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엄마가 한숨 섞인 혼잣말을 하는 사연은 당신의 살아온 내력 때문이다. 엄마는 조금씩 최근의 일들을 잊고 옛날의 기억 속으로 돌아가곤 한다. 어제 먹었던 것도 처음 먹어본다고 말하고, 방금 말해준 것을 말끔히 잊고 다시 묻는다. 얼마 전에 모시고 갔던 식당 앞에서도 처음 와보는 곳이라고 딴청을 부리기도 한다.
얼굴을 마주 보고 있으면 엄마의 눈동자는 먼 옛날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애쓰며 살아왔던 날들 속에서 힘들었던 일들을 더듬으며 한숨을 내쉬거나 눈물을 흘린다. 엄마는 지금 열세 살 아이다. ‘어멍 죽으면 어떵 살꼬.’울먹이며 한숨을 짓는다. 아픈 엄마를 대신해서 먼우물까지 걸어가 물을 길으며 울고, 올레 길을 돌아오며 울고, 말똥으로 불을 때서 밥을 지으며 울고, 온평리 넓은 밭에 나가 검질을 매면서 운다. 엄마는 요즘 그렇게 열세 살의 어린 기억 속을 산다.
몇 해 전, 엄마에게 전화를 건 나는 엄마가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면‘아이들은 학교에 잘 다니지? 조 서방도 잘 있지?’에서부터 새로 이사 온 옆집 아이들, 이웃 할머니 얘기 등 말씀이 끝이 없어서 언제 전화를 끊을까 바쁜 나는 조바심을 낼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엄마는 말이 없어졌다. 내가 엄마에게 이것저것 물으면 엄마는 그저‘응…….’만 할뿐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걱정이 된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치매를 진단하러 병원에 갔다. 의사의 책상 위에는 체크리스트를 담은 질문지가 놓여있었다. 의사는 처음에 몇 가지 산수 문제를 내주었다. 엄마에게 약간은 어려울 듯했지만 그래도 애를 써서 가까스로 통과했다. 그리고 다음은 엄마의 신상에 관한 간단한 질문이 있었다.
“할머니, 할머니가 살고 계신 나라 아시지요? 나라이름이 뭐예요?”
나는 물을 필요도 없는 질문을 다한다고 생각하며 엄마를 보았다. 그런데 엄마는 떠오르지 않는 답을 찾는 아이처럼 조바심을 품은 모습이었다. 머뭇거리던 엄마는 ‘조서언?’이라고 물음 같은 대답을 했다. ‘조서언? 조선이라고?’나는 깜짝 놀라서 엄마를 보았다. 엄마는 답이 틀렸다는 걸 느꼈는지 실망한 표정으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전라도 산골에서 태어나 칠십 년을 사셨다. 그리고 인천으로 올라오셔서 18년을 더 사셨다. 어머니가 올라오실 무렵 큰 아이가 첫돌을 맞았고, 두 번의 이사 끝에 단칸방을 면한 참이었다. 은행돈을 빌리긴 했지만 우리 힘으로 집을 마련했다. 어머니가 오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둘째 딸을 낳았다.
아들 사형제를 키운 어머니는 아들을 최고로 여기는 아주 전형적인 시골 할머니였다. 큰 아이에 이어 작은 아이까지 딸을 낳고 몸조리를 하는 내게 미역국은커녕 손녀를 보려고 방문을 열어보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술을 좋아했다. 오랫동안 술을 드셔온 시어머니는 힘이 들면 더 많이 드셨다. 그런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는 내게 남편은 말했다. 시골에서는 힘든 농사일을 하다보면 술에 의지하기 마련이라며 이해하라고 했다. 도시의 답답함과 아이를 키우는 일은 어머니에게 농사일보다 고된 일이었다. 한참을 뛰놀기 좋아하는 큰애와 강보에 싸인 갓난아이를 돌보며, 며느리 퇴근 시간만 기다렸을 어머니의 낙은 술이었다. 어떤 날은 내가 퇴근하기도 전에 취해 계셨다.
어머니는 88세가 되는 설을 앞두고 섣달그믐에 돌아가셨다. 다음날이 설 명절이라 아침 일찍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베란다에서‘펑’하는 소리가 들렸다. 허둥지둥 달려가 보니 수도가 터져서 물을 뿜고 있었다. 허둥대며 안절부절 못하는 사이 거실에서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가 위독하니 어서 와보라고 요양보호사가 말했다. 급한 대로 남편과 큰 아이를 요양원으로 먼저 보냈다. 터진 수도 때문에 관리소에 전화하고 응급조치를 끝내고나서야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남편은 황망한 표정이었고, 큰 아이가 울면서 말했다.
“엄마. 할머니가 돌아가셨어. 어떡해?”
우리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자식들의 손도 잡아보지 못하고 쓸쓸히 생을 마치셨다.
친정엄마는 제주도 성산포에서 일등 해녀였던 할머니의 여섯 번째 며느리였다. 제주도의 여자들은 일찍 혼자가 된다. 바다에서 살아가는 삶이니 남자들은 일찍 죽을 수밖에 없다. 할머니는 물질을 해서 혼자 몸으로 십 남매를 키우셨다. 일등 해녀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가난한 살림이었다.
제주도 특유의 억센 여자들의 틈바구니에서 엄마의 작은 몸과 서툰 물질은 시어머니에게 마뜩찮은 며느리였을 거다. 그래도 엄마는 할머니에게 사랑을 받으며 살았다고 한다. 엄마는 성산포에서 착하고 부지런하다고 소문이 날 정도로 생활력이 강했다. 아버지는 친구를 좋아하고 술을 좋아했다. 하루 종일 놀다가 밤이 깊어야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아침 일찍 밭에 나가 검질을 매고, 밭일이 끝나면 바다로 가서 물질을 했다. 밭에 갈 때도 바다에 갈 때도 애기듬북에 어린 나를 재워놓고 일을 했다.
나는 엄마의 큰딸로 태어났다. 아니 위로 아들인 오빠를 낳고, 내 위로 딸을 하나 더 낳았다. 내 언니를 낳고 닷새가 안 된 날에 폭우가 내렸다. 제주도의 비는 낭만적인 비가 아니다. 바람을 동반해서 내리기 때문에 모든 것을 쓰러뜨리는 사나운 비다. 비바람에 쓰러질 깻대가 걱정이 된 엄마는 밭으로 갔다. 깻대를 베어 집에 와 보니 언니가 죽어있었다.
거동이 불편하신 엄마를 보기 위해 나는 주말마다 엄마에게 간다. 입맛이 없는 엄마의 입에 달보드레한 과자라도 하나 넣어준다. 엄마의 손을 잡고 공원에 가서 햇살을 쪼고 앉은 어느 봄날, 엄마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말했다.
“너 같은 딸 하나 더 있었으면…….”
언젠가 처음으로 언니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엄마는 남의 말을 하듯 덤덤하게 말했었다. 그 기막힌 슬픔을 잊으려고 엄마는 더 열심히 살았겠지. 엄마의 가슴속에는 내 언니가 핏덩이인 채로 꼼지락거렸겠지. 희고 곱던 아기를 눈앞에서 잃었을 그 아득한 슬픔을 조용히 삭이며 얼마나 많이 속울음을 울었을까.
시어머니와 평화로웠던 날들의 기억이 마치 어제처럼 다가올 때가 있다. 그날 나는 가을 햇살이 들어오는 거실에서 어머니의 귀 청소를 해드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귓속은 오랫동안 돌봐드리지 못해 꽉 막혀 있었다. 면봉에 오일을 묻혀 단단하게 굳은 귀지를 조금씩 떼어 내고 있었다.
“한 십 년만 더 살았으면 좋겠구나.”
어머니는 눈을 감은 채 내게 귀를 맡기고 누워 혼잣말을 하셨다. 그날 어머니는 다가올 운명을 예감하신 걸까. 가슴 속에 메아리치는 마지막 말씀이 불현듯 떠오를 때가 있다. 어머니는 며칠 후 건강이 악화되어 요양원으로 옮기시게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그 겨울은 무척 추웠다.
‘자식들이 미우면 추울 때나 더울 때 돌아가신다는데, 얼마나 미웠으면 엄동설한 추위에 돌아가시겠나.’
염을 하고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뵙는 마음이 슬프기도 하고, 죄스럽기도 했지만,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편안해 보였다. 젊은 날 허리를 다쳐서 몸을 굽히고 사셨는데, 이제야 허리를 반듯하게 펴고 누워계셨다.
반평생을 굽어서 사신 어머니의 삶은 얼마나 슬프셨을까. 불편한 몸보다 불편했을 마음을 한 번이라도 따뜻하게 안아드리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아버님이 누워계신 고향 땅에 어머니를 묻는 날은 참으로 따사로웠다. 그렇게 불던 바람도 잠잠하고, 선산의 땅은 햇볕이 들어서 우리들의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듯했다. 자식들이 아무리 불효를 했어도 어머니는 한량없는 사랑으로 햇살을 내려 보내주셨다.
생각해보니 친정엄마와 시어머니는 띠 동갑이었다. 친정어머니는 병자년 쥐띠인 1936년생이고, 시어머니는 갑자년 쥐띠인 1924년생이다. 두 어머니가 살아온 곳은 각각이었지만, 그 모습은 너무도 닮았다.
그 시대를 관통한 여인들이 그랬듯이 두 어머니는 한이 많았다. 손에 쥐고 있는 게 없어서 가족을 위해 남의 밭에서 허리 한번 못 펴고 일을 했다. 쥐처럼 부지런히 곡식을 모으고, 밤낮없이 일을 하며 살았다. 집 한 칸 마련하려고, 땅 한 평 가지려는 간절함으로, 자식들 배 안 곯게 하려는 발버둥으로, 자신이 못 배우고 산 게 억울해서 자식들만은 공부시키려는 일념으로 당신의 허리를 졸라매 배고픔을 참고 사셨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느 날 큰 아이가 한밤중에 거실에서 비명을 질렀다.
“엄마. 쥐야. 쥐 좀 봐.”
깜짝 놀라서 방문을 열고 나온 나에게 큰 아이는 달려와서 쥐가 신발장 뒤로 들어갔다고 했다. 남편과 나는 아파트에 무슨 쥐가 있겠냐고 잘못 본 게 아니냐며 현관과 신발장 주변을 뒤졌다.
그때는 가을이면 시골에서 쌀이 올라왔었다. 우리가 농사를 못 짓는 논에 마을 사람들이 대신 농사를 짓고, 추수를 하고 나면 몇 가마니씩 인천으로 올려 보내주었다. 형제들끼리 서너 가마니씩 나누면 일 년은 족히 먹을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 집 거실 한편에는 늘 쌀가마니가 놓여있었다.
큰 아이가 쥐를 보았다는 사건이 있고 나서 쌀알들이 흐트러져 있는 걸 자주 보게 되었다. 그전엔 쌀을 퍼오다가 떨어진 쌀알이 흩어졌나 생각을 했는데, 점점 그 횟수가 늘어나는 게 이상했다. 쌀알들이 흩어진 집안 구석구석을 뒤져보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소파 뒤에 쌀알들이 무더기로 모여 있는 걸 발견한 것이다. 얼마 후 우리는 이사를 할 예정이었다. 남편이 내 얼굴을 보며 말했다.
“엄마가 우리 이사하는 걸 알고 다녀가셨나?”
두 어머니는 혼잣말을 하며 슬픔을 잊고 한을 풀었다. 어머니들에게도 즐겁고 기쁜 일들이 많았을 텐데, 슬펐던 기억을 왜 더 많이 떠올리는 걸까. 내가 어머니들만큼의 세월을 보내고 나면 알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만큼 살아보니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좋았던 일들은 세월의 강 속에 흘려보내지만 아팠던 일들은 차마 보낼 수 없어 가슴 속에 품고 살기 때문이다.
‘한 명의 노인이 사라지는 것은 하나의 도서관이 사라지는 것’이라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어머니들이 살아 온 삶에는 도서관에서 얻는 만권의 책 보다 귀한 지혜가 들어 있다. 시어머니는 당신이 해 온 고생을“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고 말하시곤 했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걸 자식이 몰라주니 저절로 한숨이 나오고, 들어주는 자식이 없으니 혼잣말이 되었다.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혼잣말은 이제 다시 들을 수가 없다.
내 인생의 안내서인 도서관 하나가 불타버렸다.
첫댓글 효부의 도리를 다 하고 이제 친정엄마의 병간호를 하고 있는 효녀의 독백이군요.
친정엄마께는 혼잣말을 줄이도록 더 많은 대화를 해야겠어요~
엄마는 끝없이 주기만했는데, 긴 병에 효자없단 말을 실감하네요. ㅠ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렇죠. 제 삶의 등대셨지요.
근데 제 필명은 바꿔야할까요?
윤시인으로 자주 언급이 되네요.
이제 와 생각하니 불행한 효자보다 행복한 불효자가 될걸, 후회하며 되뇌어 봅니다.
어머니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엄마와 역할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엄마가 주신 사랑 반도 못 갚으면서 생색만 내지요.
두 어머니를 보살펴 드리고 두 분의 혼잣말을 이해해주는 딸이 있으니, 그것이 두 분에게는 큰 위안이 되겠군요. 친어머니는 옛 기억을 거의 잊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신산한 삶을 내력을 기억해주는 딸이 있으니 결코 외롭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면 좋겠는데
슬픔도 병인 거 같아요.
잘 낫지가 않네요.
그래서 저는 수필을 쓰면서
한을 마음 속에 남기지 않으려고 합니다.
두 분의 한을 곱게 간직하고 계시네요. 아름다워야 하는데 슬픔이 먼저 다가옵니다. 감사합니다.
여자의 일생이랍니다. 세상이 달라졌으니 이젠 여자의 일생도 변하겠지요.
도서관이란 표현 딱 맞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어머니들이 세상을 지킨다는 것을 또 믿게 됩니다. 시인님도 어머니 맞으시죠. 힘내세요.
앗, 그 생각은 못 했어요. 저도 우리 딸들의 도서관일 텐데... 문득 두렵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