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인트시편 125편-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제 6 강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가 받는 축복’
시편 125편 1-5절
1-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2-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3-악인의 권세가 의인의 업에 미치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으로 죄악에 손을 대지 않게 함이로다
4-여호와여 선인에게와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선을 행하소서
5-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를 여호와께서 죄악을 짓는 자와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찌어다
1-A song of ascents. Those who trust in the LORD are like Mount Zion, which cannot be shaken but endures forever.
2-As the mountains surround Jerusalem, so the LORD surrounds his people both now and forevermore.
3-The scepter of the wicked will not remain over the land allotted to the righteous, for then the righteous might use their hands to do evil.
4-Do good, O LORD, to those who are good, to those who are upright in heart.
5-But those who turn to crooked ways the LORD will banish with the evildoers. Peace be upon Israel.
Point: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Introduction: 요즘 보면 경찰관들 외에는 경찰처럼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차도 비슷하고요. 경비업체 사람들입니다. 차도 오히려 경찰차보다 더 좋은 것 같아요. 우리 교회도 한 경비업체와 계약을 맺고 중요시설부분은 경비를 받고 있습니다. 이런 회사들이 요즘 호황이랍니다. 사회에 불안감이 많으니까 오히려 이런 회사는 호황기를 누리고 있다는 보도도 있습니다. ‘경보가 울리면 몇 분 안에 출동!’ 뭐 이렇게 홍보하면서 여러 회사들이 경쟁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도 어떻게 보면 이렇게 경비를 받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이 도시 주위를 작은 산들이 에워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면서 예루살렘을 바라보게 되면 마치 이 작은 산들이 예루살렘을 24시간 경비를 하는 듯 그렇게 보여집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루살렘을 그렇게 지키시고, 믿음의 성도들을 그렇게 보호하여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난 얼마 동안 하나님께서 저렇게 나와 나의 산업의 현장을 지켜주셨구나. 그래서 또 이렇게 감사하게도 내가 성전을 향해 올라가고 있구나. 할렐루야!’ 이런 마음이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 성도들의 마음에 가득한 것입니다.
Point 1: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가 받는 축복
오늘 본문은 이런 성도의 믿음과 하나님의 지켜주심의 관계를 우리들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성도들을 지키는 것이 무엇이고 또 어떻게 지키나 그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성전에 올라가는 여섯 번째 노래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성도들이 오다가 가까이 와서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지켜주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지켜주심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성도의 믿음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1절을 보세요.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지켜주시면 성도들이 어떻게 됩니까? 시온 산처럼 된다고 이 시편기자가 얘기합니다. 이 시온 산은 예루살렘에 있는 큰 바위 산입니다. 그 바위 산 위에 세워진 도시가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저도 가보니까 돌산이 예루살렘에는 많아요. 이렇게 하나님이 지켜주시면 성도들이 이 바위산처럼 든든해지고 요동하지 않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요 말씀에 우리 믿음의 분기점에 되는 중요한 단서가 하나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우리가 판단하기에 하나님 말고 시온 산, 돌산 같아보이는 것이 많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를 든든하게 해 주고 요동치 않게 해 줄 것 같은 게 많습니다.
요즘 같으면 부동산이 그렇습니다. 정부정책을 믿지 못하고 앞으로 부동산 가격이 더 오른다고 생각하니까 이자로 월급의 반이상이 나가도 대출을 받아서 집을 사놓으려고 합니다. 인생에 있어서 반석 같고 돌산 같은 존재로 부동산확보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 요즘은 연예인 될려고 하는 게 큰 붐인 것 같습니다. 관계된 학원들이 초호황이란 소리가 나옵니다. 이런 많은 지망생들에게 소위 요동치 않는 반석의 터가 무엇입니까? 인기, popularity, 이거 아닙니까?
그런데 얼마 전에 제가 ‘한채영’이를 봤어요. 한 채영 알지요. 담임목사님 모시고 강남 한 아파트에 심방 갔다가 엘리베이터에서! 같이 탄 것은 아니고, 우리가 몇 층을 내려갔더니 문이 열리면서 걔가 보여요. 매니저 둘 옆에 섰고. 걔는 매니저도 킹카더라고요. 잠깐 한 3-4초 봤어요. 거기사는 권사님하고는 아는 지 인사를 나누어요. 늘씬하고 눈도 엄청 커요. 목사님은 잘 모르시지만 저는 알잖아요. 드라마 다 보니까! ‘누구야!’ 목사님이 물으셨어요. ‘아 예, 아주 잘 나가는 여자 탈렌트입니다.’ 제 눈이 휘둥그래졌으니까 질풍노도의 청년들은 그냥 그 눈에 빨려 들어갈 듯한! 실제로가 화면보다 낫더라고요. 이런 인기를 찾아서 사람들이 난리입니다. 그게 삶의 반석이고 인생의 돌산 같은 역할을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인기라는 게 마약 같은 성격이 있습니다. 이 인기라는 게 사라지면 금단현상이 생깁니다. 요즘 보면 그 송승헌이가 제대 했잖아요. 걔처럼 스캔들이 나고서 군대가고 그리고 제대해도 일본에서 아줌마들 떼거지로 몰려와서 인기가 그대로이면 좋은 데 그런 경우가 드뭅니다. 많은 연예인들이 잊혀져 버립니다. 자기는 이제 사람들이 식상해 하고, 또 새파란 후배들이 막 치고 올라오니까! 그러면 인기가 시들해지거든요. 그게 일종의 공식인데 당사자는 이것을 버티어내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방송국에서 전화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립니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그래, 이번 드라마에는 부르겠지.’ 그러다가 좀 지나면 ‘너희들이 그럴 수 있어.’ 하면서 화를 막 냅니다. 이렇게 되다가 나중에는 거의 우울증 증세를 보이기도 합니다. 이 상황을 이겨내면 연예인들이 롱런을 하게 되고, 그렇지 못하면 폐인 비슷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제가 연예계통 쪽에 분석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연예인들이 보면 연기에만 모든 것을 걸지 못하고 양다리를 걸칩니다. 그만큼 연예계가 부침이 심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처럼 닭집내고 TV 나와서 막 닭 얘기하고, 누구는 무슨 해장국집, 별의 별 식당들, 연예인 이름 걸고 많이 하잖아요. 그게 다 인기라는 것이 자기 인생의 반석이나 돌산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일종의 지혜이지요.
그러면 권력이 반석이며 돌산인가? 아니지요. 밀리면 끝장 나는 것이 권력입니다. 보세요. 지난 정부에 최고요직에 있던 사람들이 주로 많이 가는 곳이 어디입니까? 서울구치소, 교도소입니다. 권력자 최측근들이 거의 빠짐없이 감옥에 갑니다. 이게 뭐냐하면 밀리면 끝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 보면 바쁜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디에다 연결되면 끝장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리 계산 저리 계산하느라고 바쁜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들 스스로가 권력이 반석도 아니며 돌산도 아니며 이리 저리 흐르는 성격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뭐가 돌산이고 뭐가 반석이며 뭐가 시온산이어서 요동치 않는 것인가? 시편 기자는 그게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고 하나님 그 분이 반석이고 요동치 않는 시온산과도 같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 우리 믿음에서 뭐가 문제입니까? 그냥 하나님을 든든하고 요동치 않는 시온 산으로 여기며 신뢰하며 살면 되는 데 뭐가 문제일까요? 문제는 뭐냐 하면 우리에게 많은 문제가 있는 데 그 문제들에 대해 하나님이 영 시온 산 같지 않아 보일 때가 너무도 많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을 시온 산처럼 여기기 힘들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여러 문제들이 있잖아요? 누구와 평생을 살아갈 것인가? 새파란 후배는 장가간다고 설치는 데 내 앞에는 무슨 세미한 징조도 없고! 갑갑합니다. 또 생업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 이것도 쉽지를 않습니다.
며칠 전 심방을 갔다 왔는데 이 분이 한 중소기업의 인사담당임원이십니다. 중소기업이래도 꽤 탄탄한 회사입니다. 그 회사에서 비서를 한명 채용할려고 광고를 냈답니다. 비서 1명 모집! 그런데 이력서가 몇 장이나 들어온 줄 아세요. 무려 1600장! 검토하는 데만 사흘이 꼬박 걸렸답니다. 지금 젊은 시기의 방향의 문제가 그만큼 심각합니다.
이런 문제 저런 문제들이 여러분 가운데 있고, 또 여러분의 앞에 놓여져 있습니다. 우리의 질문은 이런 문제들에 과연 하나님께서 시온 산과 같은 반석과 돌산의 든든하고 견고한 해결책의 역할을 해 주실 것인가하는 점입니다. 이런 나의 중요한 문제에 믿음이 연결되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연결되지 않으면 믿음 따로 생활 따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구약 성경을 볼 때 그 큰 줄거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이며, 믿음에서 떠나가는 것은 무엇인가 그 질문을 구약의 역사가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거든요. 그게 뭐냐하면 ‘너의 가장 중요하고 절실하고 치명적인 문제에 하나님은 과연 무엇이냐?’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그냥 믿기는 어떻게 보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천국을 보장해주는 믿음, 영생복락을 확보해주는 믿음, 그것은 나쁘지 않지요. 그 믿음은 오케이예요. 나쁠 게 없잖아요. 계산적으로 따져봐도 지옥보다는 천국이 낫고, 영원한 멸망보다는 영생복락이 낫고, 그것을 보장하는 믿음! 알고 나면 절대로 나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그 장래일 말고 지금 나의 가장 중요한 문제, 내 진로, 내 생업, 내 터전, 내 관계, 내 환경, 나의 만남, 이런 나의 중요하고 결정적인 문제에 과연 믿음을 끌어들이고, 내가 하나님을 의뢰해서 이 문제를 해결해 가느냐, 거기에 우리의 믿음이 있는 것이거든요.
사실 사울왕과 다윗을 비교하면 사울이 더 탁월한 사람입니다. 그는 많은 방법론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인기를 어떻게 끄는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알았고,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갔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살아갑니까? 자신의 가장 중요한 문제에 하나님을 개입시키지를 않습니다. 자기 머리로 자기가 다 해버립니다. 여기가 그가 사사 사무엘과 충돌했던 지점이거든요.
그러나 다윗은 어떠냐 하면 도대체 뭘 몰라요. 능력이 너무 없어요. 자기가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어요. 그래서 그는 자신의 문제, 중요한 문제는 물론이고, 사소한 문제까지 하나님께 가져갑니다. 가서 미주알 고주알 다 얘기합니다. ‘하나님, 이게 이만 저만 합니다. 제 능력으로는 힘듭니다. 저것도 이만 저만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사사건건 다 이럽니다. 하나님이 괜찮을 정도입니다. 시편이 주로 다 그런 내용인데 다윗이 보면 하나님을 참 피곤하게 만드는 스타일입니다. 이것 저것 별 것도 아닌 것을 다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게 다윗의 믿음으로 나타나고, 또 우리에게 요청하는 말씀의 믿음으로 보여집니다.
우리가 가끔 ‘기도의 거성, 기도의 거장, 기도의 종’ 이런 말을 붙이는 사람들이 교회사에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도에 뭐 위대한 철학이 담겨있고, 이데올로기가 담겨있고, 세상을 위한 굵직한 사상이 담겨있고, 그런 게 아닙니다. 정말 쓸데없는 것이다 싶은 것도 다 하나님께 얘기합니다. 보면 우리 집 애들이 정말 엄마가 귀찮을 정도로 이것 저것 묻거든요. 별 거 아닌 데 큰 애 묻고 나면, 작은 애 묻고, 그 다음에 한참 큰 애가 묻고, 별 거 아니거든요. 뭐 큰 영성이 담긴 그런 질문도 아니고, 무슨 신앙의 중요한 획을 긋는 그런 질문도 아닙니다. 그냥 별 거 아닙니다. 그래서 엄마가 힘들지요.
그런데 기도의 거장들의 기도를 보면 그냥 기도가 그래요.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다 자기 힘으로 하면 될텐데, 하나님께 다 얘기합니다. 오늘 새벽에 얘기한 걸 내일 또 하고, 모레 또 하고! 정말 하나님 피곤하겠다 그럴 정도로 기도하고 또 합니다. 그런데 그게 좀 쌓이고 시간이 오래되었다고 그런 사람들을 기도의 종, 기도의 거장, 이렇게 부릅니다.
그래서 결국 믿음이란 게 뭐냐하면 나의 가장 디테일한 문제들, 델리킷한 문제들, 내 가장 관심이 되는 문제들, 나를 지금 가장 힘들게 하고 괴롭히는 문제들, 경제적인 문제, 진로의 문제, 인간관계의 문제, 환경의 문제들, 심리적인 문제들, 이런 문제들을 하나하나 다 하나님께 가져와야 믿음이 믿음 된다는 그 말입니다. 그게 바로 본문에서 말하는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의 의미가 됩니다.
그렇지 않고 내 문제는 내가 내 방식으로, 그리고 내 마음이 끌리고, 내 욕심이 끌리는 방향으로 풀어갈려고 하면서, 내가 교회 다니니까, 내 가족이 교회 다니니까, 교회 다니는 것 나쁘지 않으니까, 또 갈보리 교회 아주 환경 좋은 곳에 있으니까 야외에 나오는 기분으로 오는 것, 또 여기서 오래 다니고 결혼하고 애기까지 놓으면 좋은 어린이집도 있으니까, 이래서 그냥 그냥 다니면 그게 결국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 삶과 신앙이 분리되어 어느 시점에는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게 되는 그런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왜 힘든가? 왜냐하면 하나님이 시온 산 같지 않아요. 멀리 계신다고 여기니까 그냥 멀리 계시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왜 그런가하면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것을 ‘퀵 서비스’를 잘 안 해 주시거든요. ‘하나님, 저 아시지요. 제가 지금 이만 저만 하고, 이게 이렇게 되어 있고, 저게 저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이런 해결이 꼭 필요합니다.’ 처음 은혜 받았을 때는 이런 모습이 분명 있습니다. 이런 기도가 있고, 이런 intimacy, 친밀감이라고 부르지요, 그런 게 있습니다.
그런데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세 번 하고, 이렇게 기도하는 데 이 응답이 제 때 배달이 안돼요. 처음 할 때는 좀 잘 들어 주시는 것 같고, 그래서 ‘와 이게 소위 영빨인가?’ 이런 생각도 드는 데 믿음 생활을 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영 잘 응답을 더 잘 안해 주십니다. ‘하나님, 제 문제가 이런 데 어떻게 되가는 겁니까? 도대체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묵묵부답! 하나님이 배달사고를 자꾸 내십니다. 이러면서 하나님이 마음에 영 잘 들지 않아지길 시작합니다.
그런데 또 뭐냐 하면 저 동네 예수 믿지 않는 것들! 쟤들이 내가 원하는 것들을 하나님 통하지 않고도 잘 얻어요. 쟤는 벌써 킹카를 세 번씩이나 바꾸고. 나보다 영 시원치 않은데! 다 손댄 얼굴인 거 내가 잘 아는 데! 쟤는 버글 버글 한 것 같은 데 나는 파리만 날리고!
나한테는 퀵 서비스를 잘 안해 주시고 주문해도 배달도 잘 안해 주시고 배달사고도 자주치시는 것 같은 하나님! 이런 하나님이 영 시온 산과는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내 절실한 문제에 영 든든하지 않은 하나님으로 보입니다. 이게 우리 믿음에 놓여 있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하나님의 지키심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가 받는 복이 뭔가? 과연 믿음이 뭔가? 어떤 하나님을 우리가 믿는 것인가?
시편 기자는 여기서 하나님의 지키심을 두 가지 모습으로 설명을 합니다. 첫째는 2절과 또 4절에서 나타납니다. 먼저 2절을 보세요.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그리고 4절을 보세요. ‘여호와여 선인에게와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선을 행하소서.’
여기서 보면 믿음으로 살며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를 시편 기자는 ‘선인’ 혹은 ‘마음이 정직한 자’라고 표현합니다.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선을 행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 믿음을 지켜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산들이 예루살렘을 둘러침과 같이 영원토록 둘러쳐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게 2절과 4절의 요약입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은 성전의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이고 예배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에서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정직한 마음입니다. 애통하는 마음, 통회하고 자복하는 마음, 가난한 마음, 이런 마음을 원하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가장 원하시고 또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신다는 말이 됩니다. 왜냐하면 신약적으로 보면 성전과 성소가 우리 마음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우리 믿음을 지키신다는 것은 곧 우리의 마음을 지키신다는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내적인 보호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미 아시고 계시겠지만, 이 마음이란 것이 아주 델리킷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간창조에서 가장 탁월한 부분이며 극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한 마귀의 주된 타깃이 되고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마음이 영적 전쟁의 가장 치열한 현장이게 됩니다. 주의 성령은 이 마음을 지키셔서 믿음을 불러일으키시려고 하고, 또 악한 마귀는 이 마음을 상처입히고, 생채기나게 하고, 피폐화시키기 위해서 자기의 모든 수단을 다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마음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성소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주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부글 부글 끓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부글 부글 끓게! 끓어서 흘러 넘쳐서 자기 마음도 상하고 남 마음도 상하게 그렇게 만듭니다. 끓어 넘치는 화끈하다는 소리도 듣고, 속도 시원하지만 주위에서 그 열에 데게 됩니다. 화끈거리고 물집이 생기고 아리고 쑤시고,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덴 사람이 또 언젠가는 폭발해 버립니다.
이 본문의 배경에 대한 해석 중에 하나가 뭐냐하면 바벨론에서 돌아와 성전 재건을 하는 유다 백성들에게 힘든 일이 생긴 것입니다. 뭐가 힘드냐하면 옆에 있던 사마리아 사람들이 와서 자꾸 말로 훼방을 합니다. ‘어이구, 하나님께 저주받아 떠돌아다니던 놈들이 뭐 성전을 다시 짓는다구. 아서라 아서. 바보같은 놈들’ 이 정도는 아주 약과겠지요. 사마리아사람들이 아주 독한 말, 자존심 상하고 마음을 후벼 파는 말들을 계속 한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듣고서 사람이 어떻게 됩니까? 부글 부글 끓지요. 속에서 치밀어 올라옵니다. 다 때려치고 한 판 붙고 싶어요. ‘너만 입있냐’ 하며 한 바탕 해주고 싶습니다. ‘너, 내 성깔 한 번 볼래’ 이렇게 한 번 해대고 싶습니다. 분위기 그렀습니다.
우리가 소위 많이 듣는 ‘신경성’이란 게 있습니다. 신경성 위염, 신경성 대장증상, 이게 뭐냐하면 제가 의사친구한테 들은 얘기인데요. 의사도 잘 모르는 병이랍니다. 그것을 뭉뚱그려서 나오는 대답이 ‘신경성’이랍니다. 답도 없고 약도 없습니다. 이게 뭔가 하면 화가 속에 차서 그렇거든요. 그게 쌓여서 나타나니까 화가 청진기에 잡힐리도 없고, 엑스레이나 MRI를 찍어도 나타나질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 배가 아프고 아랫배가 살살 아픕니다.
이런 인생의 상황들이 있는 데 그 상황에서 은혜가 무엇인가를 지금 시편 기자가 얘기합니다. 결국 은혜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지켜주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시편 기자의 고백입니다. 내 성질대로 못하게, 내 욕망대로 못하게, 내 생각대로 못하게, 그래서 마귀가 충동질을 못하게 지켜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은혜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무 생각도 없는 게 아주 아주 큰 은혜입니다. 그래서 보면 은혜를 많이 받으면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을 잘 못알아 들어요. 특히 그 현장에서 잘 못알아 들어요. 그래서 상대가 막 독을 품어 뭐라고 해도 잘 이해를 못하니까 그냥 뚱하니 집에 갑니다. 집에 가서 뭔가를 좀 생각하는 데 그래봐야 이미 늦었습니다. 그냥 집에서 좀 씩씩 대다가 말아 버립니다. 이게 큰 은혜입니다.
남이 무슨 말 하면 그것을 다 이해하고 그 속뜻까지 다 생각하고, 거기다가 추론과 설명까지 더해지는 그런 능력이 있으면 그게 정신병 시초입니다. 골치 아파서 어떻게 사나 몰라요.
그래서 욥기에 보면 푸른 가지와 마른 가지 얘기를 마른 가지는 불에 금방 타버립니다. 그러나 푸른 가지는 잘 타지 않습니다. 겨우 불이 붙는 듯하다가 피식 꺼져 버립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지켜주시면, 그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면, 사람의 마음이 푸른 가지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싱싱하게 보전하면서 계속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은혜를 하나님께 받을려면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불이 날려는 마음을 자꾸 얘기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여기가 지금 쟤 때문에 열이 날려고 해요. 하나님 저쪽이 걔 때문에 불꽃이 좀 일어나요. 하나님 비좀 내려 주세요. 물 좀 뿌려 주세요.’ 이렇게 정직하게 자꾸 얘기하면 하늘에서 비가 와요. 다른 사람은 몰라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그 마음이 정직하고, 그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비를 내려 주십니다. ‘빈들에 마른 풀 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중간 생략-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생명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둘러주십니다. 지켜주십니다. 그게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가 받는 축복입니다.
두 번째 축복은 3절과 5절에 나타납니다. 3절, ‘악인의 권세가 의인의 업에 미치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으로 죄악에 손을 대지 않게 함이로다.’ 또 5절을 보세요.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를 여호와께서 죄악을 짓는 자와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찌어다.’
여기에 나타나는 것은 일종의 외적인 보호하심과 지키심입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이 소위 ‘의인의 업’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삶을 말하며 믿음의 기업, 믿음의 분깃을 말합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얻는 구원의 축복을 말하고, 또 이차적으로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하나님의 가시적인, 눈에 보이는 열매들을 말합니다. 소위 우리가 많이 듣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의인의 업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것은 뭐냐 하면 이 의인의 업이 악인의 권세로 말미암아 해를 당하지 않게 보호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에서 사울왕이 다윗을 좇아다닐 때를 보세요. 사울이 정보망을 가동해서 다윗을 거의 잡습니다. 빠릿 빠릿하게 행동해서 거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해 냅니다.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갑니다. ‘반경 1km 안에 있다.’ 그래서 이 정도의 정밀한 정보를 얻는 것을 사무엘서에서 우리가 보게 됩니다. 이러면 거의 잡힌 것입니다. ‘다윗이 분명 요 오데에 있겠다.' 여러분 ‘요 오데’란 말 아세요. 우리 시골말인데 아주 정감있지 않아요. 요 오데, 이 근처란 말이지요, It might be around this place! 이 정도로 다윗의 위치를 파악합니다.
그런데 결정적일 때 타겟을 놓칩니다. 다윗이 숨은 그 동굴에 사울왕이 들어갔는데 거기서 잠을 자버립니다. ‘아, 졸려!’ 그리고는 다윗이 오히려 사울의 겉옷자락을 베어서 옵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의인의 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면 믿음의 사람은 시작이 좀 어설퍼요. 저렇게 해서 과연 되겠나 싶어요. 어리버리 비슷한 모습입니다. 시작이 대개 이렇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그 뜻이 어리버리하게 시작,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한 걸음 한 걸음 믿음으로 갈수록 점점 방향을 잡아갑니다. 그리고는 결정적일 때 아주 아주 정확하게 세밀하게 판단을 하고 결정을 하고 선택합니다. 왜냐? 성령께서 세미한 음성으로 함께 하시니까요. ‘야, 걔 사기꾼이야’ 결정적일 때 이 마음이 듭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소리예요. ‘야, 걔는 wind boy야’ 여러분, wind boy 아세요. 바람둥이, 다른 말로 하면 playboy! 성령께서 결정적일 때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를 지키시고 의인의 업을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런 지키심과 보호하심을 얻나? 이게 문제지요. 그 사람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우선 순위를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주시는 사랑과 기쁨, 죄의 용서, 예배 때 주시는 하늘의 감동! 이게 눈에 틔질 않습니다. 또 사람들이 이것을 중요하다고도 잘 여기질 않습니다. 경제적인 값어치가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그래서 자주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죄악에 좀 손을 좀 대더라도 눈에 보이는 것을 붙들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좀 죄가 묻어 있어도 세상 사람들이 복이라고 하는 것을 붙잡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에게는 영혼의 구원, 우리가 예수의 피로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는 것, 이게 가장 큰 축복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축복을 설사 희생시키는 자리가 와도 이 심령의 복을 붙들어야 합니다. 이 심령의 복과 물질이나 자리나 번영이나 이런 세상사람들도 다 복이라고 여기는 복이 갈등할 때 심령의 복을 선택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테스트입니다. 하나님은 그 성도의 업을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이 복의 원리를 우리가 붙들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하나 더, 5절에 나오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지키시나 ‘악인이 자기의 굽은 길로 가게 두시는 것’ 그게 하나님의 외면적 보호하심의 또 다른 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더 교만하게 놔두십니다. 그래야 빨리 패망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이 자꾸 교만을 더 떠는 경우, 그것은 일종의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봐야 합니다. ‘아, 하나님의 시간이 다가오는구나.’ 그런 판단을 믿음의 사람들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이 뭐냐하면 교만한 사람이 멀리 저쪽에서 교만을 떨면 좋은 데 나의 가장 가까운 데서 교~만하게 행동할 때입니다. 이러면 힘들지요. 피곤합니다. 지치기도 합니다. 이러다가 어떤 마음이 드냐하면 ‘너 나 한 번 보자. 너 제대로 나한테 걸렸다.’ 이러면서 내가 그 사람을 패망시키려고 합니다. 나가 그 사람을 심판하려고 합니다. 이게 아주 큰 시험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에 보면 주님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 데,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씌여진 옷을 입으시고 다리에도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이렇게 글씨가 씌여져 있습니다. 이게 뭐냐하면 성도들이 그 옷속으로 쏙 들어가면 주님이 악한 자를 다리로 파삭 밟으신다는 그런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피하는 것이 우리 믿음이고 심판은 주님께서 직접하신다는 그런 뜻입니다. 교만한 자를 주님의 다리로 파사삭 밟으시기 때문에 교만한 자가 교만하게 가만 두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망치는 게 누구냐 하면 주님이 주신 옷을 막 벗고 자기 다리로 다 밟으려고 돌아다니는 사람입니다. ‘너 함 와봐. 내가 요절을 낸다.’ 이러면서 다리 걷고 막 돌아다닙니다. 이 사람이 믿음의 역사를 망치는 사람입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의인의 업을 지키시고 교만한 자를 판단하시어서 성도를 보호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 복입니다.
Conclusion: 사랑하는 갈보리 청년 여러분, 여러분이나 저나 다 요동이 많은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기술과 문명이 발달하니까 점차 평화로워지겠지.’ 그렇게 생각하시면 큰 오산입니다. 기술의 발달과 문명의 진보가 우리를 더 복잡하게 하고 시끄럽게 하는 면이 더 많아요.
평강이 어디 있나?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을 붙잡아 주셔야 합니다. 그것을 잊지 마세요. 그게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앞길, 여러분의 분깃을 붙들어주시고 교만한 자를 막아주셔야 합니다. 거기에 평강이 있습니다. 이런 감사의 계절에 하나님의 이 평강과 축복이 하나님을 의뢰하는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Prayer: 하나님 아버지, 여러 가지 상황들이 우리를 요동케 하는 때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사모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주님의 손으로 지켜주시옵소서. 약속하신 기업과 분깃을 주님께서 둘러쳐 보호해 주시고 그래서 주님의 허락하신 구원과 평강을 경험하게 하시옵소서. 겸손한 자를 높이시며 교만한 자를 판단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게 하시옵소서. 이 감사의 계절에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생각하며 풍성하게 감사를 드리는 마음들 되게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