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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0일(수) 11시, '水山會' 친구들과 당산역 4번출구에서 만나 '선유도공원'(仙遊島公圓)을 산책하였다. 오늘이 지구상에서는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춘분'(春分)이다. 어제부터 오늘은 찬바람이 불어 음력 2월중에는 바람이 많이 분다. '2월 바람에 김치독 깨진다', '꽃샘에 설늙은이 얼어죽는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2월 바람은 동짓달 바람처럼 매섭고 차다.
'선유도'(仙遊島)는 옛날에는 신선이 내려와 놀다 간 봉우리라 하여 '선유봉(仙遊峯)'으로 불리던 작은 언덕이었다. 산의 모양이 고양이를 닮았다 하여 '괭이산'으로 불리기도 하고, 거친 물살 속에서 꿋꿋하게 서 있는 모습이 선비의 기개를 닮았다 하여 '지주봉(砥柱峯)'이라 불리기도 했다.
김정호(金正浩, 1804~1866?)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의 별책 격인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 1861)에도 '선유봉'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을 보면, 선유도는 오랫동안 섬이 아니라 산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뱃길로 연결된 양화나루 쪽 '잠두봉'(蠶頭峯, 지금의 '절두산')과 함께 한강의 절경으로 유명하여, 많은 풍류객들이 '선유봉'을 배경으로 시와 그림을 남겼다.
섬으로 근근이 명맥을 이어가던 '선유도'를 완전히 잃은 것은 1960년대 한강개발사업 때문이다. 1962년 제2한강교, 지금의 양화대교를 선유도 위에 짓게 되는데, 다리를 세우기 위해 길을 내고 골재를 채취하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선유봉의 흔적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수백 년 동안 한강의 입구를 상징하는 명소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던 선유봉은 근대화와 산업화의 과정에서 일개 암석 덩어리로 취급받게 되고, 한강 치수용 제방으로, 비행장 활주로로, 다리의 교각을 받쳐주는 기초의 일부가 되어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다.
'선유도공원'(仙遊島公圓) 산책을 하고, 뒤풀이는 선유도역 1번출구옆에 '우렁된장'식당으로 이동하였다. 너도나도식당에 우렁된장이 주메뉴인 것 같았는데, 제육볶음, 쭈꾸미볶음도 있었다. 집밥과 같은 점심식사를 맛있게 한 후 근처에서 MEGA COFFE를 마시고, 선유도역에서 산우들과 헤어졌다. 항상 건강 관리 잘 하시길 바라면서...
◈ 월일/집결 : 2024년 3월 20일(수) / 2, 9호선 당산역 4번출구 (11시)
◈ 산책코스 : 당산역-한강수변생태순환길-선유교(전망대)-선유도공원입구-선유공원관리사무소-선유도이야기-옛선유정수장-환경교실-송수펌프장-시간의정원-선유교-선유도한강공원-양평가로녹지-선유도역-뒤풀이장소-커피집-선유도역-<전철>-산성역-집
◈ 참석자 : 8명 (성수, 종화, 승렬, 원무, 종진, 용복, 양기, 황표)
◈ 뒤풀이 : '제육볶음', '우렁된장' 등에 식사 / '우렁된장' <선유도역 근처, (02) 2634-5469>→ 종진 산우 협찬
◈ 기타 : 다음은 '수산회'(水山會) 49회로 개나리·진달래가 피어있는 곳을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 '선유도공원'(仙遊島公園)
끊임없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선유도'(仙遊島)처럼 우리 역시 모든 감각을 열고,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가야 한다. '선유도공원'은 한 권의 철학책 같다. 계절에 따라,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감각의 질문’을 통해, 내가 어느 공간에 있는지, 어느 시간에 있는지, 누구인지 묻고 또 묻는다. 지금은 없는, 옛날 정수장 시설이란다
조선시대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은 말년에 양천 현감으로 있으면서 한강의 유명한 명승지들을 화폭에 담았는데, '양화환도'(楊花喚渡), '소악후월'(小岳候月), '금성평사'(錦城平沙) 등의 그림에서 오롯이 솟은 '선유봉'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양천 현아 근처의 아름다운 여덟 곳을 담은 '양천팔경첩'(陽川八景帖) 중 하나인 '선유봉'은 당시 '선유봉' 주변의 삶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예술적 영감의 원천으로 존재했던 아름다운 선유봉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서서히 존재감을 잃어갔다. 1925년 대홍수로 한강이 범람하자, 일본은 제방을 쌓기 위해 선유봉의 암석을 캐내더니, 1929년에는 여의도에 비행장을 건설하기 위해 도로를 만들고 파내기 시작했고, 1936년에는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한강 치수사업을 위한 채석장으로 활용했다. 광복 후에도 미군이 인천 가는 길을 만들기 위해 골재를 채굴하는 등 채석장으로서의 삶이 계속되면서, 아름다운 선유봉은 그림 속의 존재로 사라져버렸다.
그나마 섬으로 근근이 명맥을 이어가던 선유도를 완전히 잃은 것은 1960년대 한강 개발 사업 때문이다. 1962년 제2한강교, 지금의 양화대교를 선유도 위에 짓게 되는데, 다리를 세우기 위해 길을 내고 골재를 채취하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선유봉의 흔적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수백 년 동안 한강의 입구를 상징하는 명소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던 선유봉은 근대화와 산업화의 과정에서 일개 암석 덩어리로 취급받게 되고, 한강 치수용 제방으로, 비행장 활주로로, 다리의 교각을 받쳐주는 기초의 일부가 되어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사라지는 듯했던 선유도를, 채석장 역할을 하며 간신히 버텨내던 섬을 다시 살려낸 건, 역설적으로 콘크리트 제방으로 둘러싸 버려지게 했던 한강 치수사업이었다. 결국 급속하게 수질이 악화된 한강은 더 이상 상수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다. 특히 인구가 서울로 더욱 집중되면서 급수난이 심각해졌다. 급수차에서 물을 받기 위해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리는 모습은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1960년대 뚝섬, 노량진, 구의정수장 등 기존 정수장을 확장하는 것만으로는 급수 수요를 따라잡지 못했다.
서울시는 안정적인 수돗물 공급을 위해 1971년 영등포 정수장을 시작으로 새로운 정수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버려져 있던 선유도 역시 1978년 선유정수장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비록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아름다운 봉우리도 아니고, 고기잡이와 밭농사를 하는 사람이 사는 섬도 아니지만, 오염된 한강물을 식수로 바꾸는 정수 과정을 통해 다시 우리의 삶으로 돌아온 것이다. 하루에 40만 톤의 물을 영등포 지역에 공급하는 급수의 기능으로 제한되기는 하지만, 끊어졌던 양천 지역과의 관계 역시 되찾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