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장 1~16절 "넉넉한 포도원 주인"
예수님께서는 수제자로서 더 나은 보상을 기대한 베드로에게 비유를 통해 가르쳐주십니다. 마지막 날에 제자들이 받을 보상을 약속하신 예수님께서는 먼저 된 자가 먼저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마19:28)
▶ 심는 대로 거두는 경제 원리가 아니라 은혜 원리임을 보여주십니다. 포도원의 품꾼들 비유를 통해 첫째들이 꼴찌가 될 위험이 있음을 경고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당신의 나라에 부르실 때 계산적으로 부르지 않고 은혜로 부르십니다. 경제성과 효율성만을 고려하셨다면 우리보다 적합한 자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자격과 능력을 묻지 않으십니다.
초청하실 때 어린아이같이 받아들이고 기쁘게 따라나선다면 모두 불러주실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데에는 어떤 특별한 자격과 기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주인의 약속을 믿고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지금 천국인으로서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1~7)
본 비유 중에서 포도밭은 천국을, 포도밭의 주인은 하나님을, 일꾼은 우리를 의미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에 일용직 일꾼을 찾아 나섭니다. 주인은 온종일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찾으려고 새벽에 집을 나섰습니다.
당시에 일용직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은 길거리나 모퉁이에 서서 고용주를 기다렸습니다. 주인은 품꾼들을 만나 하루 한 데나리온의 임금으로 계약했습니다(2).
주인은 계속해서 제 3시, 제 6시와 제 9시, 제 11시에 한 데나리온에 계약을 맺고 일꾼들을 고용할 것입니다. 고용주와 일꾼들이 맺는 계약 조건인 한 데나리온은 일꾼들이 일하면서 바라는 기대치입니다.
서로가 합의한 금액에 대한 일꾼들의 불만은 나오지 않습니다. 주인은 제 3시(오전 9시)에 시장에서 일없이 서 있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주인은 3-4절의 행동과 같은 방식으로 제6시(정오), 제9시(오후 3시)에 시장에 나가서 일꾼들을 부릅니다. 주인은 하루의 반나절과 그 이상이 지났는데도 일이 없어 서 있는 사람들을 그냥 둘 수 없어서 자신의 포도원에서 일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주인은 하루 일과가 거의 끝난, 곧 일할 시간이 한 시간 남은(12) 11시 (오후 5시)에도 시장에 나갔습니다. 오후 5시는 날이 저물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그 시간에도 주인은 서 있는 사람들을 찾았습니다.
이미 일이 시작됐는데 왜 주인은 계속해서 장터에 나갔겠습니까? 왜 하루 품삯을 지불하기 한 시간 전에 다시 시장에 나갔을까요? 주인은 일감이 없는 사람들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일부러 장에 나갔습니다.
이 사실은 ‘나가 보니’(3)에 나타납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시장의 사람들을 보던 선한 주인은 그들을 자신의 일터에 고용합니다.
주인은 한 시간이라도(12절) 일할 기회를 주려고 이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고용되지 않은 사람들은 일할 의욕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일할 기회가 없어서 시장에 하루 종일 서 있었던 사람들입니다(8),
그들에게는 부양해야 할 가족도 있었을 것입니다. 날이 저물어 빈손으로 집에 들어가야 하는 이들은 절망적인 마음으로서 있었을 것입니다. 단 한 시간이라도 일을 해서 몇 푼이라도 벌기를 고대하며 그 시각까지 시장에서 자신을 고용한 고용주를 기다린 것입니다.
주인은 이들의 좌절감과 절박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주인의 관심은 자신의 필요보다도 일꾼들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데 있었습니다.
노동자들을 찾아서 도움을 주려고 상식을 뛰어넘는 호의를 베푼 주인의 마음이 이런 시대를 구원할 것입니다. 갑을 관계, 따돌림과 차별의 문제, 권위주의 문화를 극복하게 하는 힘이 될 것입니다.
날이 저물어 임금을 지불할 때가 되자 주인은 청지기에게 품꾼들을 불러 입금을 지불하라고 지시합니다. 당일에 임금을 지불하는 것은 율법에 따른 것입니다(레위기 19:13, 신명기 24:14-15).
일꾼들은 당연히 먼저 고용된 순서대로 임금을 지불받을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맨 나중에 고용된 자들에게 먼저 삯을 지불하라고 지시합니다.(8절) 임금 지불 순서가 고용 순서와 정반대였습니다.
먼저 고용된 일꾼들은 맨 나중에 고용된 일꾼들이 얼마를 받는지 지켜봅니다. 그런데 맨 나중에 온 일꾼들이 하루 종일 수고한 일꾼들이 계약한 것과 같은 액수를 임금으로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9).
그들은 이 순간에 전혀 반응하지 않습니다. 가장 적게 일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적어도 그 이상은 받게 될 줄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의 예상과 달랐습니다. 먼저 왔으니 나중에 온 사람들보다는 더 많이 받을 줄로 기대한 일꾼들은 일한 시간과 상관없이 동일한 임금을 받습니다.
이에 제11시에 온 일꾼들보다 먼저 온 일꾼들은 주인에게 불만을 제기합니다. 이들의 불만은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라는 표현으로 나타납니다(12).
일한 만큼 보상을 받아야 공의롭다는 것이 처음부터 일한 일꾼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주인은 불평하는 일꾼들에게 자신은 불의를 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인은 약속한 대로 지불 했으므로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주인은 ‘나는 선하다’라고 밝힌다(15절). 왜 주인은 선합니까? 주인은 일꾼들의 필요를 위해서 시장에 나가 일꾼들을 보았고 찾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관심은 포도원의 수익보다는 일꾼의 필요에 가 있었습니다. 먼저 고용됐거나 나중에 고용됐거나 모두 새벽부터 일자리를 구하고 있었으며, 맨 나중에 고용된 사람들에게도 먹고 사는 데 필요한 임금이 필요합니다.
▶ 주인은 저녁 무렵까지 실업자로 지내는 사람들의 생계를 생각했기에 그들의 필요를 채우려고 고용했습니다. 그러므로 고용된 것은 계약을 체결한 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 곧 주인이 베푸는 은혜를 입은 사실을 나타냅니다.
비유는 불만을 계기한 일꾼들의 대답 없이 주인의 질문으로만 끝납니다. 즉, 열린 상태로 끝납니다. 열린 종결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이 비유에서 어떤 일꾼과 비슷한지, 주인의 마음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도록 의도합니다.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에게 베푼 아버지의 지극 호의에 분노했던 이유 속 형처럼(누가복음 15:28-30), 하루 온 종일 일한 자들은 주인의 비상적인 관대함을 원망했습니다. 받을 것을 못 받아서가 아니라, 받을 자격 없는 자와 똑같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16절의 내용은 19:30의 내용과 순서가 거꾸로 돼 있으나 의미는 동일합니다. 본 비유를 19:30과 20:16의 관계를 고려하면, 본문은 하나님의 성품을 강조해서 제자들이 다른 신자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해 다룬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비유의 핵심은 은혜(또는 긍휼)와 관대함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는 마감 시간 한 시간을 남기고 부름 받은 사람들을 향합니다.
[결단]
하나님은 세상의 알반적인 원칙과 다르게 자체의 원칙에 따라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먼저 부름을 받아 오랫동안 일하고 고생하면서 일했기에 나중에 부름을 받고 덜 일한 사람보다 더 큰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긍휼을 강조하는 점에서 비유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와 비슷한 의미를 전합니다(누가복음 15:11-32).
특히 교회는 맨 나중에 온 사람을 먼저 배려한 주인처럼 환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를 실현해야 하는 공동체입니다.
더 많은 일을 한 품꾼들은 같은 품삯을 받았다고 원망하지만, 주인이 불러주지 않았다면 하루를 허탕 치고 말았을 것입니다. 자격과 조건이 되어 부름을 받았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비교하거나 불평하지 않으면, 주신 일을 기쁨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아멘! 2023-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