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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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문학은 사회적 변동과 연관하여 1945~50년의 평화적 조국건설기, 1950~53년의 조국해방전쟁기, 1953~60년의 전후 복구건설과 사회주의 기초건설을 위한 투쟁기, 1960년대 이후의 이른바 사회주의의 전면적 건설과 사회주의 승리를 앞당기기 위한 투쟁기 등 4단계 과정을 거쳐왔으며, 특히 1960년대 중반을 전후로 하여 그 양상이 크게 바뀌었다. 1960년대 중반 이전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일반론에 입각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학의 문학적·예술적 실천이 중심을 이루었고, 그 이후에는 김일성의 주체사상에 기초한 새로운 문예이론이 창작과 비평 또는 문예운동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북한 문학은 해방 직후부터 사회주의 국가건설과 체제 정립을 위해 사상과 이념에 대한 선전·계몽에 앞장섰으며, 1946년 3월에는 사회주의 이념의 문학적 실천을 목표로 한 북조선예술연맹이 결성되었다가 10월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조선문학가동맹이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려 했다면 이 단체는 평양을 중심으로 북한지역의 독자적인 문예활동을 펼치려는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중심인물들은 대부분 서울에서의 활동을 포기하고 사회주의 이념에 입각한 문예활동을 펼치기 위해 월북한 문학가들로서 이기영·한설야·안함광·송영·박세영 등이다.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공산당의 정치노선에 문예활동을 종속시키고, 그해 5월 중앙예술공작단을 조직해 그 이념을 적극적으로 선전했다. 이른바 건국사상동원운동은 당시 북한 주민의 사상을 공산주의로 개조하기 위한 의식개혁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문학가들이 앞장서 교화와 계몽운동을 담당했다. 6·25전쟁 후에는 문학가들이 전후 복구사업과 경제발전을 위해 동원되기에 이르렀고, 천리마운동 등을 통해 사회주의 체제의 정착과 대중의 사상을 쉽게 통제할 수 있도록 했다.
8·15해방 직후부터 1960년대 초반의 시로는 조기천의 장시 〈백두산〉과 강승한의 〈한라산〉이 있다. 이 두 작품은 시에 있어서 서사성을 확보했다는 공통점이 있으나 〈백두산〉이 영웅적 형상을 통한 이념 제시를 위주로 한 반면 〈한라산〉은 집단적 의식을 통해 투쟁성을 강조한 점에서 서로 대조적이다. 이 시기의 소설 가운데 대표작으로는 이기영의 〈땅〉·〈두만강〉을 들 수 있다. 〈땅〉은 북한의 토지개혁운동을 배경으로 한 무산계급의 사회적 성장과 사회주의 체제의 확립을 역사적인 필연성으로 해석하고자 했고, 〈두만강〉은 대하소설로서 한국 근대사를 민중세력의 성장과 자주성을 위한 투쟁으로 구체화시켜 놓았다. 그밖에 생산문제를 둘러싸고 새 것과 낡은 것과의 투쟁을 중심으로 노동계급의 영웅적 성격을 보여준 윤세중의 〈시련 속에서〉(1957)와 석개울의 농업협동화 과정을 3부작으로 그려낸 천세봉의 〈석개울의 새 봄〉(1955~63) 등은 사회주의 체제의 정립과정과 연관되는 내용으로서 집단적 계급의식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6·25전쟁이 끝난 뒤부터 김일성만을 찬양하고 그의 지도력을 선전하는 작품들이 많이 등장했는데, 특히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의 용맹성을 노래하거나 6·25전쟁 당시의 지도력을 과장·선전하는 작품이 많아졌다. 1960년대 이후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김일성의 주체사상에 입각해 새롭게 규정함으로써 그들 주체성과 혁명성을 더욱 드높이는 변모를 보여주었다. 따라서 1960년대 이후에는 주체적·혁명적 투쟁의식을 강력하게 내세움으로써 그만큼 이념성이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의 이른바 주체문예이론은 문예형식의 민족적 특수성을 내세우는 동시에 내용에서 혁명적 이념이라는 사회주의적 사상의 보편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김일성의 혁명사상을 바탕으로 혁명적 이념을 구현하고 있는 ' 혁명적 문예형식'을 항일혁명문학예술이라 칭하며 민족문학예술의 전형으로 내세우고 있다. 혁명적 문예형식의 주요 작품으로는 항일무장투쟁기에 김일성의 지도 아래 창작되었다고 하는 〈꽃 파는 처녀〉·〈피바다〉·〈한 자위단원의 운명〉·〈혈분만국회〉 등이 있다. 이 작품들은 노동계급이 앞장서 진행했던 혁명투쟁을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혁명적 입장을 기본으로 해서 그려냄으로써 인민의 계급적 각성을 가능하게 하고 인민의 요구와 참여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문학의 전형으로 평가되고 있다.
1970년대 이후에는 〈피바다〉·〈꽃 파는 처녀〉·〈한 자위단원의 운명〉 같은 작품들을 이른바 혁명적 대작으로 완성하기 위해 연극·가극·영화 등으로 제작했다. 이 세 작품은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계급적 모순을 폭로하면서 계급혁명과 항일투쟁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인민을 혁명대열에 참여하도록 하는 선동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특징을 보인다. 〈꽃 파는 처녀〉에서는 농촌의 한 가정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일제의 탄압과 지주들의 횡포로 부모를 잃은 여주인공이 조선혁명군의 대원이 된 오빠의 도움으로 시련을 이겨내고 혁명투쟁에 나서는 과정을 그려냈다. 또한 〈피바다〉는 일제 침략으로 남편을 잃은 아낙네가 공작원을 살리기 위해 아들마저 잃게 되나 강인한 의지로 혁명투쟁에 나선다는 이야기이며, 〈한 자위단원의 운명〉은 일제의 강압으로 친일조직인 자위단에 끌려간 남자 주인공이 소극적이고 순응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일제에 대항하여 유격대에 참여한다는 이야기이다.
해방 이후 북한 문학은 이른바 항일혁명문학의 혁명적 전통을 계승·발전시키는 것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내세웠으며, 당의 문예정책 또한 혁명사상의 구현을 중요한 지표로 내세워 문학의 창작과 연구에서 혁명성의 이념이 최고의 가치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성과 사상성의 강조, 문학예술의 선전적·선동적 기능을 강조하는 특성으로 인해 북한의 문학작품은 특히 1960년대 이후 구성과 인물성격의 형상화에서 하나의 고정된 틀을 되풀이하는 부정적 결과를 가져왔다. 혁명적 영웅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점, 비노동자 계급의 인물형상화가 천편일률적인 점, 선악의 도식적 대립, 김일성과 주체사상에 대한 무조건적 찬양, 행복한 결말 등이 그 정형성의 주요 요소들이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북한 문학은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남한에도 잘 알려진 남대현의 〈청춘송가〉나 백남룡의 〈벗〉을 통해서도 확인되듯이 문학 본연의 내적 자율성과 체제유지를 전제로 한 내부비판을 조심스럽게 허용하면서 점차 일상생활에서 풍부하게 나타나는 애정, 직업선택, 이혼, 도시와 농촌의 격차, 세대간의 이질성과 같은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박태원의 역사소설 〈갑오농민전쟁〉도 이 시기 중요한 성과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사회주의 체제의 절대적 우월성과 김일성에 대한 무조건적 찬양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한계 내에서의 변화이기는 하나, 해방 이후부터 전개되어온 북한문학의 흐름에서 변화를 나타내는 뚜렷한 징후로서 주목할 만하다. 1990년대 들어 소련과 동유럽의 몰락으로 현실 사회주의 진영이 붕괴되자 북한 문예계는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주체의 문예관, 사회정치적 생명체론 등으로 대변되는 김정일의 〈주체문학론〉(1992)에 입각한 주체사실주의문학을 내세워 종래의 사회주의 리얼리즘문학과는 질적으로 다른 문학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민의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의식을 중시하며 조선민족제일주의를 내세운다는 주체문학이 기실 수령을 향한 충성과 효성을 다하는 배타적 문학이 되고 있다는 평가를 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다만, 김일성의 항일혁명문학에만 완강하게 한정시켰던 문학사적 전통을 카프 및 고전문학의 진보적 영역으로까지 넓히는 등 현실적 유연성을 보이는 것은 남북한 문학의 궁극적인 통합을 위해 바람직한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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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미술은 현실을 혁명적 발전단계에서 강조하기 위해 주체문예이론에 입각하여, '사회주의적 내용'을 '민족적 형식'에 담는 것으로 규정된다. 또한 작품에서는 종자(사상적 알맹이)론을 중요한 창작개념으로 삼고 있는데, 사상성과 예술성의 조화와 함께 사상미학적 의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이러한 문예이론 원리에 의해 북한 미술은 역사적 사실을 재현함으로써 혁명의식을 고취시키고 김일성의 형상을 창조함으로써 당의 영도를 강화하며, 건설현장의 영웅적 인민을 재현하여 사회주의 건설을 독려하고, 민족의식과 조국에 대한 애정을 고취시키는 기능 등을 갖도록 하고 있다. 창작방법에 있어서 현재 북한 미술은 '집체적 유일심의체계'와 주체적 문예사상 연구모임의 방법으로 진행되는 '주체적 총화방법'으로 이루어지는데, 시기적절한 주제를 채택하도록 하는 '정책적 지도'와 이를 정확히 반영하도록 하는 '형상적 지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1946년 '평남지구 프롤레타리아 미술동맹'이 결성되고 이어 ' 북조선예술총연맹' 산하에 미술동맹이 결성되면서 본격적인 미술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1945~50년에 이르는 시기는 사회주의 지도이념의 확립을 위한 기초적인 작업이 진행되었던 시기로 소련의 양식과 기법이 많이 도입되어 포스터를 중심으로 선전을 위한 스탈린·김일성의 초상화와 자연주의적인 작품 및 산수화·문인화 등의 전통적인 동양화 등이 그려졌다. 6·25전쟁 동안에는 전쟁승리화나 포스터를 중심으로 사실주의적인 창작방법이 확대되었으며, 특히 부르주아 사상을 분쇄하는 반종파투쟁을 위한 선전용 그림이 그려졌다. 6·25전쟁 이후에는 경제건설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등장한 것을 제외하면 여전히 전통적인 동양화나 자연주의적인 그림들이 그려졌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 정종녀의 〈고성인민들의 전선원호〉, 김용준의 〈춤〉, 이쾌대의 〈농악〉 등이 있다. 1960년 이른바 천리마시기에는 집체적인 창작형식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1961년 '조선문학예술총동맹'으로 예술단체가 개편되자 미술조직은 그 산하의 ' 조선미술가동맹'에 소속되었다. 이 시기는 북한의 미술이 양식적으로 구체화되는 시기였는데 1965년 '조선화를 채색화로 발전시킨 데 대하여'라는 김일성의 교시와 함께 많은 논쟁을 거치면서 조선화의 급격한 변모를 가져왔으며, 유화나 다른 장르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남강마을의 여성들〉·〈낙동강 할아버지〉·〈남진하는 길에서〉 등이 이 시기의 대표작들로 북한에서 발전시킨 채색화와 이를 반영한 유화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 조각에서는 기념비미술이 발전하여 〈천리마동산〉·〈인민군렬사탑〉 등이 제작되었다. 1970년 이후에는 주체미술의 확립으로 김일성 형상을 창조하는 작품들이 대거 등장했다.
북한 미술은 일반적으로 사회적 기능과 목적에 따라 기념비미술, 실용 및 장식미술, 영화미술, 무대미술로 나뉘고, 회화는 재료와 기능에 따라 조선화·유화·벽화·출판화로 나뉘며, 조각·공예·도안 등으로 나누어진다. 특히 조선화와 조각이 중요한 장르로 취급되고 있다. 회화에서 가장 우선하는 조선화 양식이 정착된 것은 1960년대 전후인데, 다채롭고 풍부한 색채에 의해 생활반영의 진실성과 현실 묘사의 생동성을 확고히 담보하기 위해서 조선화의 채색적 기법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었다. 전통적인 회화가 지니고 있는 평면적이고 무채색적인 요소들이 사실주의적 표현에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주목하면서, 새로운 조선화는 전통적인 몰골법·선묘법·우림법 등을 능동적으로 활용하여 입체적이고 채색적인 표현이 가능하도록 그나름으로 변모시킨 것이다. 이는 '현실주제화'·'전투화' 등 적극적인 내용을 담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러한 조선화 양식은 유화 등 기타 작품의 창작원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조각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대기념비미술은 종합미술로서 북한 미술의 내용과 형식, 그리고 창작의 조직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특질을 보여준다. 삼지연대기념비·만수대기념비·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주체사상탑 등의 기념비들은 하나같이 김일성의 혁명업적과 그 정신을 계승하도록 하는 '상징성'·'생활구체성'을 창작원리로 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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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음악은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예술창작의 원리에 따라 민족음악을 구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민족음악은 조선적이면서 민중의 감정에 맞아야 한다는 것으로 주체문예사상을 바탕에 두고 전통음악을 비판적으로 계승·발전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1960년대 이후에는 이러한 주체적 음악문화를 만들기 위해 평양무용음악대학에 민족음악부를 만들고 민족음악의 현대화를 추진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궁중음악에 대한 비판과 함께 궁중악기도 쓰지 않았으나, 1980년대 들어 궁중음악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면서 당피리·당적·편종 등 1950년대 이후 쓰지 않던 궁중악기를 복원했다. 1956년부터는 전통악기를 새롭게 개량하여 썼는데 1963년에는 150여 점의 악기가 개량되었고 옥류금과 같은 창작악기도 나왔다. 1982년에 김정일의 민족음악 장려 지침이 나오면서 개량악기를 현대화하여 서양식 평균율을 사용했으며 음량과 음역을 넓히고 주법을 쉽게 했다. '맑고 밝으며 부드럽고 고운' 음색을 전통음색이라 하여 판소리·시조의 탁한 음색은 배제했다. 태평소는 이러한 이유로 음색을 부드럽게 고쳐 장새납이라는 악기로 개량되었다. 가야금은 12줄에서 21줄로 늘리고 명주실 대신 금속줄의 실을 감아 썼고, 부들을 없애고 다리를 달아 의자에서 연주할 수 있도록 했다. 그밖에 대피리·양금·해금 등의 악기가 개량되었다.
북한에서 기악곡의 원칙은 주체적 연주기법을 발전시켜 이른바 민족적 음악작품을 많이 창작하고 연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악곡보다는 성악곡이 더욱 중요시되고 있기 때문에 기악곡이 독자적으로 연주되는 경우보다는 가극 등에서 음악이 연주되는 경우나 성악곡과 함께 연주되는 경우가 많다. 성악곡은 가요라고 부르며 기악곡보다 가요를 중요시한다. 가요의 가사는 사상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절가형식(節歌形式)이 많다. 가요의 종류에는 송가(頌歌)·당정책가요·노동가요·서정가요·민요 등이 있다. 북한에서는 민요를 가장 중요시하는데 이는 근로인민의 집체적 지혜에 의해 창작되고 오랜 세월 인민 속에서 불려져 온 음악의 기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민요는 노동민요·아동민요·풍자민요·서정민요·윤무가요 등으로 분류된다. 주로 서도민요에 바탕을 둔 가야금병창·농악 등이 있다. 양약은 베토벤·모차르트·차이코프스키 같은 작곡가의 음악을 많이 다루고 있으며 이는 '외래음악'으로 분류된다.
북한에서는 종합예술을 지향하기 때문에 순수하게 음악만 하는 음악전문단체는 거의 없고 학교·공장·농촌·군대 등의 음악소조가 있다. 유일한 전문교향악단으로 1946년 8월 국립교향악단이 구성되었으며, 모란봉극장 등의 예술부에 연주자·지휘자·작곡자가 있다. 그밖에도 피바다가극단· 만수대예술단·평양예술단·국립가극단·방송예술단 등 각 공연단체에 관현악단·중창단·합창단 등이 소속되어 있다. 최근에는 윤이상음악연구소가 설치되어 현대음악도 소개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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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 있는 대동문 영화관 | 해방 후 북한의 연극계는 항일혁명연극과 카프의 연극을 계승하여 새로운 형태의 극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 시기 연극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당성과 인민성, 전투성이 강조된 점과 매 과업마다 거기에 부응하는 작품들이 요구되었다는 점이다. 또 다른 특징적인 면모는 현대적 주제와 혁명이라는 전통적 주제를 가진 다양한 작품들이 레퍼토리로 편성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건설에 희생된 사람들과 항일혁명투사들이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1950년대 북한의 연극은 중앙예술공작단·청년예술공작단·평양국립극단·해방예술극단·평북예술극단 등을 중심으로 노동미화, 남한의 반정부운동 찬양, 산업의 국유화, 전후복구건설을 주제로 한 작품과 번역극을 중심으로 활발한 공연 활동을 했다. 그뒤 1960, 1970년대에는 연극계의 세대교체와 함께 집체작이 양산되었으며, 〈혈해 血海〉·〈성황당〉·〈붉은 선동원〉·〈유격대의 5형제〉 등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부터 가극 및 영화산업이 활성화되면서 연극은 그 빛을 잃고 현재까지 혁명적 대작의 창작공연이 둔화되고 있다. 공연단체로는 중앙단체인 국립연극단·평양연극단·평양청년연극단·중앙방송연극단·인민군연극단·사회안전부연극단·철도부연극단 등이 있다. 지방단체로는 각도의 중심도시에 1개의 연극단이 있으며, 인민군 각 군단의 연극단이 있다. 혁명가극은 주민들이 쉽게 이해하고 즐길 수 있도록 절가와 방창을 많이 사용하며,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주기 위해 무대를 대형화하고 웅장하게 꾸민다. 1971년 최초로 공연된 〈피바다〉를 혁명가극의 전형적 고전으로 삼고 있으며, 그밖에 〈꽃 파는 처녀〉·〈당의 참된 딸〉·〈밀림아 이야기하라〉·〈금강산의 노래〉 등이 5대 혁명가극에 속한다. 이 작품들은 내용이나 시대배경이 대동소이하며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찬미하는 성향이 짙다. 현재 혁명가극을 공연하는 단체로는 피바다가극단·만수대예술단·평양예술단·국립가극단 등 13개 중앙단체가 있으며, 각도에 1개씩 설치된 가무단과 개성시 가무단, 해군·공군에 각 1개씩 설치된 협주단, 각 군단 협주단 등이 지방단체로 등록되어 있다.
1947년 국립영화촬영소가 설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50년 이전의 북한 영화는 전문 인력과 시설의 부족 등으로 영화제작이 매우 미미했다. 이 시기에 상영된 영화는 기록영화에 불과했고, 대부분 소련에서 수입한 영화를 상영했다. 북한이 영화발전의 토대를 마련하게 된 것은 1962년 2·8예술영화촬영소와 과학영화촬영소를 신설하면서부터이다. 이때를 계기로 북한의 영화는 다양한 장르가 개척되었고, 1962년에는 182편의 영화가 제작되었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피바다〉·〈분계선 마을에서〉·〈정방공 精紡工〉·〈유격대의 5형제〉 등이 있다. 1973년 4월에는 김정일이 〈영화예술론〉이라는 방대한 분량의 영화이론서를 발표했으며, 이 책은 북한 영화의 교과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1970년대에는 김일성을 원작자로 한 혁명작품을 영화화하는 작업이 다수 진행되었는데, 〈영화예술론〉은 이것의 제작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에 속하는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20부작 〈이름없는 영웅들〉, 10부작 〈조선의 별〉이 있으며, 그밖에도 〈꽃피는 마을〉·〈꽃 파는 처녀〉·〈이 세상 끝까지〉·〈돌아오지 않는 밀사〉·〈한 자위단원의 운명〉·〈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 등을 꼽을 수 있다. 1980년대 이후 북한의 영화계는 국제영화제에 작품을 출품하기도 하며, 외국과의 합작영화 활동을 시도하거나 혁명성이 짙은 외국영화를 수입하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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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춤은 인간의 율동적 움직임을 기초수단으로 생활 및 사상 감정을 표현하는 예술로 인식되고 있다. 북한의 춤이론은 노동기원설에서 출발하며, 예로부터 조상들이 즐겼던 춤을 사회적 의식의 한 형태로 보고 이러한 춤들을 당의 노선과 연결시켰다. 문화사적 시각에서 보면 북한 춤은 한국의 전통적인 춤과 서구의 고전 발레, 동유럽 사회주의 춤의 영향이 결합해서 오늘의 춤으로 정착되었다. 특히 주체문학예술이 주창된 때부터 주체무용도 민족적 형식, 사회주의적 내용, 인민대중의 생활감정에 합치하는 3가지 양식을 기본범주로 확정함에 따라 오늘날 북한의 춤은 혁명과업을 이룩하기 위한 현실적 특수성이 반영된 주체무용으로 대변된다. 주체무용에서도 항일혁명전통·사회주의현실·조국해방전쟁·남조선혁명·통일 등의 5가지 주제가 주요주제로서 창작방법은 생활과 정서의 구체적 묘사가 주로 이루어지고, 추상적인 춤은 배제·도태되었다.
8·15해방 직후부터 북한은 그들나름의 독자적인 사회주의적 춤을 모색하여 노동자·농민을 위한 춤을 장려하고 무용가 조직과 새로운 춤 양식의 정비에 들어갔으며, 1946년 10월에는 북조선문화예술총동맹의 산하 기구로 북조선무용가동맹을 발족했다. 1970년대 이후에는 주체문예이론에 바탕을 둔 '주체무용'을 주도적 이념으로 설정했으며, 개인의 독립된 창작을 인정하지 않고 있어 춤의 동작·구성·소재·세계관 등에서 남한과 많은 차이가 있다. 8·15해방 직후 월북한 최승희·함귀봉·정지수·한동인·장추화 등의 무용인과 원래 북한에 있던 신옥화 등의 무용인이 초창기의 북한 춤을 형성했으나 집단창작을 강조했기 때문에 이들 개인의 활동은 알려져 있지 않다. 1956년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당성·인민성·계급성을 예술의 근본원칙으로 공식 천명했고, 1970년대부터는 춤에서도 '주체의 무용예술'이 춤 양식으로 자리잡았다.
북한의 춤은 정권적으로 된 일사불란한 창작체계 속에서 진행된다. 특히 군무를 위주로 하는데 무용수의 수에 따라 독무·쌍무·군무로 나뉘며, 이들 춤은 모두 무용소품으로 총칭한다. 무용소품은 단순한 소재와 형식으로 생활을 명료하고 집약적으로 묘사하며, 몇 분 안에 끝난다. 또한 소재·구성 방식에 따라 현대무용·민속무용·전설무용·가무·음악무용서사시·음악무용조곡·가극무용 등으로 분류되며 때로는 체육무·승기무용·무용극 등의 용어를 쓰기도 한다. 북한의 무용에서는 목·팔·손목 등 모난 부위의 움직임이 많고, 동작도 크고 빠르며 절도가 있다. 군무에서도 직선적 배열과 이동·밀집 대형이 일사분란하게 처리되는 모형이 흔하다. 움직임의 속도감·선명성·자극성이 두드러지는 것은 북한 춤이 혁명적 의지를 앙양하려는 목적의식이 강하기 때문으로도 해석되며, 북방춤 계열에 속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같은 맥락에서 북한 춤에는 한국의 전통무용에 흔한 여백의 미감이나 느린 전개가 거의 없으며 더욱이 전통무용이라는 용어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민족적 무용가락 및 민족의상·민족음악·민족장단을 북한 춤의 기본요소로 강조하면서도 전통무용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 것은 전통무용이라는 말이 갖고 있는 봉건성 때문이다.
북한 춤 작품들은 무용소품·가극무용·가무 외에 음악이 배합된 무용, 현대적 미감에 맞게 재창조한 민속무용, 항일혁명전통과 그당시 무용을 다듬거나 수렴한 무용으로 나누어진다. 북한의 4대 명무용으로는 〈조국의 진달래〉(만수대예술단)· 〈눈이 내린다〉(평양가무단)· 〈키춤〉·〈사과풍년〉 등이 있다. 이 4대 명무용은 대체로 일제강점기에 혁명대원들의 조국애를 그린 것이며, 〈사과풍년〉은 사과 풍년을 맞은 협동농장 여성노동자들의 노동의 기쁨을 그린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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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는 구석기·신석기·청동기 시대와 고조선시대를 포함하여 낙랑·고구려를 중심으로 고려 및 조선시대에 이르는 역사적 유물·유적이 광범위하게 분포해 있다. 1946년에는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호령'을 발표하고, 정권수립 후에는 '물질문화보존에 관한 규정'을 공포하여 형식적으로나마 민족문화유산을 법적으로 보호하고 있다. 그러나 1950년대에는 본격적인 사회주의 개혁정책을 구체화하여 민족문화의 개조작업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더욱 강화되고 있다. 1970년대 후반에는 김일성 일가와 관련된 물적 대상이 역사적 유물로 상징·조작되고, 민족문화유산은 사회주의 건설에 유익한 것만을 골라 보존·관리·조사·발굴되고 있다. 1945~89년에 발굴된 유적은 모두 100여 개소이며 문화재의 개인소유는 금지되고 있다.
선사시대의 유물·유적으로는 평양특별시 상원군 검은모루유적, 역포구역 대현동유적, 사동구역 금탄리유적, 함경북도 선봉군 서포항유적, 평안남도 온천군 운하리 궁산유적 등 구석기시대의 유적과, 평안북도 용천군 신암리유적, 황해남도 용연군 석교리유적 등 청동기시대의 유적이 있다. 황해북도 황주군 침촌리 일대와 사리원시 상매리, 황해남도 은천군 약사동, 남포직할시 용강군 석천산 등에는 고인돌과 돌널무덤이 있다. 고조선시대의 유적으로는 함경북도 무산군 무산범의 구석기원시유적지를 비롯하여 청동기시대의 석기를 그대로 모방한 초철기시대의 유물·유적으로서 평안북도 영변군 세죽리유적, 박천군 단산리유적, 황해북도 봉산군 송산리유적, 평안남도 대동군 반석리 움무덤이 알려져 있다. 대동강 하류유역과 압록강 및 그 지류 유역일대에는 남포직할시 강석구역의 대묘·중묘·소묘 등 삼묘와 약수리 벽화고분, 태성리에 연화총, 태성리 제1·2호 고분, 용강군의 용강대총, 대안리 제1호고분, 황해남도 안악군의 안악 제1·2·3호 고분 등 고구려의 벽화고분이 많이 분포한다. 석조 및 금속 유물로는 국보급으로 묘향산 보현사 8각13층탑 외 16점, 보물급으로 홍복사 6각7층탑 외 26점과 개성선죽교·해주석빙고·용천다라니석당·해주다라니석당·황초령진흥왕순수비·마운령진흥왕순수비 등이 있으며, 평양 역포구역 무진리에서 출토된 금동투각관형장식과 평양동종, 연복사동종, 국사봉출토 불상 10여 점 등이 있다. 건축유적으로는 평양의 안학궁지, 정릉사지, 개성의 만월대 등 국보급 12점, 보물급 22점, 사적 11점 등이 있으며, 목조건물은 6·25전쟁 때 소실되었거나 파손된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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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관광정책은 김일성 우상화와 당국의 정치선전정책이 밀접히 연관된 범위에서 추진되고 있어 개인의 취미, 여가선용, 휴양과 같은 순수한 의미의 관광은 존재하지 않는다. 1984년 합영법 제정 이후 외화획득의 주요수단으로 관광객 유치사업을 시작했으며, 1985년 정무원 내에 국가관광총국을 설치하고 산하에 조선국제여행사·청년여행사 등을 두어 실무를 관장하게 했다. 1986년 처음으로 홍콩·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소규모 관광단을 유치하고 1987년 세계관광기구(World Tourism Organization/WTO)에 가입했으며, 각 상업대학에 관광학과를 설치했다. 1989년 재미교포와 합작으로 금강산국제관광회사를 설립하고 대외적으로 소개하는 등 재미교포 및 일본 관광단과 기타 해외관광객의 유치사업을 적극 전개하고 있다. 북한은 관광자원을 평양권, 남포권, 금강산권, 원산권, 백두산권, 묘향산권, 개성·판문점권으로 구분하여 특색 있게 개발하고 100여 개의 관광 코스를 선정했지만 그 가운데 일부 코스만 외부인에게 개방해왔다. 1998년 11월부터는 남한의 현대그룹과 금강산 관광사업을 실현시켜 연간 수십만 명의 관광객이 금강산을 방문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현재 북한의 관광 편의시설로는 평양시내에 고려호텔·청년여관·창광산여관·대동강여관, 보통강여관 등이 있고 양각도호텔과 유경호텔은 건설중에 있다. 지방에는 묘향산에 향산호텔·청춘여관, 원산에 송도원, 금강산에 금강산여관, 개성에 자남산여관, 혜산에 혜산여관, 백두산에 온수봉여관, 남포에 항구여관 등이 있다. 관광음식점으로는 평양에 청류관·옥류관·목탄각 등이 있고 남포에는 와우도각 등이 있다. 쇼핑 시설로는 평양에 제1백화점·제2백화점·낙원백화점 등 5개소가 있고, 지방에 남포백화점·개성백화점 등이 있다. 그밖에 원산에서 해금강(삼일포)까지의 해상과 대동강에는 여객선과 유람선이 운항되고 있으며, 신의주시에 조교를 건설하고 백두산 천지에는 100명이 탑승할 수 있는 궤도식 삭도를 건설했다. 주요관광지에 국제전화·텔렉스·팩시밀리 등이 설치되어 있으며 평양 교외 태성호반에 골프장을 건설했다. 또한 북한에는 온천과 약수터가 많은데, 온천은 함경북도의 온수평·온포·세천 온천, 평안남도의 양덕·온양 온천, 황해남도의 신천·평산·배천·달천 온천, 강원도의 외금강·노탄 온천과 평안북도의 삭주온천이 널리 알려져 있다. 약수로는 강원도의 석왕사와 삼방약수, 평안남도의 강서약수, 평안북도의 옥호동과 창성약수, 황해북도의 수천약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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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이후 남북한은 상호 불신의 주조(主潮)하에 한민족 공동의 목표를 위해 공존하기보다는 동족끼리의 무모한 대결과 중상·비방을 거듭해오면서,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타민족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전략적 이익을 주고 스스로에 대해서는 큰 불행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 1970년대에 이르러 세계적 긴장완화에 따라 남북한은 남한의 '평화통일에 대한 기본구상'에 의해 1971년 8월 12일 남북적십자회담을 개최했고, 1972년 7월 4일의 남북공동성명을 거쳐 역사적인 남북대화가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 개최되었다. 그러나 1973년 8월 28일 북한측 대표의 일방적인 남북대화 거부성명으로 대화가 중단되었다. 1979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1·19남북대화재개 제의에 따라 판문점에서 양측 대표가 만나 토의에 참여했으나 진정한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또다시 중단되었으며, 10·26사태 이후 북한은 통일방안으로서 '연방제' 주장에 역점을 두었다. 1980년 1월 11일 남북한 총리회담을 위한 실무회담이 있기까지 남한은 남북한 상호불가침조약 체결, 남북대화 진행, 남북한 자유총선 등을 지향하는 평화통일 3대 기본원칙과 남북한 경제협력협의기구 등을 제안했으나 북한은 민족분열을 고착시키기 위한 모략이라고 거부해왔다. 1980년 7월에 북한은 제22회 모스크바 올림픽 대회에 파견한 남북한 단일 팀 구성을 위한 1차 접촉을 시도했고, 1983년 10월 9일 남한 고위관리 17명이 희생된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파사건이 일어나기 하루 전날에는 미국의 국무장관 키신저가 1975년부터 제의해온 4자회담·6자회담 등을 무시하고 3자회담을 미국에 제의하기도 했다. 1984년에는 남한측에서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대회와 아시아 경기대회 및 각종 세계선수권대회를 위한 단일 팀 구성을 시도했으나 양측의 의견이 대립되어 또다시 실패했고, 1988년 서울 올림픽 대회를 위한 남북한 단일 팀 구성조차도 북한의 올림픽 공동개최 주장으로 결렬되고 말았다(→ 남북체육회담).
1985년 9월 20일에는 남북한 적십자사의 노력으로 오랫동안 숙원이었던 남북한 고향방문단의 교환방문이 이루어졌다. 1990년도에는 3차례의 남북고위급회담과 통일축구대회·통일음악회 등 비당국간 교류로써 남북한간 동질성 회복이 엿보였고, 1991년 9월 17일에는 남북한이 서로 체제를 인정하여 국제연합(UN)에 동시가입하게 되었다. 1991년 12월 31일에는 남북한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하게 되었고,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도 합의하여 남북한간에 핵통제공동위원회를 발족시키고 남북 핵 상호사찰의 길을 열었다. 1992년 5월에는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분야별 공동위원회 구성과 운영, 판문점 남북연락사무소 설치, 이산가족 및 예술공연단 교환에 합의하고, 이후 7월 19일 김달현 부총리 일행의 서울 방문이 있었다. 또한 1991년 11월에는 서울에서 개최한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에 여연구 등 북한 여성대표가 참석했고, 1992년 7월 2일에는 이 토론회에 참석하기 위해 남한대표가 평양을 방문했다. 그러나 1993년에 들어서면서 영변 핵시설 사찰문제로 북·미 간에 갈등이 격화되면서 한반도에 긴장을 고조시켰다. 북한은 3월 12일 팀스피리트 군사훈련 재개와 국제원자력기구(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IAEA)의 북한 특별사찰 결의에 맞서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이로 인해서 남북간에 긴장이 고조되고, 1994년 봄에는 미국 조야에서 북한폭격론까지 제기되었다. 이러한 긴장된 상황에서 김일성은 1994년 6월 북한을 방문한 카터 전 미국 대통령에게 핵문제의 타결 의지를 표명하는 한편, 김영삼 대통령에게 남북정상회담 용의가 있음을 전달해주도록 부탁했다. 이러한 카터의 주선으로 남북은 예비접촉 후 7월 25일~27일에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 합의는 7월 8일이 김일성이 사망함으로써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김일성의 사망은 남한에서 그에 대한 조문 문제를 둘러싸고 이른바 '조문파동'이라는 일대 파동을 일으켜서 정상회담 합의로 대화해의 분위기로 전환되었던 남북관계를 오히려 더욱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1994년 10월 21일 북·미간의 제네바 합의에 따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적 위기가 해소되었을 때에도, 남북간의 긴장과 적대적 대결은 해소되지 않고 앙금으로 남게 되었다. 결국 북한은 '조문파동'을 이유로 김영삼 정권 내내 남북대화를 거부하고 대남강경책을 고수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종교단체를 주축으로 한 민간차원에서의 남북교류 노력은 계속되었다.
1997년 남한에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관계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이른바 ' 햇볕정책'으로 불리는 김대중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은 흡수통일 포기, 교류·협력에 있어서 정경분리원칙의 적용, 평화정착 우선주의 채택으로 요약된다. 남한 정부의 화해정책에 대해 그 동안 체제보호를 위하여 외부에 대한 개방에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특히 남한에 의한 독일식의 '흡수통일' 가능성을 크게 우려해 온 북한은, 종전의 정권들과 달리 김대중 정부가 북한체제 유지론을 기초로 한반도 냉전구조의 해체와 대북 평화·협력의 추구에 초점을 둔 대북 포용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데 대해 마침내 신뢰의 태도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00년 6월 13~15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분단 55년 만에 평양에서 첫 남북 정상회담을 갖고 역사적인 6·15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남북관계는 종전과 다른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으며, 상호신뢰 구축에 기초한 남북관계 실현의 가능성이 한층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