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8일 토요일 흐림. 교포 부인 집에 저녁 초대를 받다.
이 도시에 진작 유학을 와서 여기서 터전을 잡고 매우 유복하게 살고 있다는 70전후의 한 교포 부인 N씨 댁에 초대를 받아 가서 저녁을 얻어먹고 왔다. 작년에 여기 와서 있을 적에도 이미 한번 만났던 분인데, 이번 초여름에는 지은이와 카나다 빅토리아 섬에 가서 몇일 간 한집에서 지내기도 하였을 정도로 매우 가깝게 지내고 있다고 한다.
이 도시에서 1년에 2번씩 한국의 문화 예술계 인사들의 작품을 유치하여 2,3일씩 큰 문화 행사를 여는 일을 주관하고 있는 분이라고 한다.
아름드리 고목들이 집 앞 뒤에 욱어진 산장과 같은 주택에 살고 있는데, 내외가 모두 건축가라서 그런지 집이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집안에 조명 같은 것이 아주 잘되도록 매우 돋보이게 설계를 한 것 같다.
거실에 동양화를 3점이나 표구하여 걸어 두었는데, 거기에 적힌 한문 글자가 무슨 뜻인지 ㅜ잘모르겠다고 좀 읽어 달라고 하였다. 행서와 전서를 섞어 쓴 글귀를 좀 자세히 살펴 보고, 또 희미한 낙관까지 유심히 들여다보니, 3가지 작품이 모두 한 사람이 그린 것인데, 그 화가의 호는 “제당霽堂” 이고, 성이 “배裵”인 것까지는 알아보겠는데, 이름은 무엇인지 잘 알 수가 없다고 하였더니, 배렴裵濂이란 분인데 자기네 아버지와 아는 사이였다고 하면서, 오래전에 동아일보사에서 낸 그 분의 화집을 한 권 들고 나와서 보여주었다.
경북 김천의 부농 집 자제로 17세 때 상경하여 유명한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화백의 문하에서 수업을 한 중견화가로 만년에 여러 대학에서 강의도 하였다고 약력이 소상하게 소개되어 있다. 좀 들여다 보니 그분의 화풍이 청전과 매우 비슷하게 보인다. 이러한 중견 화가를 모르고 있다가 오늘 여기서 처음 알게 되다니 뜻밖의 소득이었다.
저녁을 먹은 뒤에 그 집 남자 주인에게 “당신 고향이 어디요?”하고 물어 보았더니, 원래는 독일 계통인데 프랑스, 영국을 통하여 18세기에 어디로 옮겨왔다고 하면서, 내가 중국문학을 전공한 것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 장개석이야기를 꺼내고 계속하여 자기 아버지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으나, 오늘 여기 오는데 보청기를 잊어버리고 와서 다 소상하게 알아들을 수는 없어, 지은이 보고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통역을 좀 하라고 하였더니, 놀랍게도 그 아버지 되는 분이 2차 대전 말에 미국 공군 조종사로서 중국과 동남아 국경지대에서 비행을 하다가 추락하여, 걸어서 버마까지 탈출하여 겨우 생환하게 되었고, 그 덕분에 이곳에 있는 학비가 매우 비싼 대학에까지 진학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미국사람치고서 자기 집안의 내력 이야기를 이 정도로 소상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키가 2미터는 되는 것 같고, 얼굴도 매우 길며, 코도 역시 매우 우뚝한 분인데, 대개의 서양인 노인들이 그런 것 같이 자세가 좀 구부정하며, 특히 당료가 심하여 인슈린 주사를 손수 놓고서 식사를 하였는데, 쌀밥은 입에 데지도 안았다. 이렇게 좋은 환경에 살면서도 늙음과 병고는 피할 수 없다니 안타갑게 느껴진다. 그래도 작년에 만났을 때 보다는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고 하니 다행이다.
나는 한국말로 경상도의 종가 집들 이야기를 더러 하였는데, 지은이가 영어로 통역을 하면서 자주 핸드폰을 열고서 그러한 고가들의 사진을 찾아서 보여 주기도 하였다. 참 편리한 세상이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기와집이라고 하면서 강릉의 선교장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건축을 하는 분들이니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우리나라가 비록 땅 덩어리는 작지만, 역사 이야기를 하자면 이러한 미국 사람들에게는 이야기할 거리가 참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8월 22일 화요일 종일 소나기. 한시 1수.
종일 소나기가 내리다가 그치다가 하였다. 저녁에 혼자 공원에 산책을 나가 보니, 아이스팔트 길 밑으로 흘러가는 조그마한 시내 위로 황토 물이 콸콸 넘치게 흘러 그 나름대로 기이한데다가 매미소리까지 요란하게 들리어 모처럼 시흥이 감돌아서 다음과 같은 7언 절구 1수를 지어 보았다.
〈夏日薄暮偶吟, 次高麗鄭知常先生韻〉
여름날 초 저녁에 우연히 읊다.
고려 때 정지상 선생의 시의 각운자를 샤용하여
七月晴陰變化多 칠월청음 변화다
칠월 달 개이고 흐림 변화가 많고 보니,
一川黃浪急成歌 일천황랑 급성가
온 시내 누른 물결 급작하게 소리를 지르는 구나.
蟬聲亦復時時起 선성역부 시시기
매미소리 조차 덩달아서 때맞추어 울어 주니,
避暑何求近海波 피서하구 근해파
피서 한다고 하필이면 바다 물결까지 찾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