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준 국정원장이 노무현-김정일 대화록을 공개한 게 잘한 일이냐 잘못한 일이냐를 따지는 것도 물론 중요한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공개 경위에 논란거리가 있었다 쳐도 대화록이 공개됨으러써 드러난 사실 자체의 비중은 그보다 훨씬 더 크고 엄중하다. 대한민국 대통령이란 사람이 김정일과 만나 그런 기가 찰 자세로 그런 기가 찰 소리를 주고받았다니, 설마 하던 사람들도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하고 탄식한 사례가 아마 숱하게 많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런 '탄식한 사람들'에게는 진실이 까발려진 게 그 경위를 둘러싼 논란과는 별개의 차원에서 너무나 잘된 일 아닌가? 요컨대 김정일 앞에서 있었던 노무현 식 자세, 노무현 식 발언, 노무현 식 마인드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게 만천하에 폭로된 게 정치적 '손해‘라고 인식되었을 것이고,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제라도 그게 청천백일 하에 들통 난 게 그나마 국가적 ’불행 중 다행‘이라고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양자 간의 메울 수 없는 골은 8. 15 해방공간에서 지금까지 일관되게 존속해 온 한반도 결전의 숙명적인 구조다. 핵심은 바로 이거다. 다른 말 할 것 없다. 한반도 정치와 한국 정치의 핵(核)은 그 ‘다행’이라고 여기는 진영과 ‘손해’라고 여기는 진영 사이의 타협이 거의 불가능한 싸움, 그것이다. 노무현 식’을 좋은 것이라고 하는 진영과, ‘노무현 식’을 나쁜 것이라고 하는 진영 사이의 건곤일척의 숙명적인 결전 말이다. ‘노무현 식’은 한 마디로 무엇인가? 그는 대화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들어서시기 전까지는 점진적 자주에 대한 의지도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전작권 환수에 따른 한미연합사를 해체하기로 한 것을 마치 '자주'인양 김정일 앞에서 자랑하고 있다. 전작권은 한미 대통령이 함께 합의하면서 운영하게 돼있는 것인데도. ‘노무현 식’에 반대하는 사람들로서는 그의 그런 현실인식에 결코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이 나라 선배 세대의 대한민국 수립, 한미동맹에 기초한 6. 25 남침 격퇴, 산업화, 글로벌 화, 11위의 무역국가 달성 등등, 대한민국 네이션 빌딩의 발자취야말로 눈부신 ‘점진적 자주’의 길이었다. 이와 달리, 북한이 걸어온 길은 ‘자주’의 이름으로 호도된 쇄국주의와 수용소체제, 그리고 북녘 동포의 파멸의 길이었다. 지금 제3국에 은신해 있는 27세의 탈북 시인 백이무는 그녀의 시집 ’꽃제비‘에서 북한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만약 래세(來世)가 있다면/굶어죽기 전/얼어 죽기 전/이렇게 무릎 꿇고 엎드려서/눈을 감고 두 손 모아/간절히, 간절히 기도 하나이다/만약 래세가 있어/기어코 이 몸을 다시 태어나게 하려거든/하나님, 다음 생애에는/제발 이 몸을 조선이 아닌/다른 나라에서 태어나게 해 주소서” 이런 '두 번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은' 북한과는 달리, 20세기 역사상 유례없이 성공한 나라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두고서 '점진적 자주의 의지조차 없는 것이었다'고 막말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도 아닌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면. 그서 ‘노무현 식’을 좋아하는 진영과 그것을 싫어하는 진영 사이의 싸움은 남재준 국정원장의 대화록 공개가 잘됐느니 잘못 됐느니 하는 형식논리적이고 정쟁적인 입씨름을 능가하는, 그래서 그 따위 것으로 덮어질 수 없는, 덮어져서도 안 될, 훨씬 더 본질적인 것이다. 이 진짜 싸움을 전면에 에누리 없이 노출시킨 '명료화의 효과'라는 점에선 남재준 원장의 대화록 공개는 충분한 이념투쟁적 함의(含意)를 갖는 사건이었다. 이 투쟁은 어차피 피아(彼我) 간에 피할 수 없는 싸움, 할 수밖에 없는 싸움, 그리고 '무인(武人) 남재준'처럼 일신을 던져서 하는 싸움 아닌가? 류근일 2013/6/27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