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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존양구법문(世尊良久法門)
[법좌(法座)에 올라 한동안 묵묵히 앉아 계시다가 이르시기를,]
사부대중(四部大衆)은 알겠는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탈진어복(脫珍御服)하고 착폐구의(着弊垢衣)라.(진어복을 벗어 놓고 폐구의를 입었노라.)"
이 법문 속에는 말로 할 수 없는 참으로 높은 뜻이 담겨 있다. 진어복이란 천자(天子)가 입는 보배 옷인데 상상근기인(上上根機人)을 두고 말한 것이요, 폐구의는 중하근기인(中下根機人)을 말하는 것이다.
또 부처님께서는 성도(成道)하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셨다.
"제법적멸상(諸法寂滅相)은 불가이언설(不可以言說)이라. 아령불설법(我寧不說法)하고 질입어열반(疾入於涅槃)이라.(모든 법의 적멸상은 가히 말로서 설명할 수 없도다. 나는 차라리 법을 설하지 않고 열반에 드는 것이 나으리라.)"
이 법은 바로 보여 주어도 무엇이 어떻게 되는지 까마득하기만 하고 막연하다는 생각만 일어날 뿐이다. 마치 광대무변한 바다를 바라보면서 '저 바다를 어떻게 건너가나?'하며 어렵게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중하근기인을 위한 방편문을 열어 49년 동안 설법하셨으니, 이 일대시교(一代時敎)가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된 것이다. 그러나 조금 전에 산승이 법좌에 올라 아무 말없이 앉아 있다가 "사부대중은 알겠는가?" 하고 말한 것은 언어나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어나 문자로 설한 교법(敎法)에서는 보리(菩提)라고도 하고, 원각(圓覺)이라고도 하고, 도(道)라고도 하고, 묘각(妙覺)이라고도 하고, 심지(心地)라고 한다. 이 밖에도 많고 많은 이름과 술어(述語)가 있는데, 이와 같은 이름과 술어를 취하지 않고 법문을 하면 중하근기인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게 된다.
조주 스님께는 연왕(燕王)과 조왕(趙王)이 자주 와서 법문을 청하였는데, 하루는 시자(侍者)가 아뢰었다.
"대왕(大王)이 옵니다."
조주 스님이 깜짝 놀라며 말하였다.
"왔느냐?"
"대왕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또 왔느냐.?"
여기에서 "또 왔느냐?" 하는 이 말을 바로 알면 법문을 조금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왕이 정말로 도착하였을 때 조주 스님은 선상(禪床) 위에 가만히 앉은 채 접대를 하며 말하였다.
"상근기인(上根機人)이 오면 선상에서 앉아 영접하고, 중근기인(中根機人)이 오면 문 밖으로 나가 영접하며, 하근기인(下根機人)이 올 것 같으면 저 산문(山門) 밖에까지 나가서 영접합니다."
그러자 조왕과 연왕은 그 뜻을 알고 절을 하며 좋아하였다.
참으로 입을 열어 무엇이라고 말을 하는 것 보다는, 아무 말없이 있는 이것을 바로 알고 바로 꿰뚫어 보면 대장부의 일을 다 마치게 되는 것이다.
산승이 항상 하는 법문인데, 부처님 당시에 어떤 외도(外道)가 부처님을 찾아와서 법문을 청하였다.
"불문유언(不問有言)하고 불문무언(不問無言)이니다.(유언으로도 묻지 않고 무언으로도 묻지 않나이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아무 말없이 가만히 앉아 계셨고 이때 외도는 부처님께서 묵묵히 앉아 계신 뜻을 깨달았다.
"세존께서는 대자대비로 저의 미운(迷雲)을 열어 저로 하여금 깨닫게 하셨습니다."
외도는 크게 기뻐하며 떠나갔다. 이 법문에서 부처님께서는 법을 다 설하였고 외도는 그 법문을 모두 알아들었던 것이다.
그때 부처님 옆에는 아난 존자가 있었다. 아난 존자는 언제나 부처님 곁에 있으면서 부처님의 한량없는 법문을 모두 들었다. 매우 총명하였던 아난 존자는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한 일대시교(一代時敎)를 하나도 잊지 않고 그대로 기억하였기 때문에 부처님의 십대 제자 중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 칭하여지고 있다. 그러한 아난 존자였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부처님께서 묵묵히 앉아 계셨던 까닭을 알 수가 없었고 또, 외도가 그렇게 말한 까닭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외도는 무엇을 증득하여 도를 이룬 것입니까?"
"아난아, 좋은 말은 채찍의 그림자만 보고도 갈 길을 아느니라.[여세양마(如世良馬)는 견편영이행(見鞭影而行)이니라.]"
이 말씀처럼 구태여 입을 열어 광장설(廣長設)을 한다고 하여 법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영봉수풍천리거(英鳳隨風千里去)
치조의구서리번(痴鳥依舊棲籬藩)
영특한 봉황은 바람 따라 천리를 날아가고
어리석은 뱁새는 여전히 울타리 밑을 맴도네.
울타리의 마른 가지는 아무 소용도 없는데, 뱁새처럼 거기에 머물러 무엇을 찾을 것인가? 더욱이 부처님의 정법안장(正法眼藏)과 열반묘심(涅槃妙心)과 교외별전(敎外別傳)은 모두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하였으니, 49년 동안 설한 것과 참된 법문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이것을 분명히 알면 부처님께서 아무 말없이 앉아 계신 그 뜻을 알게 될 것이요, 조금 전에 산승이 묵묵히 앉아 있었던 까닭도 알게 될 것이며, 앞에서 말한 조주 스님의 '상상근기법문'도 알게 될 것이다.
정녕 이러한 법문은 공부를 하여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을 갖추지 못하면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애써 공부를 하여 언제라도 해결이 되어야만 한다. 해결만 되면 바로 알고, 바로 보고, 바로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이 법은 깊고 깊은 뜻이 있어 생각으로는 가히 헤아리지 못한다. 오직 이 법을 깨달아야만 법법이 원통(圓通)하고 원명(圓明)하며, 법법이 다함 없는 세계를 빛나게 하며, 일을 끝마친 사람이 될 수 있느니라.
만고벽담공계월(萬古碧潭空界月)
재삼노록시응지(再三撈鹿始應知)
만고의 푸른 못에 비친 공계(空界)의 달을
두 서너번 건져 봐야지 비로소 알리라.
이 뜻을 바로 알 수 있도록 공부를 잘 해 가기를 부탁하고 또 부탁하노라.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고 자리에서 내려오셨다.]
<정사년(1977) 5월 4일 묘관음사에서>
대사각활(大死却活)
대저 참선 공부를 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음 속에서 삶을 얻어야 비로소 자재무애(自在無碍)를 얻게 되느니라.
조주(趙州) 스님이 투자(投子) 스님에게 여쭈었다.
"크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을 때는 어떠합니까?"
투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밤길을 다니지 말고 날이 밝거든 돌지니라."
또 고인(古人)은 말씀하셨다.
"죽은 사람을 죽여 다하여야 바야흐로 산 사람을 볼 것이요, 죽은 사람을 살려 다하여야 바야흐로 죽은 사람을 볼 것이니라."
이와 같이 완전히 죽어 한 번 뒤집힌 다음이라야 돌사람이 옥피리를 불고, 목녀(木女)가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리라.
만약 여기에서 분명히 알아차렸다면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와 문수보현(文殊普賢)과 천만 성인의 자재로운 수용처(受用處)를 낱낱이 명백하게 알게 될 것이다. 알겠는가?
송(頌)하시기를,
위음왕불 저쪽 세계 꿰뚫어 바라보니
영원히 변치않는 별천지의 마을 있네.
한 번「할」 하고 법좌(法座)에서 내려오셨다.
<임진년 동안거 선암사에서>
일구소식(一句消息)
[법상에 올라 한동안 묵묵히 계시다가 주장자를 들어 법상을 한 번 치고 이르시기를,]
거론하기 이전의 한마디는 삼세제불과 역대조사도 들추어 내기를 꺼리는 것이려니와, 양구(良久)와 방(棒)과 할(喝) 또는 불자(拂子)를 드는 것 등은 어느 곳으로 떨어지며, 원상(圓像)과 원상 안에 종(縱)으로 점을 세 개 친 것과 횡(橫)으로 점을 세 개 친 것은 또 무슨 뜻인가?
누구든지 이를 명백히 꿰뚫는다면 최초구(最初句)와 말후구(末後句)와 향상구(向上句)와 향하구(向下句)와 제방(諸方)의 차별삼매(差別三昧)를 일시에 모두 꿰뚫어, 모든 대지(大地)와 시방세계와 삼라만상과 초개 같은 인간이나 축생 , 유정과 무정들이 모두 자기의 가풍을 드러내게 되느니라. 바로 이러한 경계에 이르러 석가와 달마, 문수와 보현, 마조와 석두, 임제와 덕산, 조주와 운문은 어떠한 사람인고?
삼세제불도 불 속의 흰 눈이요,
역대조사도 백골 무더기로다.
이러한 때를 맞이하게 되면 하늘은 하늘이요 땅은 땅이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거니와, 어떤 때는 하늘을 불러 땅을 만들고 땅을 불러 하늘을 만들며, 어떤 때는 산이라 해도 산이 아니요 물이라 해도 물이 아니니라. 그렇다면 필경에 어떠한 것인가?
[한참동안 묵묵히 계시다가 이르시기를,]
봄이 오면 풀이 스스로 푸르도다.
[한 번 '할' 하시고 문득 법좌에서 내려오셨다.]
<기유년 동안거 묘관음사에서>
이빨을 세 번 부딪침과 '하필'
[주장자를 들어 법상을 세 번 치고 이르시기를,]
고인(古人)이 말씀하셨다.
"내가 오로지 최고의 진리만을 거량한다면, 법당 앞에 풀이 한길이나 무성하리라.[아약일향거량종승사(我若一向擧揚宗乘事) 법당전초심일장(法堂前草深一丈)]"
또 조주 스님은 말씀하셨다.
"잠깐이라도 시비를 하면 어지러이 본심을 잃어 버린다.[재유시비 분연실심(재有是非 紛然失心)]"
이 법문에서 '어지러이 본심을 잃어 버린다.'는 말 속에 매우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참으로 본분종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인 것이다.
이 말씀에 이어 조주 스님은 대중에게 물었다.
"여기에 답할 분(分)이 있는가?"
낙보(樂普) 스님은 대중 가운데 있다가 윗니와 아랫니를 세 번 부딪쳤고, 운거(雲居) 스님은 "하필(何必)"이라고 하였다. 왜 그렇게 말하였을까? 또한 조주 스님은 낙보와 운거 스님의 답을 듣고 말씀하셨다.
"오늘 여러 사람이 몸과 목숨을 모두 잃는구나.[금일대유인 상신실명(今日大有人 喪身失命)]"
이 말씀의 뜻을 바로 사무쳐 알면 불조(佛祖) 근본처(根本處)가 바로 해결이 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더욱 공부를 열심히 하여, 밖으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진(六塵)의 경계뿐만 아니라, 삼라만상 그 어떠한 물건도 보지 못하고, 안으로 육근과 육식이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것까지도 다 잊어 버려서, 육근과 육식이 나누어지기 이전의 경계에 이르러 보라.
자연히 밖으로 삼라만상을 다 잊어버리고 안으로 육근과 육식의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것과 희로애락이 다 없어져서, 돌 사람과 같고 나무 사람과 같아져서 별안간 무심삼매(無心三昧)에 들어가게 되나니, 이 경계에 들어가면 깨닫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에 이 경계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모든 분별과 망상과 번뇌가 백천 가지 생멸(生滅)을 일으켜서 안밖에서 동시에 분연히 일어나지만, 이러한 것이 일어나기 이전의 경계에 들어가면 무진세계가 고요해지고 청정해지며, 또 고요하고 청정하다는 생각까지도 없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좁고 좁은 이곳에서 홀연히 한 기틀 한 경계 위[一機一境上]에 광활하고 끝이 없는 대천세계(大千世界)가 눈 앞에 나타나게 된다. 허공도 용납할 수 없는 굉장한 경지를 투과하고 또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이 발심하여 진리의 근원으로 돌아가게 되면 시방의 허공이 모두 사라진다.[일인발진귀원 시방허공실개소망(一人發眞歸源 十方虛空悉皆消亡)]" 하였고, "몸과 마음을 요달하여 남음이 없으면 시방(十方)의 법왕신(法王身)에 원만히 통하리라." 하였다.
곧 작아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물건이 홀연히 우주에 가득찰 만한 큰 물건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머리 셋에 여섯 개의 팔을 갖춘 대력지인(大力之人)이 되어서 네거리 한복판에서 종횡무진하게 되나니, 그 앞에는 누구도 감히 서 있을 수가 없게 된다.
예전에 덕산 스님이 깨달은 후 말씀하셨다,
"오묘한 말을 모두 다 하더라도 한 가닥의 털을 태허공(太虛空)에 두는 것과 같고, 세상의 중요한 것을 다 하더라도 한 방울의 물을 큰 골짜기에 던지는 것과 같다. 오늘 이후, 천하 노화상(老和尙)의 말씀에 다시는 의심하지 않으리라."
우리가 이러한 경지를 얻을 것 같으면, 일생을 수용하고도 다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미래가 다하도록 수용하여도 다함이 없게 되느니라.
이와 같은 까닭으로 산승이 늘,
"만겁토록 홀로 천하를 누비며, 지극히 빛나고 두루 통하고 두루 밝은 경지와 가히 설할 수 없는 무궁무진한 진리를 취하여 마음대로 수용한다."
고 한 것이다. 일찍이 황벽(黃壁) 스님은 게송으로 이르셨다.
티끌 세상을 벗어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
긴히 마음을 잡아서 한바탕 애쓸지어다
만약 찬 기운이 한번 뼈에 사무치지 않았다면
어찌 매화의 향기가 코에 가득하리오
필경에 부처님의 진리의 한마디는 어떠한 것이냐?
백억건곤장안리(百億乾坤長安裡)에
임운등등락만반(任運騰騰樂萬般)이라.
백억세계 모든 나라 장안 속에서
마음대로 뛰어노니 모두 다 즐겁도다.
[한 번 '할'을 한번 하시고 법상에서 내려오셨다.]
산시산 수시수(山是山 水是水)
[상당하시어 잠시 묵묵히 계시다가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고 이르시기를,]
산승이 법상에 올라 온 까닭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를 바로 보고 바로 알면 일대사(一大事)를 다 마쳐서 아무것도 더할 것이 없느니라.
하늘은 하늘이요 땅은 땅이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니라.
天是天 地是地 山是山 水是水
여기에 무엇을 더하고 무엇을 뺄 것인가? 하늘은 하늘대로 항상 무심하게 법문을 설하고, 땅은 땅대로 항상 무심하게 대법륜(大法輪)을 굴린다. 하늘과 땅만이 아니라, 산도 그렇고 물도 그러한 것이다.
그러기에 고인은 말씀하셨다.
"대지에 티끌이 없어졌거늘 어떤 사람이 진리의 눈을 뜨지 못하겠느냐(大地絶塵埃 何人眼不開)?"
실로 여기에는 생사도 없고 번뇌도 없고 범부와 성인도 없나니, 삼세제불이나 역대조사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이 개개가 모두 원만하게 구족하고 있는 것이다.
차를 만나면 차를 마시고 밥을 만나면 밥을 먹으며
가고 싶으면 가고 앉고 싶으면 앉는도다.
도리가 이와 같거늘 삼세제불은 어찌하여 이 세상에 나왔으며, 역대조사는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나온 것일까?
'부처님의 팔상성도(八相成道)는 중하근기(中下根機)를 위해서'라는 말이 있지만 이것은 맞지 않는 말이다. 왜냐하면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만이 법상 위에 앉아 계시지만, 땅에서도 수없는 부처님이 솟아오르고, 허공에서도 수없는 부처님이 내려오시고, 사방팔면으로부터 수없이 많은 부처님이 와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앉아 계신 주위를 오른쪽으로 무수히 돌고 있었다.
어떻게 석가모니 부처님만이 팔상성도를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불법은 깊고 깊어서 생각만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고인은 말씀하셨다.
"최초불(最初佛)인 위음왕불 이전에 분명히 알았다고 하여도 삼십 방을 맞고, 강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 사찰에 있는 찰간대(刹竿臺)를 보고 다 알았다고 하여도, 돌아가서는 역시 삼십방을 맞는다."
그렇다면 이 방망이를 면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이겠는가? 정안(正眼)을 갖춘 본분종사라면 바로 이때에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이 답이 나오는 것이다.
오늘 산승이 법상에 올라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고인들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피를 머금어 남에게 뿜으면 먼저 자기 입이 더러워진다."
"약은 병든 이를 낫게 하기 위해서 금병(金甁)에서 나오고, 칼은 난리를 진압하기 위해 보배갑에서 나온다."
이렇듯 산승은 하는 수 없이 법상에 올라온 것이니라.
이 법은 대신심과 대의심과 대용맹심으로 공부를 해야 성취할 수가 있다. 이 세 가지가 없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고인들은 위태로움과 득실(得失)을 돌아보지 않고, 천리 만리길을 멀다 하지 않고 선지식을 찾아가 친견을 하고 법의 문으로 들어가 일대사를 해결하였던 것이다.
과연 지금도 그렇게 공부할 근기를 가진 사람이 있는가? 공연히 선방이라고 지어서 '공부합네' 하며 모여 있어 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직 대신심, 대의심, 대용맹심이 아니면 공부는 백억 만리나 멀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 향곡은 월내의 조그마한 곳에 사는 것이 가장 좋다. 누구든지 찾아오면 나의 안목대로 말해줄 것이니, 전(廛)을 펴는 것도 그 물건이 팔릴 만한 곳에 가서 펴야 하는 것이다.
예전에 풍혈(風穴) 선사는 이십 년을 법문하여 납자를 제접하였지만, 그 밑에서 도인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이 일이 결코 쉽지가 않다.
공부는 티끌처럼 아주 미세한 것이라도 마음에 걸리는 곳이 있으면 다 틀려 버린다. 그리고 '공부를 해서 해결한다.'는 그 길만을 밟아가야지 그렇지 않고는 미륵불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공부하여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옛날 장경(長慶) 스님과 보복(保福) 스님이 함께 산에 올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보복 스님이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였다.
"바로 저곳이 묘봉정(妙峯頂)이다."
장경 스님이 말하였다.
"옳기는 옳으나 애석하도다."
장경 스님은 무엇 때문에 '애석하다'고 하였는가? 이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또 고인들이 "관(關)"이라는 말을 많이 썼다.
중국의 취암(翠巖) 선사는 많은 대중을 거느리고 하안거 해제일에 상당하여 말씀하셨다.
"하안거 한철 동안 여러 대중들을 위하여 가지가지 법문을 하였는데, 취암의 눈썹을 보았는가?"
대중 가운데 아무도 답하는 이가 없었다. 나중에 장경 스님이 그 말을 듣고 답하였다.
"났다.(生也)"
보복 스님이 답하였다.
"도적을 짓는 마음이 허하다.(作賊人心虛)"
그리고 운문 스님은 "관(關)."이라고 하였다.
이 관(關)은 알기가 매우 어렵다. 일본의 관산(關山) 스님은 이 '관'자를 가지고 공부를 하여 삼 년만에 해결하였기에 이름을 관산(關山)이라 하였다. 관산 스님은 열반하기 직전에 목욕재계하고 법문을 마친 다음 산문 밖으로 나와, 절 앞의 큰 계천에 놓인 돌다리 위에 서서, 한쪽 발은 땅을 짚고 한쪽 발은 든 채로 열반에 드신 분이다.
실로 이 "관"이나 "애석하다"고 한 뜻을 안다면 더 이상 공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본래 출가한 목적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견성성불(見性成佛)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가람을 짓고 수리하는 등의 모든 불사도 견성성불을 하기 위해 공부하는 공부인을위해서 해야지, 명예나 욕심이나 다른 생각으로 하게 되면 죄만 지을 뿐이다. 오직 바르고 참된 신심과 용맹심과 의심을 가지고 정진을 해야만 성과가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못 입고 못 먹어 중이 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공부를 자꾸 늦추어 '다음생에 하겠다'는 생각을 내면 절대로 안 된다. 금생에, 이 몸뚱이 있을 때 해결할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 고인은 말씀하셨다.
"한 생각 불견(佛見) 법견(法見)만 일으켜도 나귀의 태에 들고 말의 배에 들기가 화살과 같다"
그런데 무엇을 믿고 내생에 하겠다고 미룰 것인가? 공부가 그리 쉽사리 되는 줄 아는가? 꿈만 꾸어도 그 속에서 정신을 못 차리거늘, 죽을 때에 정신을 차린다고 하여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고 말이 말로 보이고 소가 소로 보일 줄 아는가? 정신이 어디 있는 줄도 모르는데 무엇을 바로 볼 것인가? 모두가 뒤바뀌어 보일 뿐이다.
선방에 들어와서 공부를 하는 이가 먹고 입는데 정신이 팔려서는 이 정법(正法)을 도저히 이루어 낼 수가 없다. 모름지기 머리에 붙은 불을 끄는 것과 같이 공부해야 하고, 감옥에 갇혀 고초를 받는 사람이 풀려 나기를 바라는 것과 같이 언제나 끊임없이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를 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편안함과 잘 먹는 것만 생각하면 도심(道心)은커녕 망상과 분별과 번뇌만이 일어날 뿐이다.
어떤 사람이 단식을 하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배가 부르니까 온갖 야단들을 하는구나. 명리도 여자도 재산도 다 배가 부를 때 탐이 나는 것일 뿐, 배가 고프니 아무 생각도 없더라."
이 말과 같이, 다른 것을 일체 생각하지 않고 오직 공부 하나만 하면 안 될 까닭이 없는 것이다. 예전 스님네는 하루 해가 지면 다리를 뻗고 울었다는데, 그렇게 애써 공부를 하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차별삼매(差別三昧)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이다.
"진대지 시방세계 그대로가 대반야요 대청정세계요 대적멸세계요 대해탈세계다." 라고 하는 등은 아무것도 아니다.
가령 "애석하다(可惜許)"든지 "관(關)"이라든지 "아이고(蒼天)" 등은 모두 차별삼매에 속하는 것이며, "조주석교(趙州石橋)"라는 유명한 공안 또한 차별삼매를 나타낸 것이다.
조주 스님께 한 스님이 찾아가 말하였다.
"오래 전부터 '조주 돌다리'라고 들리더니, 와서 보니 보잘것 없는 외나무다리뿐이로구나."
이에 조주 스님이 말씀하였다.
"너는 어찌 외나무다리만 보고 돌다리는 보지 못하느냐?"
"어떤 것이 돌다리입니까?"
그 스님이 다시 묻자 조주 스님이 답하였다.
"나귀도 건너가고 말도 건너가느니라.(渡驢渡馬)"
그 후 조주 스님이 수좌와 함께 돌다리를 보고 있다가 수좌에게 물었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만들었느냐?"
"이응(李膺)이라는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조주 스님이 또 물었다.
"만들 때에 어느 곳을 향하여 먼저 손을 대었는고?"
수좌는 이 질문에 꽉 막혀 답을 하지 못하였다.
우리가 공부를 하여 모든 차별삼매를 거울에 모습을 비추어 보듯이 환하게 알아서, 천하 선지식의 말씀에 대해 조그마한 의심도 없어야만 능히 일을 마친 대장부라 할 수 있느니라.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나'라는 것이 있다든지, 그 무엇이 있으면 공부는 벌써 그르쳐 버린 것이다.
용수불개전체현(龍袖拂開全體現)하고
상왕행처절호적(象王行處絶狐跡)이로다.
임금님 어의(御衣) 소맷자락을 떨치니 전체가 드러나고
코끼리 왕이 가는 곳에는 여우의 자취가 끊어짐이로다.
<병진년 동화사에서>
스승과 제자의 문답
어느 날 제자 진제가 스님 앞에 나와 여쭈었다.
문 : 스님께서는 뉘 집의 노래를 부르시는 것이며, 누구의 종풍을 이었나이까?
답 : 운봉 스님 일구를 이어받았나니, 영겁토록 쓰고도 다하지 않느니라.
문 : 그밖에 별다른 한마디가 있습니까?
답 : 허리춤에 십만 관의 돈을 두둑이 차고, 하늘 땅 저 밖을 마음대로 노닌다네.
문 : 스님의 일구는 어떠합니까?
답 : 진흙 소 한 울음에 천지가 깜짝 놀라, 부처고 조사고 모두 죽었더니라.
문 : 기특한 일이란 무엇입니까?
답 : 하나를 들먹이면 일곱을 얻느니라.
문 : 어떤 것이 최초의 한마디입니까?
답 : 석가와 미륵이 도탄에 빠졌느니라.
문 : 어떤 것이 최후의 한마디입니까?
답 : 번갯불 속에 곤두박질 치느니라.
문 : 어떤 것이 여래선(如來禪)입니까?
답 : 눈 밝은 납자가 깊은 우물에 빠짐이니라.
문 : 어떤 것이 향상(向上)의 한마디입니까?
답 : 부처님과 조사가 화리천(火裡天)으로 물러갔느니라.
문 : 어떤 것이 향하(向下)의 한마디입니까?
답 : 돌 사람이 무쇠 소를 잡아 타고 벽옥의 세계로 달아났느니라.
문 : 어떤 것이 몸을 바꾸는 한마디[轉身一句]입니까?
답 : 머리 셋에 팔을 여섯 가진 놈이 삼키고 뱉음을 자재로 하느니라.
기연 어구 (機緣語句)
문 : '대도는 문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답 : 쉬! 쉬! 말조심 해라.
문 : '쉬! 쉬!' 하는 뜻이 무엇입니까?
답 : 동서가 백억세계요 남북이 십억국토니라.
문 : 조주 스님께서 말씀하신 '뜰 앞의 잣나무'의 뜻이 무엇입니까?
답 : 맹호의 입 속에다 살림을 차리고, 푸른 용의 굴 속에서 곤두박질 치느니라.
문 : 조주 '無' 자의 뜻은 무엇입니까?
답 : 마구니는 넘어지고 부처는 달아나며, 손과 발이 덜덜 떨리느니라.
문 : 운문 스님 '마른 똥 막대기'의 뜻은 무엇입니까?
답 : 밝은 해가 야밤중에 하늘에 뜨니, 천상이나 인간 세상에 짝할 이 없도다.
문 : 동산 선사 '마삼근'의 뜻은 무엇입니까?
답 : 무쇠 소가 놀라서 서천으로 달아나고, 수미산이 한밤중에 항하강을 건너가느니라.
문 : 어떤 것이 스님의 경계입니까?
답 : 문수보살의 집 안에는 해가 날고, 관음보살의 집 안에는 달이 달려가느니라.
문 : 어떤 것이 스님께서 평소에 하시는 일입니까?
답 : 쇠망치로 청룡의 굴을 쳐부수니 금모사자(金毛獅子)가 개로 변해버렸다.
문 :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답 : 돌 속의 불 같은 얼굴이니라.
문 : 어떤 것이 조사(祖師)입니까?
답 : 불꽃 속의 돌 같은 얼굴이니라.
문 :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답 : 불 속에다 토마(土馬)를 굽느니라.
문 :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의 출신처(出身處)입니까?
답 : 토끼 뿔로 만든 다리 위로 무쇠 소가 달음질 치느니라.
문 : 선정(禪定)이란 무엇입니까?
답 : 동(動)하는 가운데 동하는 모양이 없느니라.
문 : 대해탈은 어떤 것입니까?
답 : 진흙 소가 항하강을 건넘이니라.
문 : 대적삼매가 무엇입니까?
답 : 옛날에 금색 봉황이 북두칠성 속으로 들어가더니, 지금까지 까마득히 소식이 없다.
문 : 어떻게 하여야 근본신(根本身)을 밝게 알 수 있습니까?
답 : 금강의 눈동자 속에는 보검이 감춰져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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