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탓하지마라 / 법상 스님
경계(境界)1)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그대로 텅 비어 고요합니다.
여여(如如)하며 여법합니다.
그런 경계가 좋고 싫은 이유는 경계에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 마음에 분별이 있는 탓입니다.
경계에 휘둘리는 마음 또한 내가 만들어낸 것이지
경계는 본래 휘둘리고 말고 할 것이 없습니다.
맑은 하늘에 인연 따라 구름이 모이고 흩어지듯
텅 비어 고요한 본래자리에 인연 따라 이런 저런 경계가
잠시 모이고 흩어지는 것일 뿐입니다.
좋고 싫은 경계가 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무분별(無分別)의 경계가 꿈처럼 잠시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경계가 일어날 때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있는 그대로의 경계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모인 경계를 가만히 두지를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편견없이 바라보지를 못합니다.
거기에 이름을 붙이고, 모양을 짓고 좋고 나쁜 분별을 일으킵니다.
연이어 좋은 분별엔 애착[탐(貪)]의 마음을,
나쁜 분별엔 성내는 마음[진(嗔)]을 일으킵니다.
그런 두 가지 분별이 생기는 연유는
본래 나도 경계도 모두 공하고 허망함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치(癡)] 때문입니다.
그 때부터 괴로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경계는 아무런 잘못이 없음을, 아무런 분별이 없음을
밝게 깨쳐 알 수만 있다면 거기에 휘둘릴 것도 없습니다.
한 여름에는 너무 더워 짜증이 나고 화도 나고 그럽니다.
그러나 ‘더위’는 그냥 더위일 뿐입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더위’일 뿐 좋고 싫다는
고정된 분별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더위는 나쁘고 싫은 것이라든가 좋은 것이라든가 하는 분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텅 비어 고요한 더위라는 경계에
우리는 온갖 분별을 부여하고
그렇게 스스로 부여한 분별 때문에 괴로워 합니다.
한 여름에 땀을 뻘뻘흘리며 일을 할 때는 더위라는 경계에 ‘짜증난다.’
‘미치겠다’ ‘쪄죽겠다’ 하며 나름대로의 싫은 마음을 덧붙입니다.
그러나 애써 찾아간 사우나에 들어가면
그보다 더한 더위에서도 ‘시원하다’ ‘피로가 확 풀린다’하고
좋은 마음으로 분별을 몰아갑니다.
본래 ‘더위’라는 경계는 텅 비어 고요하기에
좋을 것도 싫을 것도 없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더위’ 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서 좋고 싫다는 분별을 일으키고
그렇게 스스로 만들어 놓은 분별 때문에 또 한 번 괴로워합니다.
내 마음이 좋고 싫은 것이지 경계가 좋고 싫은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모든 경계는 이처럼 아무런 잘못이 없고, 분별이 없지만
우리 마음은 작은 경계에도 끄달리고 휘둘리고 그럽니다.
그러니 제 혼자 만들고 그렇게 만든 분별로 인해
제 혼자 괴로워 하고 그러는 기가 막힌 세상입니다.
어떤 사람은 밤하늘의 달을 보면서 한없이 북받쳐 오르는 우울함에
어쩔 줄 몰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달을 보면서 행복해 합니다.
똑같은 달을 보면서 괴로워하는 사람, 적적해 하는 사람,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사람, 기뻐하는 사람 등 제각각입니다.
하늘의 달은 아무런 분별도 없고 잘못도 없습니다.
그냥 떠 있는 달일 뿐이지만, 우리 마음은 과거 달과의 연관된 기억이나 추억들로 인해
좋고, 싫고, 우울하고, 그리워하는 등의 분별을 일으킵니다.
육체적인 노동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일이라고 생각하면 힘들고 고된 일이 되지만,
운동 삼아 하는 일이라 생각하면 오히려 기쁜 마음입니다.
일은 힘든 것이고 운동은 즐거운 것이지만,
사실 이 두 가지는 모두 똑같이 육신을 움직이는 것일 뿐입니다.
애써 운동을 하느라고 헬스클럽에 가서 땀을 뻘뻘 흘리며
육체적 한계를 느낄 만큼 무거운 역기를 들고도 힘든 줄 모르고,
샤워 후엔 그렇게 개운하고 시원하여 힘이 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을 할 때면 그보다 더 가벼운 것을 들고도 쉽게 피곤해지고
노곤해져 일이 끝나면 녹초가 됩니다.
같은 육체적 노동이지만 마음 따라 일도 되었다가 운동도 되는 것입니다.
마음 따라 괴로워 녹초가 되기도 하고, 되려 힘이 펄펄 나기도 합니다.
육신을 움직인다는 것은 똑같은 것입니다.
경계는 같지만 마음에서 일이다, 운동이다 분별하여
더 힘이 나게도 하고 녹초가 되게도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고 좋은 사람, 미운 사람 하고 분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누구라도 그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미운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밉다고 그 사람이 미운 사람하고 고정된 것이 아니며,
내가 좋다고 그 사람이 좋은 사람하고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다 내가 만들어 놓은 분별일 뿐입니다.
그렇게 스스로 만들어 놓고는 좋은 사람 보면 애착을 하여
헤어짐을 괴로워하고, 미운 사람 보면 괴로워하여 만남을 괴로워하고,
그렇게 제가 만들어놓은 틀에 제가 걸려 괴로워합니다.
기막힌 중생놀음이라는 것이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누군가에게 욕을 얻어먹으면 기분이 상합니다.
그러나 ‘욕’에도 좋고 싫음이 본래 없습니다.
내가 욕을 얻어먹거나 나와 가까운 사람이 욕을 얻어먹으면 기분이 상하지만,
미운 사람에게 누군가가 욕하는 것을 들으면 되려 통쾌합니다.
나와 얼마나 가까운가에 따라, 즉 아상이 얼마나 큰 대상인가에 따라
같은 욕설에도 우리 마음은 천차만별로 변화합니다.
그러니 ‘욕’ 그 자체가 좋거나 싫은 것은 아닙니다.
영화에서 나오는 그럴듯한 욕은 참 듣기 좋기도 합니다.
본래 정해진 바가 없기에 인연 따라 좋았다가 싫었다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경계가 이와 같을진데
어찌 좋고 나쁨이 따로 정해져 있겠습니까.
똑같은 경계일지라도 좋다고 분별할 수도 있고,
나쁘다고 분별할 수도 있으며, 사랑할 수도 있고,
미워할 수도 있으며, 힘 빠지는 일일 수도 있고,
힘 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경계에 뭣하러 끄달립니까.
왜 아무런 잘못도 없는 경계를 탓하는가 말입니다.
‘괴로움’ 하고 딱 정해졌다면 이야,
절대적 괴로움이라면 이야 어쩔 수 없이 괴로움을 당해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 앞에 펼쳐지는 그 어떤 괴로움도 절대적일 수는 없습니다.
괴로움이기도 하고 즐거움이기도 한 것입니다.
선택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괴로움도 즐거움도 내가 선택하는 일인 것입니다.
경계는 아무런 분별도 잘못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택 또한 하나의 분별입니다.
그러니 그냥 놓아버리면 됩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그대로 자연스러운 세상입니다.
아무것도 잡지 않으면 그대로 고요한 세상입니다.
좋고 싫고 분별하지 않으면 그대로 해탈의 경계인 것입니다.
가만히 있는 경계를 애써 좋다 나쁘다 분별하고,
행복하다 괴롭다 분별하여,
좋다고 잡으려 애쓰고 싫다고 버리려 애쓰느라
우리의 삶이 많이 번거로워 졌습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평화로운데 말입니다.
그냥 놓아버리면 본래자리 그대로인 것입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경계를 애써 탓하지 마십시오.
조건이 별로라고, 환경이 별로라고 부모님이 별로라고,
남편이 별로, 친구 성격이 별로라고 탓하지 마십시오.
그들에게는 절대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나에게로 돌릴 일입니다.
내 마음이 변하면 경계는 따라서 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싫은 경계를 잡으면 괴로움이고, 좋은 경계를 잡으면 즐거움이지만,
그 마음 놓으면 해탈입니다.
출처 : 부처님따라 떠나는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