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파 까페에 처음 올리는 글입니다.^^)
유럽에서 서쪽 끝에 있는 나라 스페인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터지기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여행을 떠나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관광하러 들리는 곳이었다. 프랑스, 이탈리아와 더불어 사랑받던 여행지가 바로 스페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의 스페인은 관광지로서 사랑받는 곳이지만, 스페인 또한 가슴 아픈 20세기 역사가 있다. 그 역사가 바로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전개되었던 스페인 내전(Spanish Civil War)이다. 스페인 내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유럽에서 발생한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끔찍한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는데, 그것이 바로 게르니카 폭격(Bombing of Guernica)이다.
1930년대 스페인에선 이른바 좌파연합이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았었다. 이를 계기로 1936년 사회당 계통의 노동자총동맹(UGT)과 무정부주의자 그룹인 노동자국민동맹(CNT)이 서로 손을 잡아 이른바 인민전선을 구성했고, 2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과반수의 지지를 얻음으로써 승리했다.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은 좌파들은 국민들에게 ‘좋은 정치’와 ‘인민을 위한 정치’, ‘진보적인 정치’를 약속했다. 이들은 정치범 석방, 농민의 조세와 지대 경감, 노동자의 임금 인상과 실업 대책, 중소기업 보호, 교육 개혁 등 개혁적이고 민주적인 정책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계획을 반대하는 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스페인의 군인인 프란시스코 프랑코( Francisco Franco)였다.
좌파 정부에 불만을 품은 프랑코는 파시스트 세력들을 결함하여 인민전선 지지자들에게 테러행위를 가했고, 더 나아가 보수 기득권 세력을 등에 업고 1936년 7월에 군부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스페인 내전의 시작이었다. 이렇게 발발한 스페인 내전은 좌파 혹은 개혁을 지지하는 공화파와 쿠데타를 일으킨 파시스트 세력 즉 국민파(라고 쓰고 파시스트라고 읽어야 한다.)의 대결로 이어졌다. 여기서 공화파와 국민파의 대결은 제2차 세계대전을 예고하는 구도로 나타났다. 프랑스(당시는 레옹 블룸이 이끄는 좌파 정부였다.)와 소련이 공화파를 군사적으로 지원했고, 미국이나 영국 그외의 다른 나라에서 좌파나 이론가들을 중심으로 지원부대가 결성되었다. 어네스트 해밍웨이 또한 이 전쟁에 자원병으로 참전했다.
반대로 파시즘 국가인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국민파를 지원했다. 특히 이들은 프랑코에게 전투기를 포함한 항공 전력을 지원했다. 당시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또한 적잖은 병력과 무기를 공화파에게 지원했고, 적잖은 전차 부대를 스페인에 보냈다. 해외에서 모인 국제여단의 규모는 4만 명에 달했으며, 이 전쟁에선 아나키스트와 맑스-레닌주의자, 생디칼리스트 그리고 트로츠키지지파까지 각종 좌파 이데올로기적 성향을 막론하고 웬만한 좌파 세력들은 공화파의 깃발 아래 집결했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스페인 내전에서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항공 병력을 국민파에게 지원했다.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의 항공 지원을 받은 프랑코 세력은 전황을 유리하게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나치독일의 공군은 무차별 폭격을 가했고, 그것이 바로 민간인 학살인 게르니카 폭격이었다.
1937년 4월 26일 오후 4시경 나치 독일의 하인켈 111형 폭격기와 융커스 52형 폭격기 그리고 하인켈 51형 전투기 등으로 구성된 공군 부대는 게르니카 지역을 폭격했다. 당시 나치 독일은 스페인 내전에서 각종 신병기를 실험하고자 했고, 게르니카 폭격은 그러한 목적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독일공군은 무차별 폭격과 기총소사를 게르니카에서 행했고, 게르니카는 순식간화 불에 타버렸다. 도시 전체가 불바다가 되었으며, 집과 건물이 무너지고 생존자들은 불에 탄 시체들을 도로에서 치워냈다. 당시 게르니카 마을의 인구는 7,000명이었다. 그러나 이 무차별 폭격으로 1,600명 이상이 사망했다. 말 그대로 히틀러의 공군은 그 마을 인구의 최소 1/4을 무차별 학살한 것이다.
이후 이 마을엔 프랑코를 지지하는 국민파 병사들이 나타나서 그 시체를 모두 모아 소각해버렸다. 독일 공군의 만행이 저질러진 뒤 게르니카의 끔찍한 참상이 전 세계에 전해졌지만 프랑코 측은 그런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몇 주일 뒤 영국의 조사단이라는 사람들이 들어왔으나 시체는 이미 소각되고 없었다. 조사단은 무너져 내린 게르니카 시가지를 간단히 둘러본 뒤, 다음과 같은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게르니카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계획적으로 방화되었다.”
물론 이 발표는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1939년 스페인 내전은 파시스트의 승리로 끝이났고, 스페인은 파시스트 독재자 프랑코의 40년 철권통치에 시달렸다. 진보 성향의 화가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인 피카소는 가로 7.8미터, 세로 3.5미터의 거대한 캔버스에 그려진 〈게르니카〉라는 작품을 내놓았다. 〈게르니카〉는 유럽의 여러 도시들에서 전시된 후 뉴욕 근대미술관에 전시되어 고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렸다. 1973년 피카소는 “스페인에 민주 정치가 부활되는 날에 〈게르니카〉를 스페인 땅으로 보내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게르니카〉는 1975년 11월에 프랑코가 사망한 뒤에야 비로소 조국 스페인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첫댓글 아까 올린 세균전은 일부러 지웠습니다. 까페 분들이 안좋아하시니, 먼저 발 맞춰야죠.
혹시 저 말씀하시는 거라면 안 좋아한게 아니고 다른 게시판에 써야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1945년 이후의 일을 다루는 전쟁 관련 게시물이었으니, 역사게시판에서 다루는 내용은 아니었던 듯하여(시사성이 좀 짙어보였기도 하고)...
@A.E.I.O.U 그건 아니고, 다른 분들이 좀 부정적으로 보길래. 그 글은 지웠습니다. 이 글은 역사 게시판에 올리는게 맞죠?
말머리 유럽 분류해서 수정해주세요 ㅎㅎ
@맑스레닌 유저 네 이 글은 역사게시판에 올려도 될 것 같습니다.
@Wehrmacht 수정완료
잘보고 갑니당 '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