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순
1910년 8월 29일 강제병합 당일, 데라우치 통감은 민심 회유책으로 ‘지세(地稅) 등 특별면제령’을 공포했다. 1908년 이전 지세 체남금, 1909년 이전 흠포금(欠逋金-관리가 횡령한 세금)과 미상환 사환미(社還米·환곡)를 전액 탕감한다는 것이었다.
‘대한’의 제호를 떼고 총독부 기관지로 전락한 매일신보(이하 ‘매신’)는 조세감면의 조칙으로 “전국에 성은의 홍대함을 감읍치 아니한 자 무(無)하다” (9. 4)고 칭송했다.
그러나 실제로 혜택을 입은 일반 백성은 거의없었다. 지세 체남금과 미상황 산환미 대부분은 지방관리들이 이미 징수해 착복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특별 면제령’은 일반 백성들에게 혜택은커녕 조세를 범포(犯逋-착복)한 탐관오리들에게 면죄부만 준 꼴이었다.
“공화(公貨)범포탕척에 대하여 범포인 등이 데라우치 통감을 위하여 송덕비를 창립하기로 협의 중이라더라” (매신, 9. 7)
“공화흠포로 은피(隱避)하는 자가 부지기수라더니 금번 창척으로 속속 출입한다는데 향곡(鄕曲)에 잠복하였던 권직상씨도 상경(上京)출입한다더라.” (매신. 9. 9)
‘특별면제령’으로 무려 4300여 명의 군수가 400여 만원의 흠포금을 탕감받았다. 그 중 가장 큰 혜택을 입은 인물은 조세 범포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던 아산군수 김갑수(1872~1961)이었다.
공주 감영의 관노 출신이었던 김갑순은 30살까지 악착같이 돈을 모아 벼슬을 사서 1902년부터 10여년간 부여·노성(논산시 노성면)·임천(부여군 임천면)·공주·금화·아산 등 6개 군 군수를 역임한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부여 군수 시절 그곳 상인의 쇠가죽 1000여 장을 강제로 빼앗아 내부의 감찰을 받았고, 노성군수 시절 매부를 봉세관으로 임명해 세금을 과다 징수하다가 원성을 사는 등 가는 곳마다 가렴주구로 악명이 높았다.
1911년 아산군수에서 물러난 후 김갑순은 중추원 참의, 충남도평의회 의원 등을 지내면서 권력자와의 친분을 이용해 부를 불려나갔다. 대전이 호남선 기점이 될 것이라는 정보를 빼내 대전 전체 토지의 40%에 달하는 22만평을 매집했다.
김갑순은 일본인 관리들을 상대로 충남 도청 이전 로비를 벌여 1932년 성사시켰다. 경부선 개통 이전 평당 1~2전 하던 대전 토지는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오르기 시작해, 도청 이전 후에는 100원 이상으로 치솟았다.
30여년 맘에 1만배 폭등한 셈이다. 그에게는 공주·예산 일대에도 1000만 평의 토지가 더 있어, ‘김갑순의 땅을 밟지 않고는 대전·공주 일대를 다닐 수 없다’고 할 정도였다
광복 이후 그는 반민특위에 체포돼 공주 출신 제헌국회의원 김명동에게 신문을 받고 풀려났다. 2대 국회의원 선거 때에는 김명동에게 당한 수모를 갚기 위해 두 아들과 장손을 출마시켰지만 엄청난 선거비용을 솓아붓고도 모조리 낙선했다. 농지 걔혁과정에 그의 토지는 대부분 유상 몰수돼 흩어졌다.
[진봉관 KAIST교수·한국문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