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무슨 기사가 된다고 그래? 취재하려면 오지 마요.” 우성해운 창업자인 차수웅(67) 전 회장의 첫 반응이었다. 차수웅 씨는 해운업계에서 성공한 사람이지만 영화배우 겸 TV 연기자 차인표의 아버지로 더 유명한 사람이다. 기자는 우연히 인터넷에 뜬 짤막한 기사를 읽고는 오랫동안 친분이 있는 차수웅 회장에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둘째가 괜한 것을 (홈페이지에) 써가지고, 참.”
해운업계 4위, 주식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전량 합작사에 매각 둘째란 차씨의 3남1녀 중 둘째인 차인표를 말한다. 지난해 12월 29일 저녁 서울 강남구 삼성동 포스코센터 내 일식당에서 조촐한 은퇴식이 열렸다. 1974년부터 우성해운을 창립해 경영해온 차수웅 회장의 은퇴식이었다. 차인표는 부친의 은퇴식에서 가족 대표로 인사말을 했다.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장남 인혁 씨가 오지 못해 차남이 대신 나선 것. 차인표는 이렇게 인사말을 했다. “아버지는 34년 전, 그러니까 제가 여섯 살 때 우성해운이라는 회사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참 오랫동안 한 회사를 책임지고 경영해오셨습니다. 150여 명의 직원들과 그 가족들이 아버지가 이끌어나가는 우성해운과 함께 울고 웃으며 반평생을 보냈습니다. 오일쇼크도 견뎠고, IMF도 버텼습니다. 재벌이 되지는 않았지만, 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34년을 경영해오셨습니다.” 이어 차인표는 의미심장한 유머를 던졌다. “제가 했던 드라마에서는 주로 아들이 회사를 상속하거나 주주총회 같은 거 해서 회장이 쫓겨나거나 그랬었는데 기분 좋게 헤어지니 행복합니다.” 차인표는 부친의 은퇴식 이야기를 자신의 홈페이지에 짤막하게 올렸는데, 이것이 일부 인터넷에 떴다. 기자는 차인표가 쓴 ‘은퇴식 소감’을 읽으면서 지금 이 순간에도 벌어지고 있는 경영권을 둘러싼 골육상쟁(骨肉相爭)을 떠올렸다. 경영권이나 재산을 놓고 형제들끼리 벌이는 살벌한 전쟁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형제간이란 기본적으로 경쟁관계에 있기 때문에 자칫 삐끗하면 반목하는 사이로 쉽게 돌변할 가능성이 있다. 어떤 가문에서는 형제간의 갈등을 넘어 부모 자식간에 싸움을 벌인다. 아버지가 아들을 고소하고 어머니가 아들을 맞고소한다. 이런 현실이었기에 둘째 아들의 ‘은퇴식 소감’은 신선했다. 차수웅 전 회장이 경영해온 우성해운의 2005년 운임매출액은 1억5,000만 달러. 국내 해운업계의 시장점유율은 한진해운 1위, 현대상선 2위. 우성해운은 머스크라인(덴마크계) 3위에 이어 업계 4위다. 1위와 2위가 그룹 소속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우성해운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우성해운은 외국파트너인 짐 라인(Zim Line)과 한국파트너가 지분을 각각 50%씩 보유하고 있던 회사다. 국내 지분의 55%를 차수웅 전 회장이 보유하고 있었다. 차수웅 씨는 자신이 키운 회사를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주식을 단 한 주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전량을 합작사인 짐 라인 측에 매각했다. 결국 우성해운의 경영권은 국내 지분의 30%를 갖고 있는 2대 주주 홍용찬 씨에게 넘어갔다. 이것은 회사 규모에 관계없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차수웅 씨는 오래전부터 자식들 얘기를 간간이 하곤 했었다. 각자의 인생을 잘살고 있다고. 그랬던 차씨였기에 마무리 정리까지 잘한 모습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차씨와 자식들 이야기를 기사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차씨는 처음에는 기자의 취재 요청을 한사코 거부했다. 기자가 포기하지 않자 어쩔 수 없이 그는 “그럼 사무실에서 차나 한잔 마시자”고 뒤로 물러났다. 차수웅 씨는 1940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인천고를 거쳐 1963년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66년 인천제철에 입사해 1972년까지 근무하며 과장과 부장을 지냈다. 차씨가 해운업에 뛰어든 1973년 유니버살해운을 통해서. 이어 1974년 우성해운을 설립했다. 그는 “당시만 해도 일본 선박회사들이 한국 제품에 대한 운임을 터무니없이 조작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일본 선박회사의 횡포에 대한 반발심이 우성해운을 설립하는 동기가 되었다는 설명이다.
“아버지께서 일으키고 성장시킨 회사… 우리의 길 가겠다” 차수웅 회장은 3남1녀를 두었다. 장남 인혁 씨는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나와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역시 전자공학으로 박사를 받았고 루슨트테크놀로지 기술부장을 거쳐 현재 인터디지털사에 근무하고 있다. 차남 인표 씨는 한국외국어대 경제학과를 중퇴하고 미국 뉴저지주립대로 유학,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한진해운 뉴욕지점 근무를 거쳐 1993년 MBC 탤런트로 데뷔했다. 3남 인석 씨는 미국 MIT대 경제과를 나와 금융계에 들어와 현재 바클레이투자은행 영업담당 상무로 있다. 고명딸 유진 씨는 캐나다 토론토의 요크대학에서 유학 중이다. 차씨에게 “솔직히 자식에게 회사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을 꺼냈다. “그런 마음이 왜 없었겠어요? 하지만 세 아들이 경영에 참여하고 있지 않았고, 또 누구도 회사에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계속할 수도 없었습니다. 내 나이가 조금 지나면 칠십이 되는데, 일선에서 뛰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파트너들이 나이 때문에 나를 버겁게 생각한다고 봤어요. 기왕 이렇게 된 이상 내가 살아 있을 때 (지분을) 정리하지 못하면 자식들에게 누(累)가 되지 득(得)이 되진 못한다고 판단했습니다.” 2004년, 그는 세 아들(인혁, 인표, 인석)을 불러놓고 경영권 승계 문제를 의논했다. 아버지는 세 아들에게 회사 경영상태를 설명하고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했다. 각자가 알아서 선택하라고 당부했다. 세 아들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세 아들 중 누구든 “내가 맡겠습니다”라고 하면 끝나는 상황이었다. 하루아침에 중견 해운회사의 CEO가 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데 세 아들은 모두 회사 경영을 포기했다. 차인표는 “아버지께서 일으키고 성장시킨 회사인데, 저희들이 들어가 경영에 참여해 잘된다는 보장도 없고 또 평지풍파를 일으킬 생각도 없다”고 분명히 의견을 밝혔다. 인석 씨 역시 “내가 해온 일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경영수업 대신 ‘연기자의 길 가겠다’며 아버지 앞에서 프레젠테이션 그는 세 아들이 자신의 인생을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내가 육십 넘게 살아보니까 인생은 자기들이 하고 싶어하는 것을 하고 살아야 한다고 깨달았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해야만 후회가 남지 않아요. 인석이는 금융계에서도 꽤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인석이는 경영 참여 문제로 오랜 시간 고민하면서도 결국에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보기에 자식들 직업이 내가 해온 일보다 낫다고 생각해요.” 우성해운이 한창 성장하고 있을 때인 1990년대 초반. 차수웅 회장은 자신을 가장 많이 닮은 차남 인표에게 경영수업을 시키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차남은 미국 뉴저지주립대 경제학과 4학년 때 연기자의 길을 가겠다고 계획서를 들고 와 아버지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너무나 뜻밖이었다. 충격을 받은 차수웅 회장은 친구인 KBS PD, 광고회사 임원, 연극과 교수를 동원해 아들이 연기자로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게 공작을 꾸몄다. 이렇게 되자 차인표는 “연기자의 길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고, 결국 한진해운 뉴욕지점에 입사하게 된다. 그러나 차인표는 1년 만에 한진해운을 나온다. “지금 안 하면 영원히 못할 것 같다. 후회할 것 같다”며 탤런트 시험에 도전한 차인표는 MBC에 합격해 연기자가 되었다. 차인석 씨는 금융분야에서는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그는 국내에 국제금융의 파생상품을 전파시킨 개척자라는 얘기를 듣는다. 장남 인혁 씨 역시 전자공학 전문가로 처음부터 해운업에는 관심이 없었다. 세 아들은 “우리들 중 누구라도 들어가 경영에 참여하는 게 당연한데 그렇게 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그가 처음 해운업에 뛰어들었을 때인 1973년 뉴욕행 배에 1,500개의 컨테이너가 실렸다. 그것이 2006년에는 뉴욕행 배에 9,000개 이상의 컨테이너가 실렸다. 한국의 위상이 30여 년 만에 이렇게 달라졌다. 그는 지분을 정리한 뒤 지인들에게 보낸 은퇴 인사장에서 “수출이 입국의 제일 목표가 되었던 때에 작지만 그 일역을 담당할 수 있었다”면서 “오늘 수출 3,000억 달러 달성의 작은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가슴 뿌듯하다”고 썼다. ‘아직은 좀더 일할 나이’라며 만류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명배우는 무대에서 내려올 시기를 잘 선택해야 한다”는 셰익스피어 희곡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식사를 하다 보면 한 숟가락 더 먹을까 말까로 고민될 때가 있잖아요. 하지만 더 먹으면 포만감으로 인해 속이 거북해지죠. 나는 그 더 먹고 싶은 한 숟가락을 먹지 않기로 한 겁니다. 정말 잘한 선택이라고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