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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과 그 지식을 정의하는 개념(槪念)에 대한 유의미한 담론
언젠가 미술 평론가 손철주의 책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를 읽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림을 알려면 적어도 그림을 읽을 수 있는 독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독법이 또한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오랜 시간 수많은 그림과
마주하며 역사적·인문적 지식이 투사되면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한학자(漢學者) 정민 교수의 『한시미학산책(漢詩美學散策)』을 읽고 또 한 번 독법의 중요성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아포리즘이 얼마나 중요한 금언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나를 위시하여 인간은 참 무지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무지함을 가지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제대로 된 통찰력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으며, 또한 이 세상에 대한 해석과 통찰이 얼마나 지난한 것인지를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런 일련의 과정이 결국 저에게 안다는 것의 의미와 그 본질에 대해 천착하도록 인도하여 주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의 왜곡된 지식과 무지를 알았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석학(碩學)이라도 그가 아는 지식은 인간이 오랫동안 축적해온 지식의 대하(大河)에 한 동이의 물을 붓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프린키피아(Principia)』를 지어 물리학에 대한 혁명적 관점을 세상에 알려준 아이작 뉴턴조차도 자신을 지식의 큰 바다에 갓 눈을 뜬 작은 소년으로 비유했습니다.
“나는 내가 세상에 무엇을 드러내 보일지도 모르지만 내 자신에 대해서는 안다. 나는 거대한 진리의 바다가 내 앞에서 발견되지 않는 채 있는데도, 해안에서 예쁜 조개껍질을 찾는 데 정신을 빼앗긴 작은 소년에 불과하다.”
안다는 것, 곧 지식은 사람마다 편차가 크기도 하거니와 전공하는 분야에 따라 다양한 지식이 실재하므로 지식의 스펙트럼은 넓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는 그런 편차를 포괄하는,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자유민주주의라는 공화국사회에서 갖추어야 할 교양에 대한 것을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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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제가 거대 담론만을 논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내면의 모든 것이 국가와 역사라는 거대 담론에 종속되어있는 것이 아닐지라도, 우리 일상의 많은 부분이 그 파도에 휩쓸리게 됩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거대 담론은 사실 미시 담론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면 우리의 삶이 지속되는 한 우리는 지켜야 할 가치와 양도할 수 없는 삶의 권리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 공동체는 많은 희생과 고난이 있었지마는, 자유민주주의와 공화제라는 정치제도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개념들은 인류가 살아오면서 오랜 시간 이 세상을 해석하고 통찰한 지식이 누적되면서 획득하게 된 가치들입니다. 하나의 개념은 그 개념에 딸린 속성들의 요약입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라는 개념에는 자본주의가 형성되고 발전하고 변형되어 온 과정, 정치제도로서 가지는 여러 가지 특성들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념을 이해한다는 것은 사전적(辭典的) 의미를 넘어 깊고 포괄적인 지식이 필요하게 됩니다. 특히 학문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분야에 따른 전문지식을 포괄한 개념이 없으면 한 줄의 글도 쓰기 어려울 만치 우리의 교양 수준은 높아졌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개념들은 그것이 정치적 개념이나 종교적 개념이든 과학적 개념들은 주로 학교라는 물리적 공간에서 학습한 것들이 많습니다.
저는 그런 학교에서 배운, 우리 현실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그 많은 개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라는 의문을 가진 적이 문득문득 떠올랐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학교에서 배운 지식이나 개념들은 거의 암기식의 수준이어서 그 뜻의 깊이를 몰랐던 게 대부분이었습니다. 그 후 성인이 되어서 나도 모르는 지적 호기심에 끌려 책을 좀 뒤져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독서량이 되자 개념의 실체들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속된 말로 주제 파악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한 권의 책, 아니 한 줄의 문장이 우리의 삶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도 독서를 통해 늦게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이를테면 다음의 문장은 세상을 보는 식견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치가 아닌 것은 이치를 이기지 못한다. 이치는 법도에 이기지 못한다. 법도도 당대의 권력에 이기지 못한다. 권력은 하늘의 도(道)에 이기지 못한다.”
그리고 좀 더 성숙한 후에 위대한 역사가 태사령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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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를 읽고, 또 그가 친구 임안(任安)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으며 역사가의 자세를 보기도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습니다. 하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습니다. 죽음을 사용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중국은 궤도이탈을 하고 있지만 한때 중국의 고전은 지혜의 보고(寶庫)였습니다. 지금은 그 패물함에 자물쇠를 채워 놓았을 뿐만 아니라 시진핑 치하의 중국이 자기들의 고전의 가치를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단어는 자연이 아닙니다.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창작된 것입니다. 저에게는 단어가 창작되었다는 인식이 참으로 소중했습니다. 거의 모든 단어를 당연하게 생각했던 나의 지적 게으름을 부끄럽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사용한 단어들을 아무 의심 없이 자명한 것으로 생각해 왔던 것입니다.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던 기원전 로마의 키케로는 후마니타스(humanitas)라는 라틴어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영어권으로 건너가 인문학(humanities)의 어원이 된 바로 그 단어입니다. 지금은 인문학이라는 말은 학문의 다양화로 그 뜻이 얼마나 풍성해졌는지 모릅니다.
작가들이 만든 단어들이 중에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단어가 있는가 하면, 세월과 함께 사라지는 단어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유전자가 생명을 얻듯이, 문화적 유전자인 밈(meme)이 그 시대에 얼마나 공감을 얻느냐에 따른 것입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새로운 단어들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단어들은 그 시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특히 요즈음의 AI (인공지능) 시대에는 컴퓨터 용어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성행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밈의 방향에 따라 그 신조어들은 생성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의 한계는 곧 내가 아는 세상의 한계이다.”라고 말한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섬광처럼 번쩍이는 글입니다. 어휘력이 빈약하면 사고력이 빈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휘는 ‘어떤 특정한 범위 내에서 사용되는 낱말의 총집합’을 뜻합니다.
그리고 한 문장에는 하나의 세계가 조립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 권의 책, 아니 한 줄의 글이 우리 삶의 사고방식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영어에서 ‘멍청이(idiot)’라는 단어는 ‘공적인 일에 관심이 없는 자’라는 헬라어(그리스어) ‘이디오테스(idiotes)’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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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인들, 특히 아테네 시민들이 공동체의 참여를 얼마나 중시했는지 idiotes라는 단어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핵심은 그 시대의 정치가 페리클레스의 웅변 속에서도 녹아 있습니다. “이곳 아테네에서는 정치에 무관심한 시민을 조용함을 즐기는 자로 여기지 않고, 시민으로서 무의미한 인간으로 간주한다,”
아테네가 헬라스 문명의 정점에 있을 때는 라티움 지방의 로마는 조그만 마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헬라스 문명이 도시국가의 패권 싸움인 27년에 걸친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몰락하기 시작하자 로마가 지중해의 강자로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로마가 아테네를 정복하였지만, 로마가 헬라스 문명을 존중했던 것은 당시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시에서도 나타납니다. “정복된 헬라스는 야만인 정복자를 사로잡아 그 예술을 시골뜨기 라티움에 인도했다.” 처음으로 그리스 땅을 정복한 로마 장군은 마치 어려운 친척을 찾아온 손님처럼 굴었다고 합니다.
뒷날의 카이사르도 헬라스 문명의 성숙한 가치를 알았으며 아테네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한 뒤 안타까운 마음으로 “너희들이 조상들 덕분에 관대한 처분을 받은 것이 도대체 몇 번이나 될까.”라고 토로한 적도 있습니다.
로마는 그리스를 정복했지만, 그리스는 로마의 정신을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리스 문명은 서구세계뿐만 아니라 동양문명에도 그 정신적 영향력을 지속해서 방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정신적 힘의 방사는 물리적 공간뿐만 아니라 시대를 뛰어 너머 시간의 방사에도 작용합니다.
그리고 2천 년을 뛰어넘어 아메리카 남북전쟁의 게티즈버그의 짧은 연설에서도 나타납니다. 남북전쟁 당시 미국에는 400만 명의 흑인 노예가 있었다고 합니다. 400만 명이라는 숫자는, 저의 역사의식으로 볼 때 충분히 역사의 동력이 될 수 있는 숫자입니다. 그리하여 노예를 해방 시키고자 하는 열망이 불타올라 민주주의로 확장되는 모습을 이 연설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87년 전 우리 조상들은 이 대륙에 자유로 잉태되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명제에 헌신한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켰습니다.…중략… 이 나라가 하나님의 아래에서 새로운 자유의 탄생을 가질 것이며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는 결코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1865년 3월 15일 2차 취임 연설에서도 그 전쟁은 공정했으며 신성할 정도로 정의로웠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정치적 자유와 가치에 대해 아테네가 보여준 웅변 이후 인간의 존엄에 대한 신성한 가치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 연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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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미국 노예제도가 신의 예정된 시간 속에서 계속되며
신의 섭리하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죄 중의 하나라
면 신은 이제 그것을 없애려고 한다. 신은 남부와 북부에 끔
찍한 전쟁을 고통으로 가져왔다. 신이 생존해 있다고 믿고있
는 우리가 그에게 있다고 여겨지는 신성으로부터 이탈했다고
할 만한 것이 있는가? 우리는 너무나도 열렬히 이 끔찍한 전
쟁의 응징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고 기도 했다. 그러나 만약
신이 그것이 계속되기를 원한다면 노예들이 250년 동안 보답
받지 못했던 고통으로 쌓아 올린 이 모든 부(富)가 무너질 때
까지, 그리고 채찍 때문에 피를 흘린 사람이 이번엔 칼로 다
른 사람의 피를 부를 때까지 계속되기를 원한다면 3천 년 전
에 말했듯이 지금도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신의 판단은 언제나 진실되고 올바르다.” ★
이러한 역사는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만들어지는 데에, 수많은 사람이 오랜 세월에서 터득한 지적인 사고의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며, 현재 미국이 도달한 민주주의 가치가 지식이 지성으로 전환되는 과정과 함께 세계시민의 선도국가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지식이 통합의 과정을 거쳐 개념화와 지성이 되는 모습을 여러 책에서 보아 왔습니다만 특히 찰스 반 도렌의 저서 『지식의 역사』는 전체를 개괄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던 걸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지식의 습득을 이야기할 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유명한 Encyclopedia Britannica는 1768년에 편집하여
1771년에 완간했는데 판을 거듭할수록 지식의 진보와 함께 그 물량은 말 그대로 모든 지식을 망라하게 되었습니다. 9판에서는 70명의 미국학자와 유럽의 60명의 학자들을 포함한 무려 1,100명의 학자가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지식의 역사』를 쓴 찰스 반 도렌 또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편집장이었으며 문학과 수학에 학위를 가지고 있으며 역사학 분야에서도 많은 책을 편집한 영국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야마모토 다카마쓰가 지은 『그 많은 개념어는 누가 만들었을까』와 남경태 작가의 『개념어 사전』, 아서 골드버그의 『이즘과 올로지』, 과학기술 자문위원으로 수많은 번역서와 칼럼을 쓴 이인식의 『미래교양 사전』등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독법, 말하자면 ‘아는 만큼 보인다.’는 뜻을 실감 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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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주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유럽이 계몽시대와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이후 서구의 학문이 문·사·철(文·史·哲)같은 인문학에서 자연과학 학문으로 방향을 틀면서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지식의 양(量)과 질(質)이 폭발적으로 발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지식의 짧은 역사가 어떤 과정을 통하여 동아시아 문명권에 이식(移植)되었을까요? 여기서 간략하나마 짚어보고 넘어갈까 합니다.
뉴턴의 『프린키피아』가 유럽의 지성에 충격을 준 이후, 이어서 근대 지리학의 기초를 연 탐험가 알렉산더 폰 훔볼트가 남아메리카를 종단한 후 『코스모스』를 출간하며 자연사 탐험이 시작됩니다. 철학자 칸트와 라플라스가 내놓은 『칸트-라플라스 이론』은 우주의 먼지와 가스가 모여 우리 태양계가 생겨났다는 가설을 내놓았습니다.
그 후 훔볼트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찰스 다윈이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을 발표하며 생물학과 지질학의 밀접한 관계와 더 나아가 지질학 시대의 고생물학까지 학문의 범위를 확대해나갔습니다.
18~9세기를 통하여 우리 문명의 수레바퀴에 큰 힘을 실어준 기술적 발명들이 있었습니다. 증기엔진이 만들어 내는 에너지와 전기의 생산은 우리의 삶을 자연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는 유용한 기술이었으나, 반면에 전쟁 기술에서 나타난 맥심 기관총은 인간의 야만성을 통제할 수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만들었습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통찰은 옳았습니다.
결국 인간은 모든 것을 얻기 위하여 악마(메피스토펠레스)와 내기를 거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파우스트』에서 괴테가 묻고 있는 것은 “인간은 그 내기를 감당할만한 도덕적 힘이 있는가.”였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서자 인간의 운명은 더욱 파우스트 적인 것이 되고 있었습니다. 상징적으로 20세기 과학의 선도는 물리학자들에게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가장 상징적인 존재였으며 뒤를 이어 플랑크, 슈뢰딩거, 보어, 하이젠베르크, 페르미 등은 우주의 비밀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20세기 초에 물리학과 더불어 알프레드 베게너는 현재의 지구의 판구조론의 토대가 되는 ‘대륙이동설’을 주장하는 『대륙과 해양의 기원』이라는 소책자를 내놓았으며, 이러한 지구과학은 결국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Gaia)』라는 가설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가이아 이론’은 결국 지구상의 물리학적, 생물학적 과정은 분리할 수 없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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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태학적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식의 발전은 주로 유럽 문명이 산업혁명과 과학혁명을 거치면서 전폭적으로 늘어나, 이것을 한국을 포함 일본 중국과 같은 한문(漢文)을 지식의 토대로 삼고 있는 동아시아권 지식인들이 새로운 용어들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저로서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노력의 중심에는 서양문명과 학문을 받아들인 메이지(明治) 시대의 엘리트들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니시 아마네(西周,1829∼1897)라는 정치가이자 계몽사상가인 걸출한 지식인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지식과 개념의 정리는 한문에 대한 문해력과도 연관되므로 당시 일본의 교양이 우리보다 훨씬 앞서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국력과도 관계가 있다고 보아야 하며, 일례로 당시 서울(漢陽)의 인구가 20만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에도(江戶, 지금의 도쿄)는 100만의 인구가 있는 대도시였으며, 유서 깊은 교토와 오사카의 인구도 각각 40만을 넘어서 있었습니다.
이러한 인구의 규모는 필시 시장과 교역의 규모가 우리와는 비견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있습니다. 시장과 교역의 규모가 크다는 것은 물자를 생산할 수 있는 농업뿐만 아니라 생필품과 관련된 공업의 규모도 달랐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에 따른 기술의 격차는 물론이거니와 그들이 얼마나 시장을 실용적으로 운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근한 예로 우리가 한낱 옹기장이로 하대하던 도공(陶工)을 그들은 도예가(陶藝家)로 숭배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들이 임진왜란 때 데리고 갔던 이삼평을 도조(陶祖)로 숭상하며 사후(死後)에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아리타에 신사(神社)까지 만들어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지식과 개념에 대한 자세가 우리와 달리 실용적이었으며 한국에서 사용하는 수많은 개념이 온전한 조선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과 충무공의 『난중일기(亂中日記)』는 오랫동안 조선에서는 잊혀졌지만 에도막부에서는 그것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으며, 특히 일제 강점기의 해군 고위층들은 매년 통영에 있는 충무공의 사당을 참배해왔다는 사실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지식을 사전(事典)으로 만드는 것은 지식을 공유하며 소통하기 위한 것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곧 문명의 수준과 국가의 품격을 말해주는 바로미터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백과사전으로 부릅니다만 메이지 초기 니시 아마네는 Encyclopedia를 백학연환(百學連環)으로 번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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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서양학문의 번역과 근대’를 전부 조망하려면 평생이 걸려도 다 못하겠지만 적어도 백학연환 같은 사전이 어떤 배경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를 안다면 특정 학술용어나 학문 분야를 지칭하는 말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퍼즐게임을 하듯이 조각 그림들을 맞추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동양의 지식이 서양의 지식과 만나는 이러한 지점을 저는 문명과 문명의 조우(遭遇, encounter)라고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로부터 들어왔습니다만 18~9세기에 이루어졌던 서구와 일본의 만남은 그 후 세계의 역사를 이해하고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습니다.
에도 막부 말기에는 일본에서도 근대화된 서양 문물에 대한 열망이 간절하여 1863년 니시 아마네와 쓰다 마미치 같은 젊은 학도들 9명은 네델란드 까지 그 멀고 먼 뱃길을 타고 갔던 것입니다.
이 문명과 문명의 조우(遭遇)는 단지 교역과 외교에 대한 분야뿐만 아니라 사상과 학문에 대한 조우로서의 의미가 더 깊으며, 그때 젊은 학도들의 열정이 동아시아를 넘어 나중에는 세계역사에도 심대한 일격을 가했다는 점을 반추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니시 아마네가 직접 쓴 『자전초고(自傳草稿)』에는 유소년기부터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그가 익힌 서구학문에 대한 편력을 서술하고 있음을 보게 되지만, 바로 이것이 메이지 유신을 가능케 한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기록한 학문에 대한 명명(命名)은 아직도 한국과 중국의 교육에 유효하며 대학교육의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Academic을 학술(學術)로 번역하며 Arts와 Science의 의미를 포함하고, 실제(實際, Practice)와 이론(理論, Theory),
기초과학(基礎科學, Pure Science), 적용과학(Applied Science), 기술(技術, Mechanical Art), 예술(藝術, Liberal Art), 문장(文章, Literature)등에는 그가 고심하여 서양의 학문을 분류한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들의 학문적 성취는 노벨상 수상자가 29명이라는 사실로도 입증되었습니다.
우리의 반일감정(反日感情)을 일부러 건드릴 생각은 없지만, 유익하지도 않은 그런 죽창가를 불러대기 전에 먼저 실력을 길러야 하지 않을까요. 그들 소위 민족주의 진보주의자들이 걸핏하면 앞세우는 인물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입니다만, 사실 어떤 전쟁에 임하던 장군은 병법의 선승구전(先勝求戰)을 생각했던 전략가입니다.
지휘자가 승리에 확신이 없으면 결국 부하 장수들을 잃을 뿐입니다. 그는 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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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 없이 부하 장수들을 전쟁터에 끌어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많은 희생없이 23전 23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치밀한 전략과 부하 장수를 아끼는 헌신적인 자세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즈음의 위선적 진보 지식인이 불러대는 죽창가와는 결이 다른 것이지요. 충무공을 위선적인 지식인이 악용하는 것이 가증스러울 뿐입니다.
오래 살려면 유해(有害)한 인간을 멀리하라고 합니다. 우리 정치계에는 유해한 인간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좀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요즈음 전문가이든, 일반인이든 최근에 관심을 가장 많이 받는 분야가 자연환경과 관련된 생태계의 의미와 챗 GPT라는 생성형 인공지능일 것입니다. 그것
은 에너지 자원을 얻기 위하여 화석연료를 무분별하게 사용한 것과 식량자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숲을 벌목하여 대규모 축산농장을 만들어온 것에도 관계가 깊은 것으로, 인간의 과도한 욕망을 자제할 국제적인 공조가 필요한 것이 되었습니다. 챗 GPT라는 생성형 인공지능은 CF 영화에나 보았던 것처럼 점점 현실화 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언제 인간의 능력을 추월할지 모를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둘 다 인간의 생존과 직결된 개념이 되었습니다.
생태학(Ecology)이란 용어는, 다윈을 존경하던 독일 생물학자 에른스트 헤켈이
다윈과 깊은 학문적 서신을 많이 주고받으면서 만들어진 헤켈의 이론에서 나온 말입니다. 여러 생물이 각 개체뿐만 아니라 그 생물이 주위에 있는 다른 생물이나 자연환경과 맺는 모든 관계를 검토하면서 포괄적으로 생각한 말이었습니다. 에콜로지 라는 밈이 유명해지다 보니 요사이는 자연 친화적인 화장품이나 공산품에도 수식어로 붙여 놓기도 하며, 심지어는 호텔 이름 앞에도 에콜로지를 부쳐 넣기도 합니다.
그 에콜로지는 자연환경 문제가 세계적인 이슈가 되면서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가설과 라이알 왓슨의 『생명 조류(Life Tide)』라는 책이 나왔으며, 사회학에서도 환경사회학(Environmental Sociology)이라는 학문이 분과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많은 분야를 제가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거니와 전문적 지식도 부족하므로 관심 있는 분은 야마모도 다카마쓰가 쓴 『그 많은 개념어는 누가 만들었을까.』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머릿속에 다 있다고 모두 자기 지식이 될 수는 없습니다.
글을 써본 사람이라면 머릿속에 있는 글은 새도우 복싱(Shadow Boxing) 같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글로 써보아야 자기 생각이 육화되며 실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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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납니다. 특히 심오한 지식이나 개념은 글로 써보아야만 확실한 실체를 알게 되며 주제 파악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써진 글은 피드백 작용으로 다른 사고와 네트워킹을 하며 심화 확장됩니다. 그의 사고가 더욱 풍성해진다는 뜻이 됩니다.
이러한 지식과 개념의 관계는 칸트는 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내용 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지식 없는 지성은 공허한 사유의 유희에 지나지 않으며, 지성 없는 지식은 한갓 박식일 뿐이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칸트를 존경했던 아인슈타인도 과학과 종교에 대해 이와 비슷한 운율로 이야기한 적도 있습니다.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이며, 과학 없는 종교는 맹인
이나 다름없다.”
이것은 인문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주제가 선명한 책은 각론과 총론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이론에는 각론이 있으며, 그리고 그 이론은 하나의 총론이 되는 개념으로 자연스럽게 수렴됩니다.
그래서 각론 없는 총론은 한갓 사유의 유희에 지나지 않으며, 총론 없는 각론은 정돈되지 못한 지식의 파편에 머물게 됩니다. 이러한 지성의 편력은 2차대전 때 레지스탕스로 참여했다가 처형당한 아날학파 역사가인 마르크 블로흐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에른스트 헤켈이 생태학이란 용어를 만들었습니다만 정작 자연의 균형이란 문제는 그 후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라는 책에서 세계적인 이슈가 되었습니다. 이미 자연환경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생태학의 고전이 된 이 책은 결국 미국 의회가 국가정책환경법안을 통과시키도록 했으며, UN에서는 매년 4월 22일을 지구의 날로 기념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레이첼 카슨은 작가가 되고 싶어 했던 아주 여린 여학생이었지만 채텀대학에서 공부하던 중 생물학으로 전공을 바꾸면서 자연생태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책 서문은 영국의 유명한 과학 명문 가문인 헉슬리의 손자인 줄리안 헉슬리가 썼으며 앨버트 슈바이처 박사를 기리며 그의 말로 헌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미래를 예견하고 그 미래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 지구를 파괴함으로써 그 자신도 멸망할 것이다.”
무서운 경고의 말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도 인간의 도덕적인 힘에 대한 파우스트적 성찰을 반추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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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레이첼 카슨의 또 다른 저서 『우리 주변의 바다』와 함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어 결국 비폭력 평화단체인 그린피스(GREEN PEACE)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린 학생 때부터 환경운동을 해오며 세계적으로 뉴스의 초점이 된 바 있는 스웨덴의 그레타 툰베리도 아마 레이첼 카슨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산업화와 중화학공업으로 한창 압축성장을 하고 있던 때에 직장 생활을 하든 우리 세대는 사실 자연환경에 대한 인식이 그렇게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 때에 미국에서 환경공학을 공부한 친구가 한국의 모 엔지니어링 회사에 근무하게 되어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라 우리는 격의 없이 술자리를 하게 되었는데, 전공이 환경공학이라 가끔 환경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문제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주(州)의 환경청장까지 지낸 친구의 말이라 문외한인 저는 주로 듣는 편이었지만 자연의 복원력에 대해서는 저도 한마디 말을 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살충제와 화학비료가 땅을 황폐시키고 원자력 폐기물이 바다에 버려져도 자연의 복원력은 워낙 강해서 극복될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는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자연은 아무리 갈퀴로 내던져도 언제나 다시 돌아온다.”
그때 내 친구는 그런 시구까지 알고 있는 것에 놀라는 듯했지만, 돌아온 대답이 이러했습니다. “But, It’s too late.” 말 그대로 너무 늦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폐해가 어디까지 침투하는지를 소상하게 이야기해주던 생각이 납니다. 말 그대로 침묵의 봄은, 봄이 다시 못 올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그 후, 그 친구의 말대로 지구환경은 급속도로 나빠져 세계는 파리 기후협약과 탄소중립에서 보는 바와 같이 더 이상 자연환경을 간과할 수 없는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생태계와 더불어 앞으로 생성형 인공지능이 인류의 생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도둑같이 찾아온 생성형 인공지능을 알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호모사피엔스가 도달한 진화의 지점이 어디쯤의 좌표에 있는지를 알아야 인간과 인공지능에 대한 혜안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인간을 생물학적으로 규정짓는 것은 인간은 영장목(目)이며, 인과(人科)의 호모속(屬)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그 호모속에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 그리고 데니소바인이 종(種)으로 존재한 것으로 분류학자들이 구별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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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은 멸종하고 사피엔스 종(種)만 살아남았습니다. DNA 분석 결과 우리는 네안데르탈인과 짝짓기를 한 것으로 밝혀져 인간의 품격에 손상이 간 것으로 알고 있지만, 자연선택의 메커니즘은 모든 생물에 똑같이 적용되는 것으로 겸허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 자연의 정직함은 우리의 시장의 메커니즘과도 닮은 꼴이지만, 그나마 우리 종만 살아남은 결정적인 요인은 두뇌의 용적이 평균 1,350㏄라는 것과 공동체를 조직할 수 있는 능력으로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뇌를 해부해 본다면 모양은 흡사 호두껍질을 까면 나타나는 호두알갱이 같은 모습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사피엔스가 이렇게 1.5㎏밖에 불과한 두뇌에 1,000억 개의 뉴런을 가지고, 성장하면서 100조 개의 시냅스로 연결해가는 과정을 가장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 우리 뇌는 두부 모양이나 푸딩 같은 모습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한 뇌가 우리의 학습효과에 따라 뉴런은 시냅스를 가지고 네트워크화를 하게 됩니다. 그러한 프로세서가 우리 DNA에 다 새겨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DNA는 사실 청사진 같은 복제가 아니라 하나의 지침서라고 보아야 합니다. 지침서에 따르다 보니 같은 형제간이라도 얼굴이 다르게 나타나며, 일란성 쌍둥이라도 재능은 다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이러한 뇌의 능력은 우리의 공동체 생활과 공진화하며 달성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도 몇십 명에 이르는 군집 생활로 수렵과 불을 사용하고 매장풍습도 있었으나 공동체라고 할만한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피엔스는 150명 이상의 공동체를 만들어 대규모의 수렵과 구석기(舊石器) 암각화에 나타난 것처럼 고래사냥도 한 것으로 보아 군장사회로 진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히브리 대학의 매크로 역사가 유발 하라리는 그 수(數)를 ‘던바의 수’라고 했습니다. 인류학자 로빈 던바가 밝혀낸 추정치이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사피엔스의 특징으로 삼는 것은 인간이 직립함으로써 여성의 골반이 작아져 산도(産道)가 좁아졌다는 것, 자유롭게 된 두 손이 도구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언어(言語)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점 등이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기능은 뇌의 용적과 공동체의 조직에 따라 같이 수반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뇌의 용적과 직립은 인간 여성의 출산 문제를 어렵게 만들어 많은 고통이 따랐습니다. 영장류 중에 신생아 사망률이 가장 높고, 산고(産苦)는 죽음으로 몰고 갈 정도로 위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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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佛家)에서는 “산고는 여인의 업보이거늘…”이라고 말하지만. 저는 여성의 업보가 무엇인지를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여성의 산도가 좁아진 것과
신생아의 뇌가 일반 성인 뇌 용적의 25% 정도로 태어나는 것은 진화의 인과관계가 만들어 낸 것이라고 봅니다.
태어날 때 350g에 지나지 않는 뇌가 생후 1년이 되면 1,000g으로 성장합니다.
이렇게 몇 년 동안 신생아의 뇌는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뉴런과 뉴런 사이에 있는 시냅스가 부모와의 교감을 통하여 늘어나게 됩니다. 뇌과학 도표에는 생후 2년 동안 뇌는 집중적인 네트워크화를 통하여 4배로 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 배운 것이 평생을 간다는 말도 나왔을 것입니다.
시냅스가 이렇게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이유는 부모와의 교감, 형제간의 친밀도, 더욱 넓게 친척과 이웃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학교에서 선생님과 친구로부터 얻는 지식이 생존과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아이들의 왕성한 호기심은 이 세상의 지식이 자신의 생존에 필요하다는 것을 타인에게 보내는 신호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적응력은 다른 영장류 에게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인간은 교육을 통하여 문명을 창조하고 생존율을 높일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이러한 특징은, 결국 인간의 존재를 정의하는 데 있어서 본성이 중요한가 아니면 양육이 중요한 것인가를 제기하게 됩니다. 이 정의가 주요한 이유는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는 데에 있어서 법과 정치를 비롯하여 모든 학문과 예술적 능력을 검증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식생활에서 얻는 에너지의 20%를 뇌에 투자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뇌는 다른 어느 기관보다도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뇌에 가장 중요한 영양소는 철분과 아연이라고 합니다. 이 성분이 부족하면 아이는 저능아가 될 확률이 높으며, 자립할 수 있는 성인으로 성장하지 못합니다.
원시 수렵민족은 그 영양소의 대부분을 동물성 단백질과 피에서 획득합니다.
그래서 여성들이 자신의 짝짓기의 대상은 사냥을 잘하는 힘과 기술을 가진 남자들이라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여성은 어떻게 그런 지혜에 도달했을까요?
『지나 사피엔스』의 저자 레너드 슐레인은 오늘날 남성을 그렇게 여성에게 봉사하도록 만든 것은 여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모사피엔스의 학명을 지나사피엔스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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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재산은 여성의 정절에 달려 있다.”새뮤얼 존슨의 말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만졌던 무화과 잎사귀 중에서, 가격표로 변하지 않는 것은 하
나도 없었어.” 솔 벨로의 말입니다.
그리고 현대의 적령기의 모든 남녀에게 해당되는 말이 있습니다.
“데이트에는 오락, 음식, 애정행각 등 세 부문이 있는데, 한 번에 최소한 두 가지는 제공되어야 한다. 처음에는 다량의 오락과 적당량의 음식 그리고 순수한 애정행각의 암시로 데이트가 시작되는 것이 통례적이다. 애정행각의 비중이 증가하면, 그에 비례해서 오락이 감소 될 수 있다. 애정행각 자체가 오락이 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더 이상 데이트라고 부르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고기가 딸린 음식이 빠질 수 없다.” (워싱턴 포스트 칼럼니스트 주디스 마틴)
이와 같은 촌철살인의 말은 이 세계는 우리도 모르는 가운데 여성이 주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1,000억 개의 뉴런과 100조 개의 시냅스를 유지하기 위해서 대규모의 수렵이 행해졌습니다. 매머드가 멸종한 시기는 결국 호모사피엔스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시기와 맞물려 있습니다.
지질학자들은 지구상에서 생명이 멸종된 시대에 따라 지질학 연대를 결정합니다. 소(小) 멸종 시대도 있지만, 대(大) 멸종 시대는 생태계를 바꾸어 놓을 정도에까지 이르는 아주 큰 규모의 멸종을 말하며 대표적인 것이 페름기 멸종과 백악기 멸종이 있습니다.
다윈의 위대한 추론은, ‘대 멸종의 시대가 지나면 좀 더 고등한 생물이 등장한다’고 자연의 생존력에 감탄한 바도 있습니다. 6,500만 년 전 백악기 말 소행성 충돌로 중생대의 공룡시대가 끝나고 지금은 포유류가 번성하는 지구의 신생대 홀로세 시대라고 일컫습니다만, 현재 지구의 기후환경과 멸종되는 동물이 많이 나타나는 현상을 보고 20세기부터 ‘인류세’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아직 학명으로 결정되지는 않았지만, 조만간 기후학자나 지질학자들이 모여 우리 시대의 지질학 학명을 결정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인류세는 생성형 인공지능도 당연히 포괄할 것입니다. 왜냐면 인공지능도 인간에게서 진화하고 분기한 생명 나무의 하나의 가지이니까요.
본성과 양육의 문제는 결국 인간사고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인지능력이 선험적(先驗的)인 것이냐 아니면 경험에 의한 것이냐.’라는 문제와 직결됩니다. 왜냐면 인간은 바로 이 능력에 의해 다른 동물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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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우리는 서양철학의 두 갈래인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과 영국의 철학자이며 계몽사상가인 존 로크의 경험론이라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산업혁명과 계몽시대를 거치면서 유럽이 세계의 지적 발전을 선도하며 영국의 경험론과 독일의 선험론은 지식을 습득하는 인간 인식의 본질을 두고 치열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 논쟁은 20세기 들어서도 과학적인 검증이 계속되었습니다.
영국에서 주로 발달한 경험론은 인간은 백지(白紙)상태로 태어나며 빈 서판(blank slate)과 같다고 할 때, 여기서 말하는 빈 서판은 라틴어 타불라 라사(tabula rasa)에서 유래된 것이며 깨끗한 석판을 의미합니다.
그 빈 서판이 어떻게 이성과 지식의 모든 재료를 갖게 되는가?
한마디로 그것은 ‘경험으로부터’ 획득된다는 것입니다. 이 백지 이론에 따르면
“먼저 감각을 통해 들어오지 않는 것은 결코 정신에 존재할 수 없다.”
사실 이 말은 철학자 존 로크보다 400년 앞서 살았던 중세의 위대한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한 말이며, 이와 같은 생각은 고대 그리스의 경험론자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론의 대표적인 철학자를 영국의 존 로크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근대를 만든 계몽주의 사상가이며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는 인간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인 인권이 미국을 건설한 건국 아버지들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철학이 1766년 토마스 패인의 『Common Sense』라는 저서와 제퍼슨의 『독립 선언서』로 나타났습니다. ‘상식(코먼센스)’은 미국 대중들의 독립이라는 국가건설에 대한 열망에 불을 지폈으며 그것이 결국 제퍼슨의 ‘독립 선언서’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백지상태이며 감각에 의해 받아들인 지식이 축적되어 이 세계를 인식하고 포용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철학자 버클리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라는 극단적인 경험론을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백지상태라는 이론은 인간을 규정하는 본성과 양육이라는 대칭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정치철학자 윌리엄 고드윈은 “어린이는 우리 손에 주어진 원료와 같고, 어린이의 마음은 흰 종이와 같다.”고 했으며 좀 더 불길한 예를 들면, 중국 공산당(共産黨)을 창당한 마오쩌둥(毛澤東)은 “가장 아름다운 시(詩)는 백지 위에 기록된다.”라고 하며 급진적인 사회 개혁인 공산혁명을 정당화했습니다.
어린이를 위해 ‘디즈니랜드’를 창설한 월트 디즈니는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순수한 의도로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나는 어린이의 마음이 하얀 책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몇 년 동안 많은 것이 그 책에 기록된다. 그 내용이 그의 삶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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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양육, 곧 교육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가?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 명제에 대하여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하여 알게 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다윈의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이라는 이론에 충격을 받은 이후, 그리고 그를 존경하고 그이 후학이 되었던 많은 생물학자의 책을 통해서였습니다.
예를 들면 ‘다윈의 불독’ 이라고 불리며 다윈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토마스 H 헉슬리를 비롯하여 알렉스 해밀턴의 ‘친족 이론’, 에른스트 마이어, J B 홀데인, 리챠드 도킨스, 스티븐 J 굴드, 제레드 다이아몬드, 에드워드 윌슨 등 세계적인 석학들의 저서가 있었습니다.
그의 진화론은 생물학자뿐만 아니라 인류학자, 분류학자, 분자생물학자, 정신을 연구하는 심리학자, 언어학자, 전산 정보학자, 심지어는 범죄를 수사하는 법의학의 분야까지 확장되었습니다.
“경험에서 인식이 나올 수 있다.”란 경험론의 철학에 의문을 품었던 이마누엘 칸트는 그의 저서 『순수이성비판』(1871)에서 그런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양 자간의 화해를 위한 시도를 했습니다.
“오성(悟性)은 아무것도 직관할 수 없으며, 감각은 아무것도 사유할 수 없다. 이 둘의 결합에 의해서만 인식이 생겨날 수 있다.” 제가 이해한 바로는 그것은 결국 지식과 지성의 문제였으며 각론과 총론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칸트는 이와같이 타고난 지식을 선험적(先驗的)이라 하여 ‘a priori’(아 프리오리)라고 말했습니다. 반면 획득된 지식은 후험적(後驗的)이라 하여 ‘a posteriori’라고 이론을 정리했습니다.
그것은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극단적으로 몰고 가면 우생론(優生論)이라는 생물학적 결정론자가 되어, 예를 들면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같은 600만 명의 유대인 학살이라는 비극을 초래했습니다.
또한 문화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양육과 교육을 절대적 가치로 몰고 가면 사람은 언제든지 진흙과 같이 마음대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인간개조론’이라는 혁명적인 사고에 이르기도 합니다.
칸트는 ‘우리의 인식능력과 자연의 합치’에 대해 경탄하며 우리의 오성에 대하여 찬탄했지만 이에 대한 설명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에 대한 설명에 한몫한 것은 다윈의 생물학이었습니다.
다윈은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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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은 “우리의 필연적 이데아(기초적 관념)는 영혼의 선존재(先存在)에서 생겨나며 경험에 의해 표출된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원숭이의 선존재가 있는지 관찰해보자.」
언젠가 김훈의 산문집에서도 저와 같은 사고에 도달한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다윈은 아직도 관찰 중이고, 진화론은 지금도 진화 중이다”
다윈의 자서전에는 다음과 같은 글도 있어 가늠할 수 없는 장엄한 자연 앞에 선 인간의 실존에 대해 왜소함을 느낀 적도 있었습니다.
“유기체의 가변성과 자연선택의 작용방식을 보건대, 생명은 바람이 부는 방향대로 움직일 뿐이다. 생명에는 더 이상 합목적성이 없어 보인다.”
어떻게 보면 노장사상(老莊思想)의 무위(無爲)와 같이 보이기도 하고,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와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인지능력, 사고, 말하기의 자연사적(自然史的) 성립과정을 재구성하는 진화론적 관점이 개입된다면 인간의 정신과 지성은 진화의 산물이며, 원칙적으로는 코끼리의 코나 꿀벌의 춤과 똑같은 방식으로 발전하였을 것입니다.
아이가 사고에 이르는 과정을 관찰하는 것은 이러한 연구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며, 아이들의 지칠 줄 모르는 왕성한 호기심이 여전히 경이롭다면 그와 같은 과정을 컴퓨터로 재구성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인간과 지금보다 더 유사한 인공지능을 만들어 낼수록 인간의 지성에 대해서도 그만큼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런 예견이 2016년 알파고(AlphaGo)의 등장으로 우리 눈으로 실제로 보게 되었습니다.
바둑판은 가로세로 열아홉 줄이 그려져 있어 바둑기사들은 검은 돌과 흰 돌로 나누어 집을 많이 차지하는 게임으로 경우의 수가 무한대로 생각되어 신(神)의 영역이라고도 말합니다. 세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알파고와 우리나라 최고 명인 이세돌이 게임을 벌였으나 4승 1패로 알파고가 승리하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놀라움과 충격으로 인공지능의 학습능력이 인간의 학습능력 보다 월등한 것을 보고 인간의 설 자리가 어디인지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곧 딥러닝(deep learning)으로 불리는 인공지능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는지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알파고의 소비전력은 170㎾이지만 이세돌은 비교할 수 없이 적은 에너지를 사용했습니다.
성인의 뇌가 사용하는 에너지는 0.02㎾라고 알려져 있으므로 알파고가 바둑을 두려면 무려 85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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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 에너지는 인공지능과 로봇의 미래를 전망하는 중요한 관점입니다.
인류가 만든 어떠한 컴퓨터도 아직 인간의 뇌처럼 적은 에너지로 작동하지 못합니다. 1.5㎏에 불과한 인간의 두뇌는 사물의 인식과 논리적인 사고와 판단, 그리고 예술 창작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복잡한 연산을 전구 하나를 겨우 켤 수 있는 에너지로 수행합니다. 이러한 능력은 어떤 기계도 따라올 수 없는 수백만 년에 걸쳐 이룩한 진화의 결과입니다.
알파고와 같은 일정한 알고리즘을 가지고 있는 컴퓨터는 바둑을 연산 처리하는 능력 만 가지고 있지만 생성형 인공지능(챗 GPT)은 오히려 더 많은 전력을 소비하는 쪽으로 발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테슬라가 발표한 자율주행용 인공지능의 경우, 학습을 위한 서버 한 대가 사용하는 전력은 무려 1,800㎾로 알파고의 10배가 넘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많은 자원을 소비하면서도 다양한 분야로 쉽게 확장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2011년 퀴즈 프로그램 우승으로 유명해진 IBM의 왓슨은 그 이후 용도를 찾기 어려워졌고, 알파고 역시 바둑 외에는 아직 이렇다 할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분야를 전문적으로 능력을 개발한 알고리즘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딥러닝이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며 응용사례마다 다시 학습해야 한다면, 에너지 위기의 현실에서는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앞으로 플랫폼 기업이 가지고 있는 데이터센터의 사용 전력은 지구환경문제와도 대립각을 세워야 할 처지가 될지도 모릅니다. 이 에너지가 인간의 육체노동을 대신하는 로봇기술에 이르면 문제는 더욱 두드러집니다.
인간이 사용하는 에너지는 대략 2.5㎾h(킬로와트시) 인데, 이 중 20%를 뇌와 각종 신경계가 소비합니다. 그만큼 인간의 육체가 두뇌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사용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1㎞를 걸을 때 약 0.6㎾h의 에너지를 사용하는 데 비해, 4족 보행을 하는 침팬지의 경우 무려 4배의 에너지를 사용합니다. 인류는 기어 다니는 생활을 포기한 대신 두 발로 걷는 2족 보행으로 효율을 극대화해서 더 많은 에너지를 두뇌에 투입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동작을 모방한 휴머노이드(humanoid)로봇은 탑재된 배터리에 담긴 에너지는 3.7㎾h이고, 한시간 정도 작동할 수 있습니다. 두 발로 걷는 데만 인간의 10배가 넘는 에너지를 사용합니다. 인간은 빵 한 조각으로 10㎞를 걸을 수 있으며 잠시 쉬면서 다시 빵 한 조각을 먹으면 10㎞를 또 갈 수 있습니다.
현재 널리 사용되는 리튬 배터리는 ㎏당 겨우 0.15㎾h 정도의 에너지를 담을 수 있습니다. 3.7㎾h의 에너지를 위해서는 무려 25㎏ 무게의 배터리를 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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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해야 합니다. 심지어 인간의 에너지를 저장하는 지방은 1㎏에 10.5㎾h의 에너지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의 위대한 점은 생각하는 능력도 있지만 더 놀라운 것은 에너지 효율적인 동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인간은 산업화 과정으로 너무 많은 에너지를 낭비함으로 기후 위기와 탄소중립이라는 피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생존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국제적인 공조가 필요한 지점에 이르렀습니다.
사람의 뇌의 발전은 수정된 지 12일째 되는 배아(胚芽)에서 시작합니다.
이 배아는 세 개의 세포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립판으로 불리는 그 최상층 세포들이 나중에 신경세포로 발전합니다. 배아는 대략 1달 정도 후에 이미 간단한 뇌를 확보하게 되며 세포는 빠른 속도로 분화해 빠르면 분당 25만 개의 새로운 뉴런이 생겨납니다. 따라서 성인은 다른 신경세포와 수만 군데서 결합하는 약 1,000억 개의 신경세포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결합 시스템은 태어날 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유년기에 뇌를 사용함으로써 생겨납니다. 뇌는 4세가 될 때까지 출생 시의 4배로 자라나며 그 후 95%가 더 커집니다. 뇌의 성장은 주로 뉴런을 서로 연결하는 축색 돌기의 증가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와 같은 ‘복잡성의 폭발시기’가 지능발달에 있어서 결정적 단계입니다. 한정된 공간에서 시냅스가 증가하다 보니 인간은 심하게 주름잡힌 대뇌피질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그 표면적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종인 침팬지보다 세배나 큽니다.
예를 들면 언어를 담당하는 부위를 부르카 영역과 베르니케 영역이라고 그것을 발견한 의사의 이름을 따 부르는데, 이 영역의 시냅스가 산모와의 교감을 통하여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인간은 어머니로부터 언어를 배우게 됩니다.
앞에서 사람 뇌의 용적에 대해 이야기 했듯이, 어머니의 좁은 산도를 통해 바깥세상으로 나오려면 태아의 뇌가 너무 커서는 산모와 태아가 모두 위험합니다. 성숙하지 못한 상태로 태아는 이 세상에 나와 산모와의 교감을 통해 뇌가 폭발적으로 발전하게 되는 메커니즘이 되지 않으면 우리의 출산율은 훨씬 낮아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감각기관을 자극할 수 있는 매우 다양한 입력사항이 바깥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뇌는 이와 같은 복잡한 환경과의 교류를 통해서만 집중적으로 네트워크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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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대비되는 인공지능(AI)은 인공신경망(Artificial neural network)이 시냅스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공신경망은 사람의 뇌가 생물학적 신경망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모방하는 것입니다.
성장이 끝난 뇌는 바로 성장기에 뇌를 사용했기 때문에 비로소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사람의 경우 이러한 성장은 16~20세에 비로소 완결됩니다. 저는 그래서 생성형 인공지능(Generative AI)이 아무리 발달해도 이와 같은 사람의 신경망을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을는지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나는 두 살 난 아이가 모든 것을 직접 하겠다는, 귀엽지만 당돌한 모습을 종종 봅니다. 그것은 인간의 생존 본능에서 나옵니다. 자기가 많이 해볼수록 뉴런의 연결망은 폭발적으로 늘어납니다. 나는 그런 모습을 설치류인 비버가 자기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댐을 쌓는 모습에서도 기시감을 느낍니다. 처음에는 가까운 데서 잔가지만을 가지고 오다가 조금 있으면 먼 곳에서도 나뭇가지를 가지고 옵니다. 먼 데서 가져오는 가지는 절대 큰것을 가지고 오지 않습니다. 경험 에 의해서 변별력이 생긴 것입니다. 비버의 댐을 쌓는 기능을 유전자의 표현형이라 합니다.
인공지능이 정말 그런 생존 본능을 가지고 있을까요.
의사 표시를 하는 행위는 언어뿐만이 아닙니다.
사람의 표정은 문화적 유전자의 표현형입니다.
사람이 나타내는 표정은 우리의 감정을 나타내는 유전자의 확장된 표현형이라는 것입니다. 감정은 우리가 주관적인 경험에서 마주하는 여러 상황 속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진화적 시각으로 보면 다양한 사회적 맥락에 대한 적응적인 반응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감정이란 우리가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것,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 등 우리의 건강과 안녕에 기여하는 여러 가지 행동에 기능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유교문화권에서는 보통 사단칠정이라 하여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으로 분류하는 것은, 성리학에서 사람의 기질을 구분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표정은 문화가 여러 가지로 분기하면서 더욱 복잡한 감정을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인 관계 속에서 어린아이가 습득하는 표정만 해도 105가지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 어린아이가 성장하면서 지능이 높아질수록 표정을 해독할 수 있는 것이 수천 가지로 늘어납니다.
생성형 인공지능 챗GPT가 아무리 발달해도 이런 사람 표정을 판독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설사 판독을 한다 해도 챗GPT가 탑재된 로봇이 이런 표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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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응답한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이러한 다양한 표정을 구사하는 것은 우리가 조직한 집단문화와 관계가 깊다고 봅니다. 우리의 유전자 DNA에는 그런 표정까지 설계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문화적 유전자인 밈(meme)이 생물학적 유전자와 공진화(共進化)를 불러일으킨 것으로 보입니다.
말하자면 사람이 나타내는 표정은 우리가 감정을 나타내는 유전자의 확장된 표현형인 것 입니다. 마찬가지로 설치류인 비버가 물길에 댐을 만들어 생존공간을 만들고 습지를 살리고 있는 것은 DNA에는 없는 확장된 표현형인 것입니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자기 학습을 한다는 것은 뉴런과 시냅스와 같은 네트워킹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내 연구진이 뇌 신경세포 연결고리를 모방한 인공 시냅스를 개발했다고 합니다. 뉴런이라는 신경세포는 천 개 이상의 신호를 주고받는 상호 연결 시냅스를 갖고 있습니다.
현재 뇌과학자가 말하는 생성형 인공지능은 인간의 십분의 일 정도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무서운 결과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데이터에 의해서만 지식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인공신경망이 100조 개의 시냅스를 만들어 인간의 뇌 기능을 초월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들이 하늘의 도(道)를 파악한다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이제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주제가 단순하지만 광범위하다 보니 글이 길어진 점 이해를 구합니다.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악보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교향악의 대가 구스타프 말러는 말합니다. 그러나 위대한 작품은 선험적인 것과 작가의 경험적인 것이 조화롭게 섞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석 달배기 영아도 얼굴이 이쁜 사람을 더 좋아한다니 아름다움에 대한 선호도 선험적이라는 것 또한 인간의 고유한 능력입니다. 그러나 지성이 만들어지는 것은 선험적이지 않습니다. 지성은 생물학적 필요에 의해서 우리의 지고한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남성이 여성에 대한 단순한 열정에 사로잡히는 시기를 사춘기(思春期)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의 삶은 삭막했을 것입니다. 또한 동시에 야만의 시기이기도 합니다.
“남자가 수컷에서 아빠로 변화하는 과정은 인간이 야만에서 지성으로 나가는 관문입니다.” 정신분석학자 루이지 조야의 말입니다. 이 주제는 『그렇게 아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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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가 된다』라는 영화를 만든 일본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에서도 주요한 모티브가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도 낳은 정과 기르는 정이 가지는 갈등 속에 진정한 아버지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되묻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빈 서판(blank slate)』의 저자인 언어학자이며 진화심리학자인 스티븐 핑커 교수가 말해주는 자연의 조화로움 속에서 생성되는 지성이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글을 마치면서, 아직 생태학과 인공지능의 미래를 논할 정도의 수준은 되지 못하지만 문제의 본질을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기에 계속 관심을 가지고 살펴 볼 생각입니다.
2023년 8월 26일
사이버 총무 김 정 율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