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rliner Philharmoniker
1878년에 그당시 지역에서 유명세를 타던 지휘자 Benjamin Bilse가 베를린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Bilse-Kapelle를 창단한다. 당시 보기드문 연주전문악단으로
화제를 모았으나 유명세를 타면서 빌제가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연주 횟수를
무리하게 늘리는 등으로 단원들의 불만이 높아져 결국 1882년에 악단 내부에서
심각한 분열이 발생하고 이때 탈퇴한 단원들이 주축이 되어 새로운 악단을 결성한다.
창단시절의 베를린 필
이것이 베를린 필의 본격적인 창단 시점으로 굳혀진다.
-1882년 5월1일을 독일에서는 창단일이라고 하고 5월5일을 첫 창단공연으로 보고 있다. -
그러나 새로 출발한 악단도 특별한 재정후원이 없어서 대중음악회나 성악가 공연의 반주
지방공연등을 하면서 어려움이 있었다. 수완이 좋은 Konzertagent (공연매니저)
Hermann Wolff가 모든 재정을 맡고 악단의 이름도 Berliner Philharmonisches Orchestra로
바꾼다. 그리고 필하모니라고 명해서 브랜너의 지휘로 1982년 10월17일 연주회를 한다.
17. Oktober 1882 Erstes Konzert als ≫Philharmonisches Orchester Ludwig von Brenner (1882–1887)
1883년 2월 18일에는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을 클라라 슈만과 협연을 하고
1884년 1월 28일에는 브라함스가 지휘하고 그의 교향곡 3번을 연주,
1886년 1월22일 Camille Saint-Saens이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4번을 연주,
피아니스트 안톤 루빈스타인,막스 부르흐등과 연주,
1887년 10월 21일 제2대 상임지휘자인 Hans von Buelow가 상임지휘자로 첫 연주를 한다.
그는 주로 고전곡들과 브라함스 작품을 집중적으로 연주하고 공개 리허설을 도입하는
등 적극적인 변화를 추구한다.
ㅅ
1888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차이콥스키가 지휘를 하고 1889년에는 그리그가
자신의 곡 Peer Gynt를 직접 지휘한다. 1892년 뷜로가 건강이 악화되어 물러난뒤
구스타프 말러,리하르트 슈트라우스등의 객원 지휘로 연주를 한다
1895년 아르투르 니키슈가 제 2대 상임 지휘자로 취임한다. 니키슈는 뷜로가 다루기
꺼려하던 브루크너의 교향곡이나 차이콥스키등 동구권 작품들을 레파투어에
추가 시키고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최초의 해외 순회 공연을 개최하기도 한다.
recording of Beethoven Fifth, Nikisch 1913 Berlin Philharmonic Arthur Nikisch , die Berliner PhilharmonikerNovember 1913
니키슈는 1922년 타계할 때까지 자리를 지켰고,그의 재임시절 객원지휘자나 솔리스트는
말러,리하르트 슈트라우스,부조니,프릿츠 크라이슬러,아르트로 루빈스타인,마스카니,
시벨리우스,카잘스,라프마니노프,막스 레거,야사 하이페츠가 1912년11살에 나이에
데뷔연주를 하고,1913년에는 처음으로 음원작업을 하고,1914년 베토벤 심포니 5번을
최초로 전곡을 녹음해 음반을 낸다.1913년 부르노 발터가 처음 지휘를 하고
1916년 빌헤름 켐프,조지 쉘,프르츠 벵글러,1920년 클라우디오 아라우,루돌프 제르킨
오토 클렘펠러가 니키슈시절 연주를 한다. 그들의 면모를 보면 음악사가 읽켜진다.
니키슈가 타계한 후 전설적인 메니저 헤르만 볼프의 뒤를 이은 딸 루이제 볼프에 의해
빌헤름 푸르트벵글러가 30대의 나이로 제3대 상임 지휘자로 취임해 화제가 된다.
힌데미트,부조니,프르트벵글러 프르트벵글러 생일날에.
그는 취임후 니키슈의 레파투어를 거의 계승하고 스트라빈스키,라벨,쇤베르그
바르톡,힌데미트등 동시대 작곡가들의 작품들도 적극적으로 소개해 보수적인
음악인들에 논쟁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1차세계대전에 패전국으로 독일은
엄청난 인플레이션과 경제 대공황으로 기존의 자주적 운영 방식을 고수하기가
힘들어져 베를린 시와 독일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지원받고 그 댓가로 일정 횟수의히
연주회를 의무 개최한다.
히틀러가 수상에 취임하면서 나치 정권치하에서는 사실상 국립 관현악단화 되었고,
나치가 개최하는 각종 행사나 군수공장등의 위문 공연을 수행한다.
1934년 힌데미트에 대한 나치의 부당한 탄압에 항의하는 글을 신문에 게재한
프르트벵글러는 지휘자 직에서 사임했으나 이듬해 복귀를 해 전쟁 말기까지 사실상의
상임 지휘자 직책을 계속 수행한다. 전쟁 말기 1945년 1월에 프르트벵글러가 스위스로
망명을 하고 악단원 대부분은 베를린을 탈출해 바덴바덴등 남서독일 방면으로 피신한다.
-프르트벵글러 시절의 객원지휘자와 솔리스트를 보면 앙세르메,에릭 클라이버
1924년에는 이골 스트라빈스키가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을 직접 연주하고,벨라 바르톡
1926년 호로비츠,1927년 첫 영국투어 연주를 하고,1929년 메뉴힌,1930년 토마스 비참,
1931년 나단 밀스타인,1932년 프로코피에프가 자신의 피아노협주곡 3번을 직접 연주하고
오이겐 요쿰,1933년 피에르 몽뛰,레스피기가 자신의 곡 "로마의 소나무"를 지휘하고
1935년 칼 뵘,찌마노프스키가 자신의 피아노곡을 직접 연주하고,1938년 약관의 30세
카라얀이 처음 데뷔 지휘를 라벨의 Daphnis und Chloe포함 브라함스 교향곡 4번을 연주한다.
1939년에는 피에르 풀르니에,1943년 앙세르메와 미켈란젤리가 슈만 피아노 협주곡을 한다.-
종전 직후 생존단원들이 베를린 필의 연주회를 재개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독일내에서
활동하던 중견 지휘자들의 대다수가 연주활동이 금지되어 지휘자 섭외에 어려움을 겪는다.
종전후 첫연주는 레오 보하르트의 지휘로 영화관이었던 티타니아 팔라스트에서
1945년 5월26일 열린다. 그는 임시직 상임 지휘자였고 몇차례의 연주후 영국군 병사의
총기오발 사고로 사망한다. 그뒤를 이어 세르주 첼리비다케가 역시 임시직 상임지휘자로
발탁되 1952년까지 나치시절 연주 금지됬던 유태인 작곡가 말러등의 곡과 미국 러시아
작곡가 작품들을 부활시켜 활발한 연주활동을 한다.
1947년 연주활동이 해금된 푸르트벵글러가 종전 후 첫 연주회를 열고
1952년에 정식으로 상임 지휘자 재취임을 한다. 그러나 그는 작곡 활동을 이유로
연주를 최소화 하고 몇차례의 연주만을 한후 1954년 사망한다.
후임으로 1954년 카라얀이 미국 순회연주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1956년 그가 원하던
종신 상임지휘자의 자격으로 취임한다.
Herbert von Karajan in 1941
카라얀 시절의 베를린필은 세계 오케스트라의 역사적으로 독보적 존제가 된다.
앙상블의 질적인 면이나 오케스트라의 시스템으로나,오케스트라 경영상으로나
모든것이 가장 이상적인 오케스트라의 구조였다.
과거의 오케스트라면 몰라도 현대의 오케스트라에서 다양한 사회적 구조로 인해
장기간 동안 상임지휘를 맡는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결국 그도 말년에 단원들과의 트라블로 인해 많은 정신적이 고통이 있었지만
35년이란 장기 집권에서 그가 음악적으로나 카리스마적으로 지휘자로써
갖추어야할 요소를 충족시키지 못한적은 말년의 몇년 뿐이였다.
그는 다양한 레파투어를 소화하고 음반작업을 통해 세계 음악사에 길이 남을
클래식 음악을 대중화한 절대적인 공이 있다.
이런 모든 부분의 기둥적인 요소는 그가 베를린 필을 아주 단단한 조직으로 만들고
그의 출중한 음악적 사고와, 각종의 크고 작은 실내악 팀을 만들어 오케스트라 연주
뿐만 아니라 실내악을 통한 연주로 앙상블의 질을 극대화 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의 설치로 동베를린에 거주하던 일부 단원들이 합류할 수 없게
되자 자연스럽게 단원들의 세대 교체로 이어진다. 1963년 한스 샤로운이 설계한
새 베를린 필하모닉 홀을 개관한다. 1967년에 그가 주도해서 그의 고향 잘쯔부르그
에서 창설된 잘쯔부르그 부활절 음악제에 오페라 공연도 하게된다.
1969년에 전후 처음 소련에서 공연을 해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참석하에 그의
10번 교향곡을 연주한다. 그는 해외 공연도 활발히 해 유럽 미국과 아시아에서는
일본 한국등 잦은 해외공연도 한다. 1983년 여성 클라리넷주자 사비네 마이어의
입단을 놓고 단원들과 심한 불화를 격었고 공연 수익 분배 문제로도 갈등이 있었다.
결국 1984년 하반기에 모든 음반녹음을 취소함으로 갈등이 극에 달했고 이듬해
첨예한 대립이 다소 가라앉아 음반 녹음활동을 재개했으나 근본적인 해결을 못하다가
1989년 건강상의 이유로 종신 상임지휘자를 사임하고 그해 7월에 그는 서거한다.
그의 사후 로린 마젤과 다니엘 바렌보임이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반대하는 단원들이
너무 많아 이루워 지지않고 단원들의 요구로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임기 7년의
상임지휘자로 취임한다. (미국에 있는 유대계 자본을 앞세워 바렌보임이 베를린 입성을
꿈꾸지만 단원들은 그의 지휘를 탐탁치 않게 여긴다. 갖은 물적 공세의 약속에도 단원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 베를린 필의 인텐단트들은 단원들의 요구에 굴복하고 1989년
10월 8일 단원들의 대표인 첼리스트 크라우스 호이슬러에 의해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전격적으로 상임지휘자에 발탁됬음을 알린다.)
전임자에 비해 7년마다 재계약을 요구하는등 권한에 제한을 두고 상임지휘자로
발탁된 아바도는 각종 이색 기획 공연이나 현대 작품의 적극적인 공연으로
화제를 모았으나 보수적인 베를린 청중들의 반발도 있었다. 그의 취임후
음반 판매가 매우 부진하자 단원들의 수입이 급감하게 되었고 상당수의 단원들이
오케스트라를 떠나 교수직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단원들의
세대교체가 이루어 졌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진행이 된 몇몇 파트에서 많은 문제점이
나타나고 특히 목관파트인 플륫과 클라리넷에서 잘못 조각이 이루어져
그리도 단단했던 베를린필의 목관파트 앙상블이 무너진다.
단원들과 베를린 청중들과의 문제점이 심화되 아바도는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그래서인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암이란 커다란 병을 얻고 치료를 통해 완전히 기를
빼았긴다. 결국 2002년 계약연장을 않겠다는 선언을 하고 상임지휘자에서 물러난다.
그는 물러난 후에 루체른 여름음악제를 전념하고 병마와 싸우면서도 죽기 바로 전까지
혼심을 다해 지휘자로써의 길을 걸었다.
ㅅ
2002년에는 세계의 유수 교향악단들이 새 지휘자를 찾기위해 많은 노력들을 했다.
베를린 필,빈필,런던심포니,시카고 심포니,뉴욕필등 그 뒤를 이어 2004년에는
암스텔담 콘써트게보까지 세계 3대 교향악단들이 새로운 지휘자를 맞이하였다.
그때 베를린 필도 일찌감치 영국의 떠오르는 별 사이먼 래틀과 계약을 하고
절대로 부족한 세계적 지휘자의 수요에서 선점을 해 버린다.
그동안 영국 지휘자들이 음악적인 깊이에서 독일 출신 지휘자에 많이 부족하다는
통념을 깨버린 사이먼 래틀은 영국적인 밝음까지 포용해 베를린필의 칼라를 변모
시키려고 노력한다.그러나 1993년 이후 잘못 조직된 목관파트와 개인적으로는
양질의 테크닉을 가진 새로운 단원들로 새대 교체를 했지만 아직 설익은 앙상블로
과거 카라얀 시대의 어떠한 오케스트라도 넘어 볼수 없는 부동의 선두 자리를
다시 찾을 수 있을런지는 두고 보아야 겠지만 아직까지는 전망이 그리 밝지 못하고 있다.
Principal conductors.
ps.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의 구조를 세밀하게 들여다 보면
기본적인 시스템은 음악적인 부분과 경영적인 부분 그리고 오케스트라와
함께 움직이며 도움을 주는 인원등 철저하게 분리되어 맡은 일을 하고있다.
오늘날 베를린 필이 있기까지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초창기에 베를린 필의
재정을 맡은 Herman Wolff일 것이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베를린 필로 성장을 했을까?
우리나라도 많은 오케스트라들이 있다. 대부분은 지방의 문화적 얼굴로 창단되어
각 지방에 재정적 후원과 그 관리까지도 행정적인 공무원 신분이 담당을 한다.
서울 시향이 법인화 하여 독립을 했지만 거의 모든 재정적 지원은 서울시에 의존한다.
현대의 오케스트라는 세계에서 각나라의 문화적 깊이를 재는 척도로 여겨진다.
이는 오케스트라가 절대적으로 단시간에 경제적인 힘만으로 바로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카타르, 홍콩등에서 물질을 앞세워 그들이 만들어 놓은
그들의 오케스트라는 그들의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전세계에서 꾸어온 연주자들을
앞세운 급조 된것이다. 이같은 오케스트라는 절대 성공할 수없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제대로 된 오케스트라를 갖을 자격은 있어 보인다.
앞서 말한대로 음악적인 자질은 충분치는 않으나 그런대로 나쁘지는 않다.
문제를 양질의 인텐단트이다. 뼈속 깊이 문화를 이해하고 사랑을 통한 재정적
지원을 책임질 수있는 훌륭한 매니져가 우리 문화계에서도 나오기를 바래본다.
franciscopa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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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franciscopai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