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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44) 우정과 의리의 사나이, 킹메이커 요나탄
미국 최초 여성 대통령을 꿈꿨던 힐러리 클린턴은 선거유세 내내 유리천장(glass ceiling)을 깨뜨릴 것이라 주장했다. 유리천장이란 능력을 갖춘 사람이 직장 내 성 차별이나 인종 차별 등의 이유로 고위직에 오르지 못한다는 비유적인 경제학 용어이다. 유리천장은 직장에서 대다수 여성들, 소수 인종, 성적 소수자들이 영향력 있고 수입이 많은 자리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다.
우리나라의 예능계에서 유리천장을 깬 사람 중 한 명은 서혜진(레지나) PD라 생각한다. 그동안 이류음악 취급을 받던 트로트를 일시에 주류 음악으로 판도를 바꾸어놓았고 임영웅과 송가인 등 트로트 가수들을 대스타로 발굴해 냈다. 서 PD는 보수적인 조직의 방송국, 예능분야 안에서 적어도 유리천장을 깨뜨린 독보적인 인물이다. 누구도 예상 못한 일본가수들과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만들어 크게 흥행시켰다. 그는 흥행은 기대했지만 문화교류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겸손하게 말한다.
서 PD는 자신의 프로그램에서는 문자투표를 할 때 시청자들이 100원씩을 내고 참여하는데, 매해 이 돈을 모아 좋은 일에 사용하려고 한다. 올해에는 5000만 원을 적십자에 기부하고 1000만 원 정도를 우간다에서 봉사하시는 수녀님들께 드리게 됐다. 팔순이 넘으신 수녀님은 “마침 보건소 봉사자들을 위한 쉼터를 지으려고 주님께 기도했는데 이틀 만에 응답이 오네요”라고 하셨다고 한다. 서 PD는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극히 꺼려하지만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꿈을 세상에 활짝 펼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주님이 주신 탈렌트라고 생각한다.
다윗이 살기 등등한 사울왕을 피해 광야에서 살아야 했던 시기가 있다. 그런데 몰래 찾아와 그의 힘이 되어준 사람은 사울의 아들 요나탄이었다. 요나탄은 다윗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한다는 표지로 자신의 겉옷과 무기를 다윗에게 주었다. 요나탄은 마음이 착한 사람이지만 전투에서는 용맹스런 전사로 많은 공을 세웠고 생의 마지막도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장군이다.
요나탄이 사울의 아들로 왕위를 이어받는 것을 당시에 반대할 사람들이 없었다. 그러나 요나탄은 일찍부터 다윗의 인품에 마음이 끌려 다윗과 의형제를 맺고 평생 의리를 지켰다. 사울이 다윗을 질투하여 처단하겠다는 속내를 전한 것도 바로 요나탄이었다. 그리고 사울에게 충성한 죄밖에 없는 다윗을 왜 죽이려 하느냐며 직언을 한 것도 요나탄이었다. 요나탄은 다윗에게 생명의 은인이었다. 그리고 요나탄의 다윗에 대한 우정과 사랑은 아주 각별하다.
요나탄은 자신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는데도 다윗의 큰 능력을 보고 왕위마저 양보한 도량이 넓은 인물이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사실 요나탄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했고 이스라엘의 역사도 달라졌을 것이다. 권력의 탐닉은 부자간에도 양보가 없는데 요나탄은 개인보다는 국가, 우정을 지킬 줄 아는 인물이었다. 권력 앞에서는 양보나 의리와 정의도 메마른 요즘 요나탄과 같은 인물이 더욱 그리워진다.
[성경 속 기도 이야기] (15)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시편 22; 마태 27,46)
힘이 들수록 하느님과의 대화 잊지 말아야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앞두고 시편 22편을 읊으셨습니다. 시편 저자는 하느님의 침묵 때문에 절망감을 느끼지만 기도하면서 그분께 의지하기에 허무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죽음의 목전에 선 이가 하느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유다인 회당 안 동편의 기도하는 곳에 “네가 누구 앞에 서 있는지를 알라!”는 경구가 쓰여 있습니다.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아니라 ‘누구’입니다. 기도는 자기 영혼에게 하는 독백이 아닙니다. 질문, 두려움과 의심에서 나오는 하소연과 고발, 침묵과 경청, 자기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타인을 향함, 청원과 신뢰, 더듬으면서 답을 찾아감, 기도가 들어졌음에 대한 확신, 감사와 찬양과 충실함의 맹세 등으로 이루어진 시편 22는 기도가 상대방과 나누는 극적이면서도 참된 대화임을 보여줍니다.
처음에 하느님은 멀리 계신 듯합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소리쳐 부르건만 구원은 멀리 있습니다.”(22,2) 시편 저자는 곤경에 빠져 있습니다. “저는 물처럼 엎질러지고 제 뼈는 다 어그러졌으며 제 마음은 밀초같이 되어 속에서 녹아내립니다.”(22,15) 그러나 갑작스러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당신께서는 저에게 대답해 주셨습니다.”(22,22) 여기서 기도하는 사람과 하느님 사이에 놓인 벽에 금이 가고 그것이 허물어지면서 기도하는 이는 갑자기 하느님 앞에 마주 섭니다.
기도를 통해 살아계신 하느님과 관계가 실현되고 ‘내가 누구 앞에 서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절망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 하느님 앞에 서있음을 아셨을 것입니다. ‘당신은 거룩하신 분! 이스라엘 찬양 위에 좌정하신 분!’(22,4)이라는 말씀은 우리가 어디에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는지를 가리킵니다. 하느님은 바로 기도 속에서 당신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하지만 ‘기도의 어려움’이 분명히 있습니다. 살아계신, 말을 건네시는 하느님 앞에 서 있다는 느낌이 아니라, 그 뒤에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아무도 답하지 않는 죽음의 벽 앞에서 서 있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네 하느님은 어디 계시느냐?”(마태 27,39-44; 시편 42,4)라는 믿지 않는 이들의 빈정댐, “주님 어찌하여 멀리 서 계십니까? 어찌하여 환난의 때에 숨어 계십니까?”(시편 10,1)라는 신앙인의 절규는 침묵하시는 하느님 체험을 이야기합니다. 더욱이 하느님의 침묵은 시간이 흐를수록 커질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때, 기도가 즉각적으로 들어지지 않을 때 “하느님의 연자 맷돌은 천천히 돌지만 곱게 갈고, 하느님이 관대함으로 맷돌을 천천히 돌리신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을 준엄하게 만회하신다.”(플루타르코스/섹스투스 엠피리쿠스/프리드리히 폰 로가우)는 말이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이는 하느님을 신뢰하면서 때가 되면 그분이 개입하실 것이라 희망합니다. 기도가 우리 삶의 비극을 희극으로 당장 바꾸어 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지혜와 희망의 창문을 열어 줍니다.
“그분께서는 가련한 이의 가엾음을 업신여기지도 싫어하지도 않으시고 그에게서 당신 얼굴을 감추지도 않으시며 그가 당신께 도움 청할 때 들어 주신다”(22,25)라는 구절은 항구히 기도하는 이의 체험을 전해줍니다. 기도하는 이는 자신을 버러지처럼 느낄 수도 있지만 동시에 영원으로부터 긍정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또한 죽음의 먼지를 응시하면서도 모태로부터 자신을 빚어낸 분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북쪽 땅
오늘 제1독서인 예레미야서에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북녘땅에서 데려오고… 모아들이리라.”는 신탁이 나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기원전 6세기 남왕국 유다의 멸망과 바빌론 유배입니다. 이 재앙이 끝나고 백성이 죄를 용서받는 날, 하느님께서 그들 가운데 “남은 자들”을 약속의 땅으로 다시 데려 오실 거란 예고지요. 말하자면, 남왕국 백성이 유배 갔던 바빌론을 “북녘땅”으로 상징화한 셈입니다. 그런데 옛 바빌론은 이스라엘의 동쪽에 자리해 있는데, 예레미야서에서는 왜 북녘땅이라고 표현했을까요?
그 이유는 ‘북쪽’이 지닌 상징성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비롯한 고대 근동인들은 북쪽을 신비롭게 생각하여 신들이 사는 곳이라 믿었습니다. 바빌론 임금의 몰락을 예고하는 이사야서에서도 북녘을 신들의 모임이 있는 곳으로 묘사합니다: “너는 네 마음속으로 생각했었지. ‘나는 하늘로 오르리라. 하느님의 별들 위로 나의 왕좌를 세우고 북녘 끝 신들의 모임이 있는 산 위에 좌정하리라’”(14,13). 옛 가나안의 바알 신화에는 바알 신이 거주하는 산이 북쪽을 뜻하는 [짜폰]으로 나옵니다. 성전이 자리했던 예루살렘의 시온산도 시편에서 “북녘의 맨 끝”(48,3)으로 묘사된 바 있습니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예레미야는, 자신이 예언자로 세워진 뒤 보게 된 첫 번째 환시를 통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어긴 이스라엘 백성이 죗값을 치를 때 주님의 재앙이 북쪽에서 닥치리라는 신탁을 전합니다. 그 환시는 “끓는 냄비가… 북쪽에서부터 쏟아질 듯 기울어져”(예레 1,13)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여기서 ‘끓는 냄비가 기울어져 있다.’는 건 전쟁과 재앙이 일어나 백성에게 당연한 일상이 뒤집히리라는 전조였습니다. 이는 예루살렘 성을 ‘끓는 솥’에 비유하며 바빌론에게 포위당하였음을 알린 에제 24,1-14과 비슷한 내용입니다. 또한 냄비가 “북쪽에서부터” 쏟아질 듯하다는 건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재앙’이라는 뜻입니다. 한편, 이스라엘은 서쪽이 지중해, 동쪽은 광야로 막혀 있어 주변국이 침입해오는 방향은 대개 북쪽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서에는 북쪽에서 들이닥칠 재앙 예고가 자주 나오며(4,6; 6,1.22-23; 10,22 등), 20장 이후에는 그 정체가 바빌론의 침공으로 밝혀집니다(20,4-6; 21,4-7 등). 그리고 예레미야와 동시대 바빌론에서 활동한 에제키엘은 유배지에서 주님 영광의 환시를 목격하는데, 이때는 ‘북쪽에서 폭풍이’ 불어와 주님 발현이라는 신비로운 현상의 전조가 되어주었습니다(에제 1,4).
이렇게 북쪽은,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백성이 지은 죗값을 치르게 하리라고 예고하실 때 상징적으로 등장하는 방향입니다. 하지만 백성이 죗값을 치른 뒤에는 같은 방향에서 구원의 메시지가 전달됩니다. 그 예가 바로 오늘 제1독서입니다. 주님께서는 백성을 흩어 버리신 그 북녘땅에서 다시 그들을 모아들여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가실 거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93) 요한의 첫째 · 둘째 · 셋째 서간
믿음과 사랑 속에 그리스도인의 참삶을 살아야
신약 성경은 사도 시대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기 나름으로 해석해 교회의 분열을 일으키는 이단자들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초대 교회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자들로 인해 교회는 심각한 위기를 겪고 오고 있습니다. 요한의 첫째·둘째·셋째 서간도 이러한 배경에서 쓰였습니다.
요한의 서간들은 신앙의 순수성을 위협하는 이단을 퍼뜨리는 자들을 ‘그리스도의 적’(1요한 2,18.22; 4,3; 2요한 7), ‘거짓 예언자’(1요한 4,1), ‘거짓말쟁이’(1요한 2,22), ‘속이는 자’(2요한 7)라고 규정합니다. 이들은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의 일원이었으나(1요한 2,19) 이젠 그리스도에게서 유래하지 않는 교리를 퍼뜨려(2요한 10) 믿음을 충실히 지키는 신자들을 탈선시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1요한 2,26; 3,7) 요한의 서간들은 이들이 세상에서 나와 이 세상에만 속한 자들로서(1요한 4,5) ‘사람을 속이는 영’이 이끄는 대로 행동한다고 비난합니다.(1요한 4,6)
교회를 위협하는 이들은 신비주의에 빠진 ‘영지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을 뵙고(1요한 3,6; 3요한 11), 그분과 일치를 이루며 살고 있으며(1요한 2,3), 빛 속에 있기에(1요한 2,9) 하느님을 완전히 안다(1요한 2,4)고 자처합니다. 이는 교회 가르침에 명백히 반대되는 주장이며 행위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강생을 부인하면서(1요한 4,2; 2요한 7)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며(1요한 2,22) 하느님의 아드님도 아니라고 가르칩니다.(1요한 4,15) 그러면서 자기들은 죄가 없다(1요한 1,8. 10)며 계명(1요한 2,4)과 형제애를 실천하는 일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1요한 2,9)
요한의 서간들은 영지주의자들을 경계하며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1요한 2,2; 4,2; 2요한 7)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처음에 받은 가르침을 충실하게 실천할 것을 권면합니다.(1요한 1,1; 2,7; 3,11; 2요한 5.6) 그래서 요한의 첫째 서간은 “내가 여러분에게, 곧 하느님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5,13)라고 밝힙니다. 헬라어 신약 성경은 ‘Ιωαννη Α·Β·Γ’(요안네 알파·베타·감마),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Ioannis Ⅰ·Ⅱ·Ⅲ’,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펴낸 우리말 「성경」은 ‘요한의 첫째·둘째·셋째 서간’으로 표기합니다.
성경학자들은 동일 인물이 요한의 세 서간을 썼다고 봅니다. 세 서간의 문체나 담긴 가르침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가 이 서간들을 썼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요한 2·3서는 글쓴이 자신을 단지 ‘원로’라고 밝힐 뿐입니다. 그리고 요한 1서에선 글쓴이 자신을 ‘예수님을 직접 뵌 목격 증인’(1,1-3; 4,14)이라고 소개합니다. 오늘날까지 교회의 전승은 요한 사도가 이 서간들을 썼다고 합니다.
요한의 첫째 서간(이하 요한 1서)은 총 5장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이 서간의 핵심 주제는 ‘하느님과의 친교’입니다. 요한 1서는 하느님과 나누는 친교의 기준을 세 단계로 제시합니다. 첫째 단계는 ‘죄를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1,5-2,28) 하느님과 나누는 친교는 하느님의 빛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선 우선 죄에서 벗어나 빛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 사랑의 계명을 준수하고, 그리스도의 적이 나타나고 항구히 주님께 대한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둘째 단계는 ‘의로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2,29-4,6) 하느님 아드님의 모범을 따라 의로움을 실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 따라 영을 식별합니다. 셋째 단계는 ‘사랑과 믿음을 실천하는 것’입니다.(4,7─5,12)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내려와 믿음 안에 뿌리를 내립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 대한 믿음은 사랑의 뿌리입니다. 요한 1서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4,8)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신약 성경의 핵심 가르침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내어 줌과 동시에 친교이며 나눔입니다. 사랑은 아버지 하느님과 성자 하느님을 하나로 결합시킬 뿐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과도 하나가 됩니다.
요한의 둘째 서간(이하 요한 2서)은 12절, 요한의 셋째 서간(이하 요한 3서)은 13절로 구성돼 있습니다. 요한 2서는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아는 사람으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내리셨고 또 교회 안에서 처음부터 전해 온 계명의 빛을 받으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며 다른 이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이는 요한 1서의 주제와 같은 내용입니다.
요한 3서 역시 진리에 따른 삶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유인하는 자들의 자세와 대비되는 것이라며 선교사들에게 협조할 것을 당부합니다.
이처럼 요한의 서간들은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할 참삶을 제시합니다. 이 참삶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는 삶입니다. 이 친교의 삶은 사랑의 실천에서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참삶의 기준은 ‘믿음’과 ‘사랑’입니다. 이는 성령을 알아볼 수 있는 기준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서간들은 모든 희망을 그리스도께 걸라고 당부합니다. 그러면서 교회를 분열하는 신앙의 위기가 닥쳤을 때 죄를 끊어버리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의 증인이 될 것임을 선언한 세례 때의 신앙 고백을 충실하게 실천할 것을 요구합니다.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43)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에스테르
6·25전쟁이 시작됐을 때 국군은 속수무책으로 북한군에게 밀렸고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북한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1950년 7월 5일에는 미군의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오산 죽미령에서 북한군을 상대로 첫 전투를 벌였는데, 세계 최강인 미군이 처참하게 패배했다.
북한군에게는 소련제 전차가 있었는데 국군에게는 전차를 파괴할 만한 화력이 없었다. 그래서 국군이 할 수 있는 일은 북한군 전차에 직접 올라가 해치를 열고 준비한 수류탄, 화염병을 안으로 던져 제압하는 것이었다. 물론 전차에 접근한다는 것 자체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국군들은 결사대를 자원으로 뽑았다.
6·25전쟁 하면 남성들만 주로 언급되는데, 사실은 1950년 8월에 해병대 4기 모병에 1300여 명 중 여성에 126명이나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1950년 9월 6일 서울수복 후 여군 500명 모집에 수천 명이 몰렸다고 하니 당시 여성들의 애국심도 대단했다. 최근 한 모임에서 요즘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나는데 우리나라도 걱정이라는 주제로 이야기했다. 그런데 한 전문직 여성이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터지면 바로 입대해야죠”라고 담담하게 말해서 모두 깜짝 놀랐다.
성경에서 용감한 여성을 꼽을 때 에스테르가 빠지지 않는다. 베냐민 지파 모르도카이는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에서 잡아 온 포로 중 한 명이었다. 모르도카이는 왕궁에서 일을 했는데 용모가 빼어난 에스테르를 양녀로 삼았다. 나중에 에스테르는 크세르크세스 대왕의 왕비가 되어 목숨을 걸고 유다인들의 생명을 구하는 애국 여성이 되었다.
모르도카이는 우연히 왕을 가까이에서 지키는 두 내시의 반역 모의를 듣게 된다. 모르도카이는 이 일을 고발하였고 두 내시는 처형된다. 모르도카이는 이 일로 왕의 신임을 더 얻게 된다. 한편 이 두 내시와 이해관계가 있었는지 재상 하만은 이 일로 모르도카이와 그의 민족 유다인들을 말살하려고 작정한다.
에스테르가 왕후가 된 후 모르도카이도 궁궐 대문에서 일을 보게 되었다. 모든 신하들은 재상 하만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했지만 모르도카이는 무릎을 꿇으려 하지 않았다. 하만은 왕에게 유독 유다인들만이 다른 민족과 화합하지 않아서 앞으로 위협이 되기에 처단해야 한다고 고발하고 왕에게 허락까지 받았다. 이 사실을 모두 알게 된 모르도카이는 옷을 찢고 자루 옷을 입은 다음 재를 뒤집어쓰고 대성통곡을 하며 에스테르에게 소식을 전했다.
에스테르는 유다인들을 한자리에 모아 사흘 동안 자신을 위해 단식기도를 올려달라고 부탁하고 자신도 왕궁에서 단식기도를 하겠다고 답을 보냈다. 그 뒤에 죽음을 무릅쓰고 왕을 만나 유다인들을 학살하려는 하만의 음모를 폭로했다. 에스테르의 지혜로 하만이 되치기를 당해 오히려 죽게 되었다. 에스테르가 모르도카이에게 보낸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유다인들 사이에 많이 회자되고 있다. “법을 거스르는 것이긴 하지만, 임금님께 나아가렵니다. 그러다 죽게 되면 기꺼이 죽겠습니다.”
[성경 속 기도 이야기] (14) 참회 기도,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시편 51편, 130편)
죄 중에도 하느님 믿고 용서 구하는 시편 기도
돌아가신 분들을 기억하며 위령기도를 바치는 위령성월이 다가옵니다. “깊은 구렁 속에서 주께 부르짖사오니, 주여, 내 소리를 들어 주소서. 내 비는 소리를 귀여겨들으소서. 주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여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오히려 용서하심이 주께 있사와 더 더욱 당신을 섬기라하시나이다.”(시 130,1-40: 최민순 역)라는 구성진 위령기도 소리를 들으면 돌아가신 가족과 친지를 떠나보냈던 때가 떠오릅니다. 가까운 이의 죽음이라는 막막한 상황에서 신앙인들이 함께 바치는 위령기도는 경황없이 슬픔에 잠겨 있는 이들에게 큰 위안과 힘을 줍니다.
위령기도에서 사용되는 시편 51편과 130편은 죄를 지은 이가 바치는 참회의 기도입니다. 죄인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과연 들어 주실까요? 시편은 악인들이나 죄인들과 어울리지 않는 이를 행복한 이로(시편 1편 참조), 죄인을 하느님이 미워하는 이 내지 기도하는 이의 원수로(시편 63,10-12; 139,19-22) 칭합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이들은 깨끗하고 흠 없는 이들입니다. “주님, 누가 당신 천막에 머물 수 있습니까? … 흠 없이 걸어가고 의로운 일을 하며 마음속으로 진실을 말하는 이라네.”(시편 15,1-2).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옳지 않은 것에 정신을 쏟지 않는 이,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이라네.”(시편 24,3-4) “당신께서 제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중에도 캐어 보시며 저를 달구어 보셔도 부정을 찾지 못하시리이다.”(시편 17,3) 그러므로 반복하여 죄짓는 이들의 기도는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집회 34,31)
하지만 참회 시편은 죄를 지음이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는 길 중의 하나임을 가르칩니다. 시편 저자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자신의 모습을 하느님의 결백하심에 대비시킵니다. “저의 죄악을 제가 알고 있으며 저의 잘못이 늘 제 앞에 있습니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잘못을 저지르고 당신 눈에 악한 짓을 제가 하였기에 판결을 내리시더라도 당신께서는 의로우시고 심판을 내리시더라도 당신께서는 결백하시리이다.”(시편 51,5-6) 이어서 시편 저자는 변화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새로이 만들어 주시길,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 당신 면전에서 저를 내치지 마시고 당신의 거룩한 영을 제게서 거두지 마소서. 당신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 주소서.”(시편 51,12-14)
끝으로 시편 저자는 자신의 체험을 널리 전하겠다는 각오를 밝히며 하느님을 찬양하고 겸손되이 자기 잘못을 다시 한번 고백합니다.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시편 51,19) 종합하자면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올바르고 정직하거나, 적어도 그렇기를 원해야 한다고, 또한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할지라도 반성과 회개, 그분에 대한 신뢰로 하느님과 다시 가까워질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힘이 더 이상 미치지 않는 상태인 죽음과 영혼의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 죄는 같은 것은 아니지만 유비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살아 계신 하느님과의 극명한 대비 속에 죄스러움을 느낍니다. 이 죄스러움은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무상함에 근거합니다. 이때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신뢰하며 용서를 구하는 시편 기도가 이 무상함을 극복하는 힘을 줍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에게도 새로운 기회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이 희망 속에서 우리는 죽은 이들을 위해서 위령기도를 바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