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의 잡초(雜草)를 없애는 방법
한 철학자가
오랫동안 가르쳐 온 제자들을 떠나보내며
마지막 수업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제자들을 데리고 들판으로 나가 빙 둘러 앉혔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앉아 있는 이 들판에 잡초가 가득하다.
어떻게 하면 잡초를 모두 없앨 수 있겠느냐?"
제자들은 학식은 뛰어 났지만 한 번도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었기에
그들은 모두 건성으로 대답했습니다.
"삽으로 땅을 갈아엎으면 됩니다."
"불로 태워 버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
"뿌리째 뽑아 버리면 됩니다."
철학자는
제자들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 수업이다.
모두
집으로 돌아가서 자신이 말 한대로
마음속의 잡초를 없애거라.
만약 잡초를
없애지 못했다면 일 년 뒤에 다시
이 자리에서 만나기로 하자."
일 년 뒤,
제자들은 무성하게
자란 마음 속 잡초 때문에 고민하다가
다시 그 곳으로 모였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잡초로 가득했던 들판은 곡식이
가득한 밭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스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이런 글귀가
적힌 팻말 하나만 꽂혀 있었습니다.
"들판의 잡초를 없애는 방법은 딱 한가지뿐이다.
바로 그 자리에 곡식을 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속에서 자라는 잡초는
선한 마음으로
어떤 일을 실천할 때 뽑아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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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졸업장을..
집안에 아직 초등학교를 마치는 아이가 없어
무심히 넘겼는데 어제 산책을 하던 중
우연히 초등학교 졸업식 이야기로
한담하시는 동네 분들 틈에 끼이다보니
갑자기 제가 어릴때 만난 당시에는
"국민학교"라 불렀던 시골 국민학교
졸업식에서 불렀던 졸업식 노래가
생각나고 우연히 알게 된 그 노래의
탄생배경이 생각나서 차제에 이곳에 옮겨
나누기로 작심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방송인으로,
記者이자
PD로 이름을 날리던 "김형민"씨가 들려준 글입니다.
나이드신 분들은 기억이 나시겠지만 탄생배경 까지는 잘 모르실 것입니다.
"졸업식 노래의 탄생비화 "
1946년 6월 6일 해방 된지 겨우 1년...
중앙청에 성조기가 나부끼고 미군 육군
중장이 38선 이하의 조선 땅을 통치하던 무렵, 군정청 편수국장
직함을 가지고 있던 외솔 최현배가
한 아문학가를 찾았습니다.
“여보 석동. 노래하나 지어 주시게.”
석동이라는 아호를 가진 이 사람의 본명은
윤석중(尹石重)이었습니다.
석동이라는 아호는 어느 신문에선가
그를 소개 하면서 윤석동(童)이라고 잘못 쓴 걸 보고 춘원 이광수가 “석동이라는 아호가 좋네. 누가 지어 준 거요?” 라고 칭찬하면서 그대로 아호가 돼 버렸다고 합니다.
“졸업식 때 쓸 노래가 마땅하지 않소.
그래서 외국 곡을 이것저것 가져다 2쓰는
형편이니 석동이 하나 지어 줘야겠소.”
윤석중은 해방 직후
“새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를
작사하여 해방된 조선의 어린이들이 목청껏
‘'새나라 우리나라'’를 부르게 해 주었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최현배가 보기에 일제 때부터 동요 작사가로
이름을 날린 윤석중은 졸업식 노래를
만들 최적임자였을 것입니다.
윤석중이 누구시더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분들을 위해서 노래 몇 개만 흥얼거려 보겠습니다.
“엄마 앞에서 짝자꿍 아빠 앞에서 짝자꿍”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아기 잘도 잔다.”
그리고 어린이날만 되면 울려퍼지는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이쯤되면 아! 아 !아! 하시면서 고개를 상하로 크게 흔드는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최현배가 졸업식 노래를 의뢰한 게 1946년
6월 5일이었습니다.
최현배의 부탁을 받자마자 윤석중의 머리 속에는 시상(詩想)이 번득인 것 같습니다.
원래 악상(樂想)이나 시상은 배차
시간 쫓기는 기사가 모는 버스 같아서 제때
손들지 않으면 휙 지나가 버리는 법.
윤석중은 그날이 가기 전에 가사를 완성합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를 하며 우리들도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윤석중이
또 급히 찾은 것은 작곡가 정순철 이었습니다.
바로 <새나라의 어린이> <엄마 앞에서 짝짜꿍>의 작곡가.
정순철 작곡가의 아드님의 회고에 따르면
정순철 또한 가사를 받고 악상이 번개같이 스치고 지나간 것 같습니다.
허겁지겁 피아노를 두들기다가 악보에
콩나물을 급하게 그려 뛰어나가던 모습을 회상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 성미 급한 작사가와 작곡가는 설렁탕집에서 만났습니다.
“비이잋 나는 조오올업장을 타신 언니께~~~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원래 흥에 겨운 예술가들의 얼굴 두께는 빙산처럼 두터워지는 법.
설렁탕 집에서 때 아닌 고성방가는
“거 조용히 합시다!”
라는 지청구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졸업식 노래는
그렇게 엉겁결에 탄생했습니다. 하지만
그 가사와 가락은 결코 엉성하지 않았습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를 하며 우리들도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하는 1절은 교과서도 제대로 없어 선배들 것들을 물려받아 공부해야 했던
시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시대와는 좀 맞지 않지만요)
그런데 뭉클한 것은 2절이고, 사실 2절을
부를 때 졸업식은 눈물바다가 되기 일쑤였습니다.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그리고 또 나오는 '‘새나라’'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새 나라의 새 일꾼이 되겠습니다.”
3절은 졸업이 아닌 다짐의 합창.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우리나라 짊어지고
나갈 우리들 강물이 바다에서 다시 만나듯
우리들도 이 다음에 다시 만나세.”
당장 편수국 전 직원들 앞에서 이 노래가
처음 불리어졌고 열화와 같은 호응을 거쳐
졸업식 노래로 공표된 것이 1946년 6월 6일이었습니다.
이 노래는 역시 커다란 환영을 받으며 각급학교에서 불리어졌습니다.
때 아닌 돈벼락을 맞은 것이 당시로서는 몇 집 안되 던 꽃집들이라고 합니다.
각급 학교 졸업 때마다 꽃다발 주문 홍수가 일어난 것입니다.
원래 윤석중의 의도는 “마음의 꽃다발”이었다고 하는데.....
그런데 이 윤석중 작사가와 정순철 작곡가는 한국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크나큰 상처를 입거나 아예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윤석중의 아버지와 새어머니, 그리고 이복동생은 충남 서산에 살고 있었는데 새어머니 쪽이 좌익과 관련되었다고 합니다.
전쟁 와중에 벌어진 피의 학살극에 윤석중의 가족은 몰살당하고 말았답니다.
윤석중이 원래 서산으로 피난 오려던 것을 아버지가
“전쟁 통에는 떨어져 있어야 누구든 산다.”
고 만류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천행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나 작곡가 정순철의 불행은 본인에게 찾아왔습니다.
다 피난 간 학교(성신여고)를 홀로 지키다가 거의 서울이 수복되던 9월 28일경 인민군에게 납북되고 만 것입니다.
이후 그의 생사는 알려지지 않는답니다.
해월 최시형의 외손자이자 의암 손병희의 사위였던 그의 제삿날은 그래서 수복 다음날인 9월 29일이 됐답니다.
후일 막사이사이상을 받은 윤석중은 이렇게 연설합니다.
“정말로 국경이 없는 것은 동심인 줄 압니다. 동심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의 본심입니다.
인간의 양심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동물이나 목성하고도 자유자재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정을 나눌 수 있는 것이 곧 동심입니다.”
간악한 일제 통치를 받을 때에도, 해방의 혼란과 설렘 와중에서도,
자신의 일가족을 학살하고 절친한 작곡가의 생사를 가린 전쟁의 공포 속에서도,
가난의 무게가 전 국민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을 때에도
윤석중은 그 어둠을 밝힐 빛으로 ‘'동심’'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졸업식 노래>는 그 중 하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