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오어사를 한바퀴 돌고
몇장의 사진을 위해서 무작정 따라오라는 말에 무작정 따라나선 길이었다.
어디를 가는지도 모르고, 대충 약전 가는 길이라는것과
암각화 사진을 찍는다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몇일전 보선생님께서 보여주신 암각화에 관한 글을 읽고,
사진이 있었으면 훨씬 좋았을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곳에 넣을 사진을 다시 찍었어야 했기에
나를 대동하고 가는 길이었다.
사진 쟁이는 아닌데 자꾸 사진을 찍어달라하니...
없는 실력에 그래도 자신들 보다 낳다는 이유로 ..
나는 그저 혼자서는 볼 수 없고 잘 모르든 것을 보게된다는 이유로
그 또한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는 이유가 맞아 떨어지기 때문에
그리고 같은곳을 바라보고 같은 것을 사랑하는 그 이유로 ..
기꺼이 카메라를 들고 나서는 길인 것이다.
오어사에서 나와 도구 약전에서 어느 허름한 식당에 들러
할머니가 내어주시는 횟밥을 한그릇씩 하고 뭔가 모르지만 시골 할머니의 구수한 점심에
오랫만에 엄마가 주시는 밥같은 밥을 먹은것만 같았다.
석리는 포항에서 구룡포를 들어가자면 약전을 지나 있던 마을이었는데
최근에 새로이 길을 뚫리고 석리를 거쳐서 가는 사람들은 잘 없는듯 하다
그 마을 사람들이나 그곳을 지나간다.
석리!!
멋지게 한길가에 새겨두었다.
예전에는 그래도 이 길이 신작로이었던 길이었것만,
지금 석리에는 또다른 신작로로 인해서 마을은 양쪽으로 도로가 나고
그 가운데에 끼여서 안타깝지만 하였다.
그런데,
무지한것은 정말 사람을 안타깝게 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이 마을 간판을 보면 알것이다.
커다란 바위가 있어 마을 이름을 걸어두기 너무나 좋았던가보다.
어디 이렇게 넓직하니 좋은 돌이 있었게는가 말이다.
그 바우에는 얼굴 형상의 문양이 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성혈의 모습도 보인다.
그런데 그 얼굴문양에 커다란 글씨가 새겨져 버렸다.
어찌하리....
이럴때 이걸두고 오호통제라!!!하고 애통하여야 하는것인지 모르겠다.
천년 이천년 전의 역사가 아닌것이다.
감히 엄두도 못내는 신석기 구석기 그 시대 인간이라는 존재가 시작할때의 이야기이지 않은가?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신라나 백제나 그 시대보다 못하다라는 법이 있겠는가?
이렇게 애석할수가 없었던 것이다.
뒷면에는 마을 이름에대한 유래를 적어두었다.
豚谷!!
돌석이 아닌 돼지 마을이다.
저렇게 써 놓고 돌골이라고 써두었다.
돈자의 발음이 돌로 들리었을까? 아니면 경상도 사투리로 인해서
그 옛날씩 발음이 어느순간 돌이 되었더란 말인가?
마을은 그만 석동(석리)이 되어버렸던 것인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마을에는 돌이 많이 있고,
이런 돌들은 이렇게 먼 먼.. 아주 먼 먼...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그 시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느집의 뒷마당에 앉은 바우다.
할머니는 그곳에 절을 하고 빌기도하고...
돌을 사랑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여실히 보여주시는
할머니집 뒤뜰에 불쑥 나타나신 형상없으신 신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곳에 앉아 계셨는지 세월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보니 약전이라는 마을이 석리랑 같은 고을이었던것이다.
석리는 석곡 이규준선생님께서 계신 마을이다.
석곡 선생을 잘 모를지도 모르지만 ,
그는 동해면 임곡리 출신으로
허준, 이제마와 더불어 조선말,일제초의 한의학자, 유학자, 천문학자였다.
그리니 아픈 사람들은 그 옛날 약전에 계신 이규준선생님을 찾았지 않을까?
그래서 인가 임곡리와 약전과 석동은 모두가 그 인근 마을이다.
그 옛날 지도의 표기가 어디 지금과 같지는 않았을것이니....!!
잠시 이규준선생님의 생가자리에 들러보니 아직도 그곳을 지키시는 어른이
몇일째 병환으로 서울병원에 들렀다가 어제서야 돌아와 집안을 청소하신다하시며
오늘은 뭘 보시러 오셨능교?하시며 이미 앞면이 있는 보선생님께 자리를 내주시고
자꾸만 차를 한잔 하고 가시라고 하시는걸 한사코 마다하고
다시 가든 길을 재촉했다.
또 한참을 돌아 남의집 밭으로 들어갔다.
그곳도 마을에 있는 돌들을 찾아 헤메이다 찾았다는 곳이란다.
지금도 성혈이 남아 있는데 그곳은 밭이라 흙으로 뒤덮여 있고
간신히 보이는 성혈은 아는 이도 없고 봐주는 이도 없고, 마을 사람들 조차도 알수가 없다.
무엇인지 모르니 말이다.
제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이름은 돼지곡이었던 돌곡이었던...
그 마을에는 온통 돌들로 가득하고 그 돌들에는 신들이 있었는지..
간절히 바라는 염원이 많은 곳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성혈이 원을 그리는듯한 형상으로 보임.
약전을 지나,
다시 상정으로 향했다.
요사이 많이 변해버린 상정리는 온 마을 곳곳이 산림지역으로 변해있었다.
그리고 간판에서 말하는상정리 고인돌 군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 숱한 오랜 세월의 역사를 우리는 묻어버리고 마는 것인지??
그 바우에는 사람이 헤아일수 있는 크기의 성혈이 70여개가
큰것을 주변으로 원주형으로 돌고 있는 형상이라고 설명하신다.
그것 조차도 원래 자기 자리에 무덤이 들어섰것만 남의 무덤가에 자리를 한듯 비좁게 서있다.
어찌하여 그 옛날을 잊어버리고 자꾸만 버리는 것인지?
그것이 없었더라면 현세는 존재하지도 않았을것을...
상정을 지나
예전 구룡포로 진입하는 길을따라가다 산길로 들어선다.
참~!!
이러한 길을 어찌 알고 가요??
닌 오늘 좋은 구경하는줄 알고 가만히 따라오니라...하신다.
이곳이 어디메뇨?하고 눈이 휘둥그려진다.
그곳은 눌태리로 가는 길이지만
실상 눌태리는 호미곶 한가운데인것이다.
우리나라 지도 호랑이 꼬리의 그 가운데를 향하여 가는 길이다.
그 산에 길을 어찌 만들어 놓았는지 모르지만 차로가 다 있었다.
구불 구불 고갯길을 넘어 넘어 넘어..
그 옛날 신작로가 생기기 전에는 그 길로 사람들이 내왕하였었지 않을까?
구룡포 사람이든 동해면 사람이든....약전사람이든...누구이었던 간에 말이다.
몇바퀴에 구비구비 고갯길을 돌아들어섰는지 모른다.
끝인가 싶으면 또 길이 있고 길인가 싶으면 고개를 돌아들고..
어디가 어딘지 모를 정도로 구비구비 산길을 가는듯만 하였다.
그 어디쯤 왔을까?
작은 오솔길 앞에 눌태리 암각화라는 작은 간판이 있었다.
유판재 그러니까 고갯길인것이다.
그 고갯마루에 있는 성황당처럼 오가는 사람들의 길목에 있는 것이다.
눌태리에서 흥환리로 오가는 길목에 있다고 적어둔것을 보니
그 유판재 고갯길은 그 옛날 신작로가 생기기전에 있었던 길인것이고
이 길의 끝에는 말목장이 있었던 것이다.
그 말목장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그 말목장으로 오고가는 사람들도..
그 길을 이용하여 내왕하지 않았을까 말이다.
그곳에도 누군가가 원을 빌었던 모양이다.
일회용접시에 한가득 올려두었다.
그저 커다란 바위같아만 보이는데
자세히 올라가서보니
성혈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주위는 음산하니 이제는 오가는 사람들도 없고
도로를 뚫어두었으니 모두들 그 길을 지나갈뿐이지
어느 누구 관심주는 이도 없으니 스산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봐도 잘모르겠다
성혈이 여러개 뚫어져 있다는것만 보인다.
이런 그림 저런그림이 있다고는 하나 일천년 이천년전도아닌...
그 시대를 논할수도 없는 그 세월의 흔적이 지금껏 남아준것만으로도 대단한것이니..
그 바우에 작은 원이라도 하나 빌어야겠다 싶다.
그 바우에 저렇게 글을 새겨주었다.
해주오씨라는게 보인다
가을도 한참가을이다.
호미곶이라고 호랑이 꼬리를 멀리서 바라만 보았다.
동해안의 구룡포라고 아홉마리 용이 있던 포구로 가려면..
그 호랑이 고갯길을 넘지 않고는 아니되었던 그 옛날 사람들의 이야기가
서리서리 맺힌 그곳을 가보았던 것이다.
바람은 불어오고
바다가 곁에 보이고
천지가 사방이 바닷길로 통하는 그곳에
억만년전의 이야기가 있다.
사람들은 알까?
이 억만년전의 사연들로 가는 길을...............
계속...............!!
첫댓글 눌태리 윷판재 - 구비구비, 돌고돌아 가는 길 그 고갯마루에 큰 바위있어 꼭대기 큰 바위구멍에다 아기장수를 씻었다는 삼신할매의 전설 또한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그 전설이야기 책 내게도 알려주셔요~^^;
그래야 같이 공부하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