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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전인 7월 7일 용원의 안골왜성을 답사한 이후
오늘은 웅천왜성을 중심으로 주변의 유적들과 함께 인근에 있는 주기철목사 기념관도 답사를 한다
이번 답사는 수필가이자 여행작가인 이효준의 안골포해전, 웅천해전, 주변 왜성들에 대한 글을 읽고
사진으로 그의 글을 묘사해보고 싶어 길을 나선 것이다
임진왜란 발발 1년째인 1593년 1월 27일의 벽제관 전투 이후 왜군은 충돌을 피하며 강화 분위기로 돌아섰으며
이후 왜의 수군이 조선 수군으로부터 패전을 거듭하여
막대한 군사적 타격을 입고 본토로부터의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자
우리수군을 해상에서 억제하고 장기간 주둔을 위한 최후의 기지로 활용하기 위하여
1593년 남해안 연안일대의 요충지에 18개소의 왜성을 축성하였다
안골왜성과 웅천왜성도 이때 축성되었다
1592년 9월 1일, 일본 수군의 본진인 부산포를 공략하여 적선 100대를 격침시키고 대승한 부산포해전 이후
이순신 장군은 거제도 북쪽 칠천도에 있었는데
명나라 군사들이 평양을 탈환한 뒤 퇴각하는 적들의 배 한 척도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라는 선조의 명에 따라
왜 수군의 본진인 부산포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웅포를 지나야 했다
웅포를 지나치고 부산포로 향한다면 협공을 당할 수도 있어 먼저 웅포부터 쓸어버리기로 한다
중심점이자 최후방 본진인 부산포왜성을 기점으로
동해안의 최전방이 서생포왜성이라면 여기에 대응하는 남해안의 서쪽 최전방이 웅천왜성이었다
웅포해전의 현장인 와성만은 길고 좁은 바다인데
왜군은 와성만 양안에 진지를 구축하고 조총과 포로 무장하였다
만 깊숙이에는 함선 115척이 정박되어 있었고 남산에는 육군 10,000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와성만은 폭 600m로 좁아서 포구 깊숙이 들어갈 수가 없어 왜의 수군을 넓은 바다로 유인해서 전투를 벌이기로 하는데
계속 도발을 해도 이미 이순신의 전술을 알고 있는 왜군은 겁을 먹고 꿈쩍도 않고 있었다
이순신은 수륙 상륙작전을 감행하는데 의병과 승병을 웅천왜성 서쪽의 제포로 보내어 상륙하게 하고
이억기 휘하의 일부 선단에게도 흰돌메공원 동쪽 남양리로 상륙하게 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수십 척의 조선 함대들도 포구 입구까지 진입해 들어가 포격을 하였다
1개월여의 7회에 걸친 장기 지구전에서 이순신 통합함대는 수륙협공으로
적선 51척을 부수거나 불태웠으며 적군 2,500명을 사살한 대전과를 올렸다
웅포해전 승리는, 도오토미의 특별명령에 따라 적 수군이 웅포에 구축한
해상전진기지 겸 육상전초기지를 반신불수로 대파하였으며
왜군의 한양 철수를 불가피하게 강요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지난번의 안골왜성부터 웅천왜성 -주기철목사기념관 -웅천읍성에 이르는 길의 대부분은
남파랑길 6코스에 해당하는 길이었다
오늘도 혼자 걸어다니는 모습을 보고 하는 질문들은 "남파랑길 하세요?" 였다
6시 50분에 집을 나섰는데 지하철타고 하단까지, 하단에서 부산버스타고 용원으로,
용원에서 창원버스타고 웅천까지 이동하다보니
집을 나선지 3시간 후인 9시 50분에 답사를 시작하게 된다
저기 보이는 웅천교회 뒷쪽에 웅천왜성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웅천왜성은 웅천 남측으로 크게 반도처럼 돌출된 남산(南山) 산봉우리 능선을 따라
산기슭까지 뻗친 석성(石城)으로 구릉지 정상부에 위치한다
부산신항 건설에 따른 대규모 매립으로 지금은 육지에 둘러싸여 있지만
당시에는 동쪽과 남쪽이 바다와 접해 있었다
웅천교회
오후에 기념관을 답사할 예정으로 있는 '주기철목사'가 어릴때부터 다니던 교회였는데
당시 웅천읍성 안의 성내동에 있었던 교회는 지금의 이 자리로 이전을 하였고
옛 교회자리에는 벧엘교회가 들어서 있다
종합안내도 뒤로 산길이 있다
처음엔 잠시 시멘트 도로로 시작하다가
이내 편안한 흙길로 변한다
동네주민들의 운동 장소인지 맨발걷기를 하는 주민들이 여럿 보였다
산 중턱 운동기구가 있는 곳에서 왼쪽으로 계속 오른다
나중에 내려올 때는 이곳에서 제포 방향으로 하산을 하였다
드디어 저기 성의 흔적들이 보이기를 시작한다
제2외성의 첫 관문인데 왜성답게 역시나 어긋나게 서 있는 두 성벽이 직각으로 꺾여있어
성벽 사이의 좁은 공간으로 방향을 바꾸어 들어서게 되어 있다
한 번에 많은 군사들이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인데
그때 성벽 위에서 무차별로 공격하면서 시간을 벌고 효과적인 방어를 할 수 있는 구조다
두 번째 관문을 지난다
왜성 특유의 70도 가량 경사진 성벽을 이루고 있다
뒤돌아 본 모습
제2외성 세 번째 관문
네 번째 관문... 세상에나.. 성문 4개를 통과해야 본성으로 진입을 할 수 있다
네 번째 관문을 통과하니 본성 성내의 넓은 터가 나타나고
저기 본성의 중심부인 가장 높은 곳, 천수대가 보인다
웅천왜성의 성벽 둘레는 1,250m, 면적은 약 5,000평, 높이는 3-8m로 추정된다고 하며
왜군 10,000여 명이 주둔했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 길이는 700~800m 정도이다
이 웅천왜성(熊川倭城)은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小西行長)가
1593년 7월 성을 쌓아 왜군의 부산포왜성 다음의 제2기지로 사용하였다
원래는 왜구를 대비하기 위한 조선의 웅포성이었는데, 왜성으로 개축하여 사용한 것이다
성의 가장 높은 곳, 천수각으로 올라가 본다
천수각(天守閣) 자리 / 남산(南山. 해발184.5m)의 정상이다
대패로 민듯한 성벽의 단면
남산(南山) 삼각점 / 해발184.5m
웅천왜성은 북측에 웅포(熊浦)와 서측에 제포(薺浦)를 동시에 끼고 있으며
동측으로는 바다 건너 안골포와 마주보는 입지다
옛날에는 천수각에서의 조망이 사방팔방으로 훤하였겠지만
숲으로 우거진 나무로 둘러싸여 지금은 남쪽으로 겨우 조망이 열린다
바로 앞에 보이는 저 매립지 가운데에 봉긋 솟은 작은 산이 송도라는 섬이었는데
이순신 장군은 저 송도의 지형을 이용하여 왜군을 유인해서 왜선 5척을 격파하였다
그리고, 그 너머 멀리에는 거가대교(巨加大橋)가 아스라이 보이고 있다
이제 제1외성과 제3외성을 찾아 가 보는데
동쪽 방향 와성만 쪽의 제1외성으로 가는 길은 본성 바깥으로 나가 길을 찾아야 하는데
제2외성과 본성과는 달리 보존이 잘 안되어 길도 제대로 없이 잡목으로 우거져 있다
겨우겨우 찾은 제1외성의 흔적이다
이곳은 그나마 왜성의 모습을 그런대로 유지하고 있다
북쪽에 있다는 제3외성은 아예 찾아볼 생각조차도 못할 정도라 더 이상의 추적을 포기한다
웅천왜성 답사를 마치고 떠난다
웅천왜성(熊川倭城)은 왜란 이후에는 증개축이 없었기 때문에
축조 당시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16세기 왜성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운동기구가 있는 넓은 공지에서
이제는 왼쪽으로 하산을 하면서 제포로 바로 내려서기로 했는데...
처음에는 그런대로 길이 있었지만
나중에는 칡넝쿨과 잡풀로 뒤덮힌 길을 헤치며 내려와 보니
보름 전인 7월 7일날 땡볕에 땀흘리며 지나갔던 부산신항 배후도로 공사현장이었다
부산신항이 들어서기 전에는, 이쪽에서도 웅천왜성을 올라가는 등산로로 자주 이용을 했을 것 같다
이럴줄 알았다면 처음에 올라갔던 웅천교회 쪽으로 하산을 하는게 나을뻔 한데.....
저기 보이는 저 탑은 삼포노래비가 있는 삼포항 너머
명동항 앞 진해해양공원의 솔라타위인 것 같다
삼포노래비와 진해해양공원은 2016년 3월에 답사를 해 보았다
<참고사진> 삼포노래비
<참고사진> 솔라타워
부산신항 배후도로 공사현장을 겨우 벗어나 제포를 향해 간다
제포(薺浦) / 제덕포(薺德浦)
제포(薺浦)의 원래 이름은 내이포(乃而浦)였다.
제포와 내이포 모두 '냉이개'를 한자로 표기한 이름인데
제(薺)는 냉이를 뜻하는 한자이며, '내이(乃而)'는 냉이의 한자음이다
제포(薺浦)
조선시대 최초의 개항장이며 국제 항구였던 제포는
이전부터도 일본과 수로로 연결되어 있던 바다의 요충지였기에
임진왜란 당시 제포를 포함한 웅천현 지역은 가장 먼저 왜군의 습격을 받아 함락당했다
1510년 (중종 5) 삼포왜란이 발발하고. 1541년에 제포왜관에 있던 왜인들의 난동사건 이후
제포왜관을 없애고 부산으로 왜관을 옮기면서 제포는 개항한 지 134년 만에 폐항했으며
1544년 수군첨절제사진을 보다 전방에 있는 가덕도로 옮기면서 내이포 첨사도 다시 만호로 강등하였다
제포 바닷가 인근 제포진성 동남측 모서리 부분에서 동남측으로 약 300m 지점에
예로부터 '관터'로 불리는 제포왜관터가 남아있었다
삼포왜관(三浦倭館) 중의 하나로 동래 부산포, 울산 염포와 함께 설치된 제포왜관(薺浦倭館)은
삼포 중 가장 규모가 컸는데
1494년 3포에 거주하던 왜인들의 수가 부산포는 127호 453명, 염포는 51호 152명이었던 것에 비해
제포의 왜인들은 무려 347호 2,500명에 이를 정도로 제포의 왜관은 크게 번성했다
2019년 3월, 부산신항 배후부지로 이어지는 진입도로를 내기 위해 야산을 허물던 중
구전으로만 전해내려 오던 제포왜관 터가 괴정에서 발견되었다
관에서는 이곳을 문화재로 지정하려고 하자 주민들은 재산권 행사를 이유로 완강하게 반발하였고
공사는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제포(제덕포) 방파제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
올망졸망한 작은 섬 몇개 너머로 우리나라에서 두번 째로 큰 거제도가 코 앞이다
제포를 떠나 인근의 제포성지(薺浦城址)를 찾아가는데
초입 오른쪽에 커다란 돌들이 포개진 축성의 흔적이 보이는 곳을 지나고
언제나 바람을 일어킬듯... 보기만해도 시원한 커다란 나무아래의 쉼터와 마을회관이 있는 곳을 지나
제덕마을회관
제포성지 안내판이 있는 이곳 초입에서 오르막 길로 오른다
짧은 거리지만 비탈길이 밉상스럽도록 무지 가파르다
쏟아져내리는 뜨거운 땀을 에너지삼아 미련스럽게 발걸음을 뗀다
엉뚱스럽게도 웬 펜션?...인가 했더니
지금은 그 이름을 잃은 제덕산(薺德山) 꼭대기는 넓디넓은 잔디밭이다
오른쪽은 의문의 그 펜션인듯 전원주택인듯한 문닫힌 건물이 있고
가운데 자리잡은 커다란 소나무 왼편에...
여기가 그 옛날의 제포진성(薺浦鎭城)이 있었던 제포성지(薺浦城址)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보인다
1592년 중반 이후 옥포 해전, 한산도 대첩, 부산포 해전 등 조선 수군이 연전연승하며
최후방에 설치했던 왜군의 본진 기지까지 타격을 입자
왜군은 곧바로 수성(守城) 태세로 돌입해 왜성을 곳곳에 쌓기 시작했는데 웅천현 지역은 그 방어선의 최전방이었다
웅천읍성의 남측 산꼭대기에 웅천왜성을 쌓아 웅천읍성, 자마산성, 명동왜성 등을 전진기지(出城)로 사용했고
제포진성도 그 중 하나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임진왜란 이후 제포진은 수군만호진으로 유지되면서
웅천현에 소속된 국방의 최전선 기지 중 한 곳으로 기능하다가 1895년 갑오개혁 때 혁파(革罷)되었다
조감도를 보니 조금전 지나온 제덕마을회관이 제포진성의 한가운데였네
제포진성은 제포왜관의 왜인들이 무단 이주하거나 웅천읍성에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위해
세종 19년(1437년) 합포(마산)에 있던 해군기지인 수군첨절제사영을 이곳으로 옮겨오며 쌓았다
하지만 임란 때 왜군에게 점령됐고 성벽 돌은 웅천왜성을 쌓는 데 사용되었다
이 때문에 애초 성벽 둘레가 1377m에 이르렀으나, 현재 남은 것은 100여m에 불과하다
남벽 치(南壁 雉) 성터 아래에 차들이 지나가는 실루엣과 소리가 들린다
그래도 지난번에 찾았던 안골왜성 옆의 안골포진성(安骨浦鎭城) 보다는 그나마 흔적이 남아있는 편이다
키 큰 소나무 아래로 조망되는 바다 쪽 모습
저기 보이는 저 쌍둥이 섬 같은 곳은 어딘지 분간도 못하겠고
이순신 장군이 헤집고 다니던 임진왜란 격전의 바다는 아파트 빌딩숲으로 가리어져 있는데
잘 보이는 것은 북쪽의 산인데, 저 산은 진해의 명산 천자봉과 시루봉이다
제포성지 입구 너머로 보이는 저 산도 옛 제포진성에 속하는 경계였을터...
제포성지에는 현재 곳곳에 건물이 들어서고, 나머지 대부분 지역은 밭으로 사용되고 있어
성 내부 구조를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라 한다
세스페데스 공원 /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 1257
웅천왜성의 성주인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는 천주교 신자여서
그의 초청으로 스페인 출신의 세스페데스 신부가 왜군을 따라 웅천왜성에 1년가량 머물렀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하멜보다 60년 앞서 한반도에 최초로 상륙한 가톨릭 신부이라고 해서
이를 기리기 위해 웅천읍성에서 웅천왜성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세스페데스 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하지만 세스페데스 신부는 왜군을 따라 종군하여 왜군의 승리를 축원하고
왜군들에게만 복음을 전하고 영세를 베풀었을뿐
조선인과는 전혀 교류가 없었으며 조선에 천주교를 전파한 적도 없는데
단순히 한반도에 최초로 상륙한 가톨릭 신부라고 해서 이렇게 그의 이름을 딴 공원까지 조성한 것은
한마디로 너무 나아간 행정이고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비약하자면, 그는 조선을 멸망시키고 조선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것을 방치한 적군이 아니었던가
공원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다
창원시에서는 하루 빨리 공원의 이름도 바꾸고 세스페데스의 모든 흔적을 지우길 바란다
웅천읍성(熊川邑城)으로 왔다
웅천읍성은 세종 16년(1434년)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와 제포왜관의 왜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축조됐다
1494년 제포에 거주하던 왜인들의 수가 무려 347호 2,500명으로 웅천의 인구수 318명을 훨씬 뛰어넘어
웅천읍성을 축조한 목적은 제포에 체류하는 일본인들로부터 웅천의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삼포왜란 때는 왜인들에게 함락돼 동문이 불탔고, 임란 때는 왜군에게 함락돼 웅천왜성의 지성으로 사용되었다
성벽 둘레에는 폭 4m가량의 해자(垓子)가 둘러처져 있다
삼포왜란과 임진왜란에서 두 번이나 크게 함락당하는 고초를 겪고 난 뒤로
축성 이후 오랫동안 남해안을 방어하는 거점으로 사용되었으나
1895년부터 읍성으로서 기능을 상실한 걸로 보고 있다
일제강점기 후에 성벽 일부만 남아있던 것을
2011년 복원 사업으로 동문인 견룡문 일원과 해자, 남쪽과 북쪽 성벽 일부를 복원하였다
읍성을 쌓은 사람들의 이름과 출신 고을의 이름을 함께 새긴 돌
구간에 따라 책임자의 이름을 기록하여 나중에 발생하는 문제 등을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남쪽 성벽에서만 5개의 명문석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웅천읍성의 명문석에서 지명이 확인된 곳은 진주, 창녕, 청도, 합천으로
당시 웅천읍성을 쌓기 위해서 경상도 전역의 백성들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무다리 조교(釣橋)
조교는 해자를 건너는데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여닫게 된 방식의 도개교다
해자를 가로질러 나무로 만든 다리를 놓고 줄을 매달아 필요한 경우에는 다리를 들어 올렸다
북쪽 해자(垓子)
옹성을 통해 동문인 견룡문으로 들어 간다
2011년 복원 사업으로 복원된 웅천읍성 동문(熊川邑城 東門)인 견룡문(見龍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문루에 화려한 팔작지붕을 얹었다
성 안에서 촬영한 동문
남쪽 성벽
남쪽 성벽과 해자
견룡문 누각과 옹성(甕城)
옹성(甕城)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다시 한 겹의 성벽을 둘러쌓아 이중으로 쌓은 성벽이다
성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 옹성을 먼저 통과해야 하며
성벽에서 밖으로 돌출되어 있어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공격하기 좋다
일본 왜성 입구가 직각으로 꺾여있는 것과 같다
북쪽 성벽과 해자
성벽 끝부분에 보이는 건물이 옛 웅천초등학교인데 지금은 곰내유치원으로 바뀌었다
2022년부터 이 웅천읍성을 기리는 축제인 '웅천읍성축제'가 진행되고 있는데
2024년 10월 열린 제3회 웅천읍성축제는 무려 축성 590년을 맞이하는 축제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