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주간불교 / 편집 - 미주현대불교
시네마서방정토의 연재를 마감하면서 기자는 어떤 영화를 다룰 것인가 고민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시네아스트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해야겠다는 결심이 서자, 고민은 더욱 증폭돼 갔다. 전편의 영화가 모두 수작이어서 고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흔히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 최고 작품으로 〈동사서독〉과 〈화양연화〉를 꼽는다.
<동사서독〉은 여러 인물들이 얽혀 하나의 이야기를 이룬다는 점에서 소설적이고, 〈화양연화〉는 단조로운 서사의 틈을 서정적인 이미지로 채웠다는 점에서 시적이다. 다루고 있는 제재도 다르다. 〈동사서독〉은 모래사막을 떠도는 고독한 무사들의 유장하고 도저한 삶을 다루고 있고, 〈화양연화〉는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결국 〈화양연화〉를 택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끝 간 데 없이 밀고나간 영상미학 때문이다.
‘花樣年華’는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식으로 바꿔 풀이하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 된다.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주제이다. 그런데도 왕가위는 이 진부한, 동서고금의 모든 예술가들이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은 연애를, 그것도, 불륜얘기를 최상의 영화로 승화시킨다.
영상미학의 힘이다. 똑같은 재료를 갖고 요리를 해도 대가의 손맛은 다른 법인데, 영화감독 중 왕가위가 그렇다. 〈화양연화〉를 보고나면, 왜 왕가위의 이름 앞에서 시네아스트라는 수식이 앞서는지 알 게 된다. 영화 줄거리도 매우 보잘 것 없다. 간단히 줄거리를 살펴보자. 1962년 홍콩. 지역 신문 편집장인 차우(양조위 분)와 그의 부인은 상하이 지역의 새로운 집에 이사를 온다. 그는 곧 새로 이사 온 젊은 여인인 리춘(장만옥 분)을 만난다.
그녀는 수출 회사의 비서이며, 그녀의 남편은 일본 회사의 대표 이사로 출장이 매우 잦다. 차우의 처 역시 종종 집을 떠나 있기 때문에, 차우는 리춘과 보내는 시간이 점차 많아졌다. 차우와 리춘은 점차 절친한 친구가 돼 간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그들 각자의 남편과 아내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서로의 배우자들이 불륜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처 입은 둘은 서로를 위무하다가 결국 자신들도 사랑을 하게 된다. 통속적인, 너무도 통속적인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이 통속적인 스토리를 어떻게 왕가위는 비범한 예술영화로 승화시킨 것일까? 해법은 카메라워크에 있다. 영화 속에서 카메라는 매우 느리게 움직인다. 카메라는 차우와 리춘이 거니는 골목을 천천히 비춘다. 만날 듯 만나지 못하고, 만나도 스쳐 보내는 둘의 행보는 관객들의 숨을 막히게 한다. 뿐만 아니라 슬로우 모션과 스톱 모션의 반복적인 사용은 1960년대 홍콩을 복원하는 데 매우 성공적이다.
흔들리는 남녀주인공의 심리상태를 잘 표현한 클로즈업 샷도 빼어나다. 게다가 첼로연주의 사운드트랙도 감동을 주는 데 한몫을 한다. 마치 가슴을 켜는듯하다. 느린 카메라 워크는 시간에 대한 사유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느리다는 것은 결국 속도와 직결되는데, 속도는 다시 시간과 직결된다. 꽃을 피우는 일은 그 당사자인 식물의 입장에서 보자면 얼마나 더디고 가슴 졸이는 일이겠는가.
리춘과 차우가 만날 때 카메라는 일순 정지한 듯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시간의 상대성을 표현한 것이다. 심장이 터질 듯한, 그래서 시간이 멎은 듯한 찰나. 그 시간은 사랑이 오는 시간이다. 그래서 영원에 닿는 시간이다. 그러니까 왕가위의 카메라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삶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 아니라 ‘일념즉무량겁(一念卽無量劫)’이라고. 불교사상을 도식화해서 보면 인생의 고달픔(四苦)을 깨닫고, 그 고달픔의 번뇌 끝에 삶이 공(空)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리하여 세상만물에 대해 애틋한 마음(慈悲心)을 갖는다는 것이다. 즉, 긍정적 허무주의이다.
슬픔을 슬픔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의 실제 얼굴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애절한 사랑을 맞이하면 밤마다 핏줄마다 바늘이 떠도는 것 같은 슬픔을 안고 뒹굴지 않는가. 〈화양연화〉의 최고 압권은 말미이다. 차우는 앙코르와트로 떠난다. 그리고 사원의 담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가슴 시린 기억을 털어놓는다. 언젠가 리춘에게 귓속말을 했듯이. 왜 하필이면 앙코르와트일까? 한때는 융성했으나 이제는 쇄락한 앙코르와트의 사원은 차우와 리춘의 사랑의 다른 모습이 아닐까?
리춘은 예전에 살던 집을 찾는다.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았던 이뤄질 수 없는 옛사랑의 자리에서 리춘은 눈물 한 방울을 흘린다. 왕가위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삶은 아프다. 그 아릿한 자리를 사랑이라고 하자. 화양연화(花樣年華). 삶에서 가장 화려한 순간. 꽃은 가지를 찢고 피지 않던가?
왕기위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삶은 아름답다. 그 환한 자리를 사랑이라고 하자. 화양연화(花樣年華). 삶에서 가장 화려한 순간. 꽃은 어렵게 피었으나 소나기 한 번에도 지나니. 꽃이 피고 지는 순간처럼 삶은 짧다. 삶을 표현하는데 시도 길다. 하이쿠도 길다. 꽃잎이 바람 부는 허공에 남긴 침묵이라면 모를까.
그래서 하이쿠의 대가 이싸는 이렇게 노래했는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벚꽃 아래서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은!' 유응오 기자 arche@jubul.co.kr
#감독 소개 왕가위는 1958년 중국 상하이 출생이다. 5세때 홍콩으로 이주했다. 홍콩 Poly Technic Univ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했다. 1988년 〈몽콕하문〉으로 데뷔한 그는 이 한편의 영화로 홍콩의 뉴웨이브 신예 감독으로 부상했다.
국내에서 ‘열혈남아’라는 제목으로 개봉된 이 작품은 홍콩의 영화제 비평가 영화 주간부 비평가 부문에 선정됐고, 이후 베를린 영화제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아 세계 영화 평론가들에게 주목받게 된다. 1990년 〈아비정전〉을 제작했다. 그는 1994년 2년에 걸친 작업 끝에 무협물 〈동사서독〉을 완성했다.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향 아래에 있는 작품이라고 본인이 말하는 이 작품은 그의 영화중 가장 스케일이 웅장한 영화로 기록된다. 그는 CF적 감각을 이용한 영화 〈중경삼림〉을 통해 제 14회 금상장 최우수 작품상과 최우수 감독상을 수상했다.
1995년 〈타락천사〉를 발표해 15회 홍콩 금상장 시상식에서 10개부문에 노미네이트돼 여우조연상·촬영상·미술상·의상상·음악상을 거머쥔다. 1996년 동성애를 다룬 〈해피투게더〉로 칸느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고 동양의 시네아스트에서 세계의 시네아스트로 부상한다. 2000년 〈화양연화〉를 발표해 세자르상 외국어영화상과 HKFCS 어워드 감독상을 받는다.
2004년 〈화양연화〉의 후속편이라 할 수 있는 〈2046〉을 발표했다. 2006년 프랑스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왕가위는 탁월한 미적 영상으로 존재의 외로움을 밀도 있게 그려 세계 영화평론가들로부터 시대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극찬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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