 보시금은 재가자의 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량품은 구매하지 않듯이 반승반속회된 주지불교에 대하여 공양을 거부하면, 결국 종교장사가 안되어 파산되기 때문에 주지불교인들은 다시 재가자의 삶으로 돌아 갈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테라와다 불교의 롤 모델
현재 한국불교에서는 자정과 쇄신결사추진본부에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종교평화선언 발표를 추진하고 1000일 기도를 한다고 하지만 주지불교시스템이 변하지 않는 한 크게 바뀔 것은 없을 것이다.
승과 속의 역할이 분리 되지 않는 한 한국불교는 은처의혹 등에 관한 이야기는 끊임없이 제기 될 것임에 틀림 없다.
이럴 때 테라와다 불교의 모델은 매우 신선하다. 테라와다 불교에 사원운용방침이 있는데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재가 신자가 사원을 만든다.(출가 비구는 관계하지 않는다) 둘째, 재가 신자가 보수나 유지, 세금 등을 포함한 모든 관리 운영을 담당한다.(출가 비구는 관계하지 않는다) 셋째, 사원의 건립 후에 사방 상가에 보시한다.
(아짠 진용 빤냐와로, 까티나 가사 법요식)
재가자가 출가자에게 보시하는 것은 4가지 생활필수품이고 나머지는 모두 승가에 보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출가자는 소유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되었을 경우 한국불교에서 보는 것과 같은 ‘주지불교’나 ‘은처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이는 천주교 롤 모델 보다 더 바람직 하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부처님 당시부터 아름다운 전통이 있었다.
2012-02-18 진흙속의연꽃 |
출처: 이 고뇌의 강을 건너 원문보기 글쓴이: 진흙속의연꽃
첫댓글 "주지불교" "은처불교" "애처불교"......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 관세음보살마하살!_()_
나무아미타불_()_
스님이 애첩이 있든... 애인이 두던......왜 신경쓰는데......나무 관세음보살!_()_
글을 쭉~ ~ ~ ~읽어보니 ㅡㅡㅡ마음이와닫습니다이렇거되면 속 많이시끄럽워지겠죠_()_ _()_ _()_
오래된 불자야 상관없지만 대외적인 불교의 이미지는 이미 땅에 떨어져 새내기불자나 신규신도에게는 악영향이 우려됩니다. 이래도 근본적인 개혁이 없으면 청정승가는 무너지게 마련이죠. _()__()__()_
청화큰스님..!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