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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설명 |
소재지 : 충남 공주시 교동 118-2
공주 황새 바위는 한국 천주교회사 안에서도 그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진 거룩한 땅이요, 충남 지역에 신앙의 요람으로 전해진다.
조선 땅에서 공식적으로 박해가 시작된 1791년 진산 사건으로 순교한 권상연(権尚然)은, 공주로 이주해 살다가 전주 땅에서 순교했다.
충청도 각 지역에서 붙잡혀 온 천주교 신자들은, 공주 감영으로 이송돼 배교를 강요당하고 이를 거부할 때에는 여지없이 사형에 처해졌다.
공주에서 처형된 순교자들의 출신지를 보면 홍주, 해미, 덕산, 예산, 홍산, 신창, 청양, 연산, 보령, 유구, 진잠, 천안, 공주, 직산, 비인, 면천 등 충남 지역과 청주, 진천, 연풍, 옥천의 충북 지역과 전라도 광주, 경기도 죽산, 포천, 한양 출신으로 유배되어 왔던 신자들이다.
이렇게 전국에서 붙잡힌 교우들이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었고, 이들이 배교를 거부함으로써 바로 ‘황새 바위’라고 불리는 자리에서 처형되었다.
천주교 성지 황새 바위에는 13.8m 높이의 순교탑이 있고, 공주에서 순교한 248위의 명패가 새겨져 있는 돌무덤 형태의 경당과, 순교 성지 입구에 유물 전시관이 아담하게 축조되어 있다.
손자선 성인은 병인박해 때 덕산 고을에 잡혀가 가혹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이송되었는데, 천주교를 버리지 않고 왜 해미까지 왔느냐? 하면서 “네가 입으로 네 살을 물어뜯지 않으면 배교한 것으로 알겠다.”는 관장의 말에 자신의 팔을 물어뜯어 놓고 기절하였다.
그는 두 다리가 부러져서 공주로 이송되었는데 배교하라는 말에 “배교하려면 두 다리가 부러지기 전에 했을 것입니다.” 하고 22세의 젊은 나이로 자기의 신앙을 증거 했다.
공주에서 순교한 성인
○ 손자선 도마 성인님. (홍주. 공주. 1866. 3.30. 22세. )
성인 : 최형 베드로(홍주 서소문 1866/3/9 참수)
최형 베드로 성인의 친인척 관 계
성 명 |
관 계 |
순 교 일 |
성별 |
형 지 |
시복시성 |
나이 |
최 형 베드로 |
본인 |
1866/ 3/ 9 |
남 |
서소문 |
성인 |
52세 |
최 수 베드로 |
형 |
1866/10/ 4 |
남 |
양화진 |
순교자 |
|
최방제 프란치스코 |
동생 |
1837 |
남 |
마카오에서 병사 |
16세 |
일명 ‘치장’으로도 불리는 최형(崔炯)은 충청도 공주(公州)의 독실한 신자 가정에서 태어나 14세 때 부모의 권면으로 입교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사서 오경을 배운 선비였으며 1836년 마카오 유학 길에 올랐던 신학생 가운데 병사한 최방제(崔方済)가 그의 동생이다. 그의 형 최수(崔燧)도 병인박해 때 절두산에서 참수된 독실한 교우 가정에서 자란 최형은 1836년 모방 나 신부의 복사로 교회 일에 헌신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뒤 한문 지식이 넉넉하여 교리서를 번역하였고, 손재주가 비상하여 묵주를 만들며 목수 일도 능숙해서 생계를 이어갔다. 1856년 베르뇌 장 주교가 입국한 뒤 교회 서적 출판의 책임자가 되어 천주 성교 공과(工課)와 성찰기략(省察記略) 주교 요지(主教要旨)등 모두 13권의 책이 출판되는 큰 공로를 남겼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장 주교가 체포된 사실을 알고 집에서 멀지 않은 주막집에 피신하였다가 2월 27일 체포되었고, 교회 서적들이 적발되자 출판물에 대한 진상을 캐려는 형리가 채창이란 무서운 형벌로 고문하였는데 굽히거나 사실을 고백하지 않았으며 잘 버티었다. 그는 “저의 집에서 압수 당한 책들은 남의 물건이오니 도로 찾아서 임자에게 돌려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심문관에게 역습까지 한 최형은 3월 9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53세로 순교하였다.(달레한국천주교회사下권407~10, 412) (103위순교성인들의생애3권46)
장 주교의 윤시 제우서 |
說明 |
이 회의에서 선교사들의 행동 및 교우들의 신앙생활 지침이 두루 논의되었는데, 교우들의 기도와 관련된 사항은, 1857년 8월 2일자로 이른바 장 주교 윤시 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를 통해서 공포되었다. 이 서한은 우선 공주로 보내지고, 거기서 다시 전라도로 전달되었다. 이 서한은 교우들의 행동 지침, 지킬 도리, 칠성사, 영해희 규칙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순교자와 증거자들 166-173)
천주의 인자하심과 교황(教皇)의 은혜로 갑쎈씨 주교 조선국 감목 시메온 프란치스코는 모든 신자들에게 강복(降福) 하노라.
주의 은혜로 너희와 수년을 무사히 지내는 가운데, 한번도 마음을 나누지 아니하고 진심 갈력하여 내 소임을 다하고자 하매, 주야로 끊임없는 진정으로 호흡에 사모하여, 너희 영혼을 다스리고 구하려고 하는 마음에 생각이 이 하나뿐이로다.
집에 있든지 공소에 가든지 공부하나, 염경하나, 항상 지원이 너희 영혼이요 일삼기도 너희 영혼이라. 예수가 좋은 목자여서 낱낱이 찾고자 하는 마음이 돌(週年)이 되었도다. 나로 하여금 뜨겁고 냉한 것과, 성하고 병든 것과, 장처와 단처(長処短処)를 알아, 당제(当剤 : 그병에 맞는 약제)로써 보하고 뜨겁게 하며, 천선(遷善)하게 하고 고치며 좋지 아니한 것을 하나도 없이하여 모든 영혼을 주께 합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만사가 번한(煩乱)하고 시세(時勢)에 말리인 바가 되어 이 원의를 채울 수 없어 듣고 본대로 이르노니, 대개 교우의 마음이 좋고 정도에 나아가기를 원하고 힘써 청명하고자 하니, 실로 내 마음이 즐겁고 주의 은혜를 감사 무지(感謝無地)할 일이로되, 사람의 본성이 약하고 마음이 흐려 점점 떨어지며 좋지 아니한 풍속도 생기며, 그냥 두지 못할 것도 많이 있는지라, 그러므로 고칠 것을 일러주매 즉시 고치기를 용심(用心)하니 더욱 반가우며, 특별히 서울 교우로 말하건대 도리 밝히기에 진심 하니 못내 반갑고 즐거운 마음 뿐이라.
천주는 그 은혜로 너희에게 충만히 상주시로다. 팔도에 이 같은 마음이 있을 줄로 알고 몇 가지 힘쓸 것을 가르치되, 혹시 너무 엄하다는 생각이 드나 도리어 생각하면 그 엄한 것은 진실한 자애(慈愛)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니, 마치 어린아이 구덩이를 향하여 빠져 가는 것을 보면서 급히 붙들고 엄히 말림이 사랑함이요, 버려 두는 것은 참괴(慙愧)하고 박정함이니라. 여러 경계 중에서 아직 대충 몇 가지를 이르노라.
미사와 모든 예절에 참례할 때 모든 교우가 버선 신고 옷을 단정히 하되 남자 교우는 망건을 쓰고 소창 옷을 입으며, 여자 교우는 머리에 넓은 수건을 쓸 것이다. 몸을 진중히 하여 장궤하거나 꿇어앉거나 하고 평좌(平坐)하기와 일어서 엎드리지는 못할 것이다. 일체 잠잠하고 작은 소리도 못하며 더구나 아이들을 데려오지 못할 것이다. 공소에서 남 여 나누는 법은 남자는 제대 방에 두고 여인은 아랫방에 두되, 방이 하나 뿐이면 남녀의 지경이 분명히 나게 할지니라.
평시(平時)
평시라도 공소에 있는 때는 노는 때가 아니다. 영혼을 다스릴 땐 주를 생각하여라. 신사(神師 : 神父) 앞에 오는 교우가 마땅히 버선 신고 망건 쓰고, 소창 옷 입고 몸 두기와 말하는 법은 나라 풍속대로 하여, 그 앞에 교우끼리 절하고 마구 수작하지 못하며, 공소 아랫방이라도 모여 놀지 못할 것이요, 수렴(収斂)하고 조용히 있어 온전히 각각 신공에 힘쓸 때니라.
여러 교우들이 세속 풍속에 너무 범연(泛然)히 여겨 돌아보지 아니하니, 실로 부끄럽고 염치없어 짐짓 어른과 아이를 의논하지 말고 마땅히 그 좋은 풍속을 다시 세워 인사와 예모를 큰 본분으로 앎이 좋을 것이니, 절하는 것과 문안 등 예절에 어른과 존장(尊長)과 친구와 손님을 그 분수대로 대접함과, 노소를 분별함과 행동거지에 인사 체면이 틀리는 것은 힘써 닦고 자식도 엄히 가르칠지니라. 어떤 동네를 보면 실로 야인(野人)의 자식으로 지목하여도 가하니 급급히 고칠지어다. 남녀 서로 상관하는 것이 극진히 조심할 때라 이목에 걸리고, 우리가 규구 삼는 것은 양반의 집 풍속이라도 그 풍속에 따라, 양반과 양민(良民)을 의논치 말고 남녀끼리 서로 마구 말하지 못하며, 더구나 여인의 방에 가기는 서로 임의로 가지 못할 것이니, 이 규구를 범하는 자는 엄벌을 면치 못하리라.
도리(道理)
도리를 모르는 자가 성사를 잘 받고 구령할 길이 없거늘 이제까지 요긴한 도리라도 아는 교우가 적으니 놀랍도다.
책 없는 사람도 많거니와 있는 사람도 보지 아니하고, 혹 본다 하여도 요긴한 도리를 공부하지 아니하니 절통(切痛)하도다. 노소를 의논하지 말고, 공부에 힘써 스스로 배우든지 남에게 묻든지 성교의 문답과 요긴한 도리를 배우고 잊지 아니하고, 그 뜻을 깨달은 후에야 성사 받기를 가히 비로소 바랄지니, 문답에서 주님을 배우는데 엄한 분부가 없으되 권하고 만번 권하나니, 주일이나 참례 날이나 각 사람이 외우면 잊지 아니할 좋은 법이니라.
또 자식을 가르침은 부모의 엄한 본분이니라. 배우지 아니하는 자가 성사 받음과 구령하기에 크게 방해로우니, 삼본문답(三本問答)과 조만과(早晩課)를 일찍 가르칠지어다.
또 엄한 규구를 세우나니 열살 된 아이는 요긴한 경문 외에 적어도 영세 문답(領洗問答)을 외우고, 열한 살에 고해 문답(告解問答), 열두 살에 성체 문답(聖体問答)을 외울 것이니라. 언문이나 전서를 가르치면 도리를 밝히기에 요긴할 것이요, 영육에 큰 이익을 받을 것이니 이를 위하여 간절히 권하노라.
성사(聖事)
모든 성사가 영혼을 기르는 양식이니, 혹 받지 아니하거나 혹 타당하지 아니하면 어찌 신명(神命)을 보존하리요? 그 신익(神益)을 온전히 받게 하고자 하여 이 아래 규구를 세우노라.
성세(聖洗)
영세하고자 하는 자가 모든 조당(阻擋)을 끊고 요긴한 경문과 삼본문답(三本問答)을 배우고, 그 뜻을 통하고 십사예절(十四禮節)을 익힐 것이다. 본명과 대부 대모를 정하고 공소에 올 것이며, 탁덕이 없는 때에 아이를 낳거든 아무 사람이나 세 주지 못하느니, 세 주기는 홀로 회장의 본분이로되 두어 사람을 데리고 할 것이다. 부모의 본분은 난지 삼 일 안에 회장에게 청할 것이니 만일 팔 일을 지내면 엄한 벌을 당하리라. 경산(驚産)이나 낙태한 일이 있거든 몇 달을 의논하지 말고 분명히 죽은 것이 아니면 세를 주어라.
견진(堅振)
모든 교우를 보건대, 견진은 귀하고 긴한 성사로 알지 아니하니 실로 마귀의 유감이나, 받을 만한 터에 영하지 않는 자는 대죄를 면키 어려우니, 영하고자 하는 사람이 마땅히 삼본문답(三本問答)외에 견진문답(堅振問答)이나 혹 적어도 대요리(大要理)에 있는 견진편(堅振篇)을 자세히 배워 둘 것이고, 또한 대부 대모를 미리 정하고 공소에 올지니라.
성체(聖体)
이 지극한 성사를 영할 때에 온전히 규구를 이제까지 행하지 아니한 것이 뜻밖에 일이로다. 장궤하고 머리를 꼿꼿이 하고 혀를 내어 조심하여 영하라는 모든 예절이 모두 다 성체문답주(聖体問答註)에 있으니, 익히 보든지 남과 한가지로 숙습(熟習)하든지 불가불 예답게 할 것이다. 만일 후에도 영할 법을 모르는 교우를 만나면 탁덕이 성체 주지 아니하고 그저 지나시리라. 또 마음을 예비하는 성체전후송(聖体前後誦)을 짐짓 궐하지 못할 것이니, 모든 교우와 한가지로 통경을 못하거든 사사로이 할 것이니라.
고해(告解)
고해 할 때에 혹 평좌하고 혹 일어나 업드리기는 일체 못할지라. 혹 장궤하거나 꿇어앉거나 할 것이다. 몸두기와 말하기는 극히 겸손하고 공손하게 할 것이라. 또 다섯 가지 요긴한 것은 문답주(問答註)에 있으니 자세히 익혀 마음에 새겨 볼 것이다. 특별히 성찰하는 것을 지금도 신신 부탁하나니, 염경하고 배우고 마음에 공부하면 어찌 못하랴, 힘쓰지 아니하는 자는 고해 하지 아니하고 그냥 나가기 쉬우리라.
또 이단의 물건을 두는 자는 고해 못할 뿐 아니라 공소에도 오지 못할 것이다. 그대로 죽으면 연 미사 은혜를 시행하지 못하며, 교우들이 모여 연옥기구(煉獄祈求)도 하여 주지 못할 것이다. 그 물건을 없이한 후라도 모든 교우 앞에 사과한 후에야 성사를 받으리라.
또 외인에게 빚진 것을 갚기는 혹 약간 힘쓰되, 교우에게서 빚과 취래 한 것은 갚기에 너무 만홀(漫忽)하니 이것이 공의냐? 혹 변이 없고 혹 경변(軽邊)의 돈이라 하여 진작 갚지 아니하면 불공한 것이니 그저 두지 못하리라.
종부(終傅)
사람이 죽을 지경에 이르면 모든 사람이 이를 위하여 힘쓸 것이로되, 이는 특별히 집주인의 본분이라. 권솔(眷率) 중에 병든 자가 있거든 임종을 기다리지 말고 신부(神父)에게 통할지니, 우리도 즉시 가서 힘대로 돌아볼지라, 그러나 지금 있는 지경에 한 오십 리쯤이나 가고, 그 밖은 가지 못하고 전교 할 때에는 탁덕이 사세를 보아 분부하리라.
또 신부가 원거리에 거처할 때에 아무 병자라도 데려오기를 일금하고, 공소에 있을 때면 먼저 신부께 통하고 지경을 보아 분부하신 후에야 데려올지니라. 또 종부를 청하는 자가 미리 이목구비와 수족을 씻어 조촐하게 하여 성유 받기에 편하게 할지니라.
혼배(婚配)
혼배는 세속에서도 대사이고 교우에게는 성사인데 어찌하여 경홀히 여기며, 도리어 더구나 법의를 거스리려 하느냐? 중간에 여러 가지 폐단이 일어났으니 깨우치지 아니할 수 없어, 마치 관면 없이 외인과 혼인하며, 내력과 지체를 속이며 정혼하였다가 큰 연고 없이 퇴혼하며, 억혼(抑婚)하고자 하여 교사한 거짓말로 꾸미고 회뢰(賄賂)하며 꾸짖고 훼방하며, 억지 쓰는 것을 무수히 하며, 아무쪼록 이를 취하는 거만한 죄로써 딸자식을 보냄 같은 것을 불가불 고칠 것이라. 이때문에 주의 은우(恩佑)를 집안에 받지 못하고, 인심이 쇠하여 가고 불목이 일어나니, 이 거룩한 예를 거간할 때에 때묻은 것을 급급히 씻고, 이후에 여전히 법답게 하기를 간절히 바라노라.
성교회법(聖教会法)에 자식을 강박 하거나 모르게 정혼하지 못하느니, 부모가 그 뜻을 통한즉 착한 자식이 자연히 따를 것이다. 혹 별고가 있거든 부모께 고하여 한가지로 의논하여 할 것이니라.
요긴한 경과 삼본 문답을 배우지 아니한 자는 혼배하기를 금하노라. 혹 급한 연고가 있거든 신부께 관면을 얻을 것이다. 회장이 권도(権道)로는 일정하지 못할 것이라, 탁덕이 없는 때에 교우가 혼배하려면, 회장은 아무 조당이 없음과 경문과 문답을 배운 것을 살핀 후에, 신랑 신부를 불러 두 사람을 증인으로 세워, 예절대로 혼배 하여줄 것이다. 또 혼배 조당이 있어 탁덕이 금하시던 혼인을 지내었거나, 탁덕의 분명한 관면 없이 딸자식을 외인에게 보내었으면 기절벌(破門)을 당하리라.
성교회 법에 동정 지키고자 하는 자가 혼자 스스로 결단하지 못하는 법이라. 마땅히 탁덕과 자세히 의논하여 할 것이니, 그 허락이 없으면 허원(許願)을 도무지 만만코 못하며, 수절하고자 하는 내외도 이 법과 같이 할 것이니라.
과부 된 사람이 개가하지 아니하는 것이 원래 이 나라 풍속이 아니라 새로 시작한 것이다. 또한 성교회 규구가 아니니 여러 번 영육에 크게 해로운 것이라. 과부 된 사람이 그 풍속을 쫓지 못할 것이니 누구와도 의논하지 말고, 혹 말로나 별법(別法)으로 말리려 하면 양심에도 걸리고 벌도 면하지 못할 줄로 알리라.
우리 사랑하는 신자들아! 이 위에 몇 가지 분부한 것은 가르치지 아니하여도 너희 마음에 있는 도리라. 그러나 사람사람이 몸을 닦고 영혼을 꾸미는데 태완(太緩)함은 모든 이의 통병(痛病)이라, 윗사람이 되어 어찌 차마 그저 두리요? 나의 이같이 분부함이 예사의 말이 아니다. 진정과 실의로 간절히 사랑하므로 인함이니, 너희들이 묵은 것을 버리고 새 길로 나아가면 이것이 나의 미미한 정을 갚음이로다. 너희는 나의 사랑하는 자녀라, 주야로 생각하는 바가 너희 영혼 대사이니, 이 뜻을 받아 십분 청명하면 세상에서도 아름다운 이름이 있고 주 대전에도 후한 상을 받으리라.
감목 시메온
1857년 3월 25일 성모 영보 축일에 신중을 기하느라고 서울의 몇몇 회장과 신자 일부만 다블뤼 주교의 성성식을 참석시키고, 성직자 회의에 참석자는 조선 교구 제 4대 교구장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 최양업 신부, 메스트르 신부, 프티니꼴라 신부, 푸르티에 신부가 참석하였고, 조선 최초로 열린 3일간의 성직자 회의에선 선교사의 모든 행적 규칙과 그 당시 상황 아래서 활동 계획을 수립하고 사목서한을 통하여 성직자와 일반 신자에게 장 주교 윤시제우서란 이름으로 1857년 8월 2일자로 반포하였다.
성가 200. 열절하신 주의 사랑
수리치 골
성지 설명 |
041-841-7981
소재지 : 충남 공주시 신풍면 봉갑리 산 116
1838년 앵베르 범 주교는 조선 교회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마리아를 주보로 모시게 해줄 것을 교황청에 요청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께서 1841년 8월에 요셉과 같이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마리아를 조선 교회가 모실 것을 허락하셨다.
페레올 고 주교는 1846년 무서운 박해 중에 이 수리치골에서 이 나라와 교회를 요셉 성인과 공동 주보이신 성모님께 봉헌했다.
성가 489. 보았나 십자가의 주님을
시복시성청원자 :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덕산 전주 1839년 12월 5일 12세) 교수
이봉금 아나타시아 순교자의 친인척 관계
성 명 |
관 계 |
순 교 일 |
성별 |
형 지 |
시복시성 |
나이 |
이봉금 아나타시아 |
본인 |
1839/12/5 |
여 |
전주옥 |
시복시성청원자 |
12세 |
김소사 아나스타시아 |
어머니 |
1839/11/ |
여 |
전주 |
시복시성청원자 |
51세 |
이성삼 |
아버지 |
1827/ |
남 |
|
순교자 |
33세 |
이시임 안나 |
고모 |
1816/12/19 |
남 |
대구관덕정 |
시복시성청원자 |
35세 |
이성지 |
삼촌 |
1832/ |
남 |
전주 |
순교자 |
38세 |
이봉금 아나타시아는 아버지 이성삼과 어머니 김소사 아나타시아 사이에서 태어난 이봄금은 열 두 살의 어린 나이로 1839년에 밀고되어 어디로 피신해야할지 몰라 귀양살이하는 홍재영 쁘로다시오의 집으로 피해 갔다가 그 집에 있던 다른 사람들과 같이 붙잡혀 124위 순교자 중에 제일 나이가 적은 어린 아이로 그들과 같이 괴로움을 나누었다.
이봉금은 귀여운 신심을 지닌 하나의 작은 천사였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열심한 가르침은 그의 마음 속에 깊이 뿌리박혀있었다. 열 살에 교리문답과 조․만과의 긴 경문을 배운 후 선교사를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선교사는 그의 조숙한 마음가짐에 감동하여 성체를 모시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그 어린이에게 박해의 시련을 겪기를 허락하셨다. 그 어린이에게 서양 신부의 행적을 묻자 “예 우리 집에 오셨어요, 그렇지만 지금은 어디 계신지 몰라요 저 같은 어린애가 어떻게 서양 신부님들의 일을 알겠어요.” “그럼 천주를 배반하고 욕하면 살려주마. 그렇지 않으면 죽일 테다.” “제가 일곱 살이 되기 전에는 철이 나지 않아서 천주님을 제대로 공경하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일곱 살 때부터는 천주를 섬겨왔는데 오늘 천주님을 배반하고 욕을 하라고 그러세요! 안돼요. 천 번 죽어도 그렇게 못하겠어요.” 관장은 그 어린 아이를 고문하지 못하고 옥으로 돌려보냈다.
옥에 돌아온 딸에게 용기를 주려고 어머니는 꾀를 썼다. “너는 틀림없이 배교할 것이다.” 어머니가 이렇게 말하자 이봉금은 펄쩍 뛰며 아니라고 말했다. “고문을 당하면 너는 꿋꿋하게 견디어 낼 힘이 없어. 어디 네가 무슨 일을 할지 두고보자.” 관장은 이 어린이의 목숨을 살리기 위하여 마침내 고문을 시작했다.
이 어린이는 형리들의 피묻은 손아귀에서도 무서워하지 않고, 그들의 무서운 매를 맞으면서 태연하여 이 아나스다시아는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마침내 사형 선고를 받고 결안에 서명하였다.
1839년 12월 5일(음력11/10) 그에게 참수하지 못하고 전주 옥에서 12세에 목매어 교수형이 집행되었다.(달레한국천주교회사중권509~511)
여사울 이존창 생가
성지 설명 |
소재지 :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현재 신례원 본당의 공소가 있는 여사울은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의 생가터가 있는 곳이다. 이존창(李存昌)에게는 지식을 얻고, 원 동지(元同知) 베드로에게는 양식을 얻는다(달레교회사상권321)는 말이 있듯이 그의 명성은 대단하였다. 내포라는 지역은 아산에서 태안까지의 평야를 일컫는 말로 충남 중서부 지역을 말한다.
그는 가성직제도가 교리에 어긋남에 따라 신부 영입을 위해 윤유일, 지황 등에게 여비를 도와주고 북경에 다녀오게 했으며, 주문모 신부를 모셔 오는데 주도 역할을 했다. 1791년 신해박해 때 그는 혹독한 고문과 가혹한 매질에 못 이겨 배교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양심의 가책을 받아 내포 지방을 떠나 홍산으로 가서, 전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전보다 더욱 열심히 신앙을 지키며 전교에 힘썼다. 우리나라의 첫 방인 사제 김대건 신부의 집안도, 이존창의 전교로 입교했다. 김 신부의 할머니는 그의 조카딸이 되며,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는 그의 손녀이다. 이존창 루도비꼬 곤자가는, 1795에 체포되어 6년 동안 연금 생활을 하다가, 1801년 다시 체포되어 서울의 정약종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공주 황새 바위에서 50세에 참수되었다.
성가 22. 천지 생기기 전
시복시성청원자 : 현계흠 바오로(서울 서소문 1801년 12월 10일 39세) 참수 명도회
현계흠 바오로 순교자의 친인척 관계
성 명 |
관 계 |
순 교 일 |
성별 |
형 지 |
시복시성 |
나이 |
현계흠 바오로 |
본인 |
1801/12/10 |
남 |
서소문 |
시복청원자 |
39세 |
최창현 요한 |
사돈 |
1801/ 4/ 8 |
남 |
서소문 |
시복청원자 |
43세 |
현석문 가롤로 |
아들 |
1846/ 9/19 |
남 |
새남터 |
성인 |
49세 |
김 데레사 |
며느리 |
1840/ 1/31 |
여 |
옥사 |
순교자 |
37세 |
현경련 베네딕다 |
차녀 |
1839/12/29 |
여 |
서소문 |
성녀 |
46세 |
현계흠 바오로는 103위성인 중에서 남매 성인인 현석문 가롤로와 현경련 베네딕다의 아버지이다. 그러나 이들이 순교한 때는 각각 다르다. 현계흠 순교자는 1801년 신유박해 때이고, 딸 현경련 성녀는 1839년 기해박해 때이고, 현석문 성인은 1846년 병오박해 때이다.
현계흠은 대대로 많은 역관을 배출한 천령 현씨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역관의 길을 택하지 않고 의원의 길을 택하여 회현동에서 약방을 경영하였다. 그리고 그는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직후 ‘블록’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명도회의 하부 조직인 ‘육회’의 한 책임자였다. 현계흠은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기 전에 한학 교양을 살려 천주교 서적을 가까이하면서 천주교 신앙에 깊숙이 개입한사람이다.
그는 신․망․애 삼 덕을 실천하여 교우들의 신망도 두터워 육회에 지도자로 선임되었다. 그는 최필공, 최필제, 이합규, ㅖ흠, 손준렬, 오현당, 김현우 등과 더불어 매월 7일 김이우의 집에서 신앙집회를 가졌으며 정약종, 최인철, 홍재영, 윤종백, 최창현, 남송로, 이합규 등과 같이 황사영의 집에서도 신앙집회를 가졌다. 또 자신의 집도 육회 조직의 거점이었다. 이것을 보면 그가 교회활동의 적극적이었다.
현계흠은 1797년 9월에 동래에 사는 현계탁을 찾아가 며칠 머무를 때, 때마침 용당포(龍塘浦) 앞 바다에 서양배가 정박하고 있었다. 그 배는 영국 북태평양 탐험선인 프로비단수호였는데, 현계흠은 강한 의욕을 가지고 9월 6일 이 배에 접근을 시도하였다. 한역서학서나 주문모 신부를 통하여 서양 지식을 어느 정도 갖고 있었던 그는, 신자임을 나타내기 위해 십자성호를 그으며 접근하는 것을 지켜보던 영국인들은 승선을 허락하여 대화를 시도하였다. 영국인은 그리스도 신자로 보이는 현계흠에게 배에 승선시켜 안내하고 군장비를 보여주었다. 현계흠의 놀라움은 대단하여 서울에서 황사영을 만났을 때 “그 배를 자세히 살펴보니 그 배 한 척이면 우리나라 전선 100척을 능히 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래서 황사영은 서양 세력에 의한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는 구상을 할 때 현계흠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머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현계흠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지방으로 피신하였다가 자기에게 체포령이 내려지고 친족 일가들이 자기 때문에 곤혹을 치른다는 소식을 듣고 4월 6일 스스로 자수하였다. 또 황사영의 취조과정에서 현계흠이 서양 배에 승선한 사실이 밝혀지자 백서사건의 일당으로 단정하고 악형을 가하며 취조를 당하고, 39세의 나이로 1801년 12월 10일(음력11/5) 서소문 형장에서 옥천희 황사영과 함께 순교하였다.(달레한국천주교회사상권570,595 중권102, 518) (순교는믿음의씨앗이되고111)
이존창의 구속 |
說明 |
홍낙안, 목만중, 이기경은 남인의 피를 이어받았으면서 벽파들의 앞잡이가 되어 날뛰고 있었다. 이기경은 정약용의 도움으로 귀양에서 풀려난 사람이지만 그는 그에게 덕을 악으로 갚은 사람이다.
정조는, 정약용과 이가환을 귀양 보낸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다시 우의정 채제공은 사당을 옹호하고, 천주교도를 은밀히 감싸고 있는 표리부동한 자이니 엄중히 문책하라는 상소문을 움켜쥐고 분노하였다.
정조는 약용을 동부 승지 자리에서 좌천시켜 금정 찰방으로 내려보내며 이렇게 당부하였다.
“공을 금정으로 보내는 것은 홍주 지방에 서학이 급속도로 만연되고 있기 때문이요. 공이 가서 그들을 따듯하게 선도하기 바라오.”
금정에 도착한 그는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찰방이란 지금의 역(駅)을 관장하는 벼슬로 충청도 해안에 위치한 서산, 보령, 청양, 홍주 등에서 오고가는 관원들의 말을 관리하는 관직이었다.
그는 금정에 부임하던 날 수소문 끝에 천주교의 우두머리인 역졸을 찾아냈다. 그는 두 얼굴을 가진 사람처럼 고민에 쌓여 있으면서 관리로서의 길을 걷고 있었다.
“역졸들이 살기 어려운 까닭이 무엇이냐? 뒤탈이 없도록 해줄 터이니 솔직하게 고하여라.”
“상납(上納)제도 때문이옵니다.”
그때 하급 관리들이 받는 녹이라야 얼마 되지 않는다. 역졸들은 오가는 파발자나 손님들에게 정성껏 친절을 베푼 대가로 한두 푼 받는 사례비로 생계를 꾸려 나가는 실정이었는데 그것마저 송두리째 빼앗기고 나면 더 이상 살고 싶은 의욕마저 잃게 된다. 만약 그것을 안 바치면 대번에 변방으로 쫓겨나거나 파직 당하기 때문이다.
그는 부임하는 즉시 상납 제도를 없애 버렸다. 그러자 역속들은 더욱 의욕적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는 개국 초부터 유교를 숭상하고 삼강오륜의 덕목을 바탕으로 하는 유교 국가요. 사람은 날 적부터 부모와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돌아가신 부모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제사를 지내면 소홀하기 쉬운 효심을 바로 잡으며, 선조와 후손간에 유대를 마련하는 아름다운 미풍양속인데 천주교 때문에 이런 미풍을 버린다면 망령된 것이다. 유교냐, 천주교냐, 하는 것보다 자기가 본래부터 지니고 있던 것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외국에서 들어온 것에 생각을 빼앗기지 말고 이미 가지고 있는 우리의 것을 잘 지켜야 된다고 설득하였다.
정약용은 자기 삶의 자세 자체가 말보다 설득력이 있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민심을 얻었으며, 부조리와 악습을 척결하는 힘을 발휘했다. 그래서 이 무렵 금정의 관속들은 거의가 천주학에 등을 돌린 상태가 되었다.
정약용이 찰방으로 부임해 오기 전에 만식(万植)이란 역졸이 열심히 전교 하여 관속과 주민들은 거의 천주교 신자가 되어 있었다. 만식이란 사람이 역졸로 들어가기 이전에 선대부터 상전으로 모시고 있던 이존창의 집으로 찾아갔다.
이존창의 아버지는 평생 동안 장사를 해서 모은 돈으로 농사지을 논 100마지기를 마련한 다음 아들 이존창에게 유언을 남겼다.
“잘 듣거라. 나는 너를 장사치로 만들지 않으련다. 장사를 하자면 언제나 거짓말을 하고 자기 양심을 판 대가로 먹고살게 마련이니 부모 된 도리로 자식에게 장사를 시키고 싶지 않다. 너는 정직하게 농군이 되어 성실하게 살아 주기를 바란다.”
부모가 그에게 마련해 준 1백 마지기의 논이면 그 당시 백성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큰 재산이었다. 이존창은 2년 동안 풍년이 들어 잘 살았다. 그러나 3․4년째 되는 두해 동안 가뭄으로 흉년이 드는 바람에 세금을 내지 못해서 아전들에게 농토를 빼앗겼다. 부친이 평생 동안 장만해 놓은 농토를 관졸들에게 빼앗기고 나니 나라의 녹을 먹는 역졸이나 아전을 보기만 해도 눈이 뒤집히는 것을 누를 길이 없었다.
그래서 어떤 방법을 찾기 위해 그는 한양에 살고 있는 김범우의 집을 찾아갔다. 역관 김범우의 부친은 이존창의 부친에게 많은 신세를 진일이 있었다. 이존창은 김범우를 찾아가서 자기 가슴에 맺힌 한을 모두 털어놓으니 마음이 후련했다.
김범우는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는데, 이존창은 관청의 수탈로 찢기고 긁혀 악만 남아 안타까워하는 것을 보니 애가 탔다. 그는 이존창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천주교 신자가 되었네. 지금은 자네가 잘 이해할 수 없겠지만 사람이 천주님을 믿으면 믿기 전과 믿은 후의 생활이 그렇게 다를 수가 없네. 이제는 나에게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마음의 평온을 잃지 않고 지낼 수가 있게 되었네. 억울한 일을 당했다 해서 살기를 포기하거나 나쁜 일에 가담하는 것은 죄를 짓는 일이네. 그러나 천주님을 믿고 그분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살다 보면, 비록 말할 수 없는 곤경에 처했다 하더라도 능히 선하게 살아갈 수가 있네. 천주님께서 이겨나갈 힘을 주시는 까닭이라네.”
이때 이존창의 마음 안에는 나쁜 생각이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악은 복수를 부르고 사람의 양심은 메마르게 되는 것이다. 그 갈림길에서 이존창은 김범우를 만나면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 복수심이 차차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김범우는 천주교 지도급 인사인 권일신에게 이존창을 소개하였다. 1784년부터 천주교가 한참 번지고 있을 때 이존창은 권일신의 말에 매료되어, 천주 실의라는 교리 책을 배우고 권일신을 대부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내포로 내려가서 관의 수탈에 찢기고 긁혀 악만 남은 마을 사람들에게 천주교를 전하기 시작했다. 그가 애쓴 보람이 있어 내포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많이 늘어나게 되었고 비밀리에 모여 성사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금정찰방의 역졸 만식은 상관에게 착취당하여 괴로워하다가 옛 주인을 찾아와서 “위에 높은 사람들이 어찌나 괴롭히는지 차라리 옛 주인을 찾아와서 다시 하인으로 살고 싶구먼유.”
“참으로 잘 찾아 왔네. 이제 자네는 하인으로 살 필요가 없네. 당분간 내가 가르쳐 주는 것을 배우고 익히면 더 이상 종노릇하며 살지 않아도 되네. 그때 가서 역졸을 하든 하인을 하든 자유로운 몸이 될 걸세.”
이렇게 해서 천주교를 배우고 금정으로 돌아간 만식은 동료들에게 천주교를 전하기 시작했다. 핍박과 압제 속에서 복음은 무섭게 파급되어 역속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독실한 교인으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이런 중에 정약용이 금정 찰방으로 부임해 온 것이다. 그는 부임 초기부터 부조리를 뿌리뽑아서 금정역의 분위기를 일신시켰기 때문에 역졸들이 더 이상 끼니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역속들은 자연히 믿음이 식어 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새 사또는 내포 지방의 신자에게 천주교를 버리도록 당부하여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나라에서 천주교 금령이 떨어졌고, 사또 역시 천주교를 믿지 말고 나라 법을 따르라고 하니 우리도 나라의 녹을 먹고사는 형편이니 나라에 협조를 해야 옳지 않겠는가.”
“그게 무슨 말인가?”
“이존창을 잡아 드리세.”
“뭐라고. 아니 무슨 수로.”
“어쨌든 나만 따라오게. 우선 사또께 이존창을 고발하고 보세.”
두 역졸은 의논 끝에 약용에게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아뢰올 말씀이 있습니다.”
약용은 두 역졸을 바라보았다.
“주위를 모두 물리쳐 주십시오.”
약용은 주위를 둘러보고 모두 물러가도록 지시를 내렸다.
“무슨 말이냐?”
“예. 이재 아뢰겠습니다. 이 지방에 천주학이 창궐하는 까닭은 모두 이존창이라는 자 때문이옵니다.”
약용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한양에서 들은 이름이었다. 김범우에게 교리를 배우고 권일신을 대부로 삼고, 교회 창설 초기부터 지금까지 내포 지방에 천주교를 전파하기 위해 맹활약하던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잘 알려져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자만 잡아들인다면 나라에서 금하는 사교의 기세를 꺾을 수 있지 않을까 하옵니다.”
“듣기로는 그가 신출귀몰한다는데 어찌 잡을 수 있겠느냐?”
“저희들에게 말미를 주신다면 은밀히 정보를 수집하여 그가 있는 곳을 알아보겠사옵니다.”
망설임 끝에 정약용은 허락하였다.
평복으로 갈아입은 두 역졸은 그 날부터 홍성, 내포, 예산 일대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희망은 국법을 어긴 거물을 잡기만 하면 큰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두 달 동안 헤매고 다녔지만 별 소득이 없이 의욕과 욕심만 앞섰지 별다른 계략을 찾아내지 못한 채 소문만 듣고 이리저리 쫓아 다녔던 것이었다.
“이존창은 대체 어디에 사는 거여.”
“집도 팔아 치워 버리고 완전히 숨어서 전교만 하고 다니니 찾을 수 있어야지.”
“이러고 있을게 아니라 다른 방법을 찾아보세.”
“어떻게.”
“며칠 전 내가 봐둔 수상한 집이 하나 있네. 내가 그 집에 머슴으로 들어가 염탐을 하는게 좋겠네. 자네는 엿장수로 가장하여 매일 한번씩 집 바깥에서 외치고 지나가게. 내가 정보를 얻게 되면 엿을 사는 척하고 나가서 알려줌세.”
보름 후 엿장수로 가장한 역졸은 머슴으로 들어간 역졸에게서 정보를 알아내어 정약용에게 고발하였다. 그는 즉시 충청 감사 유강(柳綱)에게 파발을 보냈다. 이존창은 거물이었다. 그 당시 충청도 일대의 모든 관찰사나 수령들이 그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으나 잡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고 있던 참이었다.
“수고가 많습니다. 이번 정보는 틀림없겠지요.”
“역졸들이 3개월 동안 염탐해서 알아냈으니 틀림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정보를 수집하여 예정된 날, 예정된 시간에 충청 감사 유강의 진두 지휘로 마을은 포위되었다. 천주교도들은 교리 공부 중에 급습을 당해 이존창 일당은 올 것이 왔다는 평온한 태도로 순순히 포박을 당했다.
정조는 이 공로를 크게 포상하려고 하였으나 정약용은 직분을 다한 것일 뿐 표창 받을 만한 일이 못된다는 것이었다. 정약용은 괴로움이 많았다. 천주교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행동 때문에 상을 받는다는 것은 양심상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오직 왕명을 따라야 한다는 신하의 입장 때문에 이존창을 붙잡게 한 것이다. 충청 감사 유강은 이존창을 잡게 된 경위는 정약용의 공로라는 것을 상세하게 보고하였다.
그러던 정약용은 1801년 신유박해 때 강진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1811년에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한 교회 재건 운동에 간접적으로 참여하였고, 그가 완전히 교회로 돌아온 것은 유배에서 풀려난지 2년 후로 볼 수 있다. 그의 생활은 운둔과 묵상, 고행과 기도로 일관했다. 유배지에서 돌아온 그는 보속(補贖)하는 뜻으로 기도와 고행의 삶을 살다가 조선에 두 번째로 들어왔던 중국인 여항덕(余恒徳) 신부에게 병자 성사를 받고 75세에 세상을 떠났다.
신리 성지
성지 설명 |
공소041-363-1359
합덕041-363-1061
소재지 : 충남 당진군 합덕읍 신리
다블뤼 주교는 미래를 위하여 한한불사전(韓漢仏辞典)을 준비하고, 이 나라의 역사와 년표(年表)에 대한 조선 책들을 번역하고,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천주교 서적들을 재검토하였다. 특히 사전 편찬 사업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또 1866년 3월 11일 마지막으로 고향의 부모님께 눈물겨운 최후의 편지를 여기서 썼다. 그는 3월 11일날 붙잡혀 옥중에서 갖은 고문을 받고 충청도 보령으로 압송되어 3월 30일 참수되었다. 9년 동안 베르뇌 주교의 보좌주교로, 그리고 교구장의 순교로 제 5대 조선 교구장으로 승계하여 24일만에 장엄하게 순교하였다. 안 주교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여의도에서 시성 되었다.
성가 286. 순교자의 믿음
신리 순교자 : 백청여, 손사중, 손자여 갈리스토와 그의 부친, 손 마르첼리노, 이사성 요한, 손여희, 손치황 요한, 정정심 가브리엘
거더리 순교자 : 김양범 빈첸시오, 김원행 필립보, 박 안토니오, 성 토마스, 손경서 안드레아, 손여도, 손자진, 손치량 요한, 손서방, 손치오 니콜라오, 오홍여, 임프란치스코, 손소사, 이영여, 송자선 바오로
성인 : 안 다블뤼 안토니오(불란서 갈매못 1866/3/30 49세 군문효수)
프랑스 아미앙 고을에서 태어난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의 우리나라 이름은 안돈이(安敦伊)라 하였다. 조선으로 부임하는 페레올 고 주교를 상해에서 만나 김대건 신부 서품식에 참례하고 1845년 9월 1일 상해를 출발하여 42일만에 10월 12일 서해안 강경포에 도착 입국하였다. 다블뤼 안 신부는 입국한지 10년이 되었을 때 한불자전(韓仏字典)이란 조선 최초의 사전을 만들었고 조선의 역사를 번역한 동국역대(東国歷代)등 많은 책을 출판하였다. 1853년 2월 5일 위험과 곤란과 병오박해를 같이 당한 고 주교가 선종하고 1856년 4월 입국한 4대 조선 교구장 베르뇌 장 주교가 번역과 저술 사업을 장려하면서 안 신부에게 황석두를 조역 자로 배정해 주어 교우들이 외우는 기도문 중 잘못된 점을 바르게 고치기 시작하였다. 1857년 장 주교는 다블뤼 신부를 부주교로 추대하여 주교 품을 주고 성직자 회의를 주관하게 하였다. 안 주교는 출판 사업에 착수하고 1862년에는 천신만고 끝에 수집한 순교사료 집을 파리 외방전교회에 보냈는데 이 순교사료 집이 달레의 <한국교회사>원고가 되었다. 또한 1864년 이후 출판된 교회서적 가운데 1. 성찰기략(省察記略)은 고백성사를 잘 받기 위한 지침서이고, 2. 신명초행(神命初行)은 믿을 교리를 중심으로한 묵상서이며, 3. 회죄직지(悔罪直指) 즉 죄를 통희하는 방법 등이었으며 조선에 들어와 20여 년을 보내면서 한국말을 잘하고 보신탕 등을 즐기면서 조선 교회 발전에 큰 업적을 남긴 다블뤼 안 주교는, 1866년 3월 11일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고 민 위앵 루가 신부, 오 오메트르 신부, 황석두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 안 주교는 유창한 한국말과 한문에 능통하고 박식하여 다루기가 무척 버거워 관원들이 사정 비슷하게 이것저것 물으면 마지못해 하는 대답이 “서양 사람의 일이건 조선 사람의 일이건 나는 잘 알고있으나 내가 말하면 그들 또한 나처럼 처참한 지경에 빠질 것 아니겠소. 보다시피 내 정강이는 꺾어졌고 뼈는 튀어나지 않았소? 형벌을 주려면 얼마든지 더 주시오. 혹심할수록 더욱 좋고 반갑소. 다 달게 받으리다. 그러나 죽는 한이 있더라도 더 말하지 않으리다.” 라고 하면서 교우들을 한사람도 대주지 않았다. 3월 23일 안 주교와 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장주기 등 다섯 분은 사형 판결을 받았는데 고종 임금의 가례도 얼마 남지 않아 서울에서 피를 뿌리면 혼사에 해롭다는 무당의 말에, 새남터가 아닌 서울에서 400리나 떨어진 충남 보령 갈매 못에서 <예수님 수난 하신 날> 3월 30일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 다블뤼 안 주교는 23일간의 짧은 기간 동안 조선 제 5대 교구장 일을 맡아보았으나 순교 할 때까지 21년이란 긴 세월(신부로 12년 보좌주교로 9년) 동안 조선 교회와 함께 고난의 병오, 병인 등 2대 박해를 격은 산 증인이었다.(달레한국천주교회사下권76~80, 88~9, 91~2, 110~1, 176~7, 212~3, 250~1 269) (103위순교성인들의생애3권256)
성가 29. 주 예수 따르기로
시복시성청원자 : 이국승 바오로(음성 공주 1801년 7월 2일 30세) 참수
이국승 바오로는 충청도 음성 양반 집에서 태어나 충주로 이주해 살았다. 그는 성겸이라고 불렸으며 호는 미암(靡庵)이다. 그는 장성하여 천주교의 새로운 신앙을 철저히 배우기 위하여 양근 땅에 유명한 권일신을 찾아갔고, 은총으로 마음이 움직여 즉시 받아들였다.
이국승은 1801년에 체포되어 문초를 받는 과정에서 “1790년 최인길 마티아에게 천주교 서적을 얻어보고 입교하였다.” 고 거짓 진술한 이유는 그때까지 살아있는 신자들의 이름 대신 1795년에 이미 순교한 최인길의 이름을 댐으로써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교리의 가르침에 충실히 따르고자 한 때문이다.
복음을 받아드린 이국승이 집으로 돌아오자, 그의 스승은 그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진리를 설명하면서 스승에게 권유까지 하였다. 그러나 1795년 을묘박해의 여파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것으로 보아 깊은 신앙이 아니었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온 이국승은 진심으로 뉘우치고 자신의 죄를 보속하기 위해 전심전력하였다. 그러나 부모의 배교 재촉이 끊임없이 계속되자 이를 피하기 위해 서울로 이주한 뒤 훈장 노릇을 하고 1797년 황사영 집에 유숙하며 총회장 최창현, 명도회 회장 정약종, 홍재영 등 지도층 신자들과 교류하였으며 교회 일을 돕는 가운데 주문모 신부로부터 바오로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많은 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입교시켜서 명성이 널리 퍼져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국승이 옥으로 끌려 들어갔을 때 마침 황해도 출신의 고광성이 배교하고 옥문을 나서려고 하였다. 이에 그는 고광성에게 “관장 앞에서 배교한 것은 제가 아니고 마귀가 저의 입을 빌려 말한 것입니다.”라고 말하도록 하였고, 고광성은 마침내 순교에 이를 수 있었다. 그도 약하여 관장이 고문을 중지시키고 석방하려고 할 때마다 이국승은 갑자기 뉘우치는 마음이 생겨 “풀려나면 전과 마찬가지로 다시 종교를 신봉하겠다.”하고 외쳤다. 이처럼 그가 배교와 다짐을 여러 차례 번복한 것은 그의 기질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는 경솔하고 성질이 급하여 잘 변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는 반면 열성이 가득한 장점도 가지고 있었다.
결국 그는 형조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공주감형으로 보내 1801년 7월 2일(음력5/22) 30세로 순교했다. 그가 마지막 남긴 말은 “당신들은 나를 동정하는 것 같은데, 참으로 불쌍한 것은 당신들이오.”라고 말하였다.(달레한국천주교회사상권513, 515) (순교는믿음의씨앗이되고193)
☞천주교 전국 성지 순례 코스☜
1. 전국 성지순례의 의미
전국의 주요 성지와 유적지를 15개 코스로 나누어 성지 안내 봉사자의 안내를 받으며, 교회사에 나타난 역사적 의미와 관련된 행적들을 묵상하고, 성직자와 신자들의 박해 상황, 서간이나 기록에 나타난 순교자들의 행적을 되새겨 보는 1일 성지순례 피정입니다.
2. 순례코스
제 1차 어농, 단내, 천진암 강학터, 남한산성 성지.
제 2차 전동성당․풍납문, 전주숲정이 성지.
제 3차 배론 성지, 묘재, 용소막성당, 부엉골신학당.
재 4차 초남이 유항검생가터. 치명자산.
제 5차 갈매못 성지, 다락골줄무덤 성지, 홍성읍성 성지.
제 6차 마원 성지, 최양업 신부 선종지, 연풍, 감곡성당.
제 7차 황새바위 성지, 수리치골, 여사울, 신리 성지.
제 8차 풍수원 성당, 마재 정약종 유적지, 구산 성지
제 9차 여산 숲정이 성지, 천호산 성지,
제10차 삼성산 성지, 수리산 성지, 미리내 성지,
제11차 배티 성지, 죽산 성지, 은이 공소, 골배마실.
제12차 나바위 김대건 신부 귀착지. 김대건신부 출생지.
제13차 해미 성지, 성거산 성지, 공세리 성당
제14차 갑곶돈대 성지, 이승훈 묘 성지, 남양 성모 동산.
제15차 대구 관덕정 성지, 한티 성지, 신나무골 성지,
부록 명동성당, 서소문,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성지.
3. 준비 사항
◉ 안 내 : 한국순교자 현양회 성지안내 봉사자회
◉ 출발 도착 : 매월 3번째 주일 사당역 1번 출구 아침 8시출발․오후 8시 도착예정
◉ 신 청 : 본당 또는 단체별로 버스 1대 40명 기준
◎ 순교자현양회 주소 : 서울 중구 명동 2가 1번지 가톨릭 회관
◎ 안 내 전 화 : 순교자현양회 사무국 02-2269-0413~4 F 02-2269-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