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펠로폰네소스 전쟁 하면 아테네인과 멜로스인의 대담에서 나타나는 패권적 민주주의 제국이란 형용모순과, 아르기누사이 해전과 장군들의 재판에서 드러나는 중우정치의 폐단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도널드 케이건의 책을 보면서 아테네 민주정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많이 걷어낼 수 있었습니다.
멜로스 공격은 분명 아테네의 무자비한 폭력이었만, 이미 과거의 '규칙이 지배하는' 전쟁의 양상이 바뀐 상황에서 아테네의 행위를 스파르타 등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그것보다 강하게 비판하는 것은 균형을 잃은 평가입니다. 더구나 페리클레스의 전략이 역병과 구조적 한계로 실패하면서 아테네 역시 제국 구성원들의 반역을 억제하기 위해선 무력이 필요하다고 느낄 수 밖에 없었기도 했지요. 물론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제국주의의 추악함은 분명 경계해야하겠습니다만...
시칠리아의 참담한 실패 역시 자신의 명예와 위신, 영향력에 집착해 판단을 그르친 니키아스에게 책임을 우선적으로 물어야 합니다. 정치가가 일반 시민에게 잘못된 판단 재료를 제공한 것, 예컨대 자신은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곤 하지만 시칠리아의 국력을 과대평가해 단순 구원군으로 갈 아테네 원정군 규모를 키운 것, 시라쿠사 공성 실패 후 철퇴해야할 상황에서 복점을 치며 철퇴를 미룬 것 등이 있다면 이건 시민을 속인 정치가의 책임이 더 크지 민주정이란 정체의 문제는 아닐 겁니다.
아르기누사이 해전 이후의 재판은 민주정의 실패로 오늘날까지 잘근잘근 씹히지만 이런 류의 감정에 휩쓸린 판단착오는 민주정 뿐만 아니라 군주정, 과두정 등 정체에 무관하게 흔히 범하는 문제지, 민주정만의 유별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아르기누사이 해전을 가능케한 아테네 민주정의 저력을 바라보는 것이 보다 중요하겠죠. 그리스의 자유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도 승리를 위해 페르시아의 자금까지 끌어들인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상대로 30여년을 싸워오며 수없이 털리면서도 몇번씩 해군력을 재건한건 민주정을 수호하기 위해 사재를 털고, 신전의 금박을 벗겨내고, 계층에 관계없이 일선의 중장보병으로, 선원으로 복무하며 조국에 헌신한 아테네의 일반 시민들의 애국심이었고, 이런 애국심의 근저에는 시민이 정치의 주인인 민주정에 대한 자긍심이 깔려있었습니다. 아테네 시민들은 그들의 정체가 사랑해마지않는 민주정이었기에 피해를 감수할 수 있었던거죠.
여튼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보며 아테네, 나아가 민주정의 저력을 새삼 느끼게 됐습니다. 얼마전 관람한 '변호인'에서 차동영 경감의 "빨갱이 놀음 하지 말고 애국, 국가를 위해 뭘 할지 생각해보라"는 궤변에 대해 아테네 시민들이 뭐라 답할지 족히 상상이 갑니다.
시민의 충성을 강요하기 전에 시민이 '사랑할만한' 국가가 되라고 말입니다.
첫댓글 아테네는 진정 스파르타보다 나은 국가
스파르타는 한국군대를 태어날때부터 평생 죽을때까지 경험하는 나라
@명일 저시대에는 스파르타보다는 아테네가 몇배는 나은 나라..스파르타가 북한이라면 우리나라는 아테네.. 머 북한이 스파르타만큼 군사력이 강하지도 않지만.
@명일 병영국가화, 학원의 스파르타식 교육이 대표적이죠. 정작 그런 스파르타의 아고게가 나중에 로마를 위시한 문명국들의 조롱거리가 됐다는건 아는지 모르는지
@바실리우스 2세 동감입니다.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만든 목적자체가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처럼 '우리도 제국 해보자'가 아니라 라코니아 영내의 헤일로타이 반란을 억제하는데 주변국의 힘을 빌리기 위함이었으니까요.
끊임없는 내부 투쟁을 경계하고, 이런 대립이 병영국가화를 부추기는 악순환의 스파르타와, 정치적으로는 부침이 있을지언정 안정이 유지되는 아테네는 격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우에스기 겐신 펠로폰네스 전쟁이 끝나고 아테네의 헤게모니를 스파르타가 차지하게 된 다음에 나타나는 모습들을 보면 스파르타의 청렴, 근검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를 확인할 수 있죠. 리쿠르코스의 정신도 넓은 제국에서 밀려오는 부에 파묻혀버렸으니까요. 나중에 몰락하고서야 스파르타도 그때 그시절 정신으로 돌아가보려 했지만 실패했구요.
단순히 청렴, 근검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부를 분배하고 불평등을 억제할 수 있는 정치체제가 중요하겠죠.
@우에스기 겐신 사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승리로 스파르타 제국이 형성되기 전에도 스파르타는 외국으로 물품 많이 팔아먹는 부자동네였죠. 그걸 공동식사 등으로 내부적으로만 어떻게 커버하는 것처럼 보이긴 하는데, 그 공동식사를 위한 식료품을 대지 못하면 바로 신분하락입니다. 이미 전쟁 전에도 스파르타의 계층분화와 부의 집중은 일어나고 있었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이걸 어디까지나 가속화했을 뿐이죠.
@bookmark 스파르타는 영화에서는 멋있게 보일지는 몰라도..(페르시아 제국한테 개길때에는) 현실은 시궁창..
@리블루 좀 다른 이야기지만, 흔히들 쓰임에도 불구하고, '스파르타식 학원'이라는 건 모순어법의 극치인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스파르타식 아카데미아라(...)
@바실리우스 2세 하지만 실제 역사상으로는 페르시아를 들볶아대는것도 스파르타보다 아테네가 압도적으로 대단했다는게 함정이죠(...)
@푸른숲 문제는 영화가 스파르타를 너무 돋보이게 했죠.예 300
@푸른숲 으잌ㅋㅋㅋㅋ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이야말로 공주님이 쓸법한 창조어법ㅋㅋㅋ
아테네에 민주정이 스파르타보단 대외적인 관계면이나 사상적 기반으로써는 분명히 우위에 있었던 것이 맞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유능한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 때에만 가능한거 같습니다.펠리클레스 사후에 아테네가 인구감소도 중요한 요인이지만 간과해선 안되는 부분이 유능한 지도력을 갖춘 사람의 부재가 결정적인 패인였던거 같습니다.니키아스나 알키비아데스나 뛰어난 사람은 맞지만 아테네 전체를 일관되게 조율할 능력도 부족하고 거기다 알키비아데스 인격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았습니다.(소크라테스는 뭘보고 알키비아데스를 구해줬는지 아이러니닙다)
아테네 민주정이 말 그대로 중우정치로 흐를수 밖에 없는 구조적인 한계를 안고 있기 때문에 인물에 부재는 곧 민주정의 혼란으로 흐를수 있는 취약한 요소가 있는데 펠레폰네소스전쟁에서 모든 부분이 맞물려 일어난 대참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대외적으로도 동맹국에게 너무나 많은 착취와 민주정의 강요가 튼튼한 그들에 친구들을 적으로 만든 부분도 역시 펠리클레스정도에 지도력이 있는 사람들이 해결할 수 있는거지...(제가 아테네 너무 부정적으로 썼나요)
@백운청산 그건 좀 반박의 여지가 있습니다. 어차피 뻘짓을 해댄 건 스파르타나 아테네나 그게 그거거든요;; 스파르타의 과두정 역시 그 자체의 약점으로 인한 삽을 많이들 펐습니다. 리산드로스 해임이라던가, 페르시아와의 불필요한 긴장관계라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파르타가 승리한 건, 결국 페르시아가 그 삽질들을 덮어줄 만큼의 백업을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당장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했으며 그리스의 패권을 쥐었다고 자처하자, 페르시아는 스파르타에 대한 지원을 끊어버렸고, 아테네에 약간의 호의를 주는 것만으로도 파랄로스 호와 함대가 아테네로 돌아오며 민주정을 되찾죠. 그리고 곧바로 코린트 전쟁입니다
@푸른숲 뻘짓을 했다거나 지도자를 해임하거나 임명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게 아니라 아테네에 민주정에 취약성에 대해 말을 한겁니다.소크라테스가 많은 전투에도 참여하고 직접 펠레폰네소스젼쟁에서 패한 후 30인위원회 후 아테네 민주정으로 복귀를 포함해서 죽을 때 아테네 민주정을 중우정치라고 인정을 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말을 한겁니다.오해하지 말아주세요
아테네 중우정치설은 한참 전 학설이라 요즘은 많이 비판받고 있는데요. 오히려 아테네 민주정은 페리클레스 이후에도 상당히 효율적으로 굴러갔다는 것이 최근의 중론입니다.
@백운청산 윌리엄 포레스트 <그리스 민주정의 탄생과 발전>, 도널드 케이건 <투퀴디데스, 역사를 다시 쓰다>를 한번 참고해보시면 보다 이해가 잘 되실겁니다.
@백운청산 소크라테스야 장군들의 재판에서 마침 프로스타네스를 맡으면서 민회와 대립했다보니 민주정에 큰 실망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아테네 민주정은 현대의 그것과는 달리 언론, 사법부 등의 분리된 전문가 집단이 없다보니 민회의 결정을 견제나 보완하기 어려웠던 약점이 있지 않았나 합니다. 그럼에도 나름 잘 굴러갔다는게 대단하달까요. 결국 정치가들의 문제이지 아테네 시민들의 문제는 아니었죠.
@mr.snow 오 알겠습니다.제가 편견때문에 그랬을수도 있으니까 한번 찾아보고 읽어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아테네 시민중에 그것도 수백명 추려서 그들이 현재와 같은 시스템이 작동하는 민주정이 아닌 목소리크고 나름대로 호소력이 짙은 사람(정신적으로 정상이 아닌 사람)이 그런 경우엔 더 잘먹히기에 제가 판단을 단순하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리블루 감사합니다.예 그 견해에 저도 개인적으론 동의하지만 민주정에 최대 강점이 대화와 타협이라는 부분일겁니다.극단의 상황에서 대화와 타협을 할 시간이 없을 경우 그럴때 지도력이 있는 사람이 실행한 후에 사후 재가를 받는등에 결과로 가야하는데 화급을 다투는 상황에서 대화와 타협이란 부분에서 문제가 생길때 그런 경우를 포함할 경우에 지도력이 탁월한 사람이 존재 유무가 펠레폰네소스전쟁같은 경우엔 필요한 경우일거 같습니다.그들에 민주정을 부정하는게 아니고 그 당시 민주정을 현재에 규칙과 규범으로 판단해보면 평화시엔 문제가 없지만 공황적 상황이 발생할 경우엔 취약성에 노출될 수 있는 부분에 관해서 얘기한겁니다.
@백운청산 '전시지도자'말씀이시군요. 견해는 많이 갈리겠지만 전시 등 혼란스러운 시기에는 카리스마적인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북전쟁기 링컨이나 2차 세계대전의 루즈벨트, 처칠이 그 예겠죠. 물론 대화와 타협, 절차적 정당성을 통해 선출된 지도자라는 전제가 깔려야겠지만요.
아테네의 경우 페리클레스 사후 클레온이나 데모스테네스가 이런 지도자가 될 수 있었겠지만 둘다 전사해버려서...이렇게 보면 전근대시대에 비해 오늘날 정치 발전의 대표적 예는 정치인과 장군의 역할이 분리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안정적으로 국가를 이끌어야할 지도자가 제일먼저 황천길로 가버리면 정치적 안정이 담보되지 않으니까요.
@백운청산 그러나 또 뒤집어서 보면 이렇게 최고지도자가 전선, 그것도 팔랑크스 라인의 일개 중장보병으로 구르기 때문에 아테네 시민들이 그들의 지도력을 '민주적'으로 인정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특히 오늘날 소위 사회 지도층의 병역 문제와 견줘보면...에휴
@리블루 사회 지도층의 병역 문제와 견줘보면...에휴 ㅜㅜ 동감합니다.
@백운청산 아테네 민주정의 주도적인 인물들이 정신적으로 정상이 아니었다는 증거는 그닥 없습니다. 아테네 중우정에 대한 거의 유일한 사료가 투퀴디데스인데, 제가 소개한 책에도 나오듯이 투퀴디데스 자신의 편견의 짙게 들어간 견해입니다.
@mr.snow 평시엔 아테네민주정도 문제가 없어보입니다.전시 특히 스파르타와 전면전이라는 국운이 걸린 상황 그리고 페스트로 펠리클레스 이하 지도층과 많은 시민들이 죽은 상황..이 상황에서서 스파르타와 전쟁을 감내하기 위해선 새로운 사람들이 나서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그 당시 사회지도층이란게 소피스트들에세 개인적인 사사을 받을 수 있는 경제적능력이 있어야 하잖습니까.그런 특별한 상황에선 정상적인 사람보다는 특별나게 말빨이 좋거나 시민들을 모을수 있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그런상황에선 균형잡힌 사람보단 특별히 비정상에 가까운 사람들이 권력을잡을 가능성)에 대해 써본겁니다.아테네 민주정에 참여자들이 비정상이란게 아니구요
@백운청산 추측이 아니라 명확한 증거를 제시해주시길 바랍니다. 아테네 전시 지도자였던 페리클레스도, 그리고 투퀴디데스에 의해 선동정치가라는 오명을 뒤집어썼지만, 클레온도 딱히 비정상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백운청산 당시 아테네 지도자 중 특별히 비정상적인 사람이 누군지 이야기해 보시지요.
클레온이 선동가라고 욕을 디립다 얻어먹었지만 정작 아테네는 클레온이 정치를 주도할때 승리 직전까지 갔습니다.
@bookmark 감사합니다.제 개인적인 생각였습니다.
시라쿠사의 재난을 극복한 아르기누사이 해전뿐만이 아니라, 페리클레스의 대전략을 좌초시키고 그를 몰락, 죽음에 이끌며 아테네의 인적 자원을 고갈시친 펠로폰네소스 전쟁 초기의 대역병도 아테네는 극복했죠.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의 페리클레스 등의 위대한 개인의 역할은 많이 조명받고 있지만, 우주방어를 내세운 페리클레스가 해내지 못한 스파르타의 굴복을 (일시적으로나마) 페리클레스가 없는, 그리고 엄청난 타격을 입은 아테네는 더욱 공격적인 전략으로 스팍테리아 전투에서 승리하여 이뤄냅니다.
게다가 사실 스파르타가 승자가 된 건, 단독으로 페르시아를 들볶았던 아테네에 질린 페르시아가 쇼미더머니를 시전해서고요;;
페리클레스의 전략은 시대를 초월한 것이었지만 역시 너무 앞선 게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고대에 금수령을 내릴 생각을 할 국가도, 그걸 실행할 능력을 가진 국가도 아테네 정도가 유일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메가라의 경제가 작살나긴 했지만 이건 긴 전쟁으로 국내가 황폐화된 요인이 더 크니...
그리고 페리클레스 사후 압권은 투키디데스나 아리스토파네스 등 일단의 귀족정 옹호집단이 '입전략가'로 씹던 클레온이 대박을 친 거겠죠.
"스파르타 완전시민 포박, 되는데요?"ㅋㅋㅋ
아테네가 대단한 건 기존 펠로폰네소스 전쟁 전의 불안정한 모습의 민주정에 스파르타가 가진 질서와 정치적 안정, 선민의식을 괴뢰국가화 된 세월동안 받아들이고 민주주의를 보다 세련되게 만들었다는 점이죠. 애초에 아테네의 문화적 자질의 그룻과 스파르타의 문화적 자질의 그릇은 비교 불가였습니다. 스파르타가 가진 문화의 특징상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기존의 체제가 가지지 못한 점을 개선해 나갈 수 있는 적응력이 아주 많이 떨어졌어요. 실질적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결과는 스파르타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아테네는 기존과 같은 그리스의 맹주 자리는 차지하지 못하지만 정치&문화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어요.
결과적으로 역사에 남긴 것을 돌이켜보면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격차는 압도적이라는 점에서 공감합니다. 민주정의 특징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아테네의 적응력, 흡입력은 스파르타의 경직성과는 비교를 불허했죠.
뭐, 한국 한정으로 아테네보다는 스파르타가 강세지만요(...)
@리블루 뭐 스파르타의 폐쇄성도 조금 과장된 측면이 있어서, 당시 기준으로 그렇게 특이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더군요. 오히려 아테네가 당시 기준으로 유난히 앞서나갔던거죠.
좀 과장된 측면도 있지만, 다른 도시국가는 전부 다 받아들인 군사적인 기술과 전략조차 받아들이지 않고 기존의 자기들 식의 방진대형이면 다 해결될 거라고 생각한 게 유머죠.
결과는 티레한테 몰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