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촌
손 원
외동이신 할아버지는 슬하에 팔남매를 두셨다. 구순을 넘기신 아버님은 팔남매 중 여섯째시다. 위로는 모두 돌아가시고 아버님을 비롯한 삼촌과 고모 이렇게 세분만 생존해 계신다. 형제 중 칠남매는 농사를 지으셨고, 막내 삼촌 한 분만 도시에 계신다. 삼촌이 열살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할아버지는 삼촌이 결혼하여 손녀 둘을 보신 후 돌아가셨다. 어린 나이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형제 모두가 결혼하여 분가를 하였기에 막내는 늘 외로웠다. 맏형 부부가 살림을 하고 삼촌은 할아버지와 사랑채에 거쳐를 했다고 한다. 장조카는 삼촌보다도 나이가 많았고 아래 조카들도 여럿이어서 관심도 덜 받은 듯하다. 맏형과의 더부살이에 삼촌은 자신의 장래를 생각하여 결단을 내리고자 기회를 기다렸던 것 같다.
아버님 말씀에 의하면 삼촌은 가족 몰래 집을 나갔다고 한다. 집 나갈 때 씨 암퇘지를 묶어 장에다 팔아 노자를 마련하여 도시로 갔다고 한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기에 집 나간 열두살 막내를 가족들은 걱정만 할 뿐 찾을 방법이 요원하여 그저 무사하기만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집 나간 막내는 2년 후 쯤 학생 뺏지를 달고 돌아 왔다고 한다. 객지서 갖은 고생을 하며 야간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시골살림에 상급학교 진학의 어려움을 알고 객지로 뛰쳐 나갔던 것이다. 그 후로도 시골 본가에서 별 도움을 받지 못하고 주경야독으로 도시 생활에 정착했다고 한다.
빈손으로 떠난 소년의 객지 생활은 불 보듯 뻔했다. 어렵게 야간으로 중학을 졸업하고 닥치는대로 일하며 살았다. 성실한 생활로 스스로 결혼을 하고 가족을 이루어 고향을 오갔다. 30대 초반까지는 부산서 사시다가 그 이후 서울로 이사하셨다. 슬하에 딸 둘을 두고 그런대로 밥먹고 살 정도는 되었다고 한다. 그 즈음 조카들은 장성하여 부모를 떠나고자 했다. 6형제 슬하의 조카들은 해마다 몇 명씩 삼촌을 찾아 서울로 올라왔다. 삼촌댁이 서울진출의 전초기지였던 샘이었다.
60~70년대 공업화 초기에 도시에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당시는 농촌인구가 70%가 넘어 사회초년생들도 대부분 농사를 지었다. 농사지을 땅이 부족하여 대가족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누구나 농촌을 떠나 대도시로 나가 공장에 취직이라도 해 보는 것이 소망이었다. 하지만 조상대대로 농촌 생활에 익숙한 이들이 고향을 떠나는 것은 모험이었다. 어머니 품과도 같은 푸근한 고향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을전체를 두고 봐도 고향을 떠나는 이는 손꼽을 정도였다. 특히 몇 년간 도시물을 먹은 젊은이들이 명절을 맞이하여 고향을 다녀 갈 때면 친구 한 두명을 대려가기도 했다. 도시로 나간 이들이 늘어나고 정착 해 감에 따라 학교를 마친 소년 소녀들도 도시로 향했다. 서울 등 대도시에 연고가 있다면 무작정 고향을 떠나는 이도 많았다.
삼촌이 서울에 계셨기에 조카들도 나이가 차면 너도나도 삼촌을 찾아 서울로 갔다. 남형제에서 난 조카만 해도 스물은 되었다. 얼마 전 삼촌말이 생각 난다. 조카 중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삼촌집에서 짧게는 수일간 길게는 수개월 간 머물렀다고 했다. 단칸방 월세에 살 때에도 조카들이 올라오면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 거느리고 있어야 했다. 시골서 가난하게 살고 있는 형님들이어서 달랑 몸만 올라 온 조카들이었다. 삼촌은 그들이 올 때마다 부모마냥 최선을 다했다. 단칸방에서 자신의 4식구와 조카가 같이 기거해야 했다. 조카들 일자리를 구해서 보내야 한시름 놓을 수가 있었다. 당시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몰려드는 젊은이들이 많아 일자리 구하기도 쉽지가 않았다.
삼촌이 그렇게 보낸 세월이 줄잡아 20년은 될 듯하다. 우리 5남매만 하더라도 모두가 삼촌 신세를 졌다. 큰형이 오랫동안 삼촌 신세를 졌고, 막내 동생은 큰형께 가서 서울서 학교를 다니고 정착했다. 삼촌은 20년간 20명의 조카를 보살폈고 반 정도는 서울에 정착해서 잘 살고 있다. 명실공히 서울에 계시는 유일한 집안의 어른이시다.
할아버지 살아계실 때 삼촌을 걱정하시던 모습이 선하다. 무일푼으로 객지에 나가 고생하는 막내를 안쓰러워 하셨다. 무엇보다도 아들 없이 딸 둘로 대를 이을 아들이 없음을 걱정하셨다. 조카만 열이 넘어 그 중 하나는 양자를 들여야 한다고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어쩌면 삼촌은 아들 같은 조카가 수두룩 하였기에 그런 걱정을 덜 하셨는지도 모른다.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늘 마음 만큼은 푸근하고부자였던 것 같다. 사위 둘을 보았는데 자식 이상으로 장인을 잘 모신다. 한 번은 사소한 문제로 조카들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 형님들이 안 계시기에 삼촌이 역할을 해야만 했다. 시비를 가려 중재를 할려고 했으나 모두 고집을 부려 삼촌은 중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삼촌말을 무시하기 까지 하여 몹시 섭섭해 하셨다. 나와 통화 시 "얘야, 지난 일이지만 네 사촌들 거의가 나의 신세를 졌는데 지금와서 내말마저 듣지 않는구나." 라고 하셨다. 나는 약 2주간 삼촌집에서 기거 한 적이 있었다. 삼촌은 유독 바로 윗형인 아버님과 우애가 좋았다. 가을 수확을 하면 아버님은 동생에게 쌀 한 포대를 매년 보냈다. 아마 평생을 그랬던 것 같다. 아버님이 농사에 손을 떼고 소작료로 받은 쌀도 종전대로 보냈다. 최근들어 농지 임대관리를 내가 맡고 있다. 아버님이 하시던대로 나도 소작료를 받으면 매년 삼촌께 쌀 한 포대를 보내 드린다. 얼마전에도 삼촌께 전화가 왔다. "얘야, 쌀 잘 받았다."라며 고마워 하셨다. 나는 명절이나 삼촌 생신을 챙겨드리곤 한다. 그 때마다 삼촌은 무척 좋아하며 전화를 하신다. 오늘은 주말이라 아버님께 왔다. 아버님은 동생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하셨다. 아버님은 노인성 청각장애로 정상적인 통화를 할 수가 없다. 집전화와 휴대폰을 기지고 계시지만 무용지물이다. 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나의 스마트폰 음량을 최대로 하여 스피커 기능을 사용해 보니 어느 정도 통화가 가능했다. 이렇게 형제 간의 안부를 전하곤 한다. 아부지 삼촌께 전화 걸었어요 하며 스마트폰을 드렸다. "동생, 잘 지네제? 목소리 들으니 너무 좋다. 나이가 드니 몸도 마음도 예전 같지가 않네." "예, 형님 건강하고요? 덕분에 저도 잘 지내고 있어요. 이제 형님들 모두 돌아 가시고 형님과 저 둘만 남았네요. 사는 동안 건강하시고 자주 소식이라도 주고 받읍시다. 형님뵈러 시골 갈 생각을 하지만 쉽지가 않네요. 조만간 찾아 뵙도록 할께요." 형제간 정담이 30분은 오갔다. 어릴 때 이야기, 지금의 근황 등 옆에서 들어도 푸근한 노형제 간의 대화였다. 아버님과 삼촌간 전화연결은 조그마한 효도가 되는 것 같다. 나는 요즘 손자 돌보는 일 때문에 여유가 없다. 몇 해 전 두 어른을 모시고 풍기 여동생 집을 다녀왔다. 소수서원, 부석사를 갔고 풍기온천욕을 즐기고 왔다. 인삼상회를 하고 있는 동생의 대접도 극진했다. 다시 한 번 두 어른을 모시고 싶다. (2022. 12. 31.)