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
고려의 제31대 왕 공민왕의 1비. 공민왕과의 각별한 금슬로 유명하다.
원나라의 위왕 베이르 테무르의 딸로 공민왕과 그녀는 9촌이 되지만,
충숙왕의 2비 조국장공주가 그녀의 고모라서 어떻게 보면
사촌 사이에 결혼한 셈이 된다.
덤으로, 엄밀히 말하면
당시 만악의 근원이었던 원나라에서 시집온 왕비인데도 불구하고
공민왕의 정책들을 지지하고 자기 딴에는 공민왕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기 때문에 대중에게 이미지는 매우 좋다.
태생으로 따지면 외국인 왕비,
그것도 적국 공주 출신의 왕비였던 이가 후대의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특이한 케이스.
특히 공민왕과의 로맨스는 정략결혼과 정쟁으로 한 결혼이지만,
말 그대로 세기의 로맨스로서 창작물에서도 흥하고
현대까지도 여러가지 떡밥거리를 안겨준다.
당시 고려 왕족은 원나라 황실의 일부에 불과했고
이미 상당한 수준의 통혼이 서로 이루어져 실상 방계 가문이었다.
몽골황실이 한배에 나온 형제간에도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였던걸 생각하면
노국공주의 행동은 전혀 이상할게 없다.
이름은 보르지긴 부다시리(Borjigin Budashiri).
공민왕이 친히 지어준 고려식 이름은 왕가진(王佳珍)이다.
성은 고려 왕성(王姓)인 왕씨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며,
이름을 해석해보면, 아름다운 보배.
흔히 한자어를 우리식대로 읽어 보탑실리라고도 곧잘 일컫는 편.
또한 한국사의 왕비 중에서는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외국계 인물이다.
영친왕과 혼인한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이방자)는 대한제국이 멸망해
영친왕이 이왕세자가 된 후에 결혼했기에 좀 복잡하지만
굳이 대한제국에 맞추자면 황태자비가 된다.
그러나 금슬에 비해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기에,
1359년 결혼 10년 만에 이제현의 딸인 혜비 이씨를 비로 들였다.
사실 이것도 공민왕은 들이기 정말 꺼려했다지만,
신료들은 물론 어머니인 공원왕후마저 청을 올려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들일 때는 노국공주의 허락까지 맡고 들였지만, 들이고 나서는 노국공주가
투기로 인해 식음을 전폐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하지만 그녀의 입장에선 다행스럽게도,
공민왕은 노국공주 외의 여자에겐 마음을 주지 않았다.
1364년 드디어 아이를 가졌지만 다음 해 음력 2월 16일 난산으로 사망한다.
공민왕이 얼마나 절실하게 순산을 바랐는지 사형수를 제외한 나머지 죄수들을 사면하고,
[8] 공주가 위독해지자 산천과 사찰에 기원을 드리도록 했으며 나중에는 사형수까지
모두 사면했을 정도. 하지만 끝끝내 아이도 공주도 모두 숨을 거두고 말았다.
홍건적의 고려 침공
홍건적의 고려 침공은 원나라에 쫓겨 요동으로 물러선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한 사건으로 1359년 12월에 1차 침공과 1360년 9월 2차 침공이 있었다.
또한, 1차 침공 이전에도 약 3천여 명의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식량과 물자를 약탈하기도 했다.
1359년의 1차 침공은 모거경이 4만여 명의 병력으로 침공했다가
70여 일 만에 대부분의 병력을 잃은 채 압록강을 건너 패주하는 것으로 끝났다.
2차 침공은 반성, 사류, 관선생, 주원수가 이끄는 20만여 명을 이끌고 침공하여
개경을 함락시키는 등 위력을 발휘했으나 안우, 김득배, 이방실 등의
활약으로 3개월 만에 10만여 명이 죽고,
10만여 명은 다시 압록강을 건너 도주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 과정 중에 고려에서는 김용의 난이 일어나 공민왕이 암살당할 뻔한 위기를
겪기도 했으며, 이성계 등의 신흥 무인 세력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공민왕과 노국공주. 경기도박물관 소유.
첫댓글 고려에 대해서는 기록이 많지 않다고 해서 나오는데로 읽고 있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종종 들러 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