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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인류 최초의 추수감사절(송바울)
창세기 4장 3~7절 말씀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오늘의 말씀을 인류의 첫 추수감사절이라고 제목을 정했다.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을 드려야 한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죄가 없었을 때는 사람들은 감사에 대하여 잘 알지 못했지만 타락한 후에야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었다. 땀을 흘리는 수고가 없으며 인간은 감사할 줄 모르게 된다. 수고하고 애쓴 것에 대한 열매가 나타날 때 감사를 느끼게 된다. 추수감사절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려 드려야 한다. 역경이 없으면 우리는 감사한 것을 모르고 더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멸망할지 모른다. 우리는 감사로 충만한 생활을 해야 한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 앞에 감사할 줄 모른다. 시편 14편 1절과 53편 1절에 똑같은 말씀이 나오는데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도다고 나온다. 감사는 감사의 대상이 있을 때 감사를 드릴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대표적으로 어리석은 자는 나발이다. 그는 다윗이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고 자기를 지켜주었는데도 그 은혜를 알지 못했다. 다윗이 어려울 때 도와달라고 했을 때 다윗을 오히려 비난한다. 그러한 그를 다윗이 죽이려고 하지 그의 아내 아비가일이 곡식을 가지고 다윗에게 주고 용서를 구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를 쳐서 죽인다.
신약에서 대표적인 어리석은 자는 부자이다. 부자를 곡식을 많이 쌓아놓고 마시고 쉬고 놀자면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의 영혼을 오늘 취해 간다면 그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하시며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고 하신다.
시편 6편 5절에는 죽은 자는 사망 중에서 하나님 앞에 감사할 자가 없고 음부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감사할 자가 누구인가고 말씀하고 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천국 가는 사람들이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지옥에 가는 사람들이다.
개나 돼지가 진주의 가치를 모르듯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도 어리석은 짐승들과 같다. 세상은 짐승들 천지들이다. 마음을 놓고 세상을 다닐 수 없고 마음 놓고 사람을 사귈 수 없다.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께 기도하면서 한 걸음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야 한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서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지냈다고 말씀하신다. 제사는 믿음으로 드려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예배를 하나님이 받아주실 것을 믿고 찬송하고, 기도하여야 한다. 여기에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기쁘게 받아주시는 근거가 있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져 있다는 것은 우리가 부지런히 선을 행하라고 하시는 말씀이다. 악을 행한 것에 상관없이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져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선을 행해야 한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로 예물을 드렸다. 첫 새끼는 제일 귀한 것으로 하나님이 모든 것의 첫 것은 자신의 것이라고 하셨다. 우리는 이 세상의 처음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의 대속 제물로 내어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어야 한다.
10. 예수님은 선한 목자(2)
선한 목자는 양을 안다. 겉으로만 보고 사람을 평가하는 일이 많다. 사람의 속을 안다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말이다. 사람마다 자기의 속마음을 감추고 살기 때문에 겉으로만 보고 사람을 평가하는 일이 많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중에 사울을 택하셔서 왕으로 세웠다. 사람들은 그가 얼굴도 잘생기고 키도 크고 겸손하기까지 해서 환호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울의 본색이 드러나면서 하나님께 불순종한다. 오늘날에는 왕들은 명목상 왕이고 대통령을 세워 나라를 다스리게 한다. 그러나 그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실망하게 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목사를 초빙하고도 처음에는 잘할지 몰라도 몇 년 지나면 신자들이 실망감을 느끼게 된다.
예수님은 초림하셔서 병도 고쳐주고 죽은 자도 살려주고 배고픈 자에게 빵을 먹여주시며 큰 자비를 베푸셨지만, 인간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예수님은 대한민국에도 선한 목자가 되셔서 한국을 인도하고 계신다. 인간들은 서로를 잘 모른다. 목사도 교인들의 사정과 형편을 알기 어렵다. 안다고 하는 일이 중요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다 아신다. 우리의 육신의 연약함, 생각, 방향도 다 아시기에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우리를 채찍질하시고 돌이키게 하시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도록 인도해주신다. 주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고 형통하는 사람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지 않고 내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임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가기 위해 늘 기도하며 주님을 알기 위해 힘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님이 나를 아신 것처럼, 나도 주님을 깊이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지식이다.
지식의 시작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 있다.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고 지식이 근본이라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외하는 가운데서 우리의 지식을 새롭게 출발해 나가야 한다.
선한 목자는 양을 인도한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재난, 추위와 더위, 폭풍 속에서 우리를 보호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는 선한 목자시다. 아이들에게는 착하다는 말을 쓰지만, 어른들에게는 선하다는 말을 쓴다. 헬라어에 아가토스와 칼로스라는 단어가 있는데 둘 다 착하다는 말이다. 아가토스는 도덕적으로 선한 것, 착한 것을 말하지만 칼로스는 거기에 아름답다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라는 말에는 예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모습이 우리 개인에게 유익하고 좋게만 할 뿐 아니라 인도하시는 그 모습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에게 임하는 재난 같은 것들도 다 임한다. 그 모든 것이 선한 목자가 역사하시는 방법이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가 된 것도 6·25전쟁으로 분단된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에 북한군 병사들이 죽어 나감으로 하여 북한 땅에서는 김정은에 대한 반감과 불평, 불만이 많아지고 있다. 시진핑과 김정은이 원수가 되어 탈북자들이 중국에 가면 강제 북송당했는데 지금은 다시 내보내지 않고 있다. 이 모든 일들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손길을 봐야 한다. 우리는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평화롭게 복음으로 통일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역사해주신다.
우리는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잘 보살피며 박해받는 사람,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잘 돌보아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해 주신다. 우리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알아야 하고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1. 히스기야의 감사기도
이사야서 38장 17~20절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스올이 주께 감사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오직 산 자 곧 산자는 오늘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버지가 그의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니 우리가 종신토록 여호와의 전에서 수금으로 나의 노래를 노래하리로다.”
히스기야는 이사야선지가 와서 너는 이제 곧 죽을 테니 집 안을 정리하라는 말을 듣고 통곡하면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그리고 그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수명을 15년 더 연장해 주신다. 우리는 마지막 때의 밭에서 추수해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수명을 추수해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히스기야는 15년만 수명을 연장받고 하나님 앞에 감사드리는 사람이 되었다. 하물며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은 사람들인데 얼마나 감격스럽고 기쁘겠는가? 우리는 이런 기쁨과 감격을 가지는 추수 감사절이 되어야 한다.
누가복음에 부자 이야기가 두 번 나온다. 예수님은 이 부자를 미련한 부자라고 하신다. 부자는 농사를 지어 풍년이 들어 수확을 많이 했다. 그리고 창고를 더 크게 지어 놓고 좀 평안히 쉬어보자고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은 오늘 네 영혼을 거두어 간다면 네가 쌓아 놓은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하시며 어리석을 부자라고 하신다. 세상에는 부자들이 많이 있다.
우리의 재물을 주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부활의 은총을 받은 것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죽은 자는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가 없다. 육신이 살아 있는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1장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기도를 들어주시고 말을 들어주셔서 감사하다고 하신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말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 있으면 무엇이든 구하든지 다 이루어주신다고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우리가 받지 못하는 것은 첫째는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속에 거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29장 11절 말씀에서 너희를 향한 내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오묘한 일들과 섭리를 우리는 다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려운 일을 당해도 절대로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가야 한다. 우리는 죽은 자가 되지 말고 산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희망을 잃어버리고, 사랑을 잃어버리고, 기대를 잃어버리면 죽은 자가 된다. 죽은 자는 감사할 수 업고 산 자만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다. 감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생명을 남겨주신 것이고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일꾼들이 되어야 한다. 들이나 밭에서 논에서 추수한 것으로 감사하는 것이 아닌 세계만방에 나가서 많은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들어 영적인 추수를 하여 하나님 앞에 감사드릴 수 있어야 한다.
12. 예수님은 부활이시다.
요한복음 11장 25~27절 말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 이 신앙고백은 두 가지로 첫째는 예수님은 그리스도라 하는 것과 또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왕이시고 아들이시니 이다 믿는 우리도 똑같이 두 가지의 은혜를 받는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주님은 내가 왕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부활이요 상명이라고 하신다. 이것은 내가 있는 곳에 부활이 있고 나사로는 죽은 것이 아니고 부활한다는 것을 깨우쳐주시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부활의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면 우리를 죽일 자도 없고 죽인다고 해도 다시 살아난다.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항상 청춘이다.
예수님은 실제로 죽은 자를 세 번이나 살려내셨다. 예수님은 간음하다 현장에 잡혀 왔던 여자를 살려내시고, 9장에서 소경 청년의 눈을 뜨게 해주시고 나는 빛이다. 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육신의 눈만 밝게 해주시는 분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의 눈, 영의 눈을 열어서 신령한 세계를 볼 수 있게 하신다.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려내시고,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내셨고,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를 살려내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가 좋은 때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말씀도 세 번 하셨다.
베드로는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고 신앙고백을 한다.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기뻐하시면서 그것을 알게 하신 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라고 칭찬하시며 베드로라는 이름을 지어주시며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인데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
변화 산에서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신 것을 본 제자들에게 너희가 본 것을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부활할 때까지는 말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것이 무슨 말인지 제자들을 알지 못한다.
예수님을 시험해보려고 사두개인들이 부활에 관해서 물었을 때도 예수님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거로 무섭게 책망하신다. 그러시면서 하나님의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자의 하나님이시라고 하신다. 부활을 안 믿는다는 것은 곧 죽은 자다.
예수님은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신다. 그런즉 부활을 안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안 믿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마음이 모시어 드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겉으로 볼 때는 산 것같이 보일지라도 죽은 자다. 사도의 사명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자이다.
우리는 마지막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부활이 빠진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예수님을 온전히 전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보혈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기독교의 두 기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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