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슴이 따뜻해지는 詩] 감을 따 내리며
저렇게 푸른 하늘이 어디에다 가마 걸고
이렇게 붉은 열매를 주저리로 구워 내렸나
아흔 해 이 땅에 살아도 가마터를 나는 몰라.
―정완영(1919-2016)
가을 하늘이 푸르다고 이른 까닭은 그만큼 날씨가 맑고 밝기 때문일 테다. 시인은 다른 시에서는 “하루 한 길씩을 높아가는 가을하늘”이라고도 썼다. 감나무에 매달린 감을 따 내리면서 시인은 감의 잘 익은 빛깔에 감탄하며 마치 숯이나 도자기처럼 가마에 넣어 구워 낸 것만 같다고 노래한다. 불을 땔 때의 붉은 빛과 열기가 잘 익은 감의 빛깔과 서로 어울려 멋스러운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세상의 모든 열매를 구워 내는 어마어마한 가마터가 정말이지 어딘가에 있는 것일까. 나이가 들어서도 가마터를 모른다고 한 것은 우주생명의 살아 움직이는, 신묘한 힘과 변화에 대한 경외의 마음을 드러낸 것이면서 한편으로는 겸사(謙辭)라고 하겠다.
이 시를 읽으니 고향집에서 감을 따던 일이 생각난다. 장대 끝을 벌려 그 틈에 감나무 가지를 끼운 후에 살짝 돌려 꺾어서 땄었다. 감나무 꼭대기의 감은 까치밥으로 남겨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완영 시인은 고향을 소재로 여러 시편을 남겼다. 가령 “고향을 찾아가니 고향은 거기 없고//고향에서 돌아오니 고향은 거기 있고//흑염소 울음소리만 내가 몰고 왔네요”라고 썼다. 선량함과 기지에서 태어난 가편(佳篇)일 테다.
✵백수白水 정완영鄭梡永(1919-2016) 시조 시인은 경북 금릉군에서 출생, 1960년 <국제신보> 신춘문예에 작품 「해바라기」당선,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동시 「골목길 담모롱이」입선, 196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조국祖國」 당선, <현대문학>에「애모愛慕」「강江」「어제 오늘」로 천료되어 등단하였다. 1946년 '시문학詩文學 구락부'를 발족하여 활동하였다. 이호우李鎬雨와 더불어 '영남시조문학회' 창립하였으며, 한국문인협회 시조분과 회장,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장, 부회장을 지낸 바 있다. 금천시문학상(제2회), 가람시조문학상(제1회), 중앙일보 시조대상(제3회), 육당문학상(제5회), 만해시문학상(제2회)을 수상하였으며, 1995년 은관문화훈장 수훈 받았다.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작품으로는 「조국祖國」「분이네 살구나무」「부자상父子像」「바다 앞에서」「배밭머리」「봄 오는 소리」「풀잎과 바람」「호박꽃 바라보며」「물수제비」 등이다. 시조집으로 <세월이 무엇입니까> 등이 있다.
✺조국祖國·정완영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에인사랑
손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 메이면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맺힌 열두 줄은 굽이굽이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이 학처럼만 여위느냐.
✺부자상父子像·정완영
사흘 와 계시다가 말없이 돌아가시는
아버님 모시 두루막 빛바랜 흰 자락이
웬일로 제 가슴 속에 눈물로만 스밉니까.
어스름 짙어 오는 아버님 여일(餘日) 위에
꽃으로 비춰 드릴 제 마음 없사오매,
생각은 무지개 되어 고향길을 덮습니다.
손 내밀면 잡혀질 듯한 어릴 제 시절이온데,
할아버님 닮아 가는 아버님의 모습 뒤에
저 또한 그 날 그 때의 아버님을 닮습니다.
✺바다 앞에서·정완영
아무리 바다가 넓어도
돛배 하나 없어 봐라.
갈매기 불타는 저녁 노을
고깃배 없어 봐라.
그것이 바다겠는가,
물만 가득 사막이지.
아무리 바다가 멀어도
저 항구가 없어 봐라.
흔드는 손 흔드는 깃발
뱃고동이 없어 봐라.
그것이 바다겠는가,
파도뿐인 물굽이지
✺배밭머리·정완영
배밭 머리 무논에서는 개구리들이 울고있다.
개굴 개굴 개구리들이 울고있다.
그소리 배밭에 들어가 하얀 배꽃이 피어난다.
휘파람 휘파람 불며 배밭 머릴 돌아가면
개구리 울음소리도 구름결도 잠깐 멎고
잊었던 옛얘기들이 배꽃들로 피어난다,
✺봄 오는 소리·정완영
별빛도 소곤소곤
상추씨도 소곤소곤
물오른 살구나무
꽃가지도 소곤소곤
밤새 내
내 귀가 가려워
잠이 오지 않습니다.
✺풀잎과 바람·정완영
나는 풀잎이 좋아, 풀잎같은 친구 좋아
바람하고 엉켰다가 풀 줄 아는 풀잎처럼
헤질 때 또 만나자 손 흔드는 친구 좋아.
나는 바람이 좋아, 바람 같은 친구 좋아
풀잎하고 헤졌다가 되찾아온 바람처럼
만나면 얼싸안는 바람같은 친구 좋아
✺호박꽃 바라보며-어머니 생각·정완영
분단장 모른 꽃이, 몸단장도 모른 꽃이
한여름 내도록을 뙤약볕에 타던 꽃이
이 세상 젤 큰 열매 물려주고 갔습니다.
✺물수제비·정완영
우리 마을, 고향 마을 시냇가 자갈밭엔
별보다 고운 자갈이 지천으로 깔렸는데
던지면 도마뱀처럼 물길 찰찰 건너갔지.
공부도 하기 싫고, 노는 것도 시시한 날
나는 냇가로 나가 물수제비 떠먹었지
자갈이 수제비 되어 퐁당퐁당 나를 달랬지.
*물수제비 : 둥글고 얄팍한 돌을 물 위로 튀기어 가게 던졌을 때 그 튀기는 자리마다 생기는 물결 모양.
✺분이네 살구나무·정완영
동네서
젤 작은 집
분이네 오막살이
동네서
젤 큰 나무
분이네 살구나무
밤사이
활짝 펴올라
대궐보다 덩그렇다.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조선일보 2024년 10월 28일(월) 〈가슴이 따뜻해지는 詩(문태준 시인)〉, 《Daum, Naver 지식백과》/ 사진: 이영일 ∙ 고앵자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