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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驪興閔氏 大宗會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민병권[閔丙權]
남양홍씨 파조 홍춘경
영의정 홍서봉 조부 홍춘경은 이 가문의 파조다. 홍춘경은 1497년에 태어나 1548년에 몰했다. 자는 명중, 호는 석벽이다. 1528년 문과, 1536년 문과중시에 장원하여 예조참의가 되었다. 1541년 명나라에 다녀온 뒤 좌승지, 한성부 우윤, 황해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권문에 아부하는 자를 싫어했으며 청렴 강직했다. 남영부원군에 봉해졌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파조 홍춘경은 아들 천민[문과 도승지], 일민[현감], 성민[문과 대제학 호조판서 시호 문정]을 두었다. 도승지 천민은 아들 서룡[군수], 서봉[문과 영의정 대제학 시호 문정]을, 군수 서룡은 손자 처량[문과 이조판서 시호 정정]을, 영의정 서봉은 아들 명일[문과 관찰사]을 두었다. 현감 일민은 손자 명원[문과 관찰사], 명형[문과장원 우승지 시호 의열]을 얻었다.
대제학 성민은 아들 서익[문과 병조참의]을, 서익은 아들 명구[문과장원 관찰사 시호 충렬], 명하[문과 영의정 시호 문간]를 두었다.
남양홍씨 도승지 홍천민의 아들 군수 홍서룡 집
홍서룡의 아버지 홍천민은 1526년에 태어나 1574년에 몰했다. 자는 달가, 호는 율정이다. 1553년에 문과하여 사가독서를 했다. 그뒤 대사간, 대사성 등을 거쳐 1566년 도승지에 이르렀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영양부원군에 봉해졌다. 교지 작성에 뛰어나 도승지를 여러 번 지내고 청렴했다. 군수 홍서룡의 손자 처량은 1607년에 태어나 1683년에 몰했다. 자는 자회, 호는 북정이다. 1637년에 문과하였고, 1646년에 문과 중시에도 급제하였다. 그 뒤 승지, 대사성, 예조참판, 개성부 유수 등을 거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정이다. 이조판서 홍처량의 손자 이도 집에서 문무관이 많이 나왔다. 홍이도는 무과하여 부총관을 지냈고, 이도의 아들 호인은 1706년 문과에 장원하여 충청도 관찰사, 경기수군절도사, 함길도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1744년 한성판윤에 올랐다.[호인은 맏 아버지 집으로 양자를 갔다.] 이도의 적은 아들 위인도 무과하고 그 손자 병익은 문과에 좌부승지, 병익의 아들 만섭도 문과에 대사간을 지냈다. 만섭의 후에 공인회계사 홍형기가 있다. 만섭의 동생 환섭의 후에 교수[박사] 홍성찬, 원호지청장 홍영표가 있다. 위인의 동생,희인 보인 채인 집에서도 무과급제가 여남은 장이 나왔다. 이도의 동생 언도 집에 홍주익과 재찬은 문과하여 정언, 교리를 지냈다. 재찬의 후에 조선일보 회장 홍순필, 한의대 교수 홍순승, 한의사 홍성헌이 있다. 언도의 적은 아들 철인 후에 교수 홍성칠이 있고 그 아들 정기는 고시를 합격했다.
이조판서 홍처량의 동생 처임 후에 청와대 정무비서관 홍성환이 있다. 처의 후에 홍재구, 종운은 문과에 교리, 승지를 각각 지냈다. 처징 후에 문과에 정언 홍찬섭이 있고, 극동도시가스 이사 홍성신이 있다.
남양홍씨 도승지 홍천민의 적은 아들 영의정 홍서봉 집
남양홍씨 관찰사 석벽 홍춘경 가문은 문과 97, 당상관 32, 종2품 24, 판서급 23에 상신 6명으로 과환에서 앞에 이야기한 여흥민씨, 해평윤씨, 풍산홍씨 각 가문을 앞선다. 남양홍씨 관찰사 석벽 홍춘경 가문의 상신 6명은 영의정 홍서봉 홍명하 홍치중 홍순목 4명, 좌의정 홍영식 1명, 우의정 홍중보 1명이다.
영의정 홍서봉은 석벽 홍춘경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의 한 사람이다. 홍서봉은 1572년에 태어나 1645년에 몰했다. 자는 휘세, 호는 학곡이다. 1594년에 문과, 1608년에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사가독서했다. 1610년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예조, 이조, 병조의 판서를 지냈다. 1636년 우의정에 올랐으며 곧 좌의정에 이르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명길과 함께 화의를 주장했으며, 이경직과도 함께 청나라 진영에 왕래하며 화의를 주선했다. 1640년 영의정이 다시 되었으며 익녕부원군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정이며 기로소에 들었다. 시문에 뛰어났다.
영의정 학곡 홍서봉의 아들 명일은 1633년 문과,1636년 문과 중시에 급제하고, 대사성 강원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관찰사 보옹 홍명일의 적은 아들 처우 후손에 성연[문과 대사헌], 성연의 아들 수만[문과 이조참판], 수만의 아들 중섭[문과장원 부승지], 수만의 적은 아들 원섭[문과 공조판서] 3대 4조손이 문과하여 현달했다.
대사헌 홍성연의 큰집 종손자 익섭은 문과하여 경주부윤을 지냈다. 부승지 홍중섭 후손에 판사를 지내고 변호사를 하는 홍성우가 있다. 홍처우의 적은 아들 구채의 후손[증손]에 낙연[문과 승지], 대학학장[박사] 성렬이 있다. 구채의 동생 구행은 유고가 있고, 구행의 후손에 종숙[유고 3권], 종숙의 후손에 소설가 성유, 신일제약 회장 성국, 신일제약 전무 성소가 있다. 홍처우의 동생 처주는 부사, 처주의 증손 경안[문과 승지], 경안의 아들 대연[목사], 대연의 후손에 농촌진흥청 시험장장 순범이 있다.
대연의 적은 아들 영근[무과 중군], 영근의 손자 재진[무과 오위장], 재진의 아들 종덕[무과]이 있다. 목사 대연의 동생 시연의 후손에 만섭[문과 이조참의], 순복[서울대교수]이 있다. 시연의 동생 학년[문과 공조판서], 학년의 아들 병수[문과 형조참판]가 있다.
부사 처주의 손자 응필의 후손에 순갑[독립운동가]이 있고, 처주의 손자 경희의 후손에 종성이 유고가 있고, 종성의 아들 순태[서울대교무처장], 순태의 아들 건표[독립운동가], 건표의 아들 성구[전문의]가 있다.
남양홍씨 관찰사 홍명원의 아들 관찰사 홍처후 집
현감 일민의 손자 홍명원은 1573년에 태어나 1623에 몰했다. 자는 낙부, 호는 해봉이다. 1597년 문과하여 동부승지에 올랐다. 그 뒤 광주목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표리 한벌을 하사받았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경기도 관찰사에 승진하여 반정 후의 치안 유지에 힘썼다. 한대의 문장과 당대의 시에 정통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홍명원의 아들 홍처후는 1599년에 태어나 1673년에 몰했다. 자는 덕재, 호는 성암이다. 1629년에 문과하여 1633년 정언으로 윤집, 오달제와 함께 화친을 주장하는 최명길을 탄핵하였다가 제천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659년 경상도 관찰사, 1673년 경기도 관찰사 등을 거쳐 공조참판에 올랐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충장공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홍처후의 아들 홍수하는 문과하여 장령을 지냈다. 홍명원, 처후, 수하 3대가 문과를 하였다. 홍수하의 손자 홍계적은 1680년에 태어나 1722년에 몰했다. 자는 혜백, 호는 수헌재이다. 1708년 문과하여 1719년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대사헌으로 노론의 선봉이 되어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했다. 신임사화로 흑산도에 유배되었다가 다음해 역모에 가담했다는 죄로 서울에 압송되어 문초를 받던 중 옥사했다. 영조 즉위 후 신원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충간공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1732년 부조의 은전이 내렸다.
홍계적의 맏집에 증손 홍재현이 있다. 홍재현은 헌종 국구 홍재룡과 재종[6촌]간이다. 홍재현은 1815년에 태어났다. 자는 경옥이다. 1859년에 문과하여 1867년 대사성이 되었으며 1875년 이조참판에 올랐다. 그 뒤 강원도 관찰사, 한성부 판윤, 형조와 예조의 판서를 지냈다.
남양홍씨 관찰사 홍처후의 적은 아들 부사 홍수량과 이조판서 홍수헌 집
1, 홍수량은 1626년에 태어나 1697년에 몰했다. 자는 청숙, 호는 규헌이다. 1662년에 사마시에 장원하고 강릉참봉을 거쳐 순흥 도호부사에 이르렀다. 덕망이 있고 공정한 관리로 소문이 났다. 시문에 뛰어나고 글씨를 잘썼다.
홍수량의 아들 홍우서는 1662년에 태어나 1716년에 몰했다. 자는 중웅, 호는 서암이다. 1702년 문과에 장원하고 수찬, 교리 등의 직을 수행했다. 임금에게 직언을 서슴치 않다가 무안으로 귀양갔다. 1714년에 대사간이 되고 동부승지, 우승지 등을 지냈다. 시문에 능하고 당대 명필로 이름이 높았다.
홍우서의 손자 조영은 효자로 정려가 내렸다. 조영의 아들 상정은 유고가 있고 상정의 아들 언섭은 문과에 장령을 지냈으며 언섭의 아들 재은도 문과하여 주서가 되었다. 홍우서의 적은집 손자 문영은 문과하여 대사성을 지냈다.
2, 홍수헌[홍수량 동생]은 1640년에 태어나 1711년에 몰했다. 자는 군택, 호는 담포이다. 1682년 문과하여 함경도 암행어사로 나갔다와서 대사성, 대사간 등을 거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이다. 담포 홍수헌 이후 후손의 활동이 거의 없었다. 현대 인물로 수산협동조합중앙회 부장 홍성관, 대산약품상사 대표 홍성훈 형제, 진주시 부시장 홍남표, 축구 국가 대표 선수 홍성구, 사세청 국장 겸 세무대학 교수 홍종석이 있다.
남양홍씨 관찰사 홍명원의 적은 아들 관찰사 홍처윤 집
1,관찰사 홍처윤의 아들 홍수기 집
홍수기의 아들 우악은 현감 우악의 후손에 계은[병조참의], 구섭[문과 정언]이 있다. 현대 인물로 한기[인천대 교수,박사]가 있다.
홍수기의 적은 아들 우승의 후손에 종찬[문과 교리]이 있다. 현대 인물로 홍익표[재무장관, 6선 국회의원],익표의 아들 성철[의학박사], 석환[안양관광호텔 회장], 성초[한의대 교수] , 성초의 아들 석기[철학박사], 은표[대륭실업 사장], 은표의 아들 성목[입교실업 부사장]이 있다.
2, 관찰사 홍처윤의 적은 아들 수범, 수서, 수주[문과 관찰사] 집
홍수주는 1642년에 태어나 1704년에 몰햇다. 자는 구언, 호는 호은이다. 1682년에 문과하여 정언, 장령 등을 지냈다. 동부승지 재임시 원접사가 되어 청나라 사신들에게 능숙한 문장과 글씨로 격찬을 받았다. 충청도와 경기도의 관찰사를 지냈다. 그림도 잘 그렸는데 대나무와 포도 그림이 훌륭했다.홍수주의 후손 중 현대 인물로는 성재[한도공업 전무]가 있다. 홍수서의 후손에 병성[문과 대사간], 병성의 아들 지섭[유고 5권]이 있다.
남양홍씨 관찰사 홍명원의 아들 관찰사 홍처대 집
홍처대는 1607년에 태어나 1676년에 몰했다. 자는 중일, 호는 역헌이다. 1639년에 문과하여 황해도 암행어사로 다녀왔다. 그 뒤 경주부윤, 호조와 병조의 참판, 도승지 등을 지내고 [현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1676년 영남의 시험을 관장하기 위해 임지에 가는 도중 군위에서 죽었다.
홍처대의 적은 아들 수관은 현령, 수관의 아들 우령은 1707년에 문과하여 경상도 관찰사,우령의 손자 종해는 문과에 장원하여 대사간, 종해의 손자 면섭은 문과하여 대사성, 면섭의 손자 종영은 이조참의, 종해의 적은 아들 병순의 후손 순학은 문과에 이조참판을 각각 지냈다. 수관의 동생 수인은 군수, 수인의 아들 우집은 현령을 지냈고 우집의 후손에 효섭[유고 5권]이 있다. 효섭의 아들 재중은 문과에 승지, 효섭의 종후손에 현대 인물로 순준은 교수 평론가, 순준의 아들 인표는 대농 이사를 각각 지냈다
남양홍씨 달빛 아래 궁궐을 침입하고
달빛 아래 검객 50여 명이 임금이 잠든 궁궐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20-30미터 앞 적의 심장을 향해 단도를 던져 꿰뚫을 수 있는 용사들이다. 이승엽의 홈런 공 넘어 가듯 8척 담을 뛰어 넘는 장사 들이다. 기마 무예는 몽골의 정예부대를 필적할 만했다. 검은 갓에 도포를 차려 입은 홍상범 옆에 있는 전흥문은 이 50여 명을 지휘하는 두목으로서 일당백의 걸출한 검객이다. 궁궐 담을 넘으라는 신호가 떨어지자 검객들은 하나 둘.... 궁궐 담장을 뛰어 내렸다. 경추문을 지키던 위장 김춘득은 그들 앞을 막아섰다. 담을 뛰어 내리며 채 몸을 가누기도 전에 김춘득의 환도가 번쩍였다. 날쌔기가 번개와 빛과 같았다. [아악..] 비명 소리를 지르며 하나 둘 쓰러지는 복면 괴한의 앞에 나타난 두목 전흥문 비호 같이 몸을 날려 위장 김춘득의 목덜미를 엄습했다. 김춘득은 숙위소 날랜 군사 중에 검술로는 첫손가락 꼽는 자다. 김춘득이 날쌘 칼을 피하며 사자처럼 포효한 후 미친 듯 칼춤을 추었다.
두목 전흥문은 아직 적수를 만나보지 못한 검술의 고수로서 경추문 위장의 칼솜씨에 약이 바싹 올랐다. 숙위소 군사들과 복면 괴한 사이의 칼 싸움은 격렬했다. 기합 소리, 칼 부딪치는 소리, 비명, 호통, 절규 등이 고요하던 달밤을 흔들었다.
복면 괴한 들의 칼날에 쓰러지는 숙위소 군사들이 많기는 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숙위소 군사들이 늘어났다. 시간이 갈수록 월장한 검객들은 패색이 짙어 졌다. 이에 칩입자들은 경추문을 안에서 열고 모두 도망쳐 버렸다.
아직까지도 김춘득과 칼싸움을 벌이고 있던 전흥문은 숙위소 군사들에게 두서너 겹으로 둘러 쌓였으며 생포되고 말았다.
이로써 새 임금으로 은전군을 추대하려던 거사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관찰사를 지낸 홍술해 아들 홍상범은 집안 아저씨인 홍필해의 집에서 새 임금 옹립 모의를 마치고 실행에 옮기다가 실패하였다.
홍술해의 아버지는 홍계희이다. 홍계희는 1703년에 태어나 1771년에 몰했다. 자는 순보, 호는 담와이다. 1737년[영조13년] 문과에 장원하여 부제학, 대사성을 지냈다. 그 뒤 병조와 이조의 판서 한성부 판윤 등을 지내고 편집 당상으로 [열성지]를 증보하고 왕명으로 [해동악]을 지었으며 대제학에 보직되었다. 1762년 경기도 관찰사로 김한구, 윤급 등과 함께 나경언의 상변사건을 일으켜 영조로 하여금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의 하나다. 홍계희는 예조참판 홍우전의 아들이다. 우전은 관찰사 홍명원의 증손이며, 관찰사 충장공 홍처후의 종손자이다.
홍계희의 아들 홍지해는 1752년[영조28년]에 문과하여 이조참판, 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아버지를 따라 벽파로서 홍인한, 정후겸 등과 정조의 즉위를 반대했다. 홍계희의 아들 술해, 경해, 찬해도 모두 문과하여 현달했다. 그러나 영조가 죽고 정조가 즉위하자 홍계희의 아들, 손자에 대한 조정의 핍박이 가해졌다. 이에 울분을 참지 못해 조정에 불만을 품은 자들을 모아 궁궐을 범했다. 두 아우 술해, 찬해와 아들 상간이 모두 대역죄로 처형되었다.
남양홍씨 "돈 잃은 사람은 찾아가오"
홍기섭은 젊어서 무척 가난했다. 어느 날 새벽에 어린 계집종이 펄쩍펄쩍 뛰며 돈 일곱 냥을 들고 와서 "이 돈이 솥 안에 있었습니다. 쌀도 몇 섬 살 수 있고, 땔나무도 몇 바리 들여 놓을 수 있습니다."고 말했다. 홍기섭은 놀라서 " 이것이 어찌 된 돈인고?"라며 혼자 중얼거리면서 즉시 "돈을 잃은 사람은 찾아가오."라고 글을 써서 대문 위에 붙여 놓고 돈 임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성이 유가라는 사람이 나타나 묻는 지라 홍기섭은 그대로 다 말해 주었다. 그러자 유가는 "남의 집 솥 안에 돈을 잃어버릴 사람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과연 하늘이 주신 것인데 어찌 가지시지를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러나 홍기섭은 "이 돈은 내 물건이 아닌데 어찌 내가 가질 수 있는가?"라고 말했다. 그러자 유가가 꿇어 엎드려 "소인이 어젯밤에 나으리 댁에 솥을 훔치러 왔다가 집안 형세가 너무 쓸쓸함을 보고 도리어 딱하게 여겨 그 돈을 두고 갔습니다. 나으리의 청렴하고 곧으심에 감동하였고 제 양심이 스스로 발동하여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않기로 맹세했습니다. 항상 나으리를 곁에서 모시고자 하오니 염려 마시고 가지시옵소서. 홍기섭은 즉시 돈을 돌려주며 "네가 착해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돈은 받을 수 없다."고 말하며 끝내 받지를 않았다.---[명심보감 염의편] 중에서---
이 글의 주인공인 홍기섭은 1781년에 태어나 1866년에 몰했다. 자는 수경이다. 1816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공조판서에 이르렀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선한 일 끝에 반드시 경사가 있다더니 홍기섭의 아들 재룡은 헌종의 국구가 되었다. 홍재룡은 1814년에 태어나 1863년에 몰했다. 1835년 문과에 급제하여 동부승지, 대사성 등을 거쳐 이조참판, 금위대장을 지냈다. 1844년에 딸이 헌종의 계비가 되자 익풍부원군에 봉해지고 영돈녕 부사에 올랐다.
홍기섭의 손자 종석은 문과하여 예조판서가 되고 효정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홍기섭의 증손자 홍순형은 이 가문을 한층 더 빛냈다. 홍순형은 1874년에 문과하여 개성부유수, 이조와 예조의 참판을 거쳐 1890년에 형조판서가 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정부가 주는 남작의 작위를 받지 않았다. 홍기섭의 조부는 홍계적이다. 홍계적은 1702년 진사시에 장원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 180명과 함께 박세당을 성토하는 상소를 했다. 1708년 문과하여 정언으로 궁중의 지나친 주악, 유희에 대해 상소하여 임금으로부터 호피 한 벌을 하사 받았다. 1719년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노론의 선봉으로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다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그 뒤 서울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다가 옥사했다. 영조 즉위 후 신원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충간이라는 시호가 내렸고 1732년 부조의 은전이 있었다. 홍기섭의 5대조는 홍처후[문과 관찰사 시호 충장], 6대조는 홍명원[문과 관찰사]이다.
남양홍씨 이 땅은 내 피로 젖었으니!
갑신정변의 좌장 홍영식은 갑신정변 거사 전에 김옥균을 찾아가 흰 화선지에 붓을 들어 국군의 날 F4 편대가 곡선을 그리며 고공 낙하듯이 써 내려 갔다.
내가 이 땅에 떨어졌을 때
조국은 내 피로 흠뻑 젖으리라
내 숨이 끊어질 때는
하늘만은 내 마음을 알리니
------이하 생략--------
홍영식은 자기의 비참한 최후를 예견한 듯이 그 심정을 술회한 것이다. 1884년 9월 일본공사 다께조에가 재입국하였다. 그가 다시 나타나면서 청국을 강도 높게 비판,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조성되어 가고 있었다. 다께조에를 만나고 돌아온 김옥균은 그의 지원하에 거사할 계획을 박영효와 홍영식에게 설명했다. "우리는 오직 변혁을 도모할 뿐이다. 다께조에의 행동이 방자하고 지나친 바는 있으나 더 이상 천연할 수 없다."고 역설했다. 이에 홍영식은 다께조에의 교만하고 과격한 행동에 대해 김옥균이 신중을 기하도록 당부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 인사들 간에 갑신정변의 거사 장소로 홍영식의 별장이 있는 백록동의 정자를 선택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이 곳에서 연회를 베풀어 척신과 사대당을 초청해 저격하자는 제안이 있었으나 우정국 개설 피로연을 이용하여 거사하는 쪽으로 결정이 났다. 1884년 10월 전동 우정국에 이날 연회의 주인공인 홍영식이 미국 공사 푸우트와 영국 총영사 애스턴을 비롯하여 금릉위 박영효, 독판 김홍집, 우영사 민영익, 좌영사 이조연, 승지 민병석, 전영사 한규직 및 김옥균 등 국내외 귀빈 들을 맞이 하여 성대한 파티가 벌어졌다. 이때 안동 별궁 뒤 서광범의 집에는 김옥균의 지시를 받은 장사패들이 행동을 개시했으나 사대당 측의 감시가 심해서 거사 신호탄인, 별궁에 불을 지르는 것이 불가능 하게 되었다.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한창 무르익어가는 연회 석상에서 그 사실을 보고 받은 김옥균은 불붙기 쉬운 이웃집이라도 택하여 거사할 것을 명했다. 김옥균의 잦은 연회장 바깥출입에 수상한 기운을 깨달은 사대당 인사들이 막 움직이려는 순간 밖에서 갑자기 "불이야"하는 소리가 나며 북창에 화염이 충천했다. 우정국 안 연회 석상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조금 전 눈치를 챈 민영익이 나가다가 칼을 맞아 비명을 지르며 되돌아와 거꾸러졌다. 민영익은 피투성이가 된 채 거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독립당 요원들이 우정국을 빠져 나간 뒤 묄렌도르프는 민영익을 자기 공관으로 옮겨 10여 명의 의사를 동원, 27개소의 깊은 상처에 대해 응급 수술을 단행, 기적과 같이 그의 목숨을 구했다. 우정국 거사 계획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사대당의 중심인물 민영익을 구명도생케 한 것은 독립당의 큰 실수였다.
독립당 요원들은 임금을 경우궁으로 이어케 하고 독립당이 이끄는 장졸과 일본군인으로 하여금 궁궐을 경호케 하였으며 외인의 출입을 금하였다. 그 때까지 병권을 잡고 있던 사대당의 3거두인 이 조연, 윤태준,한규직 등이 자객의 칼날 아래 쓰러졌다. 김옥균 등은 어명을 빌려 민영목, 조영하, 민태호 등의 사대당 거두 들을 급거 입시하라고 하였다. 이들 또한 궁궐에 들어 오자말자 차례로 죽었다. 일단 쿠테타에 성공한 독립당은 이재원을 영의정에 홍영식을 좌의정에 추대하고 신임 각료와 중요 인사의 발령을 냈다. 새로운 정부의 성립이 선포되고 14조에 달하는 혁신 정책까지 반포되었다.
그러는 사이 궐 밖에서 심상치 않은 공기가 감돌고 있음을 독립당 요인들은 전연 감지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대당의 살아 남은 인물들이 청나라 원세개와 오조유 등을 은밀히 만나 지원을 요청하고 있었다. 반면에 일본 공사 다께조에는 홍영식을 만나 일본군이 궐내에 오래 머물 수 없다며 철병을 통보했다. 이것은 일본의 거사 지원 철회와 같은 것으로 독리당 요원들을 모조리 불구덩이에 넣겠다는 통보와 같은 것이다. 업친데덥친격으로 원세개가 1천 500명의 군대를 2개부대로 나누어 1개 부대는 원세개 지휘 아래 돈화
문을 공격하고 나머지는 선인문을 거쳐 궐내로 침입했다.
철수하려던 일본군도 우라까미 중대장의 명령으로 청나라 군대를 향해 응사했다. 그러나 다께조에의 변심과 일본군의 사기 저하로 청군의 대적이 되지 못했다.
청군의 맹공격으로 일본군이 창덕궁을 떠난 뒤 청군의 콩 볶듯하는 총성 속에서 이미 독립당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북쪽을 향해 어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개화 독립의 깃발 아래 새로운 나라를 건설해 보려던 홍영식의 꿈이 산산 조각이 났다. 홍영식 앞에 놓인 길은 두 갈래였다. 다께조에의 뒤를 따라 일본으로 망명, 구명도생할 것인가? 국왕의 뒤를 따르다가 청군의 칼날에 쓰러질 것인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은 기노시다 제일 은행장 집으로 피신했다는 소문을 남긴 채 인천 부두로 나가 지도세마루라는 일본 우송선에 몸을 싣고 망명의 길을 떠났다. 홍영식은 죽음을 무릅쓰고 어가를 따라 나섰다. 박영교, 신복모를 비롯하여 사관생도 7명이 그 뒤를 따랐다. 어가를 따라 북묘에 이르자 청국군 장병과 사대당 군사들은 홍영식을 비롯한 독립당 요인 들을 모조리 참살해 버렸다.
사대당 인사들은 정변과 관계있는 사람의 집을 색출, 역적으로 몰아 적몰하였다. 맨 먼저 홍영식의 집을 덮쳤다. 홍영식의 아버지 전영의정 홍순목은 거사 실패의 소식을 전해 듣고 독약을 마시고 이미 죽은 뒤였다. 그 뒤 일가가 몰살당했다.
남양홍씨 그 동생에 그 형!
1,갑신년 쿠테타의 좌장 홍영식은 인품이 좋았다.
홍영식은 1855년에 태어나 30살[만29세]의 아까운 나이로 1844년에 죽었다. 자는 중육, 호는 금석이다. 박규수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박규수가 죽자 유대치[유홍기]에게 신학문의 요체를 익혔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과 교유하며 조국 근대화에 뜻을 같이 했다. 성격이 온화하고 원만하였다. 민영익과도 교분이 두터웠으며 당색에 관계없이 두루 사우들의 추중을 받았다.
1873년[고종7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일본의 현대화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홍영식은 갑신정변 주역의 한 사람으로 사대당 거두 민영익에게 비수를 꼽아야 하는 운명에 있었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통리기무아문에서 민영익과 함께 일했다.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전권대신 민영익을 따라 전권부대신으로 미국을 다녀왔다. 미국에서 돌아 온 뒤부터 민영익과 노선이 크게 달라졌다. 홍영식은 조국 근대화에 목숨을 파치기로 결심했다.
1884년 함북병마수군절도사를 거쳐 병조참판에 올랐다. 이 때 우정국 총판을 겸임하여 우정국을 설립시켰다. 이 해 10월 17일 우정국 개국 축하연에서 갑신정변을 일으켜 천하를 손 안에 넣었으나 청국군의 개입으로 갑신년 혁명 정부는 그 막을 내렸다.
2, 그 형! 충절이 만고에 빛나리니!
홍영식의 형 만식은 1842년에 태어났다. 186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동부승지를 거쳐 여주목사로 나가 선정을 하였다. 그 뒤 이조참판에 올랐다. 아버지가 1884년 의복제도를 개정하려 하자 반대하다가 삭탈 관직되었다. 이 해 동생 영식이 정변을 일으켜 실패하였다. 아버지를 따라 독약을 마시고 중태에 빠졌으나 체포되어 복역하고 나왔다. 그 뒤 1894년 동지중추부사, 1904년 해주 관찰사에 이어 찬정 벼슬이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고 출사하지 않았다. 1905년 을사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음독 자결했다. 고종은 그의 충절을 높이 평가하여 숭록대부 참정대신의 벼슬을 내렸다. 시호는 충정이다.
남양홍씨 홍영식 집
홍영식은 효종 부마 홍득기의 동생 관찰사 홍득우의 9대손이다. 홍영식의 8대조는 영의정 충간공 홍치중이다. 홍치중은 1706년에 문과하여 황해도 관찰사를 거쳐 1721년에 형조판서, 1729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홍영식의 고조는 공조참의를 지냈으며 문집을 남겼다. 원섭의 손자[적은 아들 집규 집] 종영은 문과에 이조판서 시호는 정헌이다. 집규의 동생 승규 집은 3대 문과를 냈다. 승규 문과 교리, 그 아들 종응 문과 이조판서 시호 문헌, 종응의 아들 순대는 문과에 이조참판이다. 홍영식의 종5대조 병찬집[이조참판]은 병찬의 적은집 손자 영규가 문과에 공조참판, 병찬의 큰집 증손자 종운은 문과에 예조판서를 지냈다. 홍영식의 10대조 홍중보는 문과에 우의정 시호는 충익이다. 홍영식의 11대조 홍명구는 문과 장원에 관찰사, 시호는 충렬이다. 홍영식의 13대조 홍성민은 문과, 대제학 호조판서, 시호는 문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