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예레미야 11:6~14)
6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말로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선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지키라
7내가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간절히 경계하며
끊임없이 경계하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라 하였으나
8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각각 그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에게 행하라 명령하였어도 그들이 행하지 아니한 이 언약의
모든 규정대로 그들에게 이루게 하였느니라 하라
9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 중에 반역이 있도다
10그들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한 자기들의 선조의 죄악으로 돌아가서 다른 신들을 따라 섬겼은즉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깨뜨렸도다
11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
12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주민이 그 분향하는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을지라도 그 신들이
그 고난 가운데에서 절대로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리라
13유다야 네 신들이 네 성읍의 수와 같도다 너희가 예루살렘 거리의 수대로 그
수치스러운 물건의 제단 곧 바알에게 분향하는 제단을 쌓았도다
14그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서 듣지
아니하리라
성경에서 사용하는 용어 중에 언약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미와 인간들이 받아들이는 의미가 많이
다릅니다.
2절 말씀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말하라
언약이라는 용어는 성경에서 아주 중요한 용어입니다.
특히 예레미야서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새 언약이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이 새 언약이라는 단어가 처음 나오는
곳이 바로 예레미야서입니다.
이렇게 새 언약이라는 표현이 등장함으로 그동안 있었던 언약이 옛 언약 즉 구약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용어인 언약이라는 말이 11장에 와서야 등장합니다.
그것도 지금 절박한 쪽은 이스라엘인데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저희와 맺은 언약을 잊으셨습니까? 홰 저희를 멸하시려는 것입니까?”
하고 엎드려야 하는 쪽은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언약을 기억하지도 않고, 언급하지도 않고, 언약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이는 성경에 나오는 언약을 그냥 우리 인간의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약의 개념으로만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언약의 특징은 첫째 하나님이 맺은 언약입니다.
즉 하나님의 일방적 언약입니다.
세상에서의 일반적인 계약은 쌍방 계약입니다.
즉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하는 계약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계약은 완전히 일방적인 계약, 편파적인 계약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계약을 맺고자 하시는데 인간은 계약을 맺을 필요를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약을 요청하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 계약 내용의 의무, 일해야 하는 쪽,
심지어 책임을 져야 하는 쪽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갑으로서 갑질을 하는 계약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에게는 전혀
유익이 없는 계약, 하나도 보탬이 되지 않는 계약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먼저 제안하시고, 그 내용도 모두 일방적으로 인간에게 유리한 것
뿐입니다.
이것은 명백히 불공평한 계약입니다. 과도하게 인간에게 유리한 계약입니다.
그리고 이 언약에 대해 사람들이 가장 오해를 많이 하는 것이 조건적 계약이라는
것입니다.
4절 말씀을 보면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 말씀을 보고 하나님의 언약은 조건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순종하고 행하여야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 문장만을 보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는 전혀 맞지 않는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계약을 맺기 전에 이미 이스라엘에 대하여 너희는 내 백성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출애굽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 라고 선언을 하셨고
출애굽기 5장에서는 바로 왕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후에 그리고 율법을 주신 후에 이를 지키나 안 지키는 가를
살펴보신 후에 잘 지켰을 때 `너희는 내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신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만약 순종하고 행해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면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었습니다.
만약 이 언약이 조건적이었다면 이 계약은 맺어질 수도 없고 유지될 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한 번도 제대로 순종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이 갖는 두 번째 특징이 `하나님이 일하신다’입니다.
즉 하나님이 보장하신다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너희 조상들에게 한 맹세는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 한
언약을 이루리라 한 것인데 오늘이 그것을 증언하느니라 하라’ 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바로 맹세입니다.
맹세는 언약을 주도하는 쪽의 각오와 의지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맹세를 하셨지만 이스라엘에게는 맹세를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이 언약에 대한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지십니다.
이런 계약은 세상에 없는 계약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이런 식으로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출애굽이라는 은혜를 주셨고,
나아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는 언약에 따라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이스라엘의 행동 여부에 따라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유지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우리의 믿음, 우리의 충성, 헌신, 우리의 행동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 긍휼하심, 하나님의 책임 때문에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 자랑할 것이 없고 하나님의 은혜에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왜 이토록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을까요?
8절 말씀을 보면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각각 그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였으므로
이스라엘은 순종하지 않고, 귀를 기울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더 나아가 각각 그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완악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영어의 stubbornness `확고하다 단단하다 완고하다
굴하지 않다’ 입니다.
이 자체로는 좋은 의미입니다. 우유부단한 것보다 훨씬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에 대하여 완악한가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악한 마음이 완악하면 악한 마음이 변하지 않고 확고 부동하다는 의미입니다.
죄에 대하여 흔들리지 않고 확고한 신념이 있다면 정말로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완악하다가 문제가 아니라 그 마음이 죄에 잡혀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는
일반적으로 계약 당사자들은 계약의 내용을 잘 지킵니다.
그 이유는 그 계약을 어기면 불이익 따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큰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그 계약을 지키고 싶지 않지만 할 수 없이 지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너무나도 거리낌 없이, 너무나 자주, 너무나 자연스럽게 계약을
깨뜨립니다. 왜냐하면 손해 볼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들이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죄인들의 가장 미련한 생각인데요 공짜로 얻은 것을 귀한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지속적으로 계약을 깨는 것은 하나님이 맺어준 계약 자체가
인간에게 손해 날 것이 없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해야 할 의무가 없었고, 계약을 유지하기 위해 수고해야 할
조건들이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은혜가 귀한 줄 물랐습니다.
원래 은혜란 값없이 대가 없이 받아야 은혜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장 미련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맺어주신 언약을 기억하지도 못했고 그러니까 하나님께
그 언약을 요구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냥 하나님께서는 홀로 외롭게 그 언약을 지키고, 이루어 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11절 말씀을 보면 10절에서 이스라엘이 언약을 깨뜨린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화가
나신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불순종하자 하나님이 분노하셔서 벌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표현은 그럴지 몰라도 내용은 아닙니다.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하나님께 부르짖은 적이 없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도 힘들다고 신세 한탄하며 부르짖은 것이지 하나님께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은 것이 아닙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그러면 내가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행하리라’고 하셨겠습니까?
이와 같이 이스라엘이 부르짖는 시늉만 해도 하나님께서는 들으십니다.
이스라엘이 부르짖어도 하나님이 듣지 않으셔서 다른 신에게 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은 그냥 하나님을 제쳐 두고 곧바로 우상한테로 간 것입니다.
12절입니다.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주민이 그 분향하는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을지라도 그 신들이
그 고난 가운데에서 절대로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리라
하나님과 우상의 가장 본질적 차이는 하나님은 살아 계신 분, 생명이 있으신 분,
활동하시는 분이고 우상은 만들어진 것, 생기가 없는 것,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이스라엘이 달려가도 그 신들이 그들을 고난 가운데서 구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시고 구하여도 구원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과 우상의 차이점은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주와 같은 이가 없나이다.” 라고 말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역설적 표현입니다.
이 모든 말씀은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라
비록 너희가 부르짖지 않을지라도 나는 너희를 긍휼히 여겨서 기어이 구원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각오의 표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태초부터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뜻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4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서 듣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이 말씀의 진정한 하나님의 의도도 “이스라엘이 부르짖지 않으니 너라도
부르짖으라” 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를 감사함으로 누리는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