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맥결 安麥結 (1901 ~ 1976) "3.1운동 참여, 독립운동단체 결백단 등에서 활동"
1901년 1월 2일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동진면(東津面) 고일리(古逸里) 출신이다. 이명은 안맥길(安麥吉)이다. 도산 안창호(安昌浩)의 조카로 어린시절부터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1919년 숭의여학교 재학 중 동료와 함께 일제의 ‘시정기념일’ 행사를 반대할 목적으로 만세운동을 벌였고 1925년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 회의에 참여하였으며 1927년 수양동우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안맥결의 학업과 결백회 활동
안맥결(安麥結)은 1901년 1월 2일 평안남도 강서군 초림면에서 평범한 기독교 집안의 장녀로 태어났다. 아래로는 10살 터울의 여동생 성결이 있다. 아버지 안치호는 도산 안창호의 친형으로 농사를 지었는데, 동생의 권유로 기독교 장로회에 입교하여 평생 독실한 신자로 살았다. 맥결(麥結)이란 이름은 춘궁기에 결실을 맺는 보리에 비유한 것으로 숙부(叔父)인 안창호가 지어주었다. 안맥결이 여섯 살 되던 해인 1906년에 강서군 동진면 고일리로 이사했다. 동진면은 안창호가 1899년에 강서군 최초의 근대적인 사립학교인 점진학교와 탄포리교회를 세운 곳이다. 동생 안창호의 권유로 안치호 일가는 초림면에서 동진면으로 이사 온 것으로 보인다.
안맥결
안맥결은 강제 병합되던 1910년부터 1912년까지 평양의 숭현여학교를 다녔고 1914년부터 2년간 숙부가 창설한 동진면 신양리의 점진학교 보통과에서 학업을 이어나갔다. 안맥결의 여동생인 성결에 따르면, 점진학교는 “신입생에게 제일 먼저 인사하는 예법을 가르쳤고 우리 고유의 예절을 바탕으로 애국애족의 정신을 강하게 교육했다.
”고 한다. 점진학교를 나온 후, 1916년 봄 장로교 계통의 숭의여학교에 입학했다. 숭의여학교는 1903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에서 기독교 복음 전파와 하나님의 공의 실천을 목표로 설립한 여학교로서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 함양, 민주주의 실천을 교육이념으로 내세웠다. 조선총독부가 식민지교육정책에 입각한 교육령을 공포하여 각급 학교를 정비할 때에도 이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교육방침을 고수했던 것이다. 이러한 학풍으로 인해 숭의여학교는 송죽회, 결백회(潔白會), 대한애국부인회 등 평양 여성독립운동의 요람으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3·1운동을 겪고 난 이듬해인 1920년 초, 안맥결, 권기옥을 비롯한 제11회 숭의여학교 졸업생이 주축이 되어 결백회를 조직했다. 결백단, 일편단심회, 절제회라고도 불린다. 송죽회의 민족의식과 항일활동을 계승한 단체로 정직과 검소, 국산품 애용, 금주·금연운동을 표방하며 지방순회강연에도 나섰다. 결백회 내에서도 특히 이영배, 안맥결, 배인수, 손옥련, 허경신 등은 ‘특별기도단’을 결성하여 망명한 애국지사를 은밀히 지원하는 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 일례로 1920년 3월 12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결백회 주최로 전도대회가 성황리에 개최되었는데 참석자가 1천여 명에 달했고, 1천여 원의 의연금이 걷혔다. 이에 대해 일제 당국은 결백회가 모은 의연금이 독립운동자금으로 쓰일지도 모른다는 강한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1 결백회의 활동은 평남 지역 교회와 각 학교로 파급되어 결백회 지부가 조직되었고 각 단위에서 농촌계몽, 학생자치, 생활개선운동을 전개하였다.
안맥결은 결백회 활동을 하면서 1924년 봄부터 1학기동안 회령 보통여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그해 가을, 숙부가 계신 중국 남경으로 향했다.
더 넓은 세계로 나가 웅지를 펼치고 싶었던 안맥결은 1924년 가을 숙부의 뜻에 따라 남경으로 건너와 동명학원 영어과(3년 과정)에 입학하여 어학공부에 정진하였다. 아울러 숙부가 단장으로 있는 흥사단 원동위원부(遠東委員部)에 가입하였다. 1925년 1월 19일 오후 3시 반에 동명학원 강당에서 차리석 부단장의 주례를 거쳐 통상단우(通常團友)로 인정받고 원동위원부 제19반에 편입되었다. 흥사단 자료에 따르면 그해 1월말 상해에서 열린 제11회 원동대회에 참석한 것으로 나온다. 안맥결의 흥사단 입단원서에서는 학력, 종교, 단체, 주소변동, 직업, 가족사항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특히 활동 단체에 결백회, 전도회, 면려회라고 기재했는데 결백회를 통해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한 것은 앞서 기술하였다.
이후 동명학원은 남경 사전만(絲轉灣) 40호에 교사를 신축하여 어학보습과정과 예비급의 고등중학과정까지 개설하여 상당수의 청년들을 교육시켜 상해의 인성학교와 더불어 재중 한인의 유력한 교육기관으로 자리 잡았으나 점차 학생 수가 줄어들고 원동위원부가 상해로 이전함에 따라 얼마 못 가서 문을 닫고 만다. 안맥결은 3년간의 어학과정을 끝마치지 못하고 1926년 겨울 “애국자를 만들어내는 공장주가 되라”는 숙부의 가르침을 가슴속 깊이 간직한 채 귀국길에 올랐다.
1919년 10월 1일 숭의여학교(崇義女學校)에 재학 중 동료인 한선부(韓善富) 등과 함께 일제의 ‘시정기념일(施政記念日)’에 반대하여 만세운동을 벌여 경찰에 붙잡혔고 구치소에 20일 동안 구금되었다. 시정기념일은 1910년 9월 20일 칙령 제354호 부칙에 따라 1910년 10월 1일을 기점으로 총독부 정치가 개시된 날을 휴일로 정한 날이었다. 1915년부터 공식적으로 제정되었는데 이에 대해서 반대를 했던 것이었다. 이후 1921년 숭의여학교 내에서 결백회(潔白會)와 특별기도단(特別祈禱團)을 조직해 활동하였다. 이후 일본 도쿄 나카무라여고(東京中村女高)(현 나카무라가쿠엔 여고)로 진학하여 졸업하였다.
1925년 1월 19일 안창호의 주도로 중국 상하이(上海)에 조직된 흥사단(興士團) 원동임시위원부(遠東臨時委員部)에 가입하여 제19반에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월 28~29일 영어를 공부하고자 동명학원(東明學院)이 있던 난징(南京)에 머물다가 상하이에서 열린 흥사단 제11회 원동대회(遠東大會)에 주요한(朱耀翰) 등과 함께 참석하여 애국가를 부르고 강연회에 참가하였다.
1927년 1~2월 상하이를 거쳐 귀국했고 같은 해 3월 미국의 흥사단과 상하이의 흥사단 원동위원부(遠東委員部)의 진로에 대한 논의를 통해 지금까지의 실력양성주의를 지양하고, 혁명대당(革命大黨)으로 성격을 전환한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에 가입하였다. 이후 1929년 11월 수양동우회는 국외의 흥사단과 통합되어 동우회로 개칭하여 성격 변화를 꾀하였으나 1932년 11월 안창호가 일제 경찰에 붙잡히면서 동우회의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이 동우회에 계속 가입되어 활동을 지속하였다.
1927년 7월 1일 서울에서 유중학우구락부(留中學友俱樂部)를 발기하였고 같은 해 9월 1일 강서군 동진면의 탄포리교회(灘浦里敎會)에서 개최된 기독청년면려회(基督靑年勉勵會)의 강연회에서 「무너진 집을 다시 건설하자」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이후에 고향인 동진면 고일리에 있는 사립 점진학교(漸進學校)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중에 1937년 ‘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강서경찰서에 붙잡혔다. 같은 해 11월 9일 서울 종로경찰서로 압송되려던 차에 당시 임신 중인 사정으로 조속히 교원 직을 사직하고 근신하겠다는 뜻을 밝혀 12월 21일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1938년 2월 29일 점진학교 교사직을 사임하였다.
광복 이후 1952년 서울여자경찰서장이자 총경이 되었으며 1954년 치안국 보안과에 근무하여 보안과 여경계장이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