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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복지와 분배
1960년대 이래 대한민국이 이룩한 고도성장은 많은 긍정적인 효과로 인해 경제·사회의 발전을 가져왔지만, 그 이면에는 경제성장의 혜택에서 소외되거나 희생된 계층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자원이 부족하고 경제개발 재원이 거의 없던 한국이 빠른 성장을 위해 모든 가용재원을 한 방향에 집중하는 불균형 성장 전략을 취했기 때문입니다. 경제개발 초기에는 수출 공업화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기 때문에 이와 무관한 분야는 소외되었습니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을 집중 육성할 때는 경공업이나 중소기업, 영세 서비스업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또한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생산비를 낮추고 수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려다 보니 기업주는 저금리로 돈을 빌릴 수 있는 등 많은 혜택을 받았으나, 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복지와 인권은 무시됐습니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노동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노동운동이 야당 및 정치적 민주화를 요구하는 지식인 계층과 연합하면서 노동자의 권리 보장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정부도 점차 복지와 분배 쪽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국민연금과 산재보험, 의료보험, 고용보험 등 4대 사회보험제도가 도입되어 정착되기 시작했고 1987년 정치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부터는 노동자들의 3대 권리(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가 법으로 보장되기 시작했습니다.
1)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 전태일 분신과 한국의 노동운동
1960년대 중반부터 수출 중심 공업화가 추진되면서 많은 근로자들이 농촌을 떠나 공장이 있는 대도시로 몰려들었습니다. 서울에는 옷을 만드는 봉제공장이 많았습니다. 초등학교도 채 마치지 못한 많은 여성들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공장에 취직을 했습니다. 이들은 ‘벌집’이라 불리는 화장실도 없는 2평짜리 방에서 동료들과 함께 살면서 하루 15시간 이상의 고된 노동을 견뎠습니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생존 조건을 요구하다가 자기 몸에 불을 붙이는 ‘분신’을 하여 숨져간 사람이 전태일.
1948년 대구에서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 태어난 전태일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 가족들과 함께 서울에 올라왔습니다. 형편이 어려워 다니던 초등학교를 그만두고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잔심부름을 하다가 열여섯 살에 학생복을 만드는 공장에 보조로 취직했습니다. 가족을 위해 밤낮으로 봉제일을 배워 마침내 재단사가 됐습니다.
당시 평화시장의 작업 조건은 열악했습니다. 섬유 부스러기와 먼지가 휘날리고 햇볕 한 줌도 들지 않는 열악한 작업장에서 나이 어린 여성 근로자들이 하루 15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일하다 다쳐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고, 일자리를 잃을까 봐 아파도 제대로 쉴 수 없었습니다. 노상 섬유먼지를 마시고 잘 먹지 못해 폐결핵에 걸려 목숨을 잃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월급은 ‘견습생’ 이라는 이유로 제조업 월평균 임금의 20%에 불과했습니다. 전태일은 근로자들의 기본적인 권리를 정한 법인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일하는 틈틈이 근로기준법을 공부했습니다. 나라에서 법을 만들었는데도 현장에서 전혀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 분노한 그는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을 모아 ‘바보회’라는 단체를 만들고,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노동환경 실태를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노동청에 근로 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노동청에서는 전태일의 요구를 묵살했습니다. 정부가 노골적으로 사측 편을 들자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동료들과 함께 평화시장에서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경찰이 시위대를 탄압하려 하자 그는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여 분신자살을 했습니다. 전태일은 자신의 몸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는 동안 외쳤습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전태일이 요구한 것은 한마디로 정부와 기업에게 ‘법을 지키라.’는 것이었습니다. 노동법은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등 노동 3권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근로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단결권) 회사에 근로조건 및 임금 협상을 요구할 수 있고(단체교섭권), 협상이 안 될 경우 파업을 할 수 있는 권리(단체행동권)를 달라고 죽음으로 호소한 것입니다.
전태일의 외침은 그동안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전태일의 분신을 계기로 여기저기서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노동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기 시작했지만 노동환경은 여전히 열악했습니다. 회사는 노조 설립을 방해했고, 파업을 하면 정부가 이런저런 구실을 만들어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탄압하기 일쑤였습니다.
이 같은 상황은 군사정권인 제5공화국 때(1980~1987년)도 여전했습니다. 탄압받던 노동운동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야권 및 지식인들과 연대하기 시작하여 1980년대 중반 민주화 운동의 중심 세력이 됩니다. 결국 정부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와 근로자들의 노동권 보장 요구를 반영해 1987년 10월 헌법을 개정합니다. 헌법에 ‘경제민주화’ 조항을 넣어 국가는 기업과 국민이 고루 성장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습니다.
또한 국가는 근로자의 고용증진과 적정임금 보장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했습니다. 이에 따라 헌법이 보장한 대로 최저임금제가 실시됩니다. 최저임금제도는 최소한의 기본적인 생활을 위해 근로자가 받아야 하는 최소한의 임금입니다.
1989년 시간당 --- 600원 이었던 최저 임금이 매년 조금씩 올라
2020년에는 ---- 8,590원 이 됐습니다.
최저임금은 가장 힘이 없는 비정규직 근로자들에게 소득 보장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판이 되고 있습니다. 근로환경 개선과 함께 노동 3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각종 제도가 산업 현장에 본격적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2) 국민연금과 의료보험
1980년대 중반부터 국민 삶의 질 향상과 경제성장의 혜택을 덜 받은 계층을 위한 사회 복지 시스템도 점차 갖춰지기 시작했습니다.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당시 사회보장과 안전망을 위한 구체적 방향을 만들기 시작하여 1986년에는 드디어 국민연금법을 만들고 국민연금 대상자를 점진적으로 확대해 나갔습니다.
국민연금은 일을 하면서 일정 금액을 보험료로 납부했다가 은퇴 후 연금 수급 개시 연령이 되면 연금을 받되 더 가난한 사람에 더 많은 비율이 주어지도록 설계된 소득재분배 제도입니다. 1986년 이전에는 공무원, 군인, 교사만 연금제도의 혜택을 받고 있었지만 1988년부터 10인 이상의 사업장에 적용되기 시작해 1995년에는 농어민, 1999년에는 도시 지역 자영업자들,
2006년부터 - 1인 이상 <국민연금시대>
1989년에는 ---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 실시
그 이전에도 의료보험이 있었지만, 공무원이나 대기업 근로자들만 혜택을 보고 있었습니다. 1989년에는 대상을 전 국민으로 확대해 모든 국민들이 안심하고 병원에 갈 수 있게 됐습니다. 요즘은 의료보험을 ‘건강보험’이라고 부릅니다. 2020년 발생한 코로나19 사태로 한국의 선진화된 의료보험 제도가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사람이 많아 코로나19나 중병에 걸리고서도 병원에 가지 못해 사망하는 ‘메디컬 푸어(Medical Poor)’ 계층이 존재하지만 한국에서는 전국에 1차, 2차, 3차 첨단 의료기관이 구축되어 있고 전 국민이 건강보험 대상이라 누구나 치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95년부터 고용보험이 시행되기 시작했습니다.
직장에 다니는 동안 월급의 일정 금액을 근로자와 사업주가 보험료로 내고, 근로자가 실직할 경우 실업급여를 받는 제도입니다. 1997년 외환위기로 대규모 실업 사태가 벌어졌는데, 1995년 만들어진 고용보험이 대폭 강화되어 실직자들이 생존의 위기를 넘길 수 있게 돕기도 했습니다.
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에 산업재해보험(산재보험)을 더해 ‘4대 보험’이라고 부릅니다. 1965년 도입된 산재보험은 큰 회사에만 적용되다가 2000년에 와서야 1인 사업장으로 확대됐습니다. 산재보험은 근로자를 고용한 사업주가 보험료를 내고 근로자가 일하다 다치거나 숨지면 보상해 주는 제도입니다. 회사에 취직해 일을 하는 근로자라면 ‘4대 보험’의 적용을 받습니다.
3) “아, 1987년!” - 6월 항쟁과 정치 민주화
경제성장 먼저 하고 사회 복지는 나중에 하자는 ‘선 성장, 후 복지’를 부르짖던 정부가 본격적으로 분배와 복지를 고민하고 시각을 전환한 데는 정치 분야에서 이룩한 민주화가 큰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국가를 이끄는 두 개의 축은 시장경제의 발전과 정치 민주화입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끊임없이 제헌헌법에 명시된 자유 민주주의를 요구해 왔습니다.
1950년대 이승만 대통령이 부정선거로 권력을 이어가려 하자 4.19 혁명이 일어나 국민들이 이승만 대통령을 물러나게 했습니다. 1970년대 말에도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헌법 개정을 통해 집권의 장기화를 꾀하자 국민들은 일제히 저항했습니다. 1979년 12.12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장군이 직접 선거를 거치지 않고 간접 선거로 대통령에 올랐을 때도 국민들의 저항은 지속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대학생과 야당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1980년대 이들의 핵심적인 요구는 국민들이 선거에서 직접 투표를 해 대통령을 선출하는 ‘대통령 직선제’의 도입이었습니다. 민주화 운동은 1987년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1987년 초 대학생이던 박종철이 경찰에 잡혀가 고문을 받다 숨진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정부와 치안당국이 이를 숨기려다 발각되었고, 이는 국민적 분노로 이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이 그해 4월 대통령 선거를 간접 선거로 이어가겠다는 뜻을 발표하자 시위는 더욱 거세졌습니다. 6월 9일 시위를 하던 대학생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일로 민심은 폭발했고, 대학생과 야당 정치인들은 물론 평범한 직장인과 장사하는 사람들, 주부들까지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를 하며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했습니다.
더 이상 군사정권의 독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항의였습니다. 날이 바뀔 때마다 거리에는 더 많은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투입해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방법도 검토했으나 여의치 않았습니다. 서울올림픽을 코앞에 둔 터라 전 세계가 한국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무력 진압을 시도한다면 한국은 올림픽 개최는 커녕 다시 후진적인 독재국가로 전 세계에 낙인찍힐 것이 뻔했고 군 내부에서 조차도 시위 진압에 군대를 동원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 있었습니다. 결국 당시 여당의 간선제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가 개헌약속을 발표하고서야 시위가 진정될 수 있었습니다.
1987년 12월 온 국민의 열망대로 국민의 손으로
5년마다 대통령을 새로 뽑는 직선제가 실시됐습니다.
1987년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룬 우리나라가 경제뿐 아니라 정치·사회적으로 선진화를 이룬 전환점이었습니다. 경제가 아무리 발전해도 민주화가 함께 따라가지 않으면 성장의 이익은 일부 계층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국민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사회가 불안해지면서 근로 의욕이 떨어져 다시 경제가 나빠지는 악순환이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경제개발을 추진했던 해외의 많은 개발도상국가들이 독재와 부정부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경제 발전과 함께 1987년 정치적 민주화를 이룩하였고 시민 의식이 높아져 권력층의 부정부패를 감시하는 능력이 높아졌습니다.
지금은 사회에 문제가 생겨도 촛불시위 등 평화적 해결 방법으로 문제를 풀고 있어 전세계가 감탄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도 안정적으로 정착돼 대통령·국회의원·지방자치 선거가 순조롭게 치러지고 있어, 어느덧 경제 모범 국가에서 민주주의 모범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 또한 ‘한강의 기적’이라 부를 만합니다.
4) 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
본격적인 정치 민주화가 시작된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대한민국은 1990년대 들어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제도적 틀을 마련하기 시작했습니다. 1990년대 들어 경제 체질을 선진화하기 위한 노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금융실명제의 시행이었습니다. 1993년 8월 12일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긴급재정명령’을 통해 금융실명제를 실시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그 이전까지 은행 등에서 금융 거래를 할 때 자기 이름이 아니라 가명이나 차명, 무기명 거래를 하는 일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돈을 많이 번 사람이 세금을 덜 내기 위해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은행에 예금을 분산 예치하거나 다른 사람 명의로 주식을 사는 일이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개인이나 기업의 소득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고, 공평하게 과세를 할 수도 없었으며 시중의 돈이 어디서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특히 사채시장에서 이름이 없는 무기명이나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흘러 다니는 채권은 불법적인 돈일 가능성이 높았습니다(이런 불법적인 돈을 ‘검은돈’이라고 합니다). 1980년대 초반부터 예금 등 금융 거래의 당사자를 명확히 밝히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기업과 정치권의 반대로 법만 만들어졌을 뿐 실제 시행은 되지 못했다.
부자들은 숨겨 둔 재산이 드러나 세금을 내게 될 것을 두려워했고 기업은 그동안 숨겨 왔던 매출과 수익이 훤히 드러날까 봐 반대했으며 정치권은 불법정치자금을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될까 봐 결사적으로 반대했습니다. 그러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한 정부는 비밀리에 금융실명제 실시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금융실명제를 실시한다고 소문이 나면 다른 사람 이름으로 돈을 숨겨 둔 사람들이 돈을 미리 빼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제 관련 관료와 학자들이 모처의 아파트에 숨어서 극비리에 관련 작업을 추진했고, 작업 참여자 가족들도 모르게 진행이 됐습니다. 다행히 비밀이 유지돼 전격적인 금융실명제 실시가 가능해졌습니다. 긴급명령에 의한 금융실명제 시행이 발표된 1993년 8월 12일 이후부터는 은행에 예금을 하거나 돈을 찾거나 주식 계좌를 만들 때 반드시 주민등록증이나 사업자등록증 등 개인과 기업의 ‘신분증’이 필요하게 됐습니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되면서 범죄조직의 검은돈 세탁이나 정치권의 불법 정치자금 및 기업들의 불법 비자금을 적발하고 처벌하는 것이 쉬워졌습니다. 무기명이나 차명을 통한 불법 증여를 막아 부의 세습을 줄였고, 기업이나 개인에게 세금을 부과할 때 근거가 되는 소득이 투명하게 드러나 수익에 따른 합당한 과세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일정액 이상의 현금을 거래할 때 반드시 신고하도록 한 돈세탁방지법이나 정치자금법 등이 추가적으로 보완되면서 금융실명제는 투명사회로 향하는 진정한 관문이 되었습니다. 또 부동산을 남의 이름으로 해 두는 것을 불법으로 명시하는 부동산실명제까지 도입되어 사회가 더 투명해지고 장기적 경제 발전을 위한 신뢰자본이 쌓이게 되었습니다.
[에피소드 6] 극비리에 진행한 금융실명제
법률을 만들기 위해서는 법률안을 만들어 공개하고 의견을 수렴해야 합니다. 그러나 금융실명제는 실시한다는 소문이 나면 부정한 거래를 한 사람들이 ‘검은돈’을 미리 숨길 것이기 때문에 보안과 비밀 유지가 관건입니다. 따라서 일반 법률이 아니라 우선 대통령의 ‘긴급명령’ 형태로 진행해야 했습니다. 금융실명제 제도를 만드는 동안에도 소문이 절대 바깥에 흘러 나가지 않아야 했습니다.
만약 내용이 긴급명령 발표 이전에 새 나가면 사회, 경제, 금융 전체를 뒤흔들고 정치권의 집단 반발을 불러올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김영삼 대통령은 금융실명제 발표가 있을 때까지 비밀 유지에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부총리나 재무장관을 불러 비밀작업을 지시할 때 항상 독대를 했고 이경식 부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준비상황을 물을 때도 “요즘 ‘그 일’이 잘되어 갑니까?” 할 정도로 보안을 강조했습니다.
금융실명제 실무진을 아침 식사 자리에 불러서 전원에게 보안유지 각서를 쓰라고 했습니다. 만에 하나 비밀이 새나갈 경우 무한책임을 질 각오를 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이 때문에 과천의 모 아파트를 빌려 작업을 하게 된 실무자들은 사실상 ‘감방생활’이나 다름없는 갇힌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해외 출장을 가는 것으로 위장하여 공항까지 갔다가 몰래 되돌아온 금융실명제 작업팀들은 과천 아파트에 입주할 때 “현관문을 나설 수 없다.”, “창문가에 서면 안 된다.”, “전화를 삼가고 집에 전화를 할 때는 국제전화로 위장하라.”는 등의 비밀엄수 준칙을 전달받았습니다. 그때가 여름이라 창문을 열어 놓고 작업을 했는데 밤새 타자 소리, 컴퓨터 소리가 나자 아파트 주민 한 사람이 “아무래도 간첩이 작업을 하는 것 같다.”고 아파트 경비실에 신고를 했습니다.
당황한 금융실명제 작업팀은 찾아온 경비에게 “남북통일이 될 것에 대비하여 학자들이 단체로 연구를 하고 있다.”고 둘러댔습니다. 마침 그때가 사회주의, 공산주의 체제붕괴가 본격화되어 “한국도 북한의 갑작스러운 붕괴에 대비해야 한다.”는 논의가 한창이었을 때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금융실명제는 ‘남북통일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금융실명제는 또한 금융시장 선진화를 촉진했습니다.
과거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할 때도 우리나라는 금융 분야가 낙후되어 있었습니다. 정부가 주도한 경제 분야에 부족한 재원을 강제 배분하다 보니 금융분야는 독자적인 산업으로서의 경쟁력을 잃고 항상 정부 입김에 흔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부가 금융기관의 인사와 경영, 자금 배분을 일일이 간섭하다 보니 ‘관치 금융’이라는 말까지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에 해당하는 금융, 즉 돈의 흐름이 효율적이어야 합니다.
정부가 돈 줄을 쥐고 있으면 부정부패가 발생할 수 있고, 돈이 정작 필요한 곳에 가지 못하는 경우도 자주 발생합니다. 대출해 줄 때 상대방의 신용이나 사업성 등을 제대로 점검하지 않다 보니 시장에서 스스로 살아남을 능력도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1990년대 들어 정부가 추진한 역점 과제가 금융자율화와 금리자유화였습니다. 금융기관에 경영권과 자금 대출의 자율성을 돌려주고 돈을 빌리는 사람의 신용에 따라 금리를 다르게 적용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금융실명제로 예금자나 대출자의 신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5) OECD 가입 -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1980년대 중반부터 ‘3저 호황’으로 시작된 경제성장은
1989년 무렵 잠깐 후퇴했다가
1990년대 초부터 다시 지속되었습니다.
1955년 100달러도 안 되던 1인당 국민소득이 40년 만인
1995년에는 1만 달러를 돌파했습니다.
1990년대 초반에는 북방 외교도 활발하게 벌어졌습니다. 정부는 소련, 중국을 비롯해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과 잇따라 국교를 수립했습니다. 때마침 소련과 동유럽 등 공산권이 붕괴했습니다.
남한에서는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마침내 승리했다는 자신감이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같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정부는 선진국들 대부분이 회원국으로 있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1996년 가입했습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 가입국이었습니다. OECD 가입은 여러모로 의미가 깊었습니다. OECD는 회원국의 경제력만 보는 것이 아니라 교육, 환경, 정부신뢰도, 치안, 과학기술, 보건의료, 농업, 일과 생활의 균형 등 다양한 삶의 질 평가 지표로 회원국 심사를 합니다.
돈만 많이 번다고 가입할 수 없고, 사회 제도 전반의 수준이 높아야 가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부는 OECD 가입을 위해 사회복지 제도를 확충하고 치안을 정비하며 보건의료 수준을 높이는 등 국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지금도 종종 OECD 통계를 통해 우리나라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감격스러운 것은 우리나라가 OECD 안의 여러 조직 중 ‘DAC’라고 불리는 ‘개발원조위원회’에 가입한 것.
개발원조위원회는 OECD 회원국 중에서도 일정한 조건을 갖추어야 가입이 가능한 조직입니다. 개발원조위원회 회원국들은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등 다른 나라들을 도울 여력이 있는 선진국들입니다. 지금도 전 세계에서 이뤄지는 원조의 90%가 OECD 개발원조위원회를 통해 이뤄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2010년 1월 세계에서 24번째로 개발원조위원회 회원국이 됐습니다. 명실공히 선진국으로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특히 개발원조위원회 가입이 특별한 것은 우리나라가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바뀐 최초의 국가였다는 점입니다. 현재 공적개발원조(ODA)를 통해 개도국들을 경제적으로 돕고 있고 해외 개발도상국에 인재를 파견하거나 해외 인재를 초청해 우리의 경제개발과 발전 사례를 전해 주는 노력도 기울이고 있습니다. 원조를 받는 국가에서 원조를 주는 국가로 바뀐 대한민국은 그 자체로 세계 개발도상국들에게 경제 발전의 살아 있는 교과서가 되었습니다.
[출처 : KDI, 한국개발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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