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9:9 ~ 18)
'주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요,
은혜와 긍휼이 많으시며 더디 화내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기에
그들을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17절 후반)
그들이 행하고 겪었던 일들을 회고하는 것.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와 사랑의 크기가
어머어마하지만, 우리는 망각한다.
새로운 세상 관심에 현혹되거나
걱정 근심으로 장악당한다.
그렇게 은혜와 사랑을 잊고 다시 아쉽고 서러운
마음의 모드로 하나님을 바라본다.
참 어리석지만, 그게 그렇다.
이미 주셔서 확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잊고, 흔들리고, 의심한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출애굽 시절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적들,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 자손과 애굽 군대를 완전히 분리한 것,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한 것,
시내산 언약을 주신 것,
일용한 양식과 물을 공급하신 것등을 다시 회고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드는 등
하나님을 모독했다.
세상과 사람의 계산법으로는
배은망덕한, 천인공로할 짓들이어서
엄청난 대가 지불, 징계를 받아야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지경의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그 과정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깨달음과 교훈의 시간으로 삼으신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너무나 자주 하나님께서 등을 돌리기 일쑤라
때마다 거듭 하나님 앞으로 부름을 받아야 한다. -티머시 존슨-
오늘의 명언이 묵상의 내용에 도움이 된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은혜에도 불구하고
세속에 고정된 눈 때문에 그것을 망각하기에,
다행히 사랑으로 감싸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때마다 하나님 앞으로 가기를 반복해야 한다.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위협적 함정!
'이렇게 반복적으로 죄를 짓는데,
무슨 염치로 하나님께 매번 다가갈 수 있겠나......'라는
침륜에 빠지는 일이다.
잘 생각해 보면 참 교만하거나 너무 빗나간 관점이지만
이런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구원파는 죄에 대한 우리의 오인식을 파고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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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추석 처가 모임에 다녀왔다.
처남의 고통을 눈으로 보고 적지않은 아픔을 느꼈다.
당사자가 겪고 있는 고통의 깊이와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 번뇌. 그리고 그 안에
엄연히 존재하는 신앙과 버티기와 투쟁.
이런 것들이 점철되어 어떤 큰 충격을 느꼈다.
가벼운 말 한마디를 거두게 할 만한 엄숙한 어떤 것이다.
처남을 위해 더욱 기도해야겠다.
이 고통과 번민, 절망과 분투 너머에 계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 되신다.
"하나님! 감사하옵고, 감사합니다.
우리는 보잘 것 없이 작고, 하나님은 크십니다.
크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연약한 저희를 지켜주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양정환, 그의 고통 속에 함께 하실 주님을 신뢰하여 감사드립니다.
몸의 고통이 먼저 사라지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마음의 고난과 근심을 주님께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 영혼이 깨끗이 치유받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그의 여생 동안 증거하고 사는 삶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도
흉악한 범죄를 반복합니다. 주님!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항상 기억하게 해 주십시오.
그것이 악에 맞서 싸울 수 있게 힘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