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金時習(1435 ~ 1493)】 「세상이 어질지 못해 평생을 미친 것처럼 꾸며 살다 갔다.」
조선 전기 세종 - 세조 치하의 문인,학자. 본관은 강릉,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청한자(淸寒子)·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법호는 설잠(雪岑)
어릴적부터 매우 총명하여 만 세살 때 시를 지어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그가 다섯살 때에는 세종 대왕이 그를 친히 불러 시를 짓개하여 감탄했다. 당시 세종은 비단 50필을 상으로 주었는데 단, 이 비단을 모두 홀로 가지고 집으로 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과연 이걸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가 궁금했던 모양인데 '별거아닌거' 라는 투로 즉석으로 비단을 서로 묶어서 엄청 길게하곤 그냥 그것을 질질 끌면서 가버렸다고한다.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보던 책들을 모두 모아 불사른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설잠'이라는 법명으로 산사를 떠나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고 한다. 방랑 생활을 하면서 많은 시를 남겼다.
그는 벼슬길에 뜻이 없었는지 과거에도 응시하지 않았다고도 하는데 다른 기록에선 17살에 과거에 응시했다가 불합격되는 통에 너무 오만했구나... 뉘우쳐 절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하던 도중에 찬탈 소식에 울분을 토하며 머리를 밀고 승려가 되었다. 1456년 성삼문이 극형에 처해졌을 때 한밤 중에 시체를 수습해 몰래 아차 고개 남쪽에 묻고 장사지냈다. 양녕대군이 세조 시절, 수재라고 하여 세조에게 그를 천거했으나 떠도는 승려로 살아가면서 벼슬자리를 모두 거부했다. 하루는 억지라도 끌고간다는 포졸들이 들이닥치자 달아나더니만 주변에 있던 논밭 거름을 주기위해 만든 똥통에 스스로 빠져서 "자아.. 이런데도 날 주상에게 데려갈테냐? 가봐야 네놈들 목만 날아갈텐데?" 라며 비웃었고 포졸들은 미쳤다고 그냥 가버렸다. 당대에 설법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세조가 그 설법을 듣고자 재물도 준다고 하고 어명을 어기니 너 참수한다 협박까지 했음에도 그러면 죽여보든가라며 거침없이 대들고 보니 죽여봐야 설법을 못 들으니 세조가 고민 끝에 효령대군에게 부탁하여 효령 대군이 손수 와서 설득하자 딱 1번 가서 세조에게 가서 설법을 했다.
하루는 길을 가는데 신숙주가(정창손이나 정인지라는 얘기가 있다.) 마침 가마에 타서 길을 가고 있기에 "이놈! 선왕의 신신당부를 어긴 이 못난 놈!"이라고 호통을 치자 신숙주는 아무 말도 없이 서둘러 그 자리를 피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서거정과도 우연히 만났는데 신숙주와 달리 이 사람은 오래 전부터 수양 대군을 모시던 사람인지라 김시습도 이 사람은 호통치지 않고 정답게 이야기를 하였으나 그 말투는 서로를 은근히 비꼬는 비수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서거정은 그를 천거하고자 세조에게 건의했으나 결국 그도 포기했다고 한다. 그나마 세조가 죽고 나서야 벼슬을 지내기도 했으나 워낙에 떠돌아 다닌 게 오래되어서 잘 맞지도 않았다. 게다가 현실과 이론의 차이 및 온갖 부조리에 치를 떨며 오래가지 않아 때려치고 다시 야인으로 돌아와 지냈다.
많은 저술을 하기도 했는데, 조선 최초의 한문 소설이라 일컬어지는 금오신화의 저자. 금오는 남산(경주)의 봉우리 금오봉을 말하는데, 금오신화를 이 산에 있던 용장사 절에서 스님으로 7년간 머무를 때 썼기 때문이다. 도중에 잠시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결혼해 대를 이으려 했으나, 아내가 일찍 죽고 실의에 빠져 다시 머리를 깎고 입산했다. 그후 떠돌아 다니다가 무량사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유언으로 화장하지 말고 묻어달라고 당부한 후 사망했다. 몇 년 후 절에서 다시 파보니 시신이 살아 있는 것과 같아 사람들은 부처라 여겨 화장 후 나온 사리를 봉안했다. 사리는 부여군 무량사 부도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일제 시대 때 비바람으로 부도가 훼손되자 부여 박물관(현대의 국립 부여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이후 불교계에서 사리를 원래 장소로 되돌려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를 받아들여서 2017년 9월 무량사로 돌아갔다.
생존 당시에는 야인 생활을 했기 때문에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 시기는 김시습이 죽은 뒤 한참 뒤인 중종 시기였다. 그래서 김시습의 일화는 정사보다는 주로 야사가 출처이다. 정조 대에 남효온과 함께 이조 판서로 추증되는데 당시에 이미 자손이 끊겼다는 언급이 조선 왕조 실록에 있다. 일생을 한마디로 말하면 "재주는 많았으나 세상이 어질지 못해 평생을 미친 것처럼 꾸며 살다 갔다."
고은 시인은 <만인보> 6권에서 그를 다룬 시를 썼다.
제목은 사람 이름과 같은 '김시습'.
사육신에 대고 생육신이라고?
좀 장난스러운 이름이야
좀 구차스러운 이름이야
그 생육신 중의 하나 매월당이라고?
하여간 살아 있어 반가우이
중도 아니고 속도 아니라고
비승비속도 아니라고
신선도 신선 아닌 것도 아니라고
반가우이 홍산 무량사에 가고
경주 남산에 가도
그 어드메 평치 아니거든
좀 으슥한 곳마다 벼랑 아래마다
거기 매월당이라고
젖내 나는 시절부터 시 지어
왕도 놀라 불러들이니
그 시의 재주 하나로 살아남아
이 산 저 산 떠돌며 시 짓고
그 시 내버렸구나 반가우이
왕조시대 겨우 여기가지가 시인이었구나
사육신으로도 안되는 터에
생육신으로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그것으로도 사는 까닭 왜 아니겠는가
그 재주 왜 백성과 더불어 노닐 수 없었던가
만백성 까막눈과 노닐어
그 까막눈에 시 바치지 못하고 말았던가
그것만은 반갑지 않으이
아까운 시인 매월당 김선생 시습이여
김시습은 한명회가 청춘부사직(靑春扶社稷) 백수와강호(白首臥江湖)라는 시를 읽고는 개작시를 저질러 靑春亡社稷 (청춘망사직) 白首汚江湖 (백수욕강호) 로 바꿔버리기도 했는데 한명희의 시 청춘부사직 백수와강호는 젊었을 때는 국가를 도와 일하고, 늙어서 머리가 하얗게 되면 세상에 누워서 만년을 보낸다는 뜻이다. 반면 김시습이 글자를 바꾸어서 쓴 청춘망사직 백수욕강호는 젊어서 나를 망치고 늙어서 세상을 더럽힌다라는 뜻이다. 이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 개작시를 보고 감탄했고 배를 잡고 웃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나중에야 사실을 알게 된 한명회가 노발대발해서 시를 찢어버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