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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피난처 (시 91:1-11) 21. 8. 15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과 같도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아멘. (시 125:1-2) |
[서 론]
할렐루야! 아멘! 오늘 복된 자리에 잘 오셨습니다. 옆 사람과 함께 인사를 나눕시다. ‘반갑습니다. 참 잘 오셨습니다.’ 오늘도 ‘여호와의 천사가 우리 모두를 둘러 진 치고 보호해 주시는’(시 34:7)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오늘 설교 제목은 ‘나의 피난처’입니다. 따라해 보십시다. “나의 피난처” 오늘 읽은 성경에 나옵니다. 2절을 읽어볼까요?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피난처’ (避難處)란 무엇입니까? 위험과 재난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곳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큰 비를 피할 수 있는 동굴이나, 적의 포격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방공호(防空壕)나, 추위와 더위를 피할 수 있는 거처가 피난처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피난처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 론]
1. 피난처를 찾는 인생
우리의 삶을 불안하게 하고, 두렵게 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5-6절을 읽어볼까요?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4가지의 두려운 일이 나옵니다. ‘밤의 공포, 날아오는 화살, 퍼지는 전염병, 재앙’ 이 4가지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잘 모르지만, 읽기만 해도 우리의 마음이 편하지 못하는 것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언제 이런 일이 나에게도 닥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 성경에 ‘전염병’ 이라는 말이 2번 나옵니다. 3절에 ‘심한 전염병’, 6절에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이 나옵니다. 때론 전염병도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두렵게 하고, 우리의 삶을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지금 온 세계가 전염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바로 ‘코로나19’전염병입니다. 많은 국가들이 백신을 맞고 있지도 코로나는 멈출 줄을 모르고 계속 퍼져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백신을 맞고 있지만 매일 2,000명에 가까운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 코로나로 인하여 우리의 삶은 크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지 못합니다. 많은 가게들이 영업을 하지 못하여 경제적으로 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사람을 만나도 대화나 식사도 제대로 못합니다. 애경사나 문병도 제재를 당하거나, 가지 못합니다. 학생들은 학교도 가지 못합니다. 지금처럼 무더위에도 마스크를 벗지 못합니다. 이것이 밤의 공포요, 날아오는 화살이요, 전염병이요, 재앙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내일 일을 알 수 없습니다. 코로나 전염병이 예고도 없이 찾아왔듯이, 내일 어떤 일이 닥쳐올지 모르기에 우리는 불안하고 두렵기도 한 것입니다. 두려운 현실을 애써 무시한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내 힘으로 해결해 보려고 하지만 한계에 부딪힙니다.
그래서 이런 재앙을 피할 피난처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피난처를 만들려고 애를 씁니다. 무엇이 나의 피난처가 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흔히 피난처로 삼는 것은 무엇일까요? 재물, 권세, 사람, 자식 등...
재물이 많으면 그 재물이 자기를 지켜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권세를 가지면 그 권세가 자기를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사람을 사귀면 그 사람이 자기를 지켜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는 자식이 크면 자기를 지켜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많은 재물을 모으려고 밤낮을 쉬지 않거나, 수단 방법을 가리지도 않습니다. 또 세상의 권세를 얻고자 별별 줄을 다 붙잡아 봅니다. 또 많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를 씁니다. 또 자식의 성공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 재물, 권세, 자식은 도움은 줄 수 있지만 피난처가 될 수는 없습니다.
① 재물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은 재물이 많으면 안전할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재물이 우리에게 오는 재앙을 막아주지 못합니다. 재물이 전염병을 막아줍니까? 감옥에 가는 것을 막아줍니까? 재물이 피난처가 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② 권세도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세상의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얼마나 애를 씁니까? 하지만 그 권세는 오래가지 못하고, 오히려 그 권세가 자기에게 해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권세가 피난처가 되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③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가까운 사람이 나의 피난처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나와 함께 갈 수 없습니다. 나를 막아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시 146:3)
④ 자녀가 우리의 피난처가 될까요? 자녀도 힘은 되지만 피난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흔한 말로 ‘무자식이 상팔자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또 ‘자식이 많아도 병든 배우자보다 못하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자녀를 나의 피난처로 삼으려는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내 자녀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나의 피난처로 삼으려고 했습니까? 재물? 권세? 사람? 자녀? 건강? 이런 것은 얼마간의 도움을 줄 수 있어도 나의 피난처가 되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을 피난처로 삼고자 했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2. 피난처는 누구인가?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의 진정한 피난처가 될 수 있을까요? 참된 피난처는 하나님이십니다. 2절과 9절을 읽어볼까요?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가 되심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가 되면 어떻게 될까요? 4절을 읽어볼까요?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하나님이 그의 깃으로 덮어주신다고 했습니다. 닭이 자기 날개로 병아리를 감싸는 것과 같이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이 여러 재앙과 위험과 병으로부터 지켜주신다는 했습니다. 3절을 읽어 볼까요?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10절을 읽어볼까요?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김바울이라는 인도 선교사님의 간증입니다. 그는 대학교 1학년 때 예수님을 믿는다고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갈 곳이 없어서 3일간 교회에서 자면서 기도했습니다. 오늘처럼 주일날 어린이 예배시간에 뒤에서 참석하며, 한 모퉁이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때 주일학교 선생님이 어린이들에게 ‘하나님은 피난처다’라는 설교를 했는데 시청각으로 했습니다.
선생님은 ‘돌, 계란, 밥그릇’을 가지고 나와서 말했습니다. ① 먼저 계란을 상위에 올려놓고 돌을 들어 계란을 내려치는 모습을 하면서 어린이들에게 물었습니다. “계란이 깨질까요? 안 깨질까요?” 어린이들은 “깨어집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② 다음에는 밥그릇 안에 계란을 넣고 돌로 계란을 치는 흉내를 내며 말했습니다. “계란이 깨어질까요? 안 깨어집니다. / 왜 안 깨어집니까? 밥그릇 때문입니다. / 밥그릇이 계란을 보호해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밥그릇입니다.”
김바울 청년은‘하나님이 밥그릇이다’라는 말씀에 큰 은혜를 받고 다시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정말로 밥그릇이 되어 주셨고, 계란같은 연약한 그를 돌보아 지켜 주셨습니다. 후에 그는 가족 모두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어 재앙과 위험(올무)에서 막아주신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실 때 여러 가지 재앙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재앙을 내리실 때 같은 애굽이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는 고센 땅에는 재앙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피난처가 되어 막아주신 것입니다.
<파리 재앙>을 보십시오. 애굽 온 땅에 파리가 가득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에는 파리가 오지 못하도록 막아주셨습니다. “그 날에 나는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 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리니”(출 8:22)
<전염병 재앙>을 보십시오. 애굽인의 가축은 전염병에 걸려 죽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가축은 전염병에 걸리지 않도록 지켜주셨습니다. “이튿날에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시니 애굽의 모든 가축은 죽었으나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한지라.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본즉 이스라엘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였더라.”(출 9:6-7)
<우박 재앙>을 보십시오. 애굽 땅에 불우박이 내려 사람과 짐승과 나무와 채소를 쳤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하는 땅에는 우박이 내리지 않도록 막아주셨습니다. “우박이 애굽 온 땅에서 사람과 짐승을 막론하고 밭에 있는 모든 것을 쳤으며 우박이 또 밭의 모든 채소를 치고 들의 모든 나무를 꺾었으되 이스라엘 자손들이 있는 그 곳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었더라.”(출 9:25-26)
<흑암 재앙>을 보십시오. 애굽 온 땅에 3일 동안 흑암이 가득하였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에는 오히려 빛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내밀매 캄캄한 흑암이 3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 그 동안은 사람들이 서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 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빛이 있었더라.”(출 10:22-23)
이런 재앙이 1-2번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재앙이 내릴 때마다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② [다니엘의 3친구(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보십시오. 그들이 왕의 신상 앞에 절하기를 거부하였다가 뜨거운 용광로 불속에 던져졌지만 하나님이 불속에서 그들을 지켜주셨습니다. 피난처가 되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였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단 3:27)
또 <다니엘>을 보십시오. 그가 왕이 한달간 금지한 기도를 하다가 붙잡혀 사자굴에 던져졌지만 하나님이 사자들의 입을 봉하여 그를 지켜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의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하지 못하였사오니”(단 6:22)]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이 나의 진정한 피난처가 되심을 믿고 그 사실을 고백해야 합니다.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2절)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우리의 피난처가 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3. 누구의 피난처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피난처가 되어 주실까요? 모든 사람의 피난처가 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천국에 오기를 원하시지만, 모든 사람이 자동으로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그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피난처가 되시는 것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곧 하나님은 자기를 피난처로 삼는 자에게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9-10절을 읽어볼까요?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그런데 하나님을 자기의 피난처로 삼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자기 피난처로 삼은 사람은 어떤 모습을 보일까요?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기도하는 것입니다. 14-15절을 읽어볼까요?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①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자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기뻐합니다.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14절) 하나님을 사랑하면 나타나는 모습은 예배입니다. 예배드리기를 기뻐합니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시 122:1) 그러므로 예배를 소홀히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배드리기 위하여 세상의 다른 일을 기꺼이 뒤로 제쳐놓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현이요, 그것이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찾아오는 재앙을 막아주시고, 올무에서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몽골의 이용규 선교사님의 이야기입니다. 한 몽골 소녀가 주일날 아침에 소를 잃어버렸습니다. 소를 찾아 헤매다가 예배시간이 되자 소 찾는 일을 그만두고 예배드리려고 교회로 달려왔습니다. 믿지 않는 자의 눈으로 볼 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배보다 소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하지. 예배는 다음에 또 드리면 되지 않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소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컸기에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을 뒤로 하고 예배를 드리려고 온 것입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배가 끝났을 때 잃어버린 소가 교회 마당에 와서 ‘음매’ 하고 우는 것이었습니다. 잃어버린 소가 제 발로 주인을 찾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예배를 드렸더니 하나님이 그의 피난처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②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자는 늘 기도하기를 힘씁니다.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15절)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지 않으면 기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표현이요,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다는 표현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재앙을 막아주시고, 올무에서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을 보십시오.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를 침략하여 예루살렘성을 포위하고 항복하라고 위협했습니다. 나라가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앗수르가 강대국이기에 어떤 왕도, 어느 나라도 유다를 도와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성전에 나가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왕하 19:19)
그러자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듣고 앗수르의 손에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왕하 19:35) 하나님께 기도하였더니 하나님이 그의 피난처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건져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기를 피난처로 삼는 자를 재앙과 전염병으로부터 지켜 주십니다. 7절을 읽어볼까요?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예배를 귀하게 여기고, 늘 깨어 기도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오늘 나는 진정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로 삼고 있는지를 돌아보십시다.
[결 론]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한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특히 지금은 코로나 전염병으로 인해 삶이 더 어렵고, 내일이 어찌될지 불안하고, 건강의 위협을 느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피난처로 삼는 ‘재물, 권세, 사람’ 이 우리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우리를 모든 재앙으로부터 지켜줄 진정한 피난처는 하나님이십니다. 3절을 읽어볼까요?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그런데 누구에게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까? 하나님을 자기의 피난처로 삼는 자입니다. 9-10절을 읽어볼까요?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라.”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여 예배를 귀히 여기고, 기도하기를 힘쓰는 자입니다. 14-15절을 읽어볼까요?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코로나로 인하여 우리의 삶이 어렵고, 미래가 불안한 이때에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로 삼고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이 모든 재앙과 전염병으로부터 지켜주시고, 건져 주시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따라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입니다.’ /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로 삼고 살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