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강 / 엔도 슈사쿠 / 유숙자 / 민음사
헤르만 헤세는 기독교 문화 속에서 동양 문화를 바라보았다면
엔도 슈사쿠는 동양 문화 속에서 서구 기독교 문화를 조명했다.
반면에 이승우는 기독교 문화를 서구화된 동양 문화로 바라보았다고나 할까.
내가 무슨 평론가도 아니고 비교학을 연구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몇 권 읽은 느낌으로 정리해 보자면 이렇다.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지역과 시대의 구분이 사라져가고 문화와 종교가 혼재된 현대 생활에서 중심을 잡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을 한다고 해서 특별하게 달라지는 것은 없으며, 하지 않는다고 해서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연을 가진 주인공들이 인도로 모인다.
- 다시 태어날 아내를 찾아 참석한 이소배
- 자신을 대신해서 죽은 구관조를 방생하기 위해 참석한 누마다
- 전우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참석한 기구치
- 자신이 유혹했다가 차버린 신부가 된 남자의 소문을 듣고 참석한 미쓰코
- 신부가 되었지만, 겐지스강에서 힌두인들을 돕는 오쓰
대략 굵직한 흐름으로는 5명의 주인공이 나온다.
죽음에 이끌려 인도를 찾은 이소매, 누마다 그리고 기구치가 있고, 미쓰코와 오쓰는 현재에 물음이 있다. 각각의 행보는 인도 수상이 암살당하면서 제약을 받는다.
등장인물의 사연이나 행보, 그들이 머무는 인도의 상태가 각기 특이하고 요란한 듯 보이지만 결국 큰 흐름에서 보자면 미미한 일이며 더 멀리서 바라보자면 의미를 부여할 만한 것인가 하는 느낌이 든다. 어떤 형태이든 생명체는 자연으로 돌아가고 자연은 그 생명을 다시 토해낸다. 땅을 통해서 알을 통해서 자궁을 통해서 다시 난다.
강물은 여러 사연을 안고 출렁이지만 깊은 강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존재하며 조용하게 말없이 흐른다. 누구의 간섭도 없이. 다만 내 마음의 얕은 강이 문제다.
첫댓글 거울 없이는 자기 얼굴을 바로 보기가 어려운 것처럼 서양 것의 도움으로
우리는 자기의 정체성을 조금씩 찾아가는 여정이 담겨 있는 작품이라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