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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세종대왕자태실 (星州世宗大王子胎室) 사적 444호 소재지 : 경북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8번지 소재 도동서원에서 김교현회원이 준비한 간식을 먹은 후 곧바로 성주세종대왕자태실 (星州世宗大王子胎室)로 가던 중 이원식 사장이 점심을 준비하기로 한 성주 근방의 한적한 곳에 위치한 <대성가든>에서 ‘낙지철판’ 요리와 소맥의 폭탄주의 대접을 잘 받았다. 오찬 후 오후 일정의 첫 번째로 성주세종대왕자태실(星州世宗大王子胎室)을 찾았다.
인간의 한 생명의 자라는 곳이 태(胎)이다. 태반이 튼튼하고 약함에 따라 어머니의 배 속에서 자라는 태아의 건강을 짐작할 수 있으며, 현대 의학에서도 태반(胎盤)의 중요성이 다시 한 번 인식되고 있다. 태는 어머니와 아기를 소중히 이어주는 아기의 뿌리이다. 오늘날에는 태안의 제대혈이 온갖 난치병을 치유하는 기적을 일으키는 등 태의 신비한 힘은 현대과학으로 속속 밝혀지고 있다. 이미 우리 조상들이 태의 소중함을 알고 태를 모시고 기도하는 이유를 알만하다. 예로부터 태의 가장 큰 의미는 사람 신체의 기운의 근원이라고 생각한 도교사상과 풍수지리설에 바탕을 두었다. 생명의 씨앗이 싹이 터서 자라게 한 태를 소중하게 묻은 것은 그만큼 생명의 존귀함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있다. 태장문화(胎藏文化)의 유래는 예로부터 도교사상과 풍수지리설에 바탕을 둔 것으로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 (사람 신체 기운의 근원)이라고 인정하여, 태아가 출산된 뒤에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하였다. 보관하는 방법도 신분의 귀천이나 계급의 고하에 따라 다르며 특히 왕실의 경우에는 국운과 직접 관련 있다하여 더욱 소중하게 다루었다. 우리나라에 있어 태를 봉안한 최초의 기록은『삼국사기(三國史記)』의 김유신의 장태(藏胎)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이후 고려의 왕실에서 태봉안 양식(胎奉安 樣式)이 성립된 후 많은 기록들과 태실들이 조선시대까지 그 맥락이 이어진 오랜 전통을 가졌다. 남자의 태가 좋은 땅을 만나면 총명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벼슬이 높으며 병이 없어진 다는 것이 당시의 생각이었다. 또 여자의 태가 좋은 땅을 만나면 얼굴이 예쁘고 단정하여 남에게 흥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었다. 왕실에서의 남자는 왕자를 가리킨다. 왕자가 총 명해야 한다는 것은 국가의 흥망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태장은 우리나라 전국 곳곳에는 태실(胎室), 태봉(胎封) 혹은 태장(胎臧)이라는 지명이 많이 있다. 이는 태장문화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바로 이와 같은 것들은 왕의 자녀들의 태를 묻은 곳을 의미한다. 즉 왕실에서 왕, 왕비, 대군, 왕세자, 왕자, 왕세손, 왕손, 공주, 옹주 등이 출산하면 전국의 명산을 골라 그 태를 봉안하는 것이 태장이다. 그래서 성주세종대왕자태실(星州世宗大王子胎室)도 집단군(集團群)으로, 성주군 월항면 선석산(禪石山) 아래 태봉(胎峰) 정상에 조성되었으며, 세종의 적서(嫡庶) 18왕자와 세손 단종의 태실 등 19기가 군집을 이루고 있다. 태실은 왕실에 왕자나 공주 등이 태어났을 때 그 태를 넣어두던 곳을 말한다. 성주세종대왕자태실(星州世宗大王子胎室)은 전체 19기중 14기는 조성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한 다섯 왕자의 태실의 경우 방형(方形)의 연꽃잎이 새겨진 대석(臺石)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으며, 세조 태실의 경우에는 즉위한 이후 특별히 귀부(龜趺:거북으로 만든 비석 받침돌)를 마련하여 가봉비(加封碑)를 태실비 앞에 세워두었다. 조선 세종 20년(1438)에서 24년(1442)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태봉은 당초 성주이씨의 중시조(中始祖) 이장경(李長庚)의 묘가 있었는데 왕실에서 이곳에 태실을 쓰면서 그의 묘를 옮기고 태를 안치하였다고 한다. 세종대왕자태실은 조선초기 태실형태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우리나라에서 왕자태실이 완전하게 군집을 이룬 유일한 예라는 점, 그리고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와 함께 왕실 태실 조성방식의 변화 양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태실은 인간 생명의 근원인 태를 중히 여기는 정신은 오늘날 생명존중 사상과 인간 존중 사상을 엿 볼 수 있는 귀중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나, 풍수지리설을 믿고 특권 계층이 전국을 무대로 자기 자식의 태를 명당에 매장해야겠다는 집념은 오늘날의 잣대로는 비판 받아 마땅하다. 성주세종대왕자태실(星州世宗大王子胎室)을 답사하고 가까이 있는 조선왕실의 태실 기도도량인 선석사(禪石寺)를 탐방하였다. 이 절은 692년 신라의 의상대사가 창건한 뒤 나옹 스님 등 많은 고승이 머무신 천년고찰로 200m거리에 태실이 조성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조선 왕실의 기도도량이 되었다고 한다.
태를 담는 항아리
태실로 올라가는 길
태봉에서 바라본 좌측산(여인의 우측다리 형상)
태봉에서 바라본 우측산(여인의 좌측다리 형상)
선석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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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세종대왕 왕자태실 그당시 대단한 국책사업이었겠지. 그러나, 선석사의 태봉합병 50만원은 근대적 미신인가 자직 손자의 명복을 태봉함으로 기원해야하나 싶어 씁쓸한 마음 금할길 없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