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1년도의 디라키움 전투. 알렉시우스 콤네누스는 세 방향으로부터 노르만 본영을 공격할 계획이었지만, 로베르토 기스카르는 자기 부대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그의 뒤에 있는 다리를 부수면서 평원에서 비잔티움 주력을 상대하기 위해 진군했다.
하지만 로베르토 기스카르는 이것이 알렉시우스의 우회하는 기동을 헛되이 했음은 인지하지 못했다. 노르만측은 바랑기에게 직면했을 때 측면을 노출했지만, 바랑기는 지원해줄 그들의 주력에서 너무 멀리 진군했었을 때 노르만 보병에게 격퇴당했다.
많은 바랑기 군인들이 성 미카엘 교회에 피신했고 노르만인들은 그곳에 불을 질렀다. 비잔티움의 중심은 한 힘겨운 싸움 후 틈을 보였고, 붕괴해서 궤주했다.
1,017년 경의 바실리우스 2세의 메놀로기움에서 나오는 다윗과 골리앗. ‘골리앗’은 장교의 장식띠에 프테루게스들과 술이 달린 보통의 러멜러 코르슬릿을 입은, 11세기 중보병의 좋은 예시다.
그의 투구와 언덕 뒤에 운집한 가죽 갑옷 입은 ‘이스라엘인들’의 투구는, 이 시기 즈음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지는 솥형 투구를 연상하게 하는, 새로운 종류의 테두리를 하고 있다.
다윗은 하층민의 복장을 하고 있으며 슬링으로만 무장했고, 이는 전장의 군인들을 따라다니는 하인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나타낸 건지도 모른다.(B1 참조)
비슷한 스쿠타토스들. 위의 셋은 10세기의 손궤가, 다른 아래의 둘은 그보다 뒷시기의 삽화가 출처다. 10세기의 인물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같은 장비를 착용했다.(예를 들면,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긴 클리바니온-소매는 있거나 없거나-과, 애번테일이 있거나 없는 투구)
가장 마지막 인물은 마드리드 스킬리치스가 출처며, 그의 갑옷은 10세기의 그것과 실질적으로 다른 부분이 거의 없다. 1,110년 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마지막 인물의 방패는 비잔티움 고유의 ‘삼각 구석이 있는’혹은 카이트 실드다. 그는 일종의 누비 코르슬릿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만지케르트는 전통적인 비잔티움 군대의 종말을 목도했다. 타그마 연대 대부분은 전장에서 파괴되었고 살아남은 자는 직후에 현장에서 사라졌으며, 그들처럼 정원 미달로 병력이 부족했던 동부 테마들과 마찬가지로 절멸되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사라지면서, 승리를 거둔 투르크인들이 아나톨리아의 많은 부분에 곧 갑자기 퍼져 침략하게 되었다. 투르크인들 다수는 로마누스의 직속 후임자들인 미카일 7세와 니케포루스 3세에 의해, 근시안적으로 용병으로서 끌어들여졌다.
동부 테마 군대들의 파괴가 실질적으로 제국을 무방비 상태로 만든 건 사실이었고, 새로운 중앙군이 곧 수도 안에서 나타나기 시작하긴 했지만 제국의 노출된 동부 변경 지역들에 대한 책임은 노르만족, 투르크족, 쿠만족 그리고 페쩨네그족으로 주로 구성된 점점 늘어나는 용병 연대들에게 크게 넘어갔다.
테마 부대들의 광범위한 실종과 그에 따라 제국의 용병들에 대한 의존이 심화되는 것이 만지케르트의 군사적 이야기가 주는 주된 결과였고, 그것이 제국의 나머지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감퇴되지 않는 경향을 고정시켰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현찰은 모자랐고 제국의 국고는 소진되었으며, 매우 오래 전부터 많은 군인들은 토박이든 용병이든, 프로니에-Pronoiai(단수형은 프로니아)라 불리는 새로운 땅으로 급여를 받아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는 10세기부터 일찍이 존재했지만 군역과 정규로 결합된 것은 오직 포스트 만지케르트 시기부터였다. 테마의 불하 토지 지주들과는 달리, 스트라티오티스나 프로니아리오스로 불린 프로니아의 지주는 현금 그리고/혹은 현물의 형태로 추가의 지불을 받으면서 추가적인 세금 경감의 혜택도 받았고, 때문에 옛 테마 군인보다 재정 상태는 상당히 좋았다-하지만 프로니에는 최소한 13세기까진 세습되지 않았다.
많은 비잔티움의 귀족들도 당시 기병으로의 군역을 대가로 프로니에를 받고 있었으며, 아마 미리 결정한 규모의 개인 종자들을 대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프로니아 제도에 있는 진정 불리한 점은 제국이 세입의 상실로 큰 금액 부담을 진다는 점이었으며, 이는 다시 실질적으로, 제국이 유지할 수 있는 군인의 수가 꾸준히 줄어듬을 뜻했다.
만지케르트 직후 시대의 초창기에 실제로 개혁된 군대의 핵심은 옛 타그마들인 스콜라이, 엑스쿠비티, 이카나티 그리고 에테리아의 잔존 군인들을 포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모두 이따금씩 11세기를 마감하는 수십 년 동안 이따금씩 기록되지만, 알렉시우스 콤네누스의 긴 재위기의 끝(1,118년도)이 되기 전에 무로 사라져갔던 것으로 여겨진다.
니케포루스 3세가 프리지아의 코마테니 연대와 아다나티 모두를 설치하면서, 처음으로 중앙군을 재조직하려는 일치된 시도를 했던 것 같다-비록 후자는 그가 미카일 7세의 로고데티스였을 때 했긴 했지만.
후자는 동부 테마들의 잔존 군인들 중에서 육성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며, 브리엔니오스에 따르면 수효는 만 명이었다고 한다. 그는 처음에 아다나티란 칭호를 그 부대의 장교들에게만 적용했지만, 곧 그 말은 해당 연대 전체를 이르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알렉시우스 콤네누스는 장교들의 고아들 중에서 모집하여 약 2,000명 가량의 인원이 있었던, 또 다른 연대인 아콘토풀리-Sons of Leaders-를 몸소 육성했다. 셋 모두 기병 부대였으며, 아마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되었을 베스티아리테-Vestiaritae, Soldiers of the Emperer's Household-도 있었다.
베스티아리테는 앵글로 색슨족으로 구성된 바랑기와 두 새로운 투르크인 부대인 엘리트 바르다리오테-Vardariotai(바르다르 계곡과 오크리다에 사는 투르크족 기독교인. 아마 우쩨족), 투르코풀리-Sons of Turks(아마 비잔티움이 고용한 투르크인 용병들의 후손으로 구성되었던 것 같고, 일부는 기독교도였거나 모친이 비잔티움인이었다.)가 한데 모여 이뤄졌으며, 알렉시우스의 재위기 남은 기간 동안 실질적으로 중앙군을 제공했다.
이 부대들 중 여럿은 로베르토 기스카르의 노르만족과 1,081년의 디라키움 전투에서 싸웠으며, 이 해는 알렉시우스가 제위에 오른 바로 그 해였다. 하지만 이때의 그의 군대가 토착 비잔티움인 부대들이 드문드문 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은 가운데 용병들과 동맹군들을 어설프게 섞은 잡군이었음은 분명했다.
바랑기가 처음에 기스카르의 이탈리아 동맹군들에게 시련을 주긴 했지만, 수 개 국어의 각종 집단들의 모임이 하나가 되지 못할, 붕괴의 때가 오는 것은 거의 필연적이었다.
바랑기는 진격을 빨리 한 탓에 지쳐버렸고 본대와 접촉을 잃었으며, 로베르토의 보병들에게 전멸당했다. 바르다리오테는 도망쳤고 비잔티움의 세르비아 동맹군은 화살 하나 날리는 일 없이 후퇴했다. 그것은, 알렉시우스 자신도 가까스로 빠져나왔던 재앙이었다.
알렉시우스가 이 패주로부터 재건했던 군대는, 그의 가문과 친구들로부터 거둬들인 현찰과 빼앗은 교회의 소유물들에서만 급여를 지불 받을 수 있었다.
이는 진정 비잔티움의 명운의 최저점이었으며, 알렉시우스는 그의 재위 후반부에 여러 주목할만한 승리들을 일궈냈지만(1,091년도에 레부니온에서 페쩨네그족에게, 1,116년도에 필로멜리온에서 셀주크족에게), 그의 후원으로 일어났던 군사적 부활은 오직 짧은 지속 시간 동안 뿐이었다.
군대는 그의 후임자들인 요안네스 2세와 마누엘의 휘하에서 주체를 유지했지만 후자의 재위기 동안 상당한 프랑스의 영향에 압도되었고, 세계 수퍼 파워로서의 제국의 위신을 영원히 파괴했으며 비잔티움의 군사적 패권의 끝을 극적으로 표시했던 만지케르트의 재앙에서 결코 진정으로 회복되지 않았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마법의 활님..아 제국이 서서히 쇠락해가는구나
게임 측면에서 보면 이 시점이 바로 M2TW 시작 시점이죠. archontopoulai나 vardariotai 같은 유닛들은 바닐라에도 나오구요.
예 ss모드도 여기서부터 시작하죠..
아콘토풀레, 바르다리오테.
아콘토풀로라이 혹은 바르다리오타이라 읽는 분들 계시는데 이건 코이네입니다만 당대에는 그렇게 부르지 않았습니다. 아콘토풀레, 바르다이오테가 맞습니다.
다만 이 글에선 맨앳암스가 아콘토풀로이라고 전자는 단수라 표기해서 아콘토풀리라 썼습니다.
아....눈물좀닦고 ㅠ 만지케르트여....비잔티움군을 돌려다오ㅠ
그래도 제국의 끝은 추하지 않았다.
ㅠㅠ
알렉시우스 1세 초반기는.. 포스트 만지케르트보단 팔레올로구스 치세의 프로토타입이라고 봅니다. 미하일 8세 치세와 강역, 환경이 비슷하기도 하구요. 르네그루쎄 표현처럼 유럽엔 우상숭배 투르크인 아시아엔 무슬림 투르크인들이 제국을 애워싸는 모습이 가히 1453년에 비견할정도로 표현하니 ㅡㅡ;; 그나마 유럽쪽이 허접해서 다행이지 아센왕조가 저때 일어났다면 알렉시우스라도 엄청 고전하거나 이겨도 1320년 이후 파탄난 것과 유사한 길을 걷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